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출발 전과 출발 후, 그리고 방금까지 모두 3건의 메시지를 보냈으니 나무랄 데가 없었다.오히려 연정훈이 한 개도 답장하지 않았다.주요 원인은, 그의 개인 휴대폰도 거의 업무와 연관돼 있어 오늘 일찌감치 벚꽃동으로 돌아간 후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벚꽃동에서 안시연을 만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휴대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연정훈은 감정이 풍부한 부승희의 낭독을 들으면서 불쾌함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고, 안시연이 그의 답장을 받지 못해 또 잡생각을 할까 봐 걱정됐다.“오빠, 안시연이 오빠를 너무 사랑하네요.”부승희가 결론을 내렸다.연정훈은 말을 잇지 않고 침착하게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이것 봐!”부승희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매력 있는 남자는 당당하고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어.”“...”이승우는 간식을 가져다 먹으면서 카드를 던졌다.“상황을 보니 네가 아직도 안시연을 쌀쌀맞게 대하는 것 같네?”부승희가 말했다.“우리 오빠 조건이면 도도한 것도 정상이지.”한우빈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안시연이 없는데, 오늘 밤 어디서 잘 거야?”연정훈이 곁눈질도 하지 않고 말했다.“안시연이 없으면 내가 잘 곳도 없겠어?”“잘 곳이 있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잖아.”이승우가 느릿느릿 말했다.“나는 너와 달라. 재워줄 필요 없어.”연정훈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그가 이긴 것을 보고 이승우는 밑장빼기를 했나 해서 한참 확인했다.결과, 정말 연정훈이 이긴 것이었다.“성공한 남자는 사랑과 도박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군.”부승희가 계속해서 알랑거렸다.이승우는 하찮게 여기며 일어나더니 부승희더러 대신 놀라고 했다.머리 회전이 빠른 부승희가 연정훈에게 말했다.“오빠, 이번에 내가 이기면 나랑 같이 양주에 갔다 와야 해.”연정훈은 안시연이 생각나서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입이 싼 이승우가 옆에 있어서 그는 얼굴에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양주.안시연 쪽의 식사 자리는 일찍 끝나지 않았다. 연명걸이 직접 참석해 테이블마다 술을 권했다.연명걸은 상상속의 부잣집 도련님과 달리 점잖았고, 누구 앞에서나 웃는 얼굴이었다.“돈을 잘 벌 것 같은 얼굴인데, 왜 회사가 적자일까요?”장가희의 말에 안시연은 피식 웃었다.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연명걸이 왔다 간 후 모두가 긴장을 풀고 열심히 먹었다.안시연은 중도에 화장실에 갔다.문을 나설 때, 익숙한 모습이 언뜻 보였는데 임유정이었다.두 사람은 천창을 사이에 두고 복도에 마주 섰다.임유정은 그녀를 보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졌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안시연은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갔다.그녀가 가버리자, 임유정은 돌아서서 룸으로 들어갔다.담배 연기가 자욱한 룸에서 남자 몇 명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연명걸이 상석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여자가 냉랭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네.”꽤 예쁘게 생긴 그녀는 화를 내면 도도한 매력이 있었다.연명걸은 그녀의 집안과 예쁜 외모가 마음에 들어 그녀를 추어올리며 참을성 있게 이유를 물었다.옆에서 줄곧 임유정에게 호의를 보였던 이철수도 친절하게 물었다.임유정은 한숨을 쉬며 연명걸을 바라보았다.“정인에서 보낸 감사팀에 안시연이라는 사람이 있죠?”연명걸이 기억을 더듬는 것을 보고, 임유정이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제일 예쁘고, 여우 같은 눈이 특히 매혹적인 여자요.”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연명걸뿐만 아니라 이철수도 즉시 기억해 냈다.“423호실, 흰 치마 입은 여자 말이야?”임유정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역시 그 여우 같은 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남자는 없다.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연명걸이 무심하게 물었다.“둘 사이에 껄끄러운 일이 있었어?”“껄끄러운 일까지는 아니에요.”임유정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핵심을 콕 집어 말했다.“다만 그
고속도로 입구.연정훈이 뒷좌석에서 쉬고 있고 부승희가 단톡방에서 이승우와 채팅했다.그녀는 이승우를 나무랐다.[하마터면 너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했어.][나쁜 계집애, 너는 양심도 없어? 너만 아니었으면, 오늘 그 자식을 끝까지 감시했을 거야. 답답해 죽게. 그것도 몰라?]부승희는 얼굴이 빨개졌다.“누가 그러래?”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연정훈이 조용히 눈을 떴다.진수빈이 때맞춰 입을 열었다.“대표님, 양주에 도착했어요.”“응.”연정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진수빈이 호텔 위치를 미리 알아봤기에 직접 그쪽으로 향했다.“안시연이 오빠를 보면 무척 좋아할 거야.”부승희의 말에 연정훈은 차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왠지 기대됐다.안시연의 얼굴에서 기쁜 표정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이 시간에 그녀는 자지 않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양주의 장마 날씨도 그리 불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호텔.안시연이 소파에 앉아 알파카 한 마리를 안고 있고, 그녀의 앞에 또 한 마리가 서 있었다.맞은편 침대에는 양혁수가 누워 있다.그녀는 몇 번째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알파카를 데리고 오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요?”“방이 이렇게 큰데, 우리를 숨겨줄 수 없어요?”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다른 직원과 방을 같이 써요.”“제가 사비로 그분 방을 따로 잡아줄게요.”“차라리 제가 돈을 낼 테니 당신이 알파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요.”양혁수는 미소를 지었다.“안 가요.”“...”그녀는 이제 겨우 마음 편히 살게 됐는데,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이 싫다.“혁수 씨, 제발 좀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 저는 당신과 이러고 놀 수 없어요. 감당이 안 된다고요.”양혁수는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지난번에 약속을 어겨서 화났어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진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양혁수가 피식 웃었다.“처음부터 저를 무시했어요?”“아니요, 제가 자신을 정확히 아는 거죠.”“당신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장가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연 안시연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찰이었다.여러 명 가운데 맨 앞에 선 경찰이 그녀에게 경찰증을 보여주었다.“경찰입니다. 일상적인 검사이니 협조해 주십시오.”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은... 성매매를 잡는 것이다.그녀는 방 안의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섰다.하지만 경찰은 이미 안으로 들어왔다.연정훈과 양혁수가 거만하게 서 있고, 소파에는 알파카 두 마리가 있었다.중요한 것은, 양혁수가 목욕 가운을 입고 있고 그와 연정훈은 모두 방을 예약한 사람이 아니다.안시연이 설명하려는데, 경찰이 또 서브룸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남자를 찾아냈다.이에 양혁수도 놀랐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서브룸에 사람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안시연 씨, 이 방은 당신과 장가희 씨가 예약한 거 맞죠?”경찰의 질문에 안시연은 혼란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이 세 남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안시연은 말을 못 했다.그녀의 첫 반응은 연정훈의 신분이 특수해서 큰일 날 수 있으니 절대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양혁수의 옷차림을 보고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힘들다.그녀는 엉겁결에 연정훈 앞에 서며 말했다.“이분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경찰은 어리둥절해했다.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좋아. 차별 대우를 하겠다, 이거지?’화가 잔뜩 났던 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고 화가 거의 다 가라앉았다.‘그래도 누구와 가까운 사이이고 누구와 먼 사이인지는 아는군.’하지만 안시연은 곧바로 양혁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은 제 남자친구인데, 저를 보러 왔고요.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양혁수는 눈이 번쩍 뜨였고,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안시연이 왜 그러는지 안다. 평소라면 이성적으로 잘 대처했다고 그녀를 칭찬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전혀 기쁘지 않다.그는 낯선 사람이고 양혁수가 남자친구라고 말하다니.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경찰서에서 안시연의 왼쪽에는 연정훈이, 오른쪽에는 양혁수가 나란히 앉아 골치 아픈 조사서를 쓰고 있었다.양혁수는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저와 제 여자 친구가 대화 중이었는데 이 낯선 남성분이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자마자 강제로 집 안으로 들어와 깜짝 놀랐다고요!”“...”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연정훈과 안시연은 내내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온 걸 지켜봤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말은 뻔한 거짓말이었다.“저기요. 경찰서에서 진실만을 말하세요!”양혁수는 진지한 얼굴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안시연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옆에 앉은 연정훈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경찰이 연정훈에게 질문하려고 하자 진수빈이 모두 막아섰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려?’‘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어리둥절해 보이는 경찰에 안시연이 손을 들고 먼저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저기 만취한 남성과는 어떤 사이입니까?”“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어떻게 안시연 씨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저는 잘 모릅니다.”“어떻게 저 사람을 발견했습니까?”“제가 발견한 게 아니라 경찰이 먼저 발견하지 않았나요?”“...”양혁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지한 얼굴의 안시연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듣고 있던 연정훈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몰라요.”“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하면서 왜 손을 든 거야?”말문이 막혀버린 안시연은 몰래 입을 삐죽였다.이동하는 내내 자신의 옆을 지켜준 고마운 마음에 대신 조사를 받겠다고 한 건데 연정훈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줬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조사가 잠시 중단되고 안색이 어두운 경찰을 보며 안시연은 상황 설명을 다시 이어가려고 했다.그때,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안시연이 당황해했다.“네.”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른 한 손이 덥석 안시연을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양혁수가
연정훈의 말 한마디에 양혁수는 가운 차림으로 경찰서에 덩그러니 남겨졌다.양혁수를 남겨두고 떠나려니 안시연은 조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그래서 연정훈에게 말했다.“알파카를 데리고 날 찾아온 것뿐이에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연정훈은 양혁수가 미웠으므로 알파카도 귀찮게 느껴졌다.“그 두 마리 알파카 모두 양혁수에게 넘기고 다시 신경 쓰지 마.”“그런데 양혁수가 경찰서에 있으면 나비와 영준이는 어떡해요?”나비.영준.연정훈은 그 이름에 인상을 절로 찌푸렸다,그래서 안시연의 손을 놓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안시연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빼 들고 운전기사가 두 사람을 원래 지내던 호텔로 데려다주길 기대했다.진수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시연 씨, 오해는 풀렸지만 직장 동료들은 아직 진상을 모르지 않나요?”안시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방금 복도에서 둘러싼 사람들은 대부분 심사팀 직원들이었다.안시연이 떠나고 유언비어는 아마 회사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역시나 대화방은 메시지 상태가 99+가 되어 있었다.장가희가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왔다.“시연 씨 대체 무슨 상황이야? 우리 방에 남자 세 명이 나타났다면서? 게다가 경찰이랑 같이 나갔다는 건 또 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무기력함을 느꼈다.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며 대체 어디부터 말을 꺼내면 좋을지도 몰랐다.그때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원래 묵던 호텔로 알파카 두 마리 보살피러 가려고?”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쥔 채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사람을 시켜 알파카를 보살펴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어린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이 새벽에 누가 갈 수 있겠어? 네 알파카는 소중하고 내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은 거야?”안시연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큰 방.연정훈은 안시연이 알파카가 지낼 공간만 잘 정리하면 바로 돌아올 줄 알았다.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안시연은 돌아오지 않았다.인상을 찌푸린 연정훈이 거실로 나갔으나 안시연은 보이지 않았다.“안시연?”이름도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다만 방안에서 알파카의 발굽 소리가 탁탁탁 들려왔다.연정훈은 불길한 마음에 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문을 열자 바로 양나비와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양나비는 그 자리에서 두 바퀴 턴을 돌았다.탁탁탁.연정훈은 입을 삐죽 내밀고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방안을 둘러봤다.“안시연?”재차 이름을 불렀으나 묵묵부답이었다.무언가 눈치챈 연정훈은 바로 작은 방문을 닫아버렸다.작은 방안에서는 여전히 탁탁탁 알파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양나비는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쳤다.“...”거실로 나온 그는 드레스 룸 맞은 편에서 또 다른 작은 방을 발견했다.문을 열자 방에는 전등이 켜지 있지 않아 컴컴했다. 그러나 바닥에 비친 노란색 불빛은 욕실 쪽에서 들어온 것이었다.안시연은 샤워 중이었다.연정훈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안시연이 작은 방 두 개가 있다는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렇다면 안시연은 설마 지금도 냉전 상태라고 생각하는 걸까?오늘 밤도 예전처럼 같은 이불을 덮고 잘 수가 없는 걸까?이러한 생각에 연정훈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결국 연정훈은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그녀가 싫다고 하면 연정훈은 강제로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욕실안의 안시연은 생리 날짜가 다가온 건지 아랫배가 자꾸 아파와 평소보다 좀 더 길게 욕조에 머물렀다.욕조의 물은 세 번이나 바꿨으며 밖으로 나왔을 때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어젯밤 일을 다시 곱씹으며 욕실 밖으로 나올 때도 안시연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그런데 화장대에 앉은 그녀는 거울로 침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자세히 살펴보니... 연정훈이었다.연정훈은 손에 책을 쥔 채로 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안시연이 갑자기 멈춰 섰고 연정훈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파카의 발소리는 마치 거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걱정된 안시연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연정훈을 밀어냈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너무 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연정훈의 손을 밟을 뻔했다.연정훈은 아랫니를 꽉 깨물며 겨우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안시연은 빠르게 두 알파카를 다시 작은 방에 가뒀다.안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 옆에 서서 말했다.“문을 잠그려면 키가 필요해요. 나비는 똑똑해서 스스로 문을 열 수 있는데 제가 키를 찾지 못해서...”연정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알파카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듣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서 안시연은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숨을 참다가 그녀를 순식간에 자신의 아래로 깔아버렸다.안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급하게 작은 방을 다녀왔던 터라 분위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연정훈은 굳어버린 그녀의 몸이 느껴졌고 천천히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그렇게 안시연도 달뜬 숨을 내쉬고 연정훈이 거친 숨을 내쉬게 되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한쪽 손을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꽉 쥐었다.이제 다시 시작해보려는데...탁탁탁!발소리가 또 들려왔다!“...”안시연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나비가 또 방 밖으로 나온 걸까?안시연은 예전부터 연정훈만큼 집중하지 못했으며 연정훈의 리드에 겨우 따라가는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몸도 따라서 굳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걸 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목에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힘 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최대한으로 힘을 풀었다.하지만 곧 생리라 그런지 아랫배도 계속 아파오고 오늘 밤은 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방밖에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안시연은 또 방 밖으로 나가본다면 연정훈이 기분 나빠할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일을 마치고 나가보면 그만이었다.그래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