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은 막 원장에게서 양혁수의 상태를 듣고는 가까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위층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양지원의 귀에 들어왔다.소현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엄마'라는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양지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안시연은 당황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으로 무의식적으로 소현정 앞을 막아섰다.“양 대표님...”양지원은 천천히 다가가며 차갑게 물었다.“안시연 씨, 혹시 혁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요?”“아니에요!”안시연은 즉시 부인했다.양지원과 많은 교류는 없었지만, 양지원은 김세연처럼 안시연을 깔보지 않았다. 그래서 양지원 같은 당당한 어른 앞에서 비굴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 씨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면, 둘이 왜 몰래 만나는 거죠?”양민아는 끼어들어 말했다.양민아의 말이 끝나고 양지원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양지원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결코 드러낼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였다.양혁수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양지원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고 안시연에 대한 적대감은 한없이 커졌다.안시연은 급히 해명했다.“어머니는 제가 여기 입원한 줄 알고 저를 보러 오신 거예요.”당황스러웠던 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소현정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양지원을 향해 도전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 병원이 양 씨 소유도 아니고 네가 올 수 있으면 나도 당연히 올 수 있는 거 아니야?”이 말에 양지원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인데 자신은 보지도 못하고 이 여자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원망과 질투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소현정은 양지원과 안시연이 마주한 상황의 위험성을 잠시 잊었다.양지원은 이런 여자와 말싸움하는 것조차 가치 없다고 느꼈다. 양지원은 안시연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전에는 안시연 씨를 불쌍한
연정훈과 오성호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욱 수습하기 어려워졌다.소현정은 크게 울며 소리쳤다.“난 그저 내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오성호는 양혁수 때문에 급히 돌아와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몰랐지만,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과 안시연의 얼굴이 양지원을 닮은 것을 보자마자,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그 순간, 차가운 기운이 발끝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갔다.오성호는 재빠르게 소현정을 노려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소현정은 그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자존심에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연정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연 대표님, 공정하게 말씀 좀 해주세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했나요? 그저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양 대표님이 저를 쫓아내려 하시네요.”이 명백하고도 저열한 이간질에 안시연은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소현정 씨, 불쌍한 척할 필요 없어요.”양민아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아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해요. 당신과 당신 딸이 이긴 사람들이라고 하셨죠. 당신은 제 엄마의 남편을 빼앗았고 당신 딸은 연 대표님을 사로잡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정말 대단하네요, 당신네 모녀.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죠. 그렇죠?”“난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명분만 차지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제삼자인 거 모르시나요?”“그만둬!”오성호가 묵직하게 소현정의 말을 끊었다.“아직도 창피한 것을 모르겠어?”소현정은 바로 입을 닫았다.소현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채 연정훈을 쏘아봤다.양민아가 더 말을 던지려 했지만, 그때 연정훈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당신이 안시연의 어머니인가요?”연정훈이 소현정에게 물었다.소현정은 원래 오성호를 두려워했지만, 연정훈은 젊고 고귀해 보여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연정훈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현정은 갑자기 겁이 났다.“네...”“안시연에게서 들
시립 병원에서.양지원의 기분은 극도로 나빴고 결국 양혁수를 보러 가지 않았다.사건 담당자가 양혁수가 사고 당일 현장에 남긴 물건을 전달하러 왔을 때, 양지원은 심한 두통으로 양민아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양민아가 막 떠나자마자 양창수가 도착했다.“큰아씨.”양지원은 양창수를 보자마자 양석진이 떠올랐다.순간적으로 양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왜 왔어요?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아닙니다.”양창수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석진 씨께서 급히 돌아가셔야 해서요. 그곳에서 석진 씨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이렇게 빨리 떠나신다고요?”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양혁수가 사고를 당했을 때, 양석진은 밤새 달려왔고 양지원은 그가 오성호보다 먼저 와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양혁수를 돌보느라 양석진과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요즘 석진 씨가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양창수가 말을 이었다.양지원은 실망했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억눌렀다.“오빠에게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으며 나무로 만든 보석 상자를 건넸다.“아씨께서 건강하시면, 석진 씨의 걱정도 덜어지고 석진 씨도 건강해지실 겁니다.”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이제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그에게 말썽을 부리지도 않는데 무슨 걱정을 하게 한다는 말인가.그래도 참자.양창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양지원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양지원이 좋아하는 자색 진주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진주의 품질은 부드럽고 뛰어났지만, 최고급은 아니었다.“오빠가 사준 거예요?”“네. 석진 씨께서 우연히 보시고 아씨에게 어울릴 거로 생각하셔서 사신 겁니다.”양지원은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침착했다.“오빠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양지원의 얼굴을 두어 번 더 살폈다.양지원은 자신이 품은 감정이 들킨 듯한 느낌에 살짝 눈살을 찌푸
양민아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결과를 받았다.안시연의 신분증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생일은 9월 4일이었고 아버지는 그해 1월에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안시연은 유복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만약 안시연이 10월에 태어났다면 그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안시연은 오성호의 아이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양민아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조사를 지시했고 오성호와 소현정이 처음 연결된 시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했다.그리고...“어떻게든 안시연의 유전자 검사 샘플을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양민아는 생각해 보니, 유전자 검사만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오성호의 샘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양혁수의 샘플은 구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오성호의 아들이니, 그와 안시연의 유전적 관계만 확인하면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만약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이라면 양민아에게는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오성호는 이미 양씨 그룹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딸 또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양민아는 깊은 고민 끝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들기로 결심했다.양씨 가문의 양녀라는 신분만으로는 결국 너무 불안정했다. 정민아는 반드시 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그렇게 결심한 양민아는 해외에서 휴가 중인 양홍두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저 민아예요...”...연정훈의 ‘결혼은 안 한다’라는 말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연정훈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자기 말을 이미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안시연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네 고백은 잘 들었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이승우도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안시연 씨가 네 말을 이해한다면 안시연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거야.”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
안시연은 연정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이 동의한 것 같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벚꽃동의 구조를 좋아한다면 강남시티에 가서 따로 공간을 내서 벚꽃동의 구조를 그대로 만들어 놓을게.”하지만 안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왜 그러는데?”“정훈 씨, 알고 계시지 않나요? 계약을 수정하려면 양쪽의 동의가 꼭 필요해요.”안시연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연정훈이 답했다.“...알아.”안시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연정훈은 갑자기 목이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정훈은 눈앞의 화면을 보며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너는 원하지 않는 거야?”“이미 정훈 씨에게 많은 폐를 끼쳤으니,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그 말은 분명 화가 나 있는 듯한 어조였다. 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채,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안시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내년 이맘때쯤이면, 저는 이미 집도 있고 차도 있으며 여유도 생길 거예요. 정훈 씨와의 인맥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경인을 떠날 계획이에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적당한 시기가 오면 결혼할 사람을 찾을 거예요.”연정훈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결혼은 꼭 해야 해?”안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해요. 결혼하지 않으면 제 아이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정말 싫어요.”그 말에 연정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연정훈은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시연의 말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앞으로...”“앞으로 정훈 씨도 결혼하실 거예요.”안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끊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아마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하시겠죠. 그때쯤이면 아이도 낳고 행복
연정훈은 체면을 중시하여 안시연에게 애걸복걸할 수는 없었다.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이상,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할 주제가 없었다.연정훈은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안시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이런 답답함은 연정훈이 태어날 때부터 경험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이불에서 끌어내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안시연은 방금 납치 사건을 겪었고 심리적으로 상처받아 사람에게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맞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이렇게 자신을 다독인 후, 연정훈은 더욱 불안해졌다.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침대 위에 있던 안시연은 약간 놀랐다.연정훈은 핸드폰을 힐끔 보더니 할아버지 측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찡그린 얼굴로 전화가 온 시간이 적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품었다.최근 안시연은 잠이 얕았고 특히 놀람에 민감해졌다.연정훈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문이 닫히자, 안시연은 눈을 떴다.안시연은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며 연정훈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에게 다짐했지만, 또다시 시계를 쳐다보며 그가 나간 시간을 세고 있었다.연정훈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도련님.”연정훈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집 밖에서는‘연 대표님’이라고 불리지만, 할아버지 측의 사람은 예전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을 ‘신 아저씨’라고 불렀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전화를 주셨나요?”상대방은 공손한 태도로 몇 마디 격식을 차리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강훈 씨가 회장님을 뵈러 몇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무릎을 꿇을 지경입니다.”연정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께서는 어떤 태도였나요?”“회장님께서는 당연히 도련님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련님, 이번에는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 연강훈 씨뿐만 아니라 L K 은행
안시연은 납치 사건으로 인해 며칠간 결근했다.함풍의 주식 양도 절차는 전면 중단되었고 심사팀은 이미 경인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차라리 긴 휴가를 내고 양주에서 쉬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을 경인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정훈 씨, 바쁘면 먼저 혼자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양주에 남을게요.”연정훈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연정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양혁수도 곧 경인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을 거야.”안시연은 잠시 망설였다. “전화 한 통만 할게요.”안시연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은 무표정하게 기다렸다.조금 후, 안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혁수 씨도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하네요. 그러면 저도 정훈 씨와 같이 갈게요.”연정훈은 순간 혼란스러웠다.어릴 적부터 배워온 품격이 자꾸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연정훈은 욕설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로 갈까요? 아니면 열차를 탈까요?”안시연이 물었다.“저는 두 마리 양도 데리고 가야 해요.”연정훈은 짧게 대답했다. “...차.”안시연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어 두 마리 양을 데려올 시간을 정했다.그리고 바쁘게 짐을 챙겼다.안시연은 양혁수와 양에게만 신경을 쓰고 연정훈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연정훈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안경을 벗었다.쿵!큰 소리가 났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비가 차 멀미하는 것 같아. 약을 좀 사야겠어.”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이 소란을 피운 덕분에 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양혁수가 안시연과 함께 가겠다는 양지원의 마음을 달래 동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연정훈은 정말로 다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경인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넓은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안시연은 맞은편에서 영준을 안고 있었고 연정훈은
안시연은 결국 안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최근 안시연은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고 연정훈도 안시연을 무리하게 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이불을 덮고 단순히 대화만 나누는 것도 연정훈에게는 충분했다.물론, 안시연이 연정훈과만 대화할 때 한해서였다.“내일 점심은 저에게 가져다줄 건가요?”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서 책을 들고 있었지만, 이마를 찌푸린 채였다.안시연은 연정훈 옆에서 대놓고 양혁수와 통화 중이었고 벌써 20분이 넘게 흘렀다.양혁수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그 세 번의 은혜 덕분에 안시연은 양혁수를 향한 관용이 전보다 커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 예의 있게 물었다.“혁수 씨가 전화했는데, 받아도 괜찮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안시연이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그녀를 더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시간이 늦었으니 너무 오래 통화하지 마.”“네.”안시연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지 않았다.“혁수 씨는 집에 계시잖아요. 저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네가 오면 내가 뒷문으로 사람을 보내 데리러 갈게.”연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시선을 피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마. 안시연이 잡히면, 네가 안시연을 보호할 수 없을 거야.”양혁수는 웃으며 말했다.“아, 형도 계셨군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을 감지하고 살짝 옆으로 몸을 옮겼다.양혁수는 더 도발적인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저는 목숨 부지하는 처지라, 저희 어머니는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셔요. 안시연이 날 보러 오는 건 물론이고 제가 안시연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고려해 보실 겁니다.”연정훈과 안시연은 둘 다 잠시 말을 잃었다.둘은 동시에 양혁수가 병실 밖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