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문을 조용히 닫은 뒤, 침착하게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너는 내려갈 필요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집으로 갈게.”연정훈이 말했다.전화를 끊자, 아주머니가 다시 와서 알려주었다.“여사님께서 차 한잔 같이하자고 부르셨어요.”아주머니의 미묘한 표정에서 안시연은 연 할머니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했다.안시연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고 굳이 내려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상황을 보니, 더 버티면 곧 경호원이 와서 억지로 데려갈 것만 같았다.끌려 내려가는 모습은 절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옷 갈아입고 곧 내려갈게요.”“네. 알겠습니다.”아주머니는 급히 내려갔다.안시연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흰색 긴팔 셔츠에 은은한 연보라색 모직 치마를 맞춰 입었다.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대로 특별한 환영도 거창한 장면도 없었다. 소파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차를 새로 데워드릴까요?”“두 잔 가져와요. 그 아이도 곧 내려올 것 같아요.”“네. 알겠습니다.”나이 든 아주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계단 위에 있는 안시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민수희에게 말했다.“안시연 아가씨가 내려왔습니다.”민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의 어머니와는 달리 연 할머니는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안시연을 더 긴장하게 했다.안시연은 작은 거실을 지나 조용히 민수희 앞에 다가섰다.민수희의 외모와 표정을 보면서도 안시연은 민수희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오랜 병상 생활로 얼굴에 기운이 없었고 안시연이 보아온 대부분의 노인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민수희는 달랐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었으며 콧대 위에 걸린 안경이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부는 다소 처졌지만, 여전히 희고 깨끗해 보였다. 눈매와 얼굴 윤곽을 보면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였음을 짐작할 수
안시연은 민수희를 만나 비로소 말로 사람을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단 두 마디의 간단한 말만으로 안시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이, 신분 얘기들.표면적으로 관대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연정훈의 정식 연인으로서 존재하는 안시연에게 그런 말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안시연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민수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라고 확신했다.안시연은 자존심이 강하고 연정훈의 재산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민수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시연이 가진 것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별로 없으며 그것마저도 민수희의 눈에는 무모한 야망으로 보였다.“사실 네가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연정훈이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를 설득해서 너를 내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냥 여기 계속 있어라.”“나중에 연정훈이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때 우리는 신혼집을 따로 마련해 줄 계획이니, 그때는 준비하렴.”안시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약혼이요?”“연정훈이 네게 말하지 않았니?”민수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안시연은 말이 목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민수희는 더욱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양민아는 알고 있지?”“우리와 양씨 가문과 대대로 인연이 깊은 집안이야. 그만큼 적합한 혼사가 또 있을까?”민수희의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처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들렸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연정훈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에게도 너의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테니까.”안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안시연은 더 이상 민수희를 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아직 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래, 괜찮아. 네 방으로 가서 쉬어.
“네가 이제는 다 커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 다 알고 있다.”“생신 잔치 날, 넌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발표 일정은 바뀌지 않을 거야.”“그때는 모든 사람이 이 할머니를 비웃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지.”할머니가 나가면서 차분한 어조로 남긴 마지막 말이 연정훈을 충격에 빠져들게 하였다.민수희는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할머니가 말해 줄게. 오늘 같은 계획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어. 혼인 계획을 하더라도 내 아들에게 돌아갔겠지. 그런데 누가 막내아들을 위해 계획할 기회를 가로챘을까? 바로 너야.”“너의 작은아버지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잊지 마라.”오래도록 봉인된 기억이 마치 누군가의 손으로 연정훈의 목을 조이는 듯, 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했다.연정훈은 감정을 억누르며 침실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안시연이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연정훈은 캐리어를 보며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어디 가려는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정훈 씨 할머니께 들었어요. 약혼한다면서요?”“그런 일 없어.”연정훈은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안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저는 우선 나비와 영준이를 데리고 벚꽃동으로 갈 거예요. 며칠 뒤에 집을 구하면 그때 나갈게요.”그렇게 말하고 안시연은 두 마리 양에게 목줄을 차 주었다.연정훈은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고 마음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안시연, 나는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어.”연정훈은 다시 강조했다.안시연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네. 알겠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정훈 씨가 약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혼인에 끼어들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들으며 고통스러웠다. 안시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정훈의 예민한 신경을 더 괴롭히
연정훈이 너무 강하게 안아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떠나보내기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목구멍에 맺힌 씁쓸함을 삼키며 연정훈을 밀어내려 했다.“정훈 씨, 놓아줘요.”하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너무 컸고 안시연의 힘으로는 연정훈을 전혀 밀어낼 수 없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아래층에서 이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다.양 두 마리는 양쪽에 서서 고개를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뒤에야 진정하며 안시연을 놓아주었지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안시연을 서재로 끌고 갔다.안시연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뭐 하는 거예요?”서재 문 앞까지 오자 나비도 따라가려 했다.연정훈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나비는 침을 뱉었다.서재 안에서 안시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도망칠 수 없었다.연정훈은 화를 억누르며 안시연의 얼굴을 쓰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안시연의 마음이 아파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헤어지다니요.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냥 제가 교수님한테 약간의 이득을 봤고 일을 안 하고 돈을 받은 것뿐이었죠.”안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교수님이 신경 쓰인다면 시급으로 계산해서 제 월급에서 빼도 돼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좋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하였다.“양주에서 내가 한 말은 전부 흘려들은 거야?”안시연은 대답했다.“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다행이네요. 안 그랬으면 교수님 정말 곤란하셨을 거예요. 앞에서는 저한테 같이 있자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약혼을 준비하고 계셨다니요.”연정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난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안시연은 고개를 떨구고 깊은 숨을 내
연정훈은 거칠게 안시연의 입술을 탐했고 안시연은 호흡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아까부터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그러자 연정훈은 빠르게 안시연의 허리를 잡고 자기 몸에 기대게 했다.그는 제 멋대로 입술을 탐했으며 안시연이 지금 본인의 기분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다.‘모르겠다면 알 때까지 하면 되지.’“음...”연정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각도를 조정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으며 머릿속으로 전류가 파고드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했다.연정훈이 자신을 가두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자 안시연은 그를 깨물기로 했다.하지만 이미 여러 번 물린 경험이 있었던 연정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빠르게 그녀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읍!”안시연이 고개를 쳐들었다.입을 다물 수 없게 되자 입가로 무언가 길게 늘어져 나왔다.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찾아왔으나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고 점점 무게가 연정훈에게 실렸다. 그는 안시연의 자세가 불편하다고 생각되어 살짝 뒤로 물러섰다.키스를 마치고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다시 꼭 감고 인상을 찌푸렸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숨을 세게 들이쉬는 그녀를 보며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어디 불편해?”안시연은 머리만 괜찮았다면 그에게 박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불편하냐고 물을 수 있는 걸까?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안시연은 연정훈을 세게 밀어내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연정훈이 표정을 구기고 그녀를 부축했다.안시연은 그의 품에 기댔고 머리가 윙윙 울리더니 눈앞의 사물이 중첩되어 보였다.그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또 몸을 뒤로 뺐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다시 한
안시연은 너무 심장이 쿵쾅거려 연정훈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 고집을 피웠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에게 입을 맞춰 도망갈 수 없게 했다.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당겼다.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연정훈도 얌전히 누워있는 안시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연정훈은 손을 뻗어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의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 그동안 좀 쉬고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아무 말도 없는 안시연의 옆으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시간이 지나고 안시연은 누워있던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리면 연정훈과 마주 보아야만 했다.이제 허리가 점점 시큰거리는데 옆의 연정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나비가 밖에서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내가 나가 볼게.”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이 드디어 작게 대답했다.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연정훈이 방문을 나섰다.그가 방을 나서고 안시연은 침대 위에서 찌뿌둥하던 몸을 한참 뒤척였다. 그리고 연정훈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를 등지고 누웠다.민수희가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 연정훈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안시연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오직 그녀만이 그에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줬다.어지럽던 머리가 진정되고 안시연은 잠이 솔솔 밀려왔다.“큰 문제는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외상 스트레스의 가장 좋은 해결법입니다.”의사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용해야 할 약을 확인했다. 이어 주방으로 가 도우미들에게 안시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어느새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가만히 잠에 든 그녀를 지켜보다가 모든 고민을 뒤로 하고 같이 잠에 들기로 했다.두 사람의 핸드폰에는 불이 날 정도로 부재중 전화가 찍혔으나 두 사람은 전혀 관심이
양씨 가문.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착잡한 기분이었다.그가 자꾸 병실 안을 왔다 갔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자 양지원도 인상을 팍 찌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양지원은 국그릇을 밥상 위로 탁 올렸다.“빨리 먹어.”“...”그는 상처 난 부위를 움켜쥐고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또 어느 눈치 없는 녀석이 우리 양지원 씨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까요?”양지원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쭉 밀었다.“말만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먹고 싶지 않아요. 계속 누워있었더니 입맛이 싹 사라졌다고요. 많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요.”“...”양지원이 팔짱을 척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넌 민아와 연정훈이 약혼하길 바라고 있었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아들의 고민을 읽은 양지원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약혼에 있어 양지원은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약혼은 순리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와 직접 가입할 줄은 몰랐다.양지원은 막아서려 했지만 며칠 전 안시연과 소현정의 일로 기분이 상했고 막아설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두 가문 사람들이 모두 허락했으나 오직 연정훈만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이 약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좋은 결말이 없었다.양혁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온 건 누가 입김을 불어서 그래요.”양지원도 모를 리가 없었다.“민아는 네 누나야.”양혁수가 쳇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민아가 움직일 거라 양혁수는 미리 예상을 했었다.명예와 권력을 위해 낳아준 부모의 성도 버린 사람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더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그런 소리 마세요. 난 외동아들이고 그 누구와도 재산을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그리고 이번에 결정된 혼사를 어머니는 절대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뱉은 말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부승희는 양씨 어르신이 보내온 모바일 초대장을 안시연에게 보냈다.[이 기세를 보아하니 두 가문이 큰 소식을 공개할 예정인 것 같은데요.][네. 연정훈 씨와 양민아 씨의 약혼 소식이겠죠.]???[안시연 씨, 그걸 지금 그냥 넘어간다고요?]안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남 시티를 한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대화는 적은 편이었다.더구나 안시연은 아직도 연정훈에게 삐진 상태였다. 그리고 연정훈은 아주 느긋하게 그녀와 연장전을 이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내일 밤이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집에 가뒀다.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던 안시연은 갑자기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외할머니가 병원에서 크게 넘어졌다는 소식이었다.외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고민이 다 2순위로 넘어가 버렸다.안시연이 급하게 집을 나서려고 했으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이 전화를 늦게 받자 안시연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외할머니가 다쳤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요!”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정훈은 바로 회의를 중지하고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야. 일단 경호원을 시켜 병원으로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당장 날 내보내 줘요!”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외할머니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경호원에게 그녀를 병원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절대 안시연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네, 걱정하지 마세요.”연정훈의 허락을 받은 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다행히 외할머니는 큰 부상이 아닌 팔목에 작은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