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체면을 중시하여 안시연에게 애걸복걸할 수는 없었다.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이상,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연정훈은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안시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이런 답답함은 연정훈이 태어날 때부터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이불에서 끌어내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안시연은 방금 납치 사건을 겪었고 심리적으로 상처받아 사람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맞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이렇게 자신을 다독인 후, 연정훈은 더욱 불안해졌다.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침대 위에 있던 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은 핸드폰을 힐끔 보더니 할아버지 측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찡그린 얼굴로 전화가 온 시간이 적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품었다.최근 안시연은 잠이 얕았고 특히 놀람에 민감해졌다.연정훈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문이 닫히자, 안시연은 눈을 떴다.안시연은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며 연정훈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며 그가 나간 시간을 세고 있었다.연정훈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도련님.”연정훈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집 밖에서는‘연 대표님’이라고 불리지만, 할아버지 측의 사람은 예전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을 ‘신 아저씨’라고 불렀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를 주셨나요?”상대방은 공손한 태도로 몇 마디 격식을 차리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강훈 씨가 회장님을 뵈러 몇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을 지경입니다.”연정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께서는 어떤 태도였나요?”“회장님께서는 당연히 도련님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련님, 이번에는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 연강훈 씨뿐만 아니라 L K 은행
안시연은 납치 사건으로 인해 며칠간 결근했다.함풍의 주식 양도 절차는 전면 중단되었고 심사팀은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차라리 긴 휴가를 내고 양주에서 쉬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을 경인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정훈 씨, 바쁘면 먼저 혼자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양주에 남을게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연정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양혁수도 곧 경인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야.”안시연은 잠시 망설였다. “전화 한 통만 할게요.”안시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은 무표정하게 기다렸다.조금 후, 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혁수 씨도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하네요. 그러면 저도 정훈 씨와 같이 갈게요.”연정훈은 순간 혼란스러웠다.어릴 적부터 배워온 품격이 자꾸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연정훈은 욕설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로 갈까요? 아니면 열차를 탈까요?”안시연이 물었다.“저는 두 마리 양도 데리고 가야 해요.”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 “...차.”안시연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마리 양을 데려올 시간을 정했다.그리고 바쁘게 짐을 챙겼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양에게만 신경을 쓰고 연정훈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안경을 벗었다.쿵!큰 소리가 났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비가 차 멀미하는 것 같아. 약을 좀 사야겠어.”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이 소란을 피운 덕분에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양혁수가 안시연과 함께 가겠다는 양지원의 마음을 달래 동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연정훈은 정말로 다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경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넓은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안시연은 맞은편에서 영준을 안고 있었고 연정훈은
안시연은 결국 안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최근 안시연은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고 연정훈도 안시연을 무리하게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이불을 덮고 단순히 대화만 나누는 것도 연정훈에게는 충분했다.물론, 안시연이 연정훈과만 대화할 때 한해서였다.“내일 점심은 저에게 가져다줄 건가요?”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들고 있었지만, 이마를 찌푸린 채였다.안시연은 연정훈 옆에서 대놓고 양혁수와 통화 중이었고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그 세 번의 은혜 덕분에 안시연은 양혁수를 향한 관용이 전보다 커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 예의 있게 물었다.“혁수 씨가 전화했는데, 받아도 괜찮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안시연이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그녀를 더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너무 오래 통화하지 마.”“네.”안시연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혁수 씨는 집에 계시잖아요. 저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네가 오면 내가 뒷문으로 사람을 보내 데리러 갈게.”연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시선을 피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마. 안시연이 잡히면, 네가 안시연을 보호할 수 없을 거야.”양혁수는 웃으며 말했다.“아, 형도 계셨군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살짝 옆으로 몸을 옮겼다.양혁수는 더 도발적인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저는 목숨 부지하는 처지라, 저희 어머니는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셔요. 안시연이 날 보러 오는 건 물론이고 제가 안시연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고려해 보실 겁니다.”연정훈과 안시연은 둘 다 잠시 말을 잃었다.둘은 동시에 양혁수가 병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다음 날, 연정훈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마당에 경호원들이 늘어난 것을 발견했다. 전부 다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아주머니는 대문 앞에 벚꽃이 피었길래 보러 갔는데 사람들이 다가와 물어보았다고 했다.“대표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가실 때는 대표님께 전화해야 한답니다.”안시연은 원래부터 마음이 불편했고 더구나 감시까지 당하는 상황에 기분이 나빠졌다.안시연은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앞에 있는 케이크를 힘껏 찔렀다.아주머니는 안시연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위로하면서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라고 유도했다.안시연은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지금 안시연은 단지 어지럼증이 빨리 나아져서 다시 일하고 싶을 뿐이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운전 연습도 해야 한다.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안시연은 불안했다.점심에는 퀵 서비스를 불러 양혁수에게 음식을 보냈다.아주머니가 두 세트를 준비하며 제안했다.“대표님께도 한 세트 보내드릴까요?”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정훈 씨는 회사에서 잘 먹고 있어요.”“그래도 직접 보내드리는 것만 못하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아주머니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제가 보내드릴게요.”안시연은 침묵했다.“...”됐다.안시연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두 마리 알파카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막 낮잠을 자려던 참에, 연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점심 먹었어?”연정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안시연이 말했다.“벌써 1시 가까이 됐는데요.”‘시간이 몇 시인데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몰라?’연정훈은 마치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다.“나 방금 일이 끝나서 시간 보는 걸 깜빡했어.”안시연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보로 아는 아는 듯했다.이 정도 레벨의 대표라면 시간관념이 가장 철저해야 했다. 설령 그가 까먹었다 하더라
안시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문을 조용히 닫은 뒤, 침착하게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너는 내려갈 필요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집으로 갈게.”연정훈이 말했다.전화를 끊자,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 알려주었다.“여사님께서 차 한잔 같이하자고 부르셨어요.”아주머니의 미묘한 표정에서 안시연은 연 할머니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안시연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고 굳이 내려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상황을 보니, 더 버티면 곧 경호원이 와서 억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끌려 내려가는 모습은 절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옷 갈아입고 곧 내려갈게요.”“네. 알겠습니다.”아주머니는 급히 내려갔다.안시연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흰색 긴팔 셔츠에 은은한 연보라색 모직 치마를 맞춰 입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대로 특별한 환영도 거창한 장면도 없었다. 소파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차를 새로 데워드릴까요?”“두 잔 가져와요. 그 아이도 곧 내려올 것 같아요.”“네. 알겠습니다.”나이 든 아주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계단 위에 있는 안시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민수희에게 말했다.“안시연 아가씨가 내려왔습니다.”민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의 어머니와는 달리 연 할머니는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안시연을 더 긴장하게 했다.안시연은 작은 거실을 지나 조용히 민수희 앞에 다가섰다.민수희의 외모와 표정을 보면서도 안시연은 민수희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오랜 병상 생활로 얼굴에 기운이 없었고 안시연이 보아온 대부분의 노인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민수희는 달랐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었으며 콧대 위에 걸린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부는 다소 처졌지만, 여전히 희고 깨끗해 보였다. 눈매와 얼굴 윤곽을 보면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였음을 짐작할 수
안시연은 민수희를 만나 비로소 말로 사람을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단 두 마디의 간단한 말만으로 안시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이, 신분 얘기들.표면적으로 관대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연정훈의 정식 연인으로서 존재하는 안시연에게 그런 말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안시연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민수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라고 확신했다.안시연은 자존심이 강하고 연정훈의 재산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민수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시연이 가진 것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별로 없으며 그것마저도 민수희의 눈에는 무모한 야망으로 보였다.“사실 네가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연정훈이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를 설득해서 너를 내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냥 여기 계속 있어라.”“나중에 연정훈이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때 우리는 신혼집을 따로 마련해 줄 계획이니, 그때는 준비하렴.”안시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약혼이요?”“연정훈이 네게 말하지 않았니?”민수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안시연은 말이 목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민수희는 더욱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양민아는 알고 있지?”“우리와 양씨 가문과 대대로 인연이 깊은 집안이야. 그만큼 적합한 혼사가 또 있을까?”민수희의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처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들렸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연정훈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에게도 너의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테니까.”안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안시연은 더 이상 민수희를 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아직 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래, 괜찮아. 네 방으로 가서 쉬어.
“네가 이제는 다 커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 다 알고 있다.”“생신 잔치 날, 넌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발표 일정은 바뀌지 않을 거야.”“그때는 모든 사람이 이 할머니를 비웃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지.”할머니가 나가면서 차분한 어조로 남긴 마지막 말이 연정훈을 충격에 빠져들게 하였다.민수희는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할머니가 말해 줄게. 오늘 같은 계획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어. 혼인 계획을 하더라도 내 아들에게 돌아갔겠지. 그런데 누가 막내아들을 위해 계획할 기회를 가로챘을까? 바로 너야.”“너의 작은아버지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잊지 마라.”오래도록 봉인된 기억이 마치 누군가의 손으로 연정훈의 목을 조이는 듯, 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했다.연정훈은 감정을 억누르며 침실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안시연이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연정훈은 캐리어를 보며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어디 가려는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정훈 씨 할머니께 들었어요. 약혼한다면서요?”“그런 일 없어.”연정훈은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안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저는 우선 나비와 영준이를 데리고 벚꽃동으로 갈 거예요. 며칠 뒤에 집을 구하면 그때 나갈게요.”그렇게 말하고 안시연은 두 마리 양에게 목줄을 차 주었다.연정훈은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고 마음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안시연, 나는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어.”연정훈은 다시 강조했다.안시연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네. 알겠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정훈 씨가 약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혼인에 끼어들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들으며 고통스러웠다. 안시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정훈의 예민한 신경을 더 괴롭히
연정훈이 너무 강하게 안아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떠나보내기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목구멍에 맺힌 씁쓸함을 삼키며 연정훈을 밀어내려 했다.“정훈 씨, 놓아줘요.”하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너무 컸고 안시연의 힘으로는 연정훈을 전혀 밀어낼 수 없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아래층에서 이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다.양 두 마리는 양쪽에 서서 고개를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뒤에야 진정하며 안시연을 놓아주었지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안시연을 서재로 끌고 갔다.안시연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뭐 하는 거예요?”서재 문 앞까지 오자 나비도 따라가려 했다.연정훈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나비는 침을 뱉었다.서재 안에서 안시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도망칠 수 없었다.연정훈은 화를 억누르며 안시연의 얼굴을 쓰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안시연의 마음이 아파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헤어지다니요.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냥 제가 교수님한테 약간의 이득을 봤고 일을 안 하고 돈을 받은 것뿐이었죠.”안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교수님이 신경 쓰인다면 시급으로 계산해서 제 월급에서 빼도 돼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좋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하였다.“양주에서 내가 한 말은 전부 흘려들은 거야?”안시연은 대답했다.“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다행이네요. 안 그랬으면 교수님 정말 곤란하셨을 거예요. 앞에서는 저한테 같이 있자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약혼을 준비하고 계셨다니요.”연정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난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안시연은 고개를 떨구고 깊은 숨을 내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
부승희가 말했다.“결정적인 순간에 잠재력을 좀 발휘할 수는 없겠어?”이승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1대4 싸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거냐?”‘마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상대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여전히 숨을 몰아쉬었다.“어쨌든 넌 정말 한심하다.”“내가 그런 잠재력이 있어도 쓰지 않아. 상대를 다치게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져?”부승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마.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그럴 줄 알았다. 네 양심 없는 걸 알고 있었다고.”“나...”부승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위층 창문에서 소리가 나며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뒷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부승희와 이승우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둘은 계단 밑으로 몸을 숨겼고 마침 그곳은 위층에서 내려다볼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집주인은 창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부승희는 이승우를 툭툭 찔렀다.“이제 나가야 하는데 네가 부른 사람들은 도착했어?”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고 천천히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자물쇠가 녹이 슬어서 문을 닫을 땐 잘 닫히지만 열 때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부승희는 살금살금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살폈다.“할 수 있어?”“조금만 기다려.”부승희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는 그를 타박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떨어지라고 손짓했고 부승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그녀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겼다.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난 뒤에야 걸쇠가 풀렸지만 문이 약간 걸려 있었고 이승우는 그제야 이 집 사람들이 왜 마당 문을 닫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미 소리가 난 이상 그는 아예 힘을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이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왜 그래? 가게는 저쪽인데.”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쪽에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거칠게 뛰어오더니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바로 저 두 명이 돼지 사육사예요. 아마 우리를 신고한 게 저들일 겁니다. 빨리 막으세요.”부승희는 순간 얼어붙었다.‘돼지 사육사? 내가? 난 유명한 축산 기업가인데.’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그들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처음 이 골목에 들어설 때도 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손에 이끌려 뛰는 사이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속에서 술이 요동치며 흔들려 더욱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겨우 끝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쫓아오는 사람들이 이쪽까지 미리 막지는 않았다.이승우는 방향 감각이 뛰어나 빠르게 판단한 뒤 왼쪽을 선택했다.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부승희는 여러 번 그에게 무언가를 물었지만 정신없이 뛰는 사이 그의 대답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이대로라면 토할 것만 같았다.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7~8년 전 북미에서 보냈던 휴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랬다.무료한 하루를 보내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에 나가려 했지만 동행한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결국 이승우만 그녀에게 끌려 억지로 함께 나왔다.그날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고 그는 케이크를 사러 갔다. 그런데 부승희가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거리 한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왔고 그녀는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있는 앞쪽에는 안전한 것을 떠올렸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점 커지는 총소리와 몰려오는 인파에 좁은 거리에서 압사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다.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받았지만 이승우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소음 속에서 간신히
전주에 양육을 하러 온 부승희와 이승우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성격상 여린 타입도 아니었고 가정에서 애교 많은 사람도 아니어서 반년이 넘도록 집에서는 전화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남녀 관계를 떠나 같은 지역 출신들이 만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지만 더구나 둘은 함께 자라난 사이였고 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부승희는 가끔 전주에서 돼지를 키우는 일이 돈을 벌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자 어린 시절처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일시적인 취미인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살아갈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졌다.지켜본 결과 부승희보다 이승우가 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돼지를 양육하는 테스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감독을 맡았고 판매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이미 해외와의 거래를 성사했다.부승희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배여진이 보낸 메시지를 꺼내어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평온하게 잠을 청했다.그녀는 조용히 있었고 이승우도 더 조용했다. 더 이상 그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7월 초에 해외 대표가 협상을 위해 찾아왔고 그들의 첫 번째 대형 거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성사되었다.부승희는 손을 휘둘러 팀 전체를 초대해 저녁을 준비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일행은 급히 흩어졌다.이승우는 마치 집안일을 하는 사람처럼 술을 적게 마시고 부승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술이 깰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그녀를 지켜보며 뒤따라갔다. 부승희는 앞에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나의 돼지들 사랑해.”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정말 그렇게 좋아?”부승희는 돌아서며 이승우를 마주 보며 걸어갔다.“이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우리가 예전에 계획했던 3년 계획이 조기에 달성된 거야!”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배여진은 조용히 떠났다.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 이혼하러 돌아간 듯했고 선기현이 직접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했다.“직접 데리러 왔다면 그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부승희가 말했다.이승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건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당장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쓰레기 같은 남자.’부승희는 거칠게 욕을 퍼붓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야 너랑 선기현 씨 친하잖아. 근데 너한테 밥 안 사줬어?”“사줬지. 며칠 전에 도착해서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했어.”“근데 왜 안 갔어?”“나는 흠집 있는 친구 안 사귀어.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부승희는 어이없었다.“...”‘멍청이.’배여진과 선기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승우와 부승희의 반면교사 같아서 이승우는 괜히 불안해졌다.그 골칫거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건물에서 키우던 돼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집단 폐사했다. 게다가 다른 두 곳에서는 식품회사가 찾아와 협력을 논의하면서 일이 급증했다.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한 명은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실에서 협상하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돼지 수의사들과 함께 치료에 매달렸다.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해졌다.부승희는 돼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이승우와 협력 건을 논의했다.그녀는 파초심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이승우에게 건넸다.이건 열대 지역에서 가져온 거였는데 돼지들에게 먹일 수는 있지만 돼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승희는 두어 번 먹어보니 수분이 많아서 그런지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이승우는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졌다.“돼지도 안 먹는 걸 왜 먹어?”이승우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부승희는 찌꺼기를 뱉으며 말했다.“나중에 남편을 고를 때 ‘파초심을 좋아할 것'이라는 조건을 꼭 추가해야겠다.”이승우가 움찔했다.
저녁 10시.부승희는 농장에서 자리를 찾아 뜨끈한 만둣국을 한 입 크게 넣었다.멀지 않은 곳에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도망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이승우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전화를 돌렸다.“오빠, 적당히 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그 앞으로 걸어와 만둣국을 슬쩍 바라봤다.“더 있어?”“아니. 태오 씨가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둣국 사준 거야.”정태오는 농장 경비원이었는데 스무살은 막 넘긴 순수한 청년이었다.부승희는 국물을 들이켜며 뿌듯해했다.이승우는 부승희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뿌듯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만둣국을 먹게 돼서 뿌듯한 건가?이승우는 부승희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나 두 개만 줄래?”“싫어. 나 먹을 것도 부족하단 말이야.”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훔쳐 입에 넣었다.“오빠!”“나 경찰에 신고했어.”이승우는 부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부승희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왜?”“그 사람들이 이 야심한 밤에 무리 지어 다니며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합법은 아니잖아.”이승우는 어느새 만두를 두 개째로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들끼리 하산하다가 저 무리를 만났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이승우가 세 번째로 만두를 훔치려 했다.부승희는 모기를 때리듯 이승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깜짝 놀란 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다툼이라도 하려는데 황규식이 이승우를 향해 걸어왔다.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피한 줄도 몰랐다.“무슨 일이에요?”황규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견인된 차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급하게 차량을 구해뒀는데 오늘 밤 떠나실 겁니까? 아니면 하룻밤 묵을 겁니까?”“아니에요. 내일
부승희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그런데 이승우가 대신 외투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제 어깨에 눕혔다.“좀 더 눈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부승희는 정말 피곤했기에 군소리 없이 다시 머리를 기댔고 제 어깨에 올라온 이승우의 손을 휙 내쳤다.“잠시만 눈 좀 붙일게.”부승희는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저 사람을 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안심해.”“응...”차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고르게 들려오는 부승희의 숨소리에 이승우는 제 어깨를 고정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부승희가 제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고개를 드니 기사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더 경계심을 높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기사는 껌을 꺼내 이승우에게 권했다.“저는 괜찮습니다.”기사는 덤덤하게 껌을 다시 내려놓았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부승희는 말소리가 거슬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이승우가 말했다.“기사님, 제 여자 친구가 잠이 들어서요.”‘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이승우는 겨우 표정을 풀었으나 허리에 따끔 하고 고통이 느껴졌다.“쓰읍.”이승우가 아픈 곳을 살살 매만지는데 부승희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지금 또 어디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그러자 이승우는 마른기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잠든 거 아니었어?”“...”[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만큼만 넘어가 줘.]마지막 한 마디는 이승우가 타자해서 부승희에게 보여줬다.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다시 잔다.”“그래그래. 푹 자.”차량은 계속 달려 농장으로 향했고 이승우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을 불러 농장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모자라 부승희를 힐끔거리는
“두 분 택시 잡으려는 거죠?”가장 앞장선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택시 기사 같지 않은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이승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따로 부른 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그 말에 기사는 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그런 평범한 차량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도 엄연히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 차에 타도 다 똑같아요.”그때 부승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콜택시 운전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손님, 차량이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데 차라리 다른 차량 잡는 게 어때요?”부승희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젠 하다 하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독점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그들은 두 사람이 콜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이승우는 아무나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기사의 더러운 시선이 자꾸 부승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꿨다.이 야심한 시간에 본인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부승희가 옆에 있었다.저 사람들은 말이 좋아 운전기사였지 독점 운영하는 걸 보아 어쩌면 깡패 일까지 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먼저 상황을 안정시키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었다. “그쪽 차에 타면 바로 떠날 수 있어요?”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손님, 우린 미터기로 계산 안 해요. 인수로 계산하지.”“네, 상관없어요. 얼마면 되는데요?”“어디로 가세요?”이승우는 주소를 말했다.“한 사람 오만원.”‘세상에 말도 안 돼.’목적지에서 가백산까지의 거리는 콜택시로 고작 만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비록 두 사람에게 있어 오만원과 만원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가지 씌우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부승희는 몰래 이승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이승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부승희의 손을 꼭 잡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