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중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누군가를 내버려두더라도 최소한 먹을 것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남겨뒀어요.”양지원은 내심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오빠가 손도 대지 않은 쿠키를 남겨줬다고요.”“...”양지원은 바로 무언가 깨달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당황해서 물었다.“내 쿠키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요. 그 쿠키에 독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양지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레시피대로 만들었어요.”“게다가.”“저 아이가 낮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낮에 먹은 음식이 때마침 증상을 보일 수도 있잖아요. 왜 날 탓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 쿠키, 나도 먹어봤어.”양석진이 말을 잘랐다.“네?”“나도 중독 증상이 나타난 적 있다고. 그래서 해독제를 먹었지.”양지원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오빠는 쿠키 포장을 뜯지도 않았잖아요.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요.”“포장 뜯었고, 나도 먹었어.”“...”양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포장을 확인해 보았다.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그와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양석진이 준비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그런데 쿠키를 하도 먹었더니 목이 메었다.탁자 위로 그녀가 좋아하는 녹차가 놓여있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실로 향했다.양석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친절하게 말했다.“왼쪽 선반에 홍차가 있어.”양지원이 말했다.“화차를 찾고 있어요.”양석진이 답했다.“화차는 세 번째 층 오른쪽에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에서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석진은
거실에서.양지원은 찻잔을 들고 별장을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만 남기고 떠나다니. 우리가 꽤 믿음직스러운가 봐.”신기할 따름이었다.위층에 누워 있는 사람은 양지원의 딸 라이벌이었고, 연정훈은 양지원의 사위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다.그런 여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양석진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 아침 일찍 양지원이 구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렸다고 양창수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짐작하고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위층에 올라가서 그 여자아이를 돌보고 있어. 링거를 다 맞고 나면 링거를 뽑아줘.”양석진이 명령하듯 말했다.양지원은 사람 돌보는 일을 싫어했다. 안시연이 꽤 마음에 들었지만, 소현정의 딸이라는 생각만 하면 또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반박하려는데 피곤함에 찌든 양석진의 얼굴이 보였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그래.’‘내가 하지 뭐.’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오빠, 방에 돌아가 눈 좀 붙이지 그래요?”양석진이 눈을 떴다.그는 조용히 그녀를 쳐다보았고 양지원은 이미 뒤돌아서 계단으로 오르고 있었다.한참이 지나고 양석진은 시선을 거두고 1층의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위층으로 올라간 양지원은 벽을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그녀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안시연이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고 양지원은 그녀의 손등을 살폈다.그녀는 한평생을 살도록 링거를 뽑아본 적이 없었기에 미리 구상을 해봐야 했다.다행히 너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흠.’‘그렇게 어렵지는 않네.’이런 생각을 하며 양지원은 안시연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드디어 환각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그리고 실눈으로 주변을 살폈다.?!양지원이었다.꿈속이라 생각한 그녀는 빠르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한번 상대를 살폈다.
안시연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기 때문이었다.안시연은 양지원에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링거는 잠시 멈출 수도 있었고 천천히 링거 바늘을 뽑아도 되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양지원이 문제에 봉착했다.어느새 링거는 바닥을 보였고 지금 링거를 뽑지 않으면 피가 역류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양지원이 과격하게 바늘을 뽑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문밖을 향해 외쳤다.“오빠!”???양지원은 외부 도움을 요청하고 다 떨어진 링거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조급해진 그녀는 직접 양석진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다.그녀가 계단으로 나가자 양석진이 마침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무슨 일이야?”그를 발견한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끌어당겼다.“수액이 거의 다 떨어졌고 난 패치를 떼어내지도 못했어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큰일이라도 생긴 줄만 알았다.방에 들어서고 양지원은 서둘러 침대 옆자리를 내어주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뻗어 링거를 멈췄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는 이마를 탁 내리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이걸 몰랐네.”양지원은 안시연의 침대 옆에 앉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패치가 너무 단단해요. 한참 애썼는데 하나도 안 뜯긴다니까요.”“네가 왼쪽, 내가 오른쪽을 맡을게.”양석진이 분업을 제안했다.“좋아요.”안시연은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식물 중독으로 인한 환각 환청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양지원이 부른 구세주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오른 안시연은 마지막 기억 속 사람이 양석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세상에.정말 꿈만 같았다.돈, 명예 모든 걸 거머쥔 이 남매가 지금 자신의 링거를 뽑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안시연은 평생 없을 기회에 속으로 감탄했다.‘어휴.’‘두 손 모두 링거를 맞았다면
안시연은 찻잔을 받아 들고 침대에 기댄 채로 양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꿈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양석진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그의 지시대로 양지원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약과 물을 챙겨오고 체온계도 챙겨왔다.안시연은 마음이 불편해 입을 열었다.“대표님, 좀 쉬세요.”그녀는 10센치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그 하이힐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그러나 양지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밤을 새우는 건 젊은 시절에나 했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괜히 마음이 흥분되었다.“마셔.”양지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안시연은 잔뜩 긴장해 감히 마시지 못했다.양지원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농담 말투로 물었다.“연정훈이 어디 갔는지 안 물어보네요?”안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궁금했지만 그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불쌍한 그 모습에 양지원은 흥미가 싹 가셨으며 되레 동정심이 느껴졌다.“약혼 소식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어요.”양지원이 말했다.안시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양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은 여사님을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바로 그쪽을 찾으러 갔고 지금은 의사당 무단 침입으로 끌려갔어요.”“끌려갔다고요?”안시연은 누가 감히 연정훈을 끌고갈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양지원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요? 무단 침입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에요.”안시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양지원이 방금 한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안시연 본인도 양석진이 머무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단 침입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또한 양지원이 본인에게 농담할 사람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손에 든 컵을 꼭 쥐고 물었다.“괜찮을까요? 의원님께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신다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양석진이 말했다.“내가 언제 추궁하지 않는다고 했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양석진을 바라보았다.“그곳에 중요한 문서가 얼마
안시연이 말을 바꿔도 양지원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양지원은 허리를 곧게 펴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시연에게 농담했다.“정말 사형선고를 받았나 봐요. 최후의 인맥으로 마지막으로 널 보러 온 것 같은데.”“...”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커플의 알콩달콩한 시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양석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양지원도 그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계단에 도착했을 때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고 있던 연정훈과 마주쳤다.그의 손에는 음식으로 보이는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지원 이모.”연정훈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양석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양지원은 안시연이 보고 싶어 조급해하는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그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빨리 가봐. 그 아이도 널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은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빠르게 걸어갔다.안시연의 방문은 닫혀 있었으나 들려오는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정리했다.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연정훈은 이미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시간을 따져보면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왠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침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연정훈은 손에 쥔 걸 내려놓고 방의 온도를 살핀 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그는 옷소매를 정리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컨디션 어때?”“많이 좋아졌어요.”연정훈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 온도를 확인하려 했다.그런데 손이 너무 차갑다는 게 떠올랐고 연정훈은 빠르게 화장실로 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다.안시연은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리고 화장실 앞까지 걸어가 문에 몸을 기댄 채로 조용히 바라보았다.
연정훈의 눈빛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안시연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안시연은 화가 나 얼굴을 돌리고 연정훈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그녀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옆 의자에 앉았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서서 안시연을 비추던 빛을 가렸다.안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젖혀 빛을 피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자 결국 안시연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정훈 씨의 가문에서는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나요? 할머니는 확고한 분이시잖아요. 할머니를 거스르면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요?”연정훈은 말했다.“서로 다른 두 권리가 충돌할 때는 덜 해로운 것을 선택해야 해.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할머니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면 너를 건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안시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정훈 씨는 나를 건드리는 게 두렵지 않나요?”“두렵지는 않아.”연정훈은 안시연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아까운 마음은 있어.”안시연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시연은 살짝 고개를 들며 동공 지진을 느꼈다.“왜요?”연정훈은 숨김없이 대답했다.“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다시 내게 사기꾼이라고 하지 않기를 바래.”안시연의 마음 방어선이 조금 무너졌다. 안시연은 여전히 연정훈을 좋아하고 있었고 아무리 깊이 숨기려 해도 자신을 속일 수 없음을 느꼈다.연정훈의 호의에 대해 안시연은 두려움 속에서 조심스럽게 시험하고 있었다. 받고 싶지만, 받기 두려운 마음이었다.“정훈 씨가 좋아할 만한 게 저에게 있을까요?”“그렇다면 내가 좋아할 만한 건 뭐지?”연정훈이 반문했다.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은 몰랐다. 연정훈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안시연의 마음을 완전히 점유한 터라 더 이상 연정훈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안시연이 대답하지 않자, 연정훈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안시연을 바라보며 반농담처럼 말했다.“잊고 있었네. 지금은
아래층에서.양지원은 양석진이 좀 더 쉬도록 권했지만, 양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와.”그들이 오늘 밤 만난 이유는 연정훈과 안시연의 문제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만나 상황이 잠시 진정된 듯했지만, 양지원은 양석진이 이제 떠날 것으로 생각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 다시 침묵 속에 빠졌다.갑자기.꼬르륵.양지원은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양석진은 침묵했다.“...”“오빠, 배고파요?”양석진은 짧게 말했다.“...응.”“그럼...”양지원은 일어나 먹을 것을 찾으러 가려 했다.“괜찮아.”양석진은 손을 흔들며 그녀가 주방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음식은 시키면 돼.”양지원은 양석진의 의도를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요리 안 할 거고 여긴 식재료도 없어요.”양지원은 위층을 잠시 올려다보며 말했다.“제가 좀 가져올게요.”양석진은 다시 침묵으로 답했다.“...”양석진은 젊은이들을 방해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말리려 했지만, 양지원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방 안은 꽃들 덕분에 한층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안시연은 꽃다발을 안고 낯선 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연정훈은 만두를 담아 안시연 옆에 앉아 한 입 건넸다.안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벌렸다.“맛있어?”“네. 게살이 들어 있어요.”“하나 더 먹어봐.”안시연은 다시 입을 벌렸다.쿵쿵쿵!연정훈이 안시연을 돌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방해받았다.밖에 있는 사람이 양지원일 거로 생각한 연정훈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정훈씨, 문 좀 열어줘요.”안시연이 말했다.“좋아.”연정훈은 그릇을 내려놓고 안시연에게 티슈를 건네고 문을 열러 갔다.문이 열리자, 양지원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역시나, 방안에는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지원 이모, 무슨 일이세요?”양지원은 여유로운 태도로 말하였다.“저 음식 반은 나 줘.”연정훈은 어이없었다.???“통닭은 됐고 닭 다리만 줘.”연
연정훈이 말이 끝나자 안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양지원은 흥미로웠다. 연정훈의 성장 과정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평범한 사람처럼 사랑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또 생각해 보니, 자기 자녀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다른 사람들은 서로 예쁜 사랑을 하고 있는데 양지원의 자식들은 그저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한다.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양지원은 조용히 닭 다리를 양석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드세요.”양석진이 말했다.“난 닭 다리 별로 안 좋아해.”양지원은 말없이 닭 껍질을 떼어냈다. “양석진 씨도 닭 껍질을 안 좋아하나요?”안시연이 물었다.양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이 말했다.“저도 안 좋아해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다들 닭 껍질이 치킨의 생명이라고 하잖아요..”안시연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매끈한 닭 다리가 안시연의 그릇에 놓였다.연정훈은 즉석에서 알아차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안시연은 침묵했다.“...”양지원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넌 반응이 빠르구나.”연정훈이 답했다.“이모께서 잘 이끌어주셔서요.”연정훈은 콩국을 담은 그릇을 건네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양지원은 감탄하며 말했다.“네 엄마와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했고 두 가문도 이미 친척이 되었지. 그런데도 넌 늘‘지원 이모’라고만 부르고‘작은 엄마’라고는 한 번도 부르지 않더라. 혁수보다 더해. 내가 너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다니 드문 일이구나.”연정훈이 말했다.“작은엄마라고 부르면 나이 들었다고 느끼실까 봐요.”“작은엄마라고 안 부르고 이모라고 하면 좀 더 젊어 보이시잖아요.”“사실 누나라고 부르고 싶지만, 우리 엄마가 절대 못 부르게 하셔서요.”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의 옆에 있던 양석진은 조용히 몇 마리의 소금 새우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양석진은 양지원이 준 독한 과자 때문에 안시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