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같은 쿠키라고요?”양창수가 미소를 터뜨렸다.“아직도 버리지 않으셨어요?”양창수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의사는 어이가 없었다.양석진은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쿠키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잘 보관해 뒀는데 뭐가 문제야?’양석진이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사람이 식욕을 못 참고 그렇게 많이 먹어 댔으니 문제지. 몇 개 남지도 않았던데.’양창수는 양석진의 생각을 바로 읽었고 의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현관까지 같이 걸어가며 양창수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킬러는 여전히 한 사람이네요.”층계까지 걸어왔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양창수가 입을 열었다.“킬러 도착.”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만하시고 빨리 마중이나 가세요.”방안에는 안시연과 양석진만 남겨졌고 그도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비록 양석진은 안시연의 아빠뻘이었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니 같은 방에 있는 건 부적절했다.그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깊은 잠이 들었던 안시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더니 갑자기 몸부림치며 끝자리로 움직이려 했다.“우웩!”!!!양석진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었고 안시연의 구사 물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휴지통이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그는 빠르게 휴지통을 그녀의 옆으로 걷어찼다.안시연은 아까 이미 속을 모두 비웠고 지금은 그저 구역질만 할 뿐이었다.안시연이 바닥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양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양석진은 탁자에 놓인 물을 따라 건네려 했다.그리고 방 밖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양지원은 젊었을 적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고 진중해 보이는 가면을 갖췄으나 사실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양석진의 집으로 들어선 그녀는 너무 급한 나머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에 양지원은 깜짝 놀랐다.양석진이
안시연은 먹었던 모든 걸 토해내고 편하게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편해 보이는 안시연을 보며 드디어 안심했다.그러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또 마음이 아팠다.양주에서도 병원 신세를 졌는데 자신의 구역인 경인에서도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날 밤 그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고민을 길게 할수록 그는 제 가문 어르신들의 수단이 역겹게 느껴졌다.그리고 안시연을 향한 마음에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조금 좋아하는 그런 섣부른 마음이 아니었다.이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음속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안시연이 잠에서 깨면 이런 말을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 항상 모른 척 넘어가 그녀의 속을 상하게 했었다.안시연이 몸을 뒤척이자 연정훈은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음...”행여나 그녀가 움직이다가 링거 바늘이 움직일까 봐 걱정되었다.안시연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아래층에서.양지원은 진녹색의 소파에 앉았다. 탁자 앞에는 양창수가 가져온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간식은 대부분 쿠키였다.그녀는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석진은 창문을 열고 그녀를 등진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라이터는 손이 닿는 아무 거치대 위로 올려두었다.뿌연 연기가 그의 옆선을 흐릿하게 가렸다. 그러나 높은 신분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양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담배 끊었지 않아요?”양석진이 그녀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끊었었지.”“...”“기분이 안 좋으면 가끔 필 뿐이야.”그리고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꽂고 차를 직접 우렸다.담배 연기는 어느새 저녁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없었다.양지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머릿속엔 양석진이 안시연을 보살피던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다.그는 결벽증이 심했고 낯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그때 양석진이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양주에서 만
양지원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중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누군가를 내버려두더라도 최소한 먹을 것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남겨뒀어요.”양지원은 내심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오빠가 손도 대지 않은 쿠키를 남겨줬다고요.”“...”양지원은 바로 무언가 깨달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당황해서 물었다.“내 쿠키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요. 그 쿠키에 독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양지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레시피대로 만들었어요.”“게다가.”“저 아이가 낮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낮에 먹은 음식이 때마침 증상을 보일 수도 있잖아요. 왜 날 탓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 쿠키, 나도 먹어봤어.”양석진이 말을 잘랐다.“네?”“나도 중독 증상이 나타난 적 있다고. 그래서 해독제를 먹었지.”양지원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오빠는 쿠키 포장을 뜯지도 않았잖아요.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요.”“포장 뜯었고, 나도 먹었어.”“...”양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포장을 확인해 보았다.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그와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양석진이 준비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그런데 쿠키를 하도 먹었더니 목이 메었다.탁자 위로 그녀가 좋아하는 녹차가 놓여있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실로 향했다.양석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친절하게 말했다.“왼쪽 선반에 홍차가 있어.”양지원이 말했다.“화차를 찾고 있어요.”양석진이 답했다.“화차는 세 번째 층 오른쪽에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에서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석진은
거실에서.양지원은 찻잔을 들고 별장을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만 남기고 떠나다니. 우리가 꽤 믿음직스러운가 봐.”신기할 따름이었다.위층에 누워 있는 사람은 양지원의 딸 라이벌이었고, 연정훈은 양지원의 사위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다.그런 여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양석진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 아침 일찍 양지원이 구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렸다고 양창수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짐작하고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위층에 올라가서 그 여자아이를 돌보고 있어. 링거를 다 맞고 나면 링거를 뽑아줘.”양석진이 명령하듯 말했다.양지원은 사람 돌보는 일을 싫어했다. 안시연이 꽤 마음에 들었지만, 소현정의 딸이라는 생각만 하면 또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반박하려는데 피곤함에 찌든 양석진의 얼굴이 보였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그래.’‘내가 하지 뭐.’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오빠, 방에 돌아가 눈 좀 붙이지 그래요?”양석진이 눈을 떴다.그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았고 양지원은 이미 뒤돌아서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다.한참이 지나고 양석진은 시선을 거두고 1층의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위층으로 올라간 양지원은 벽을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그녀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안시연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고 양지원은 그녀의 손등을 살폈다.그녀는 한평생을 살도록 링거를 뽑아본 적이 없었기에 미리 구상을 해봐야 했다.다행히 너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흠.’‘그렇게 어렵지는 않네.’이런 생각을 하며 양지원은 안시연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드디어 환각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그리고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양지원이었다.꿈속이라 생각한 그녀는 빠르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한번 상대를 살폈다.
안시연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안시연은 양지원에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링거는 잠시 멈출 수도 있었고 천천히 링거 바늘을 뽑아도 되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양지원이 문제에 봉착했다.어느새 링거는 바닥을 보였고 지금 링거를 뽑지 않으면 피가 역류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양지원이 과격하게 바늘을 뽑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문밖을 향해 외쳤다.“오빠!”???양지원은 외부 도움을 요청하고 다 떨어진 링거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조급해진 그녀는 직접 양석진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다.그녀가 계단으로 나가자 양석진이 마침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무슨 일이야?”그를 발견한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끌어당겼다.“수액이 거의 다 떨어졌고 난 패치를 떼어내지도 못했어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큰일이라도 생긴 줄만 알았다.방에 들어서고 양지원은 서둘러 침대 옆자리를 내어주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 링거를 멈췄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는 이마를 탁 내리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이걸 몰랐네.”양지원은 안시연의 침대 옆에 앉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패치가 너무 단단해요. 한참 애썼는데 하나도 안 뜯긴다니까요.”“네가 왼쪽, 내가 오른쪽을 맡을게.”양석진이 분업을 제안했다.“좋아요.”안시연은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식물 중독으로 인한 환각 환청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양지원이 부른 구세주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오른 안시연은 마지막 기억 속 사람이 양석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세상에.정말 꿈만 같았다.돈, 명예 모든 걸 거머쥔 이 남매가 지금 자신의 링거를 뽑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안시연은 평생 없을 기회에 속으로 감탄했다.‘어휴.’‘두 손 모두 링거를 맞았다면
안시연은 찻잔을 받아 들고 침대에 기댄 채로 양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꿈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양석진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그의 지시대로 양지원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약과 물을 챙겨오고 체온계도 챙겨왔다.안시연은 마음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대표님, 좀 쉬세요.”그녀는 10센치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그 하이힐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그러나 양지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밤을 새우는 건 젊은 시절에나 했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괜히 마음이 흥분되었다.“마셔.”양지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안시연은 잔뜩 긴장해 감히 마시지 못했다.양지원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농담 말투로 물었다.“연정훈이 어디 갔는지 안 물어보네요?”안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궁금했지만 그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불쌍한 그 모습에 양지원은 흥미가 싹 가셨으며 되레 동정심이 느껴졌다.“약혼 소식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안시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양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은 여사님을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바로 그쪽을 찾으러 갔고 지금은 의사당 무단 침입으로 끌려갔어요.”“끌려갔다고요?”안시연은 누가 감히 연정훈을 끌고갈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양지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요? 무단 침입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에요.”안시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양지원이 방금 한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안시연 본인도 양석진이 머무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단 침입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또한 양지원이 본인에게 농담할 사람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손에 든 컵을 꼭 쥐고 물었다.“괜찮을까요? 의원님께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신다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양석진이 말했다.“내가 언제 추궁하지 않는다고 했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양석진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중요한 문서가 얼마
안시연이 말을 바꿔도 양지원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은 허리를 곧게 펴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시연에게 농담했다.“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나 봐요. 최후의 인맥으로 마지막으로 널 보러 온 것 같은데.”“...”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커플의 알콩달콩한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양석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양지원도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계단에 도착했을 때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고 있던 연정훈과 마주쳤다.그의 손에는 음식으로 보이는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지원 이모.”연정훈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양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양지원은 안시연이 보고 싶어 조급해하는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빨리 가봐. 그 아이도 널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빠르게 걸어갔다.안시연의 방문은 닫혀 있었으나 들려오는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정리했다.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연정훈은 이미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시간을 따져보면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왠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침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손에 쥔 걸 내려놓고 방의 온도를 살핀 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그는 옷소매를 정리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컨디션 어때?”“많이 좋아졌어요.”연정훈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 온도를 확인하려 했다.그런데 손이 너무 차갑다는 게 떠올랐고 연정훈은 빠르게 화장실로 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안시연은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리고 화장실 앞까지 걸어가 문에 몸을 기댄 채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연정훈의 눈빛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안시연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안시연은 화가 나 얼굴을 돌리고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그녀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옆 의자에 앉았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서서 안시연을 비추던 빛을 가렸다.안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젖혀 빛을 피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자 결국 안시연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정훈 씨의 가문에서는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나요? 할머니는 확고한 분이시잖아요. 할머니를 거스르면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요?”연정훈은 말했다.“서로 다른 두 권리가 충돌할 때는 덜 해로운 것을 선택해야 해.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할머니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면 너를 건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안시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정훈 씨는 나를 건드리는 게 두렵지 않나요?”“두렵지는 않아.”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아까운 마음은 있어.”안시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시연은 살짝 고개를 들며 동공 지진을 느꼈다.“왜요?”연정훈은 숨김없이 대답했다.“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다시 내게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기를 바래.”안시연의 마음 방어선이 조금 무너졌다. 안시연은 여전히 연정훈을 좋아하고 있었고 아무리 깊이 숨기려 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음을 느꼈다.연정훈의 호의에 대해 안시연은 두려움 속에서 조심스럽게 시험하고 있었다. 받고 싶지만, 받기 두려운 마음이었다.“정훈 씨가 좋아할 만한 게 저에게 있을까요?”“그렇다면 내가 좋아할 만한 건 뭐지?”연정훈이 반문했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은 몰랐다. 연정훈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안시연의 마음을 완전히 점유한 터라 더 이상 연정훈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안시연이 대답하지 않자, 연정훈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바라보며 반농담처럼 말했다.“잊고 있었네. 지금은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