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틀림없이 장가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연 안시연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찰이었다.여러 명 가운데 맨 앞에 선 경찰이 그녀에게 경찰증을 보여주었다.“경찰입니다. 일상적인 검사이니 협조해 주십시오.”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것은... 성매매를 잡는 것이다.그녀는 방 안의 상황을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섰다.하지만 경찰은 이미 안으로 들어왔다.연정훈과 양혁수가 거만하게 서 있고, 소파에는 알파카 두 마리가 있었다.중요한 것은, 양혁수가 목욕 가운을 입고 있고 그와 연정훈은 모두 방을 예약한 사람이 아니다.안시연이 설명하려는데, 경찰이 또 서브룸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남자를 찾아냈다.이에 양혁수도 놀랐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서브룸에 사람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안시연 씨, 이 방은 당신과 장가희 씨가 예약한 거 맞죠?”경찰의 질문에 안시연은 혼란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이 세 남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안시연은 말을 못 했다.그녀의 첫 반응은 연정훈의 신분이 특수해서 큰일 날 수 있으니 절대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양혁수의 옷차림을 보고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기도 힘들다.그녀는 엉겁결에 연정훈 앞에 서며 말했다.“이분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경찰은 어리둥절해했다.양혁수는 헛웃음을 지었다.‘좋아. 차별 대우를 하겠다, 이거지?’화가 잔뜩 났던 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고 화가 거의 다 가라앉았다.‘그래도 누구와 가까운 사이이고 누구와 먼 사이인지는 아는군.’하지만 안시연은 곧바로 양혁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은 제 남자친구인데, 저를 보러 왔고요.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양혁수는 눈이 번쩍 뜨였고, 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안시연이 왜 그러는지 안다. 평소라면 이성적으로 잘 대처했다고 그녀를 칭찬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전혀 기쁘지 않다.그는 낯선 사람이고 양혁수가 남자친구라고 말하다니.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경찰서에서 안시연의 왼쪽에는 연정훈이, 오른쪽에는 양혁수가 나란히 앉아 골치 아픈 조사서를 쓰고 있었다.양혁수는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저와 제 여자 친구가 대화 중이었는데 이 낯선 남성분이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자마자 강제로 집 안으로 들어와 깜짝 놀랐다고요!”“...”경찰이 바보도 아니고 연정훈과 안시연은 내내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온 걸 지켜봤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말은 뻔한 거짓말이었다.“저기요. 경찰서에서 진실만을 말하세요!”양혁수는 진지한 얼굴로 방금 했던 말을 다시 뱉었다.“...”안시연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옆에 앉은 연정훈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경찰이 연정훈에게 질문하려고 하자 진수빈이 모두 막아섰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기다려?’‘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어리둥절해 보이는 경찰에 안시연이 손을 들고 먼저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저기 만취한 남성과는 어떤 사이입니까?”“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어떻게 안시연 씨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저는 잘 모릅니다.”“어떻게 저 사람을 발견했습니까?”“제가 발견한 게 아니라 경찰이 먼저 발견하지 않았나요?”“...”양혁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지한 얼굴의 안시연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듣고 있던 연정훈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몰라요.”“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하면서 왜 손을 든 거야?”말문이 막혀버린 안시연은 몰래 입을 삐죽였다.이동하는 내내 자신의 옆을 지켜준 고마운 마음에 대신 조사를 받겠다고 한 건데 연정훈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줬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조사가 잠시 중단되고 안색이 어두운 경찰을 보며 안시연은 상황 설명을 다시 이어가려고 했다.그때,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안시연이 당황해했다.“네.”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다른 한 손이 덥석 안시연을 잡았다.???고개를 돌리자 양혁수가
연정훈의 말 한마디에 양혁수는 가운 차림으로 경찰서에 덩그러니 남겨졌다.양혁수를 남겨두고 떠나려니 안시연은 조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그래서 연정훈에게 말했다.“알파카를 데리고 날 찾아온 것뿐이에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연정훈은 양혁수가 미웠으므로 알파카도 귀찮게 느껴졌다.“그 두 마리 알파카 모두 양혁수에게 넘기고 다시 신경 쓰지 마.”“그런데 양혁수가 경찰서에 있으면 나비와 영준이는 어떡해요?”나비.영준.연정훈은 그 이름에 인상을 절로 찌푸렸다,그래서 안시연의 손을 놓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안시연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빼 들고 운전기사가 두 사람을 원래 지내던 호텔로 데려다주길 기대했다.진수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시연 씨, 오해는 풀렸지만 직장 동료들은 아직 진상을 모르지 않나요?”안시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방금 복도에서 둘러싼 사람들은 대부분 심사팀 직원들이었다.안시연이 떠나고 유언비어는 아마 회사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역시나 대화방은 메시지 상태가 99+가 되어 있었다.장가희가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왔다.“시연 씨 대체 무슨 상황이야? 우리 방에 남자 세 명이 나타났다면서? 게다가 경찰이랑 같이 나갔다는 건 또 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무기력함을 느꼈다.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며 대체 어디부터 말을 꺼내면 좋을지도 몰랐다.그때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원래 묵던 호텔로 알파카 두 마리 보살피러 가려고?”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쥔 채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사람을 시켜 알파카를 보살펴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어린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이 새벽에 누가 갈 수 있겠어? 네 알파카는 소중하고 내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은 거야?”안시연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큰 방.연정훈은 안시연이 알파카가 지낼 공간만 잘 정리하면 바로 돌아올 줄 알았다.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안시연은 돌아오지 않았다.인상을 찌푸린 연정훈이 거실로 나갔으나 안시연은 보이지 않았다.“안시연?”이름도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다만 방안에서 알파카의 발굽 소리가 탁탁탁 들려왔다.연정훈은 불길한 마음에 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문을 열자 바로 양나비와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양나비는 그 자리에서 두 바퀴 턴을 돌았다.탁탁탁.연정훈은 입을 삐죽 내밀고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은 채로 방안을 둘러봤다.“안시연?”재차 이름을 불렀으나 묵묵부답이었다.무언가 눈치챈 연정훈은 바로 작은 방문을 닫아버렸다.작은 방안에서는 여전히 탁탁탁 알파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양나비는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쳤다.“...”거실로 나온 그는 드레스 룸 맞은 편에서 또 다른 작은 방을 발견했다.문을 열자 방에는 전등이 켜지 있지 않아 컴컴했다. 그러나 바닥에 비친 노란색 불빛은 욕실 쪽에서 들어온 것이었다.안시연은 샤워 중이었다.연정훈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안시연이 작은 방 두 개가 있다는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렇다면 안시연은 설마 지금도 냉전 상태라고 생각하는 걸까?오늘 밤도 예전처럼 같은 이불을 덮고 잘 수가 없는 걸까?이러한 생각에 연정훈은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결국 연정훈은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그녀가 싫다고 하면 연정훈은 강제로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욕실안의 안시연은 생리 날짜가 다가온 건지 아랫배가 자꾸 아파와 평소보다 좀 더 길게 욕조에 머물렀다.욕조의 물은 세 번이나 바꿨으며 밖으로 나왔을 때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어젯밤 일을 다시 곱씹으며 욕실 밖으로 나올 때도 안시연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그런데 화장대에 앉은 그녀는 거울로 침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버렸다.자세히 살펴보니... 연정훈이었다.연정훈은 손에 책을 쥔 채로 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안시연이 갑자기 멈춰 섰고 연정훈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파카의 발소리는 마치 거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걱정된 안시연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연정훈을 밀어냈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너무 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연정훈의 손을 밟을 뻔했다.연정훈은 아랫니를 꽉 깨물며 겨우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안시연은 빠르게 두 알파카를 다시 작은 방에 가뒀다.안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 옆에 서서 말했다.“문을 잠그려면 키가 필요해요. 나비는 똑똑해서 스스로 문을 열 수 있는데 제가 키를 찾지 못해서...”연정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알파카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듣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서 안시연은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숨을 참다가 그녀를 순식간에 자신의 아래로 깔아버렸다.안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급하게 작은 방을 다녀왔던 터라 분위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연정훈은 굳어버린 그녀의 몸이 느껴졌고 천천히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그렇게 안시연도 달뜬 숨을 내쉬고 연정훈이 거친 숨을 내쉬게 되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한쪽 손을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꽉 쥐었다.이제 다시 시작해보려는데...탁탁탁!발소리가 또 들려왔다!“...”안시연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나비가 또 방 밖으로 나온 걸까?안시연은 예전부터 연정훈만큼 집중하지 못했으며 연정훈의 리드에 겨우 따라가는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몸도 따라서 굳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걸 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목에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힘 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최대한으로 힘을 풀었다.하지만 곧 생리라 그런지 아랫배도 계속 아파오고 오늘 밤은 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방밖에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안시연은 또 방 밖으로 나가본다면 연정훈이 기분 나빠할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일을 마치고 나가보면 그만이었다.그래
새벽.안시연은 두 알파카를 재차 작은 방에 가두고 다른 도구로 문손잡이를 고정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안방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정훈은 가운을 입은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가운이 흩어져 있는 걸 보아 분노를 참고 세수를 하느라 가운이 풀어 헤쳐진 거라 생각되었다.안시연은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펴보니 인상이 최대로 찌푸려져 있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 생각만 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대체 양나비는 어떻게 침착하고 정확하게 연정훈의 얼굴을 묘준할 수 있었던 걸까?그 생각에 안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을 돌렸다.안시연이 빠르게 웃음을 참았으나 한번 터진 웃음을 끊을 수는 없었고 억지로 입을 틀어막았다.연정훈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양혁수의 성을 이어받은 알파카였다. 그런데 그 알파카가 오늘 밤 잠자리를 방해하고 얼굴에 침까지 뱉어버렸다.게다가 안시연은 이 상황을 아주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안시연은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등 뒤가 바로 문이었음에도 안시연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앞으로 다가갔고 안시연은 기회를 보아 옆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긴 팔로 순식간에 그녀를 낚아챘다.안시연은 바로 그의 품에 안겨버렸고 두 다리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으며 등 뒤로는 문이 닿았다.안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연정훈이 침을 꿀꺽 넘기며 물었다.“지금 이 상황이 웃겨?”“...”깜짝 놀라버려 다시 웃음이 터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연정훈의 물음은 다시 안시연의 웃음 버튼을 눌러버렸다.풉.???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고 있었으나 덕분에 어깨가 자꾸 들썩였다.“죄, 죄송해요. 참지 못하고 그만!”“...”“나비가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요..
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입을 다물었다.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아니요.”연정훈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며 왠지 마음이 아파졌다.연정훈이 아무 말 없자 안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예전처럼 도와줄 수는 있어요...”대충 말해도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예전의 연정훈이었다면 스스럼없이 부탁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가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강제로 가지거나 그녀가 배려하는 건 싫었다.그래서 연정훈은 안시연을 내려주었다.“자자.”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벌써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챘다.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한 안시연이 조용히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불 끌게요.”안시연이 말했다.“응.”방안은 다시 어두워졌다.이번에는 알파카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눈을 감았지만 잠에 들 수가 없었다.안시연은 바로 자신의 옆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과 체향이 그를 둘러쌌다.연정훈은 몸이 들끓는 게 느껴졌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이러한 마음은 침대 위의 안시연이 아닌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단지 미소일 뿐이었으나 연정훈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그는 온밤 생각에 뒤척였고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옆자리가 텅 빈 걸 발견했다.연정훈은 옆방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연정훈이 양주를 찾은 소식이 전해진 건지 앞다투어 그와 약속을 잡았다.안시연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알파카의 사료를 챙겨주고 연정훈을 따라 방을 나섰다.“아침 먹으러 가요?”그녀의 물음에 연정훈이 답했다.“옷 갈아입어. 부승희가 아침밥 사준 대.”안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부승희 씨도 양주에 온 거에요?”“응.”안시
부승희는 우유 한 컵을 들이마시며 말했다.“그래요! 당연히 그래야죠!”안시연은 미소로 부승희의 말에 대답했다.연정훈은 덤덤하게 말했다.“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어. 적응하는데 어려우면 다시 경인으로 돌아오면 돼. 그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안시연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연정훈의 앞에서는 특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한마디 했다.“견뎌낼 수 있어요.”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는 그녀의 모습에 두 마리의 알파카가 떠올랐다.양혁수를 고사하고 안시연은 알파카 두 마리와 참 닮았다.이승우는 두 사람 사이 작은 갈등을 눈치채고 빠르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는 한편으로 연정훈이 말을 참 직설적으로 한다며 나무랐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연정훈의 편을 들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양주까지 온건 안시연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며? 또 다른 이유는 없어?”안시연이 자리에 굳었다.‘보... 보고 싶었다고?’연정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승우를 차갑게 노려봤다.이승우는 연정훈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부승희는 바로 구역질했다.연정훈은 이승우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중요할 볼일이 있었어.”“예를 든다면?”연정훈이 고민하다가 답했다.“주씨 가문과 노인 복지 시설의 전국화에 대해 얘기해 봐야 해.”꽤 자세하게 늘여놓은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안시연은 다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그럼 그렇지.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하지만 이승우는 속으로 연정훈이 구제 불능이라며 욕하고 있었다.“주운성네 가문을 말하는 거야?”“응.”이승우는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정인 그룹이 큰돈을 들여 전국에 노인 복지 시설을 놓으려는 거면 주씨 가문이 잘 어울리긴 하지.”“왜?”부승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최근 몇 년 동안 부승희도 개인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연차가 짧아 이승우 무리와는 비길 수가 없었다.이승우가 설명했다.“주씨 가문에는 사람이 많아. 전국 각지의 의료 시스템에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