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뱉은 말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부승희는 양씨 어르신이 보내온 모바일 초대장을 안시연에게 보냈다.[이 기세를 보아하니 두 가문이 큰 소식을 공개할 예정인 것 같은데요.][네. 연정훈 씨와 양민아 씨의 약혼 소식이겠죠.]???[안시연 씨, 그걸 지금 그냥 넘어간다고요?]안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남 시티를 한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대화는 적은 편이었다.더구나 안시연은 아직도 연정훈에게 삐진 상태였다. 그리고 연정훈은 아주 느긋하게 그녀와 연장전을 이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내일 밤이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집에 가뒀다.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던 안시연은 갑자기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외할머니가 병원에서 크게 넘어졌다는 소식이었다.외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고민이 다 2순위로 넘어가 버렸다.안시연이 급하게 집을 나서려고 했으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이 전화를 늦게 받자 안시연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외할머니가 다쳤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요!”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정훈은 바로 회의를 중지하고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야. 일단 경호원을 시켜 병원으로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당장 날 내보내 줘요!”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외할머니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경호원에게 그녀를 병원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절대 안시연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네, 걱정하지 마세요.”연정훈의 허락을 받은 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다행히 외할머니는 큰 부상이 아닌 팔목에 작은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안시연은 양지원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오르고 마주한 양지원은 말없이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창밖을 내다보니 일렬로 줄을 선 직원들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주변 환경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보니 경인시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온 모양이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석진의 주거지로 온 것이었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차에서 내리며 양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연정훈의 옆에 붙어있는 건지.”“...”“양 대표님...”“따라와요.”양지원은 안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높은 하이힐로 녹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별장 앞으로 예쁜 돌길이 있었으며 양편으로는 잘 정돈된 화단이 보였다. 하늘에는 빨간 노을이 졌고 별장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졌다.안시연은 어리둥절해서 그 뒤를 따랐다.양지원은 키로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왠지 이 정원으로 들어선 후부터 양지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중년 보스의 부담을 덜고 조금 편해 보였다.그녀는 문을 열고 전등을 켜더니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편하게 앉아 있어요.”안시연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양지원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얌전히 창가 자리에 잡았다.양지원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한가득 간식을 들고 내려왔다.그중에는 땅콩 치즈 쿠키도 있었는데 양지원은 박스 채로 완벽하게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얼굴을 굳혔다.“이걸 밥이라 생각하고 먼저 먹고 있어요. 물은 주방에 있어요.”그리고 양지원은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저만 남겨두시는 거예요?”양지원이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양 대표님!”“다 그쪽을 위한 거예요.”양지원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그쪽과 그쪽 엄마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하지만...”안시연
안시연은 양지원이 꺼내준 쿠키를 절반 넘게 비웠다.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할 정도 맛이 좋았다.그녀는 연정훈에게도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이제 아예 포기를 했다.오늘 밤은 특별한 날이었고 거물들의 싸움에 자신의 존재가 거슬렸던 것이라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지원의 약혼이 공개되면 아마 이 집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양지원은 아마도 제 딸의 혼사를 그릇칠까 걱정이 되었겠지.안시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서운한 감정인지 뭔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달콤한 쿠키가 그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거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거실은 별 볼 일 없이 무난했다.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많은 명화가 걸린 복도가 보였다.여러 명화 중에서도 가족사진이 제일 눈에 띄었다.사진 속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젊은 여자는 당연히 양지원일 테고, 남자는 아마도... 양석진일 것이다.남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는데 양지원은 다정하게 오빠의 어깨를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모르는 사람이 봤다면...흠,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안시연은 심심한 나머지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보았다.양지원이 안시연에게 거실에만 있으라고 말 한 적도 없었기에 안시연은 위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은 모두 잠겨 있었지만 공용 구역은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었다.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척 여유롭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지금 이 시간쯤이면 연정훈도 연회에 도착했을 것이다.그는 양지원과 어깨를 나란히 서서 사진 속 양지원과 양석진처럼 다정하게 사진을 찍을 것이다.머리가 갑자기 핑그르르 돌더니 하던 생각도 잠시 멈췄다.그녀는 앞으로 두 걸음을 걸었으나 바보처럼 제 자리에서 휘청거리고 말았다.이번에는...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웠다.그 순간 시야가 갑자기 흐릿해지고 눈앞에 특수 효과가 생긴 것처럼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음?토끼?호... 호랑이?안시연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호흡
연회장에서.양지원은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바로 손님을 맞았고 이어 연정훈의 옆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와인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난 네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어.”“지원 이모가 내 사람을 데려가고 왜 그런 걱정을 해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렸다.본인이 안시연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걸 연정훈도 알 거라 생각했다.?‘대체 뭐가 문제지?’연정훈은 양지원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이모가 그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데려간 곳도 안전하지만 할머니는 곧 그 사람 데려갈 거예요.”양지원은 말없이 민수희를 살폈다.안시연을 데려가기 전 민수희가 먼저 선수 치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양석진의 구역에서 아무리 민수희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내 판단이 틀린 건가?’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제 사람을 붙였어요.”“그럼 정훈이 너는 할머니 때문에 온 거야?”양지원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곳은 네 할머니면 몰라도 넌 감히 움직이지 못할 거야.”연정훈은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눈인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죠.”“그럴 필요 없어. 합법적으로 내... 혁수 삼촌의 거주지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양석진 레벨이면 그의 거주지는 일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절대 안전을 보장했다.연정훈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굳이 합법적일 필요는 없죠.”연정훈은 안시연만 되찾으면 되었다.납치 사건 그 후로 연정훈은 안시연의 멘탈이 걱정되었다.양지원은 이런 연정훈을 조용히 살폈다.침착해 보이는 겉면과는 달리 겨우 화를 참고 있는 내면이 언뜻 보였다.할머니만 없었다면 아주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그래.”양지원이 남은 와인을 전부 들이켜며 말했다.“어디 한번 기다려볼게.”어느새 손님들도 거의 도착했다.생일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가 되고 약혼 서약은 거의 흘러가는 말로 한번 꺼낼 계획이었다.하지만 그의 한마디 말이면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민수희가 연정
연회장 주차장에서.양지원은 뒷좌석에 앉아 실소를 터뜨렸다.그리고 창문을 내리고 편하게 좌석에 몸을 기댔다.앞좌석의 집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연정훈 도련님이 그렇게 가버렸는데, 큰아씨께서는 왜 기분이 좋아보아 실까요?”“가버린 것에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이 상황이 좀 흥미롭네.”“흥미롭다고요?”“그래.”자리를 떠난 타이밍이 너무 제 멋대로였다.양지원이 안시연을 데리고 간 건 그녀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여사님과 연정훈이 모두 다시 그녀를 찾으려 했으니 양지원이 안시연을 그에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양지원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여사님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자신을 약 올리는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결혼을 찬성하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나서서 반대할 필요는 없었다. 안 그러면 어르신의 입장도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양지원이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갈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연회장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사님은 연정훈의 체면을 챙겨줄 생각이 없었고 연정훈이 여사님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굳이 연회장에 참석하고 다른 한편 안시연을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니. 그리고 제일 중요한 타이밍에 홀연히 자리를 떠나 여사님의 뒤통수를 제대로 쳐버렸다.쯧쯧.그러고 보니 연정훈에 비하면 양혁수는 정말 순한 양이라 할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허리를 펴고 팔을 차창 위로 올렸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폐 끝까지 들이마셨다.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민아 아가씨께서 많이 속상해하실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대꾸하지 않았다.어머니가 되어 양민아를 응원하는 게 맞았으나 양민아의 행동은 양지원의 관념과 너무 달랐다. 양지원은 양민아가 이해되지 않았다.“민아는 똑똑한 아이이니 며칠 후면 다 정리할 거야.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굳이 연정훈에게 목을 맬 필요가 뭐 있어.”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지원 이모, 저예요.”양지원은 의외라
의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같은 쿠키라고요?”양창수가 미소를 터뜨렸다.“아직도 버리지 않으셨어요?”양창수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의사는 어이가 없었다.양석진은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쿠키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잘 보관해 뒀는데 뭐가 문제야?’양석진이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저 사람이 식욕을 못 참고 그렇게 많이 먹어 댔으니 문제지. 몇 개 남지도 않았던데.’양창수는 양석진의 생각을 바로 읽었고 의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현관까지 같이 걸어가며 양창수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킬러는 여전히 한 사람이네요.”층계까지 걸어왔는데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양창수가 입을 열었다.“킬러 도착.”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만하시고 빨리 마중이나 가세요.”방안에는 안시연과 양석진만 남겨졌고 그도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비록 양석진은 안시연의 아빠뻘이었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니 같은 방에 있는 건 부적절했다.그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깊은 잠이 들었던 안시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더니 갑자기 몸부림치며 끝자리로 움직이려 했다.“우웩!”!!!양석진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었고 안시연의 구사 물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휴지통이 침대 옆에 놓여 있었고 그는 빠르게 휴지통을 그녀의 옆으로 걷어찼다.안시연은 아까 이미 속을 모두 비웠고 지금은 그저 구역질만 할 뿐이었다.안시연이 바닥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생각에 양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침대에 힘없이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양석진은 탁자에 놓인 물을 따라 건네려 했다.그리고 방 밖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양지원은 젊었을 적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고 진중해 보이는 가면을 갖췄으나 사실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양석진의 집으로 들어선 그녀는 너무 급한 나머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문이 열리고 보인 광경에 양지원은 깜짝 놀랐다.양석진이
안시연은 먹었던 모든 걸 토해내고 편하게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편해 보이는 안시연을 보며 드디어 안심했다.그러나 손등에 꽂힌 링거를 보며 또 마음이 아팠다.양주에서도 병원 신세를 졌는데 자신의 구역인 경인에서도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날 밤 그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고민을 길게 할수록 그는 제 가문 어르신들의 수단이 역겹게 느껴졌다.그리고 안시연을 향한 마음에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조금 좋아하는 그런 섣부른 마음이 아니었다.이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마음속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안시연이 잠에서 깨면 이런 말을 직접 전할 생각이었다. 항상 모른 척 넘어가 그녀의 속을 상하게 했었다.안시연이 몸을 뒤척이자 연정훈은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음...”행여나 그녀가 움직이다가 링거 바늘이 움직일까 봐 걱정되었다.안시연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아래층에서.양지원은 진녹색의 소파에 앉았다. 탁자 앞에는 양창수가 가져온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간식은 대부분 쿠키였다.그녀는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석진은 창문을 열고 그녀를 등진 채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라이터는 손이 닿는 아무 거치대 위로 올려두었다.뿌연 연기가 그의 옆선을 흐릿하게 가렸다. 그러나 높은 신분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양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담배 끊었지 않아요?”양석진이 그녀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끊었었지.”“...”“기분이 안 좋으면 가끔 필 뿐이야.”그리고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꽂고 차를 직접 우렸다.담배 연기는 어느새 저녁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없었다.양지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머릿속엔 양석진이 안시연을 보살피던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다.그는 결벽증이 심했고 낯선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그때 양석진이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양주에서 만
양지원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중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양석진은 어이가 없었다.“누군가를 내버려두더라도 최소한 먹을 것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남겨뒀어요.”양지원은 내심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오빠가 손도 대지 않은 쿠키를 남겨줬다고요.”“...”양지원은 바로 무언가 깨달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당황해서 물었다.“내 쿠키에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요. 그 쿠키에 독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양지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레시피대로 만들었어요.”“게다가.”“저 아이가 낮에 뭘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낮에 먹은 음식이 때마침 증상을 보일 수도 있잖아요. 왜 날 탓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 쿠키, 나도 먹어봤어.”양석진이 말을 잘랐다.“네?”“나도 중독 증상이 나타난 적 있다고. 그래서 해독제를 먹었지.”양지원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오빠는 쿠키 포장을 뜯지도 않았잖아요.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요.”“포장 뜯었고, 나도 먹었어.”“...”양지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포장을 확인해 보았다.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그와 유치한 말다툼을 이어가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양석진이 준비한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그런데 쿠키를 하도 먹었더니 목이 메었다.탁자 위로 그녀가 좋아하는 녹차가 놓여있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실로 향했다.양석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친절하게 말했다.“왼쪽 선반에 홍차가 있어.”양지원이 말했다.“화차를 찾고 있어요.”양석진이 답했다.“화차는 세 번째 층 오른쪽에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에서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석진은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
부승희가 말했다.“결정적인 순간에 잠재력을 좀 발휘할 수는 없겠어?”이승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1대4 싸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거냐?”‘마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상대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여전히 숨을 몰아쉬었다.“어쨌든 넌 정말 한심하다.”“내가 그런 잠재력이 있어도 쓰지 않아. 상대를 다치게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져?”부승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마.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그럴 줄 알았다. 네 양심 없는 걸 알고 있었다고.”“나...”부승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위층 창문에서 소리가 나며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뒷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부승희와 이승우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둘은 계단 밑으로 몸을 숨겼고 마침 그곳은 위층에서 내려다볼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집주인은 창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부승희는 이승우를 툭툭 찔렀다.“이제 나가야 하는데 네가 부른 사람들은 도착했어?”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고 천천히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자물쇠가 녹이 슬어서 문을 닫을 땐 잘 닫히지만 열 때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부승희는 살금살금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살폈다.“할 수 있어?”“조금만 기다려.”부승희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는 그를 타박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떨어지라고 손짓했고 부승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그녀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겼다.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난 뒤에야 걸쇠가 풀렸지만 문이 약간 걸려 있었고 이승우는 그제야 이 집 사람들이 왜 마당 문을 닫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미 소리가 난 이상 그는 아예 힘을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이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왜 그래? 가게는 저쪽인데.”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쪽에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거칠게 뛰어오더니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바로 저 두 명이 돼지 사육사예요. 아마 우리를 신고한 게 저들일 겁니다. 빨리 막으세요.”부승희는 순간 얼어붙었다.‘돼지 사육사? 내가? 난 유명한 축산 기업가인데.’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그들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처음 이 골목에 들어설 때도 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손에 이끌려 뛰는 사이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속에서 술이 요동치며 흔들려 더욱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겨우 끝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쫓아오는 사람들이 이쪽까지 미리 막지는 않았다.이승우는 방향 감각이 뛰어나 빠르게 판단한 뒤 왼쪽을 선택했다.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부승희는 여러 번 그에게 무언가를 물었지만 정신없이 뛰는 사이 그의 대답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이대로라면 토할 것만 같았다.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7~8년 전 북미에서 보냈던 휴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랬다.무료한 하루를 보내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에 나가려 했지만 동행한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결국 이승우만 그녀에게 끌려 억지로 함께 나왔다.그날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고 그는 케이크를 사러 갔다. 그런데 부승희가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거리 한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왔고 그녀는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있는 앞쪽에는 안전한 것을 떠올렸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점 커지는 총소리와 몰려오는 인파에 좁은 거리에서 압사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다.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받았지만 이승우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소음 속에서 간신히
전주에 양육을 하러 온 부승희와 이승우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성격상 여린 타입도 아니었고 가정에서 애교 많은 사람도 아니어서 반년이 넘도록 집에서는 전화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남녀 관계를 떠나 같은 지역 출신들이 만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지만 더구나 둘은 함께 자라난 사이였고 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부승희는 가끔 전주에서 돼지를 키우는 일이 돈을 벌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자 어린 시절처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일시적인 취미인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살아갈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졌다.지켜본 결과 부승희보다 이승우가 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돼지를 양육하는 테스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감독을 맡았고 판매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이미 해외와의 거래를 성사했다.부승희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배여진이 보낸 메시지를 꺼내어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평온하게 잠을 청했다.그녀는 조용히 있었고 이승우도 더 조용했다. 더 이상 그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7월 초에 해외 대표가 협상을 위해 찾아왔고 그들의 첫 번째 대형 거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성사되었다.부승희는 손을 휘둘러 팀 전체를 초대해 저녁을 준비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일행은 급히 흩어졌다.이승우는 마치 집안일을 하는 사람처럼 술을 적게 마시고 부승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술이 깰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그녀를 지켜보며 뒤따라갔다. 부승희는 앞에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나의 돼지들 사랑해.”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정말 그렇게 좋아?”부승희는 돌아서며 이승우를 마주 보며 걸어갔다.“이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우리가 예전에 계획했던 3년 계획이 조기에 달성된 거야!”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배여진은 조용히 떠났다.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 이혼하러 돌아간 듯했고 선기현이 직접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했다.“직접 데리러 왔다면 그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부승희가 말했다.이승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건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당장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쓰레기 같은 남자.’부승희는 거칠게 욕을 퍼붓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야 너랑 선기현 씨 친하잖아. 근데 너한테 밥 안 사줬어?”“사줬지. 며칠 전에 도착해서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했어.”“근데 왜 안 갔어?”“나는 흠집 있는 친구 안 사귀어.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부승희는 어이없었다.“...”‘멍청이.’배여진과 선기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승우와 부승희의 반면교사 같아서 이승우는 괜히 불안해졌다.그 골칫거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건물에서 키우던 돼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집단 폐사했다. 게다가 다른 두 곳에서는 식품회사가 찾아와 협력을 논의하면서 일이 급증했다.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한 명은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실에서 협상하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돼지 수의사들과 함께 치료에 매달렸다.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해졌다.부승희는 돼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이승우와 협력 건을 논의했다.그녀는 파초심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이승우에게 건넸다.이건 열대 지역에서 가져온 거였는데 돼지들에게 먹일 수는 있지만 돼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승희는 두어 번 먹어보니 수분이 많아서 그런지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이승우는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졌다.“돼지도 안 먹는 걸 왜 먹어?”이승우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부승희는 찌꺼기를 뱉으며 말했다.“나중에 남편을 고를 때 ‘파초심을 좋아할 것'이라는 조건을 꼭 추가해야겠다.”이승우가 움찔했다.
저녁 10시.부승희는 농장에서 자리를 찾아 뜨끈한 만둣국을 한 입 크게 넣었다.멀지 않은 곳에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도망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이승우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전화를 돌렸다.“오빠, 적당히 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그 앞으로 걸어와 만둣국을 슬쩍 바라봤다.“더 있어?”“아니. 태오 씨가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둣국 사준 거야.”정태오는 농장 경비원이었는데 스무살은 막 넘긴 순수한 청년이었다.부승희는 국물을 들이켜며 뿌듯해했다.이승우는 부승희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뿌듯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만둣국을 먹게 돼서 뿌듯한 건가?이승우는 부승희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나 두 개만 줄래?”“싫어. 나 먹을 것도 부족하단 말이야.”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훔쳐 입에 넣었다.“오빠!”“나 경찰에 신고했어.”이승우는 부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부승희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왜?”“그 사람들이 이 야심한 밤에 무리 지어 다니며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합법은 아니잖아.”이승우는 어느새 만두를 두 개째로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들끼리 하산하다가 저 무리를 만났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이승우가 세 번째로 만두를 훔치려 했다.부승희는 모기를 때리듯 이승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깜짝 놀란 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다툼이라도 하려는데 황규식이 이승우를 향해 걸어왔다.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피한 줄도 몰랐다.“무슨 일이에요?”황규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견인된 차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급하게 차량을 구해뒀는데 오늘 밤 떠나실 겁니까? 아니면 하룻밤 묵을 겁니까?”“아니에요. 내일
부승희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그런데 이승우가 대신 외투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제 어깨에 눕혔다.“좀 더 눈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부승희는 정말 피곤했기에 군소리 없이 다시 머리를 기댔고 제 어깨에 올라온 이승우의 손을 휙 내쳤다.“잠시만 눈 좀 붙일게.”부승희는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저 사람을 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안심해.”“응...”차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고르게 들려오는 부승희의 숨소리에 이승우는 제 어깨를 고정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부승희가 제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고개를 드니 기사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더 경계심을 높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기사는 껌을 꺼내 이승우에게 권했다.“저는 괜찮습니다.”기사는 덤덤하게 껌을 다시 내려놓았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부승희는 말소리가 거슬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이승우가 말했다.“기사님, 제 여자 친구가 잠이 들어서요.”‘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이승우는 겨우 표정을 풀었으나 허리에 따끔 하고 고통이 느껴졌다.“쓰읍.”이승우가 아픈 곳을 살살 매만지는데 부승희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지금 또 어디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그러자 이승우는 마른기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잠든 거 아니었어?”“...”[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만큼만 넘어가 줘.]마지막 한 마디는 이승우가 타자해서 부승희에게 보여줬다.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다시 잔다.”“그래그래. 푹 자.”차량은 계속 달려 농장으로 향했고 이승우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을 불러 농장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모자라 부승희를 힐끔거리는
“두 분 택시 잡으려는 거죠?”가장 앞장선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택시 기사 같지 않은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이승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따로 부른 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그 말에 기사는 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그런 평범한 차량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도 엄연히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 차에 타도 다 똑같아요.”그때 부승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콜택시 운전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손님, 차량이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데 차라리 다른 차량 잡는 게 어때요?”부승희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젠 하다 하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독점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그들은 두 사람이 콜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이승우는 아무나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기사의 더러운 시선이 자꾸 부승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꿨다.이 야심한 시간에 본인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부승희가 옆에 있었다.저 사람들은 말이 좋아 운전기사였지 독점 운영하는 걸 보아 어쩌면 깡패 일까지 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먼저 상황을 안정시키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었다. “그쪽 차에 타면 바로 떠날 수 있어요?”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손님, 우린 미터기로 계산 안 해요. 인수로 계산하지.”“네, 상관없어요. 얼마면 되는데요?”“어디로 가세요?”이승우는 주소를 말했다.“한 사람 오만원.”‘세상에 말도 안 돼.’목적지에서 가백산까지의 거리는 콜택시로 고작 만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비록 두 사람에게 있어 오만원과 만원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가지 씌우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부승희는 몰래 이승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이승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부승희의 손을 꼭 잡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