의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같은 쿠키라고요?”양창수가 미소를 터뜨렸다.“아직도 버리지 않으셨어요?”양창수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의사는 어이가 없었다.양석진은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쿠키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잘 보관해 뒀는데 뭐가 문제야?’양석진이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사람이 식욕을 못 참고 그렇게 많이 먹어 댔으니 문제지. 몇 개 남지도 않았던데.’양창수는 양석진의 생각을 바로 읽었고 의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현관까지 같이 걸어가며 양창수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킬러는 여전히 한 사람이네요.”층계까지 걸어왔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양창수가 입을 열었다.“킬러 도착.”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만하시고 빨리 마중이나 가세요.”방안에는 안시연과 양석진만 남겨졌고 그도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비록 양석진은 안시연의 아빠뻘이었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니 같은 방에 있는 건 부적절했다.그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깊은 잠이 들었던 안시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더니 갑자기 몸부림치며 끝자리로 움직이려 했다.“우웩!”!!!양석진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었고 안시연의 구사 물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휴지통이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그는 빠르게 휴지통을 그녀의 옆으로 걷어찼다.안시연은 아까 이미 속을 모두 비웠고 지금은 그저 구역질만 할 뿐이었다.안시연이 바닥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양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양석진은 탁자에 놓인 물을 따라 건네려 했다.그리고 방 밖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양지원은 젊었을 적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고 진중해 보이는 가면을 갖췄으나 사실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양석진의 집으로 들어선 그녀는 너무 급한 나머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에 양지원은 깜짝 놀랐다.양석진이
안시연은 먹었던 모든 걸 토해내고 편하게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편해 보이는 안시연을 보며 드디어 안심했다.그러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또 마음이 아팠다.양주에서도 병원 신세를 졌는데 자신의 구역인 경인에서도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날 밤 그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고민을 길게 할수록 그는 제 가문 어르신들의 수단이 역겹게 느껴졌다.그리고 안시연을 향한 마음에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조금 좋아하는 그런 섣부른 마음이 아니었다.이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음속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안시연이 잠에서 깨면 이런 말을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 항상 모른 척 넘어가 그녀의 속을 상하게 했었다.안시연이 몸을 뒤척이자 연정훈은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음...”행여나 그녀가 움직이다가 링거 바늘이 움직일까 봐 걱정되었다.안시연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아래층에서.양지원은 진녹색의 소파에 앉았다. 탁자 앞에는 양창수가 가져온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간식은 대부분 쿠키였다.그녀는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석진은 창문을 열고 그녀를 등진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라이터는 손이 닿는 아무 거치대 위로 올려두었다.뿌연 연기가 그의 옆선을 흐릿하게 가렸다. 그러나 높은 신분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양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담배 끊었지 않아요?”양석진이 그녀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끊었었지.”“...”“기분이 안 좋으면 가끔 필 뿐이야.”그리고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꽂고 차를 직접 우렸다.담배 연기는 어느새 저녁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없었다.양지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머릿속엔 양석진이 안시연을 보살피던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다.그는 결벽증이 심했고 낯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그때 양석진이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양주에서 만
양지원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중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누군가를 내버려두더라도 최소한 먹을 것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남겨뒀어요.”양지원은 내심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오빠가 손도 대지 않은 쿠키를 남겨줬다고요.”“...”양지원은 바로 무언가 깨달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당황해서 물었다.“내 쿠키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요. 그 쿠키에 독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양지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레시피대로 만들었어요.”“게다가.”“저 아이가 낮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낮에 먹은 음식이 때마침 증상을 보일 수도 있잖아요. 왜 날 탓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 쿠키, 나도 먹어봤어.”양석진이 말을 잘랐다.“네?”“나도 중독 증상이 나타난 적 있다고. 그래서 해독제를 먹었지.”양지원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오빠는 쿠키 포장을 뜯지도 않았잖아요.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요.”“포장 뜯었고, 나도 먹었어.”“...”양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포장을 확인해 보았다.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그와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양석진이 준비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그런데 쿠키를 하도 먹었더니 목이 메었다.탁자 위로 그녀가 좋아하는 녹차가 놓여있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실로 향했다.양석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친절하게 말했다.“왼쪽 선반에 홍차가 있어.”양지원이 말했다.“화차를 찾고 있어요.”양석진이 답했다.“화차는 세 번째 층 오른쪽에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에서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석진은
거실에서.양지원은 찻잔을 들고 별장을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만 남기고 떠나다니. 우리가 꽤 믿음직스러운가 봐.”신기할 따름이었다.위층에 누워 있는 사람은 양지원의 딸 라이벌이었고, 연정훈은 양지원의 사위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다.그런 여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양석진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 아침 일찍 양지원이 구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렸다고 양창수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짐작하고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위층에 올라가서 그 여자아이를 돌보고 있어. 링거를 다 맞고 나면 링거를 뽑아줘.”양석진이 명령하듯 말했다.양지원은 사람 돌보는 일을 싫어했다. 안시연이 꽤 마음에 들었지만, 소현정의 딸이라는 생각만 하면 또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반박하려는데 피곤함에 찌든 양석진의 얼굴이 보였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그래.’‘내가 하지 뭐.’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오빠, 방에 돌아가 눈 좀 붙이지 그래요?”양석진이 눈을 떴다.그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았고 양지원은 이미 뒤돌아서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다.한참이 지나고 양석진은 시선을 거두고 1층의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위층으로 올라간 양지원은 벽을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그녀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안시연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고 양지원은 그녀의 손등을 살폈다.그녀는 한평생을 살도록 링거를 뽑아본 적이 없었기에 미리 구상을 해봐야 했다.다행히 너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흠.’‘그렇게 어렵지는 않네.’이런 생각을 하며 양지원은 안시연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드디어 환각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그리고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양지원이었다.꿈속이라 생각한 그녀는 빠르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한번 상대를 살폈다.
안시연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안시연은 양지원에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링거는 잠시 멈출 수도 있었고 천천히 링거 바늘을 뽑아도 되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양지원이 문제에 봉착했다.어느새 링거는 바닥을 보였고 지금 링거를 뽑지 않으면 피가 역류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양지원이 과격하게 바늘을 뽑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문밖을 향해 외쳤다.“오빠!”???양지원은 외부 도움을 요청하고 다 떨어진 링거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조급해진 그녀는 직접 양석진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다.그녀가 계단으로 나가자 양석진이 마침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무슨 일이야?”그를 발견한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끌어당겼다.“수액이 거의 다 떨어졌고 난 패치를 떼어내지도 못했어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큰일이라도 생긴 줄만 알았다.방에 들어서고 양지원은 서둘러 침대 옆자리를 내어주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 링거를 멈췄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는 이마를 탁 내리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이걸 몰랐네.”양지원은 안시연의 침대 옆에 앉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패치가 너무 단단해요. 한참 애썼는데 하나도 안 뜯긴다니까요.”“네가 왼쪽, 내가 오른쪽을 맡을게.”양석진이 분업을 제안했다.“좋아요.”안시연은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식물 중독으로 인한 환각 환청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양지원이 부른 구세주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오른 안시연은 마지막 기억 속 사람이 양석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세상에.정말 꿈만 같았다.돈, 명예 모든 걸 거머쥔 이 남매가 지금 자신의 링거를 뽑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안시연은 평생 없을 기회에 속으로 감탄했다.‘어휴.’‘두 손 모두 링거를 맞았다면
안시연은 찻잔을 받아 들고 침대에 기댄 채로 양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꿈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양석진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그의 지시대로 양지원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약과 물을 챙겨오고 체온계도 챙겨왔다.안시연은 마음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대표님, 좀 쉬세요.”그녀는 10센치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그 하이힐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그러나 양지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밤을 새우는 건 젊은 시절에나 했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괜히 마음이 흥분되었다.“마셔.”양지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안시연은 잔뜩 긴장해 감히 마시지 못했다.양지원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농담 말투로 물었다.“연정훈이 어디 갔는지 안 물어보네요?”안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궁금했지만 그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불쌍한 그 모습에 양지원은 흥미가 싹 가셨으며 되레 동정심이 느껴졌다.“약혼 소식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안시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양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은 여사님을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바로 그쪽을 찾으러 갔고 지금은 의사당 무단 침입으로 끌려갔어요.”“끌려갔다고요?”안시연은 누가 감히 연정훈을 끌고갈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양지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요? 무단 침입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에요.”안시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양지원이 방금 한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안시연 본인도 양석진이 머무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단 침입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또한 양지원이 본인에게 농담할 사람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손에 든 컵을 꼭 쥐고 물었다.“괜찮을까요? 의원님께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신다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양석진이 말했다.“내가 언제 추궁하지 않는다고 했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양석진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중요한 문서가 얼마
안시연이 말을 바꿔도 양지원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은 허리를 곧게 펴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시연에게 농담했다.“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나 봐요. 최후의 인맥으로 마지막으로 널 보러 온 것 같은데.”“...”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커플의 알콩달콩한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양석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양지원도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계단에 도착했을 때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고 있던 연정훈과 마주쳤다.그의 손에는 음식으로 보이는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지원 이모.”연정훈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양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양지원은 안시연이 보고 싶어 조급해하는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빨리 가봐. 그 아이도 널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빠르게 걸어갔다.안시연의 방문은 닫혀 있었으나 들려오는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정리했다.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연정훈은 이미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시간을 따져보면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왠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침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손에 쥔 걸 내려놓고 방의 온도를 살핀 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그는 옷소매를 정리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컨디션 어때?”“많이 좋아졌어요.”연정훈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 온도를 확인하려 했다.그런데 손이 너무 차갑다는 게 떠올랐고 연정훈은 빠르게 화장실로 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안시연은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리고 화장실 앞까지 걸어가 문에 몸을 기댄 채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연정훈의 눈빛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안시연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안시연은 화가 나 얼굴을 돌리고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그녀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옆 의자에 앉았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서서 안시연을 비추던 빛을 가렸다.안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젖혀 빛을 피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자 결국 안시연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정훈 씨의 가문에서는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나요? 할머니는 확고한 분이시잖아요. 할머니를 거스르면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요?”연정훈은 말했다.“서로 다른 두 권리가 충돌할 때는 덜 해로운 것을 선택해야 해.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할머니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면 너를 건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안시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정훈 씨는 나를 건드리는 게 두렵지 않나요?”“두렵지는 않아.”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아까운 마음은 있어.”안시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시연은 살짝 고개를 들며 동공 지진을 느꼈다.“왜요?”연정훈은 숨김없이 대답했다.“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다시 내게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기를 바래.”안시연의 마음 방어선이 조금 무너졌다. 안시연은 여전히 연정훈을 좋아하고 있었고 아무리 깊이 숨기려 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음을 느꼈다.연정훈의 호의에 대해 안시연은 두려움 속에서 조심스럽게 시험하고 있었다. 받고 싶지만, 받기 두려운 마음이었다.“정훈 씨가 좋아할 만한 게 저에게 있을까요?”“그렇다면 내가 좋아할 만한 건 뭐지?”연정훈이 반문했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은 몰랐다. 연정훈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안시연의 마음을 완전히 점유한 터라 더 이상 연정훈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안시연이 대답하지 않자, 연정훈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바라보며 반농담처럼 말했다.“잊고 있었네. 지금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
부승원의 사무실에서.소파에 앉은 반우희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가 너무 웃겨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당당하더니 우리 어머니 만나고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반우희는 영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렇게 넋이 빠진 모습으로 있지 말고 여기로 와.”반우희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그리고 턱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어머님이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요?”부승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마음에 안 들면 뭐 어때?”반우희가 입을 삐죽이더니 평소대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게 다 변호사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부승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정말? 네가 내 생각을 했다고?”반우희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어머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날 만나지 못할 테니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이도 들고 나한테 이렇게 돈도 많이 쏟았는데 결혼까지 가지 못하면 변호사님만 억울하잖아요.”그리고 반우희는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꽤 양심 발언이네? 내가 억울할 가봐 걱정도 하고?”반우희는 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난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한테 빚지고는 못 살아요.”“내가 제안 하나 할까?”부승원은 펜을 내리고 옆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 아마도 옆방에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그 말에 반우희는 바로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이에 부승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결국 너도 말뿐이네.”반우희는 한숨만 풀풀 내쉬었고 더 고민에 휩싸였다.‘정신 차려 반우희!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그리고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승주한테 조언을 받아야겠어요.”‘승주한테 조언을 받는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