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오만한 연지유를 바라보았다.화려한 그녀는 보잘것없는 서유를 들판의 잡초처럼 만들었다.서유는 단 한 번도 억울한 적이 없었지만 이 순간 갑자기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승리자의 발밑에 깔린 것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배경도 권력도 없는 그저 무능하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협박당하고 짓밟힘과 괴롭힘을 당했다.그녀는 운명에 맞서 싸우는 걸 포기하고 힘없이 물었다.“제가 뭘 어떻게 해야 사직서를 처리해 주실 거죠?”그 당시 4천만 원을 빌렸으니 6배인 2억 4천만 원의 위약금을 내야 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큰돈이 없었기에 그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연지유는 이제야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서유를 보고 더 오만해진 태도로 말했다.“간단해요. 김 대표님을 잘 케어하는 거예요. 김 대표님이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면 서유 씨 사직서 처리해 줄게요.”사직서를 처리해 주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김시후를 케어하라니?서유는 이런 지시가 너무 내키지 않았다.“김 대표님은 제가 케어해 주는 걸 원하시지 않을 겁니다.”연지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 사진을 여러 번 봤는데 김 대표님이 서유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꽤 재밌더라고요.”서유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자 연지유가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서유 씨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연지유는 이미 서유와 김시후를 긴밀한 사이라고 단정지은 것 같았다. 서유의 마지막 이용 가치까지 짜내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이것이 자본가의 진정한 면모였다.서유는 더 이상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차갑게 한마디 뱉어냈다.“그때 가서 꼭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연지유는 팔짱을 끼며 서유에게 안심하라는 눈짓을 했다.“난 항상 약속을 지켜요.”번지르르한 말뿐이었다.서유는 연지유와 더 따지고 싶지 않아 다시 몸을 돌려 나갔다.사무실에 돌아온 서유
최민지는 염산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겁에 질려 흠칫했다. 받아치려던 말조차 그 순간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서유는 시선을 돌려 옆에서 몸을 움츠리고 감히 한마디도 못 하는 임유라를 바라보았다.“나이 많은 남자와 잔 건 당신이잖아. 근데 왜 날 비난하는 거야?”임유라는 서유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비밀을 얘기할 줄은 몰라 화를 냈다.“무슨 뜻이에요?”서유는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최민지가 당신의 능력에 대해 이미 모든 사람에게 말했어요.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죠?”임유라는 고개를 돌려 최민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그런 소리를 해?”최민지는 평소에 참기만 하던 서유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임유라의 일을 말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화가 나서 서유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서유에게 손목을 잡혔다.서유는 최민지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날렸다.“당신이 이 뺨을 때리는 순간 난 당신의 모든 재산을 잃게 만들 거야.”최민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그깟 뺨 때리면 뭐! 네가 어떻게 내 재산을 다 잃게 만들 건데?”서유는 최민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비웃었다.“당신이 그랬잖아. 나 스폰서 많다고. 그중에 아무나 데려와도 당신 정도는 짓밟아 버릴 수 있어.”서유는 말을 마친 후 그녀의 표정이 어떻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밀어내며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최민지는 서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서유, 이 미친년아.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유는 못 들은 척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녀는 예전에 겪었던 굴욕들을 오늘 모두 쏟아냈다.어떤 기분인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수도꼭지를 튼 뒤 세수하려고 하는데 원영이 들어왔다.그녀는 방금 동료들과 마실 밀크티를 사 들고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최민지가 서유를 욕하는 걸 보고 다급하게 회장실로 서유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서유 씨, 무슨 일이에요?”그녀는
서유는 깊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내 김시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이건 어제 그를 도와 호텔을 예약할 때 그의 비서에게서 받은 정보였다.연결음이 3번 정도 울린 뒤 김시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유 씨 무슨 일 있어요?”그녀는 멈칫했다. 김시후는 어떻게 그녀가 누군지 아는 것일까?“어제 내가 서유 씨 번호 저장했어요.”마치 그녀가 놀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김시후는 간단하게 설명했다.서유도 더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김 대표님, 연 대표님께서 그동안 제가 동아 그룹을 대표해서 김 대표님을 케어하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제게 시키실 일 있으신가요?”“날 케어한다고요?”김시후는 조금 놀라며 말했다.“네 그렇습니다.”서유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김시후도 이런 요구에 올랐겠지만 그녀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상대방은 잠시 침묵한 뒤 뭔가를 이해한 듯 입을 열었다.“마침 이번 서울 출장에 제 개인 비서가 없었는데 제 사무실에 와서 차나 커피를 내주는 업무라도 서유 씨한테 부탁드려도 될까요?”서유는 김시후가 거절할 줄 알았지만 그녀에게 개인 비서의 업무를 부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김시후는 그녀에게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의심도 하지 않는 걸까?그녀는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김시후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조금 있다가 회의가 있어요. 서유 씨 언제 오실 수 있어요?”서유는 주소를 물은 뒤 대답했다.“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상대방은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그가 전화를 끊자 사무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김태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김 대표님, 서유 씨는 분명 회사를 핑계로 대표님께 접근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개인 비서 업무를 맡기시는 거죠?”김시후도 어제 자기를 무시하던 서유가 갑자기 오늘은 먼저 자기를 케어해주겠다고 하는 것인지 조금 이상했다.그러나 김시후는 그 사진 때문에 연지유가 서유와 자기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서유에게 그를 케어하고
서유는 프런트에 물어본 뒤 대표실로 향했다.김시후가 마침 지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서유가 노크했다.“김 대표님.”김시후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나요?”전에는 동아 그룹의 파트너 회사에서 출장을 오면 스케줄을 짜 그들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면 되었다.하지만 김시후는 그녀에게 개인 비서 업무를 맡겼기에 먼저 그녀에게 시킬 일은 없는지 물어봐야 했다.김시후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을 내려놓은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준비할 건 없어요. 조금 있다 나 회의 갈 때 커피 좀 내려줄래요?”“알겠습니다.”서유는 말을 마친 뒤 사무실을 나갔다. 김시후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예전에 여러 번 본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기억나는 게 없어. 또 머리 아프네...’그는 고개를 흔들며 핸드폰을 들어 소준섭에게 문자를 보냈다.소준섭은 마침 학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문자가 온 것을 보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또 머리가 아프다고? 뭐 생각난 거 없어?」「없어. 근데 한 사람을 보고 있으면 익숙한 느낌이 들어. 그리고 머리도 엄청 아파.」「그 사람이 누군데?」김시후는 이 질문을 보고 갑자기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만약 소준섭이 그의 두통이 서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서유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김시후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대충 ‘모르는 사람’이라고 둘러댄 뒤 회의가 있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화진 그룹의 계열사는 서울시에서 규모가 부산시만큼 크지는 않지만 여전히 강동거리 대부분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다.김시후가 소집한 임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십 명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노트북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서유는 회의실 밖의 리셉션 공간에 앉아서 유리창을 통해 엘리트 임원들을 조금 부러운
김시후는 모든 사람의 표정을 무시하고 PPT를 설명하던 그 임원을 향해 턱을 치켜세웠다.“계속하세요.”그의 말에 임원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수입 상황을 보고할 때, 서유가 정보를 훔칠까 봐 숨기는 것이 있었다.서유도 상황을 살펴보고 더 이상 소리 내어 말을 끊을 수도 없었는지라 그저 얌전히 김시후의 옆에 앉아있었다.회의가 끝나자 서유는 그제야 쫓아 나가 김시후에게 물을 수 있었다.“왜 제가 방청하기를 원하십니까?”그러자 김시후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서유를 내려다보더니 따뜻하게 대답했다.“서유 씨가 매우 동경하는 것 같아서요.”서유는 금세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이유 때문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제가 화진 그룹 정보를 알고 동아 그룹에 보고할까 봐 두렵지 않아요?”“별로 중요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리고...”김시후는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나는 서유 씨의 사람 됨됨이를 믿어요.”그의 미소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깨끗하고 맑았으며 아주 환했다.서유는 마치 그가 자신의 인공 심장을 두 발로 부러뜨린 김시후가 아니라 여전히 송사월인 것 같았다.“서유 씨, 준비해요. 저랑 저녁에 연회에 가요.”서유는 잠시 어리둥절해지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연회요?”김시후은 고개를 끄덕였다.“온씨 가문에서 주최하는 저녁 만찬에 갈 건데, 제가 파트너가 없어서요. 서유 씨가 잠시 대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개인 비서가 파트너를 대신하는 역할도 하나?’온씨 가문은 특별히 혁혁한 가문이라고는 할 수 없고, 단지 재벌가라고 할 수 있다.그러니 이승하와 같은 신분의 후계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서유는 뒤늦게 생각하고는 곧 대답했다.어차피 입찰회가 끝나자마자 김시후는 부산으로 돌아갈 것이다.‘며칠밖에 시간이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금방 지나갈 거야. 그리고 화진 그룹 대표를 모시고 만찬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는 옷차림을 하고 가야지!’아니나 다를까 김시후는 곧장 그녀를 데리고
“대표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김시후은 서유를 보고 넋을 잃었는데, 김태진이 옆에서 가볍게 기침을 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그렇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가게에서 나올 때, 마침 친구와 쇼핑하고 있던 안희연에게 목격되었다.그녀는 화장을 바꾼 서유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서유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안희연은 그녀가 기질이 있고 비교적 예쁘다고 느꼈다.그러나 이번에 서유를 보니 그녀가 뜻밖에도 여느 재벌 집 여식들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생각되었다.곧이어 안희연은 고개를 돌려 VIP 카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브랜드 매장을 바라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번에 서유가 찾은 남자가 임태진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치장해주려면 적어도 20억은 들었을 텐데, 연석 오빠도 나한테 이 정도의 돈을 쓰지는 않았어!’이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똑같이 몸 팔러 나왔는데 왜 서유는 자신보다 좋은 사람을 가질 수 있냐면서 말이다.그녀는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들어 이연석에게 보내는 동영상을 녹화했다.“연석 오빠, 이것 좀 봐. 서유 씨가 또 새 사람 찾았어. 다만 이번에 찾은 사람은 정말 돈이 많은 것 같아. 눈 깜짝하지 않고 20억을 써준다니까?”그녀는 서울의 모든 부유한 사람들을 연구해 본 적이 있지만, 김시후를 연구해 본 적이 없어서 그를 알지 못했다.그저 이제 막 떠오른 새내기인 줄 알았다. 아무래도 많이 젊어 보이니 말이다.한편, 이연석은 다른 사람들과 골프를 치고 있었는데 라운드를 마치고 앉아서 핸드폰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그는 안희연이 보내온 영상을 보고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김시후가 서유 씨한테 이런 대접을 해준다고?!’뒤이어 그는 골프채를 집어 던지고 영상을 이승하에게 전송했다.“형, 서유 씨 좀 봐요. 분명히 믿는 구석이 생긴 것 같아요.”회의를 하고 있던 이승하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집중이 흐트러졌다.예전의
서유는 한눈에 온재빈의 생각을 알아차렸다.특별히 저녁 만찬 연회를 열고 김시후를 초청하여 참석하게 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의 여동생과 맺어주기 위함으로 추측되었다.하지만 온재빈은 그가 여자를 데리고 올 줄 몰랐었는지라 마음속으로 서유에 대한 의견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그래도 가정교육을 잘 받은 탓인지, 온재빈은 그녀의 체면을 잘 봐주었고 이렇게 되면 서유 역시 자연히 그에게 잘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악수를 건네는 온재빈의 손을 잡고 웃었다.“안녕하세요.”이내 온재빈은 손을 놓고는 시선을 김시후에게 돌렸다.“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마시고 옛이야기 나누러 가자.”그러나 김시후는 조금 마음이 편치 않아 서유에게 말했다.“저랑 함께 들어가요.”서유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온재빈을 힐끗 보고는 눈치 있게 거절했다.“배가 좀 고파서, 뭐 좀 먹으러 갈게요.”이윽고 김시후가 서유를 살피기도 전에 온재빈은 하인을 불러왔다.“이 아가씨 데리고 가서 음식 좀 대접하세요. 절대 홀대하지 마시고요.”그러자 하인은 서유에게 황급히 말했다.“자, 저를 따라오세요.”이렇게 한번 말해놓으면 사정을 다 알아도 친구를 거절하기 어려워 김시후는 서유에게 신신당부하였다.“함부로 어디 가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요.”서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의 인솔하에 회식장으로 왔다.한식, 양식 등 모든 음식이 줄지어 늘어선 긴 탁자 위에 놓여 있다.서유는 소화가 잘되지 않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하인의 접대에 이를 악물고 버섯 수프를 마셨다.그녀가 조용히 회식장 구역에 서서 수프를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정원 밖에서 고급 차 몇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뒤이어 소수빈은 먼저 차에서 내려서 코니섹의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존귀한 남자를 불러 내렸다.따스한 노란색 조명 아래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차 문 앞에 서 있는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신에 의해 조각된 듯한 정교하고 입체적이며 흠잡을 데 없
이연석은 그와 서유의 일을 직접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는데, 주로는 서유가 이승하가 “기르던” 여자였기 때문에 체면을 주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김시후를 가만둘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온희수의 일로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김시후은 이연석에게 곤욕을 치르면서도 화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 밑에는 한기가 돌았다.“혼인은 제 허락을 받지 않고 아버지가 마음대로 한 결정입니다. 저는 이연석 씨 여동생분한테 장가들 생각 없어요. 그러니 진실로 받아들이지 마세요.”말문이 막힌 이연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곱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 말은 파혼하겠다는 겁니까?”“약혼한 적이 없는 어떻게 파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습니까?”김시후는 담담하게 웃었다.확실히 그저 혼담이 오갔을 뿐이지, 실현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그리고 두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어떻게 직접 혼인을 할 수 있겠는가?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김시후가 이 말을 한 것은 이씨 가문의 체면을 봐주지 않은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이연석은 평소 노는 데에만 습관이 되어 김시후와 같이 뭐든 노련하게 대하는 성질 따위를 배우지 않았다.곧이어 이연석은 김시후에게 “따뜻한” 교훈을 주려고 소매를 걷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이승하가 그를 저지했다.“연석아.”상석에 앉은 남자는 담담했지만 천하를 손안에 둔 듯한 시큰둥한 모습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역시 이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랄까 봐, 그 카리스마가 너무 강했다.이승하는 아무런 감정 없는 말투로 김시후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애초에 김시후 씨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 와서 혼인을 청한 것이니 그 약속을 무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청하셨으면 아버님께 어떻게 무르라고 하세요.”“청했다.”라는 말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원래는 김씨 집안이 이씨 집안 덕을 보려고 한 거였구나. 김씨 집안도 우리라 마찬가지네, 자식들을 팔아 입지를 굳히려는 걸 보면 말이야.’모두들 김시후를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