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한눈에 온재빈의 생각을 알아차렸다.특별히 저녁 만찬 연회를 열고 김시후를 초청하여 참석하게 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의 여동생과 맺어주기 위함으로 추측되었다.하지만 온재빈은 그가 여자를 데리고 올 줄 몰랐었는지라 마음속으로 서유에 대한 의견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그래도 가정교육을 잘 받은 탓인지, 온재빈은 그녀의 체면을 잘 봐주었고 이렇게 되면 서유 역시 자연히 그에게 잘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악수를 건네는 온재빈의 손을 잡고 웃었다.“안녕하세요.”이내 온재빈은 손을 놓고는 시선을 김시후에게 돌렸다.“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마시고 옛이야기 나누러 가자.”그러나 김시후는 조금 마음이 편치 않아 서유에게 말했다.“저랑 함께 들어가요.”서유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온재빈을 힐끗 보고는 눈치 있게 거절했다.“배가 좀 고파서, 뭐 좀 먹으러 갈게요.”이윽고 김시후가 서유를 살피기도 전에 온재빈은 하인을 불러왔다.“이 아가씨 데리고 가서 음식 좀 대접하세요. 절대 홀대하지 마시고요.”그러자 하인은 서유에게 황급히 말했다.“자, 저를 따라오세요.”이렇게 한번 말해놓으면 사정을 다 알아도 친구를 거절하기 어려워 김시후는 서유에게 신신당부하였다.“함부로 어디 가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요.”서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의 인솔하에 회식장으로 왔다.한식, 양식 등 모든 음식이 줄지어 늘어선 긴 탁자 위에 놓여 있다.서유는 소화가 잘되지 않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하인의 접대에 이를 악물고 버섯 수프를 마셨다.그녀가 조용히 회식장 구역에 서서 수프를 먹고 있을 때, 갑자기 정원 밖에서 고급 차 몇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뒤이어 소수빈은 먼저 차에서 내려서 코니섹의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존귀한 남자를 불러 내렸다.따스한 노란색 조명 아래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차 문 앞에 서 있는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신에 의해 조각된 듯한 정교하고 입체적이며 흠잡을 데 없
이연석은 그와 서유의 일을 직접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는데, 주로는 서유가 이승하가 “기르던” 여자였기 때문에 체면을 주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김시후를 가만둘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온희수의 일로 트집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김시후은 이연석에게 곤욕을 치르면서도 화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 밑에는 한기가 돌았다.“혼인은 제 허락을 받지 않고 아버지가 마음대로 한 결정입니다. 저는 이연석 씨 여동생분한테 장가들 생각 없어요. 그러니 진실로 받아들이지 마세요.”말문이 막힌 이연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곱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 말은 파혼하겠다는 겁니까?”“약혼한 적이 없는 어떻게 파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습니까?”김시후는 담담하게 웃었다.확실히 그저 혼담이 오갔을 뿐이지, 실현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그리고 두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어떻게 직접 혼인을 할 수 있겠는가?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김시후가 이 말을 한 것은 이씨 가문의 체면을 봐주지 않은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이연석은 평소 노는 데에만 습관이 되어 김시후와 같이 뭐든 노련하게 대하는 성질 따위를 배우지 않았다.곧이어 이연석은 김시후에게 “따뜻한” 교훈을 주려고 소매를 걷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이승하가 그를 저지했다.“연석아.”상석에 앉은 남자는 담담했지만 천하를 손안에 둔 듯한 시큰둥한 모습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역시 이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랄까 봐, 그 카리스마가 너무 강했다.이승하는 아무런 감정 없는 말투로 김시후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애초에 김시후 씨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 와서 혼인을 청한 것이니 그 약속을 무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청하셨으면 아버님께 어떻게 무르라고 하세요.”“청했다.”라는 말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원래는 김씨 집안이 이씨 집안 덕을 보려고 한 거였구나. 김씨 집안도 우리라 마찬가지네, 자식들을 팔아 입지를 굳히려는 걸 보면 말이야.’모두들 김시후를
온희수는 풀이 죽어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서유는 그녀가 온재빈의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추측했고, 그녀가 거들먹거리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곧이어 서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여기는 화장실이잖아요. 당연히 볼일 보러 온 거죠.”그녀의 말투 역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서유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렇지 않고 최민지처럼 계속 참는다면 상대방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 득의양양해질 것이다.서유의 말투에 온희수는 자연히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흥, 밀당하는 거야 뭐야? 일부러 숨어서 시후 오빠가 너 걱정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똑똑히 말해줄게. 시후 오빠의 파트너가 됐다 해서 네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 봉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시후 오빠는 내 사람밖에 될 수 없다고!”온희수의 경고에 서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내가 여기에 숨은 건 그저 이승하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무슨 밀당을 한다 그러는 거지?!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 아니야?’서유는 온희수에게 설명할 핑계도 대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아가씨, 전체적인 신분을 생각하면 아가씨도 김 대표님을 넘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제 앞에서 굳이 존재감 찾을 필요 없습니다.”김시후는 이지민과 혼인을 할 예정이었고 온희수의 신분은 이지민에게 비하면 훨씬 못했기에 헛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하지만 온희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는 손을 들어 서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네가 뭔데? 네가 뭔데 온씨 가문의 아가씨인 내가 네 앞에서 존재감을 찾아?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그 뺨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서유은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온씨 가문 아가씨가 뜻밖에도 사람을 때릴 줄은 몰랐다.이로 인해 그녀는 갑작스럽게 뺨을 한 대 맞았다.서유는 그 자리에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이 발목을 잡았다.뺨을 한 대 맞았을 뿐인데 현
이승하는 손을 닦은 후 안색이 좋지 않은 서유를 바라보았다.“내가 너한테 경고했잖아. 김시후를 멀리하라고.”방금 이승하가 온씨 가문 대저택에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연회에 참석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따지러 왔을 줄이야.그가 수완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하루 만에 그녀와 김시후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 일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만약 연지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집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 김시후와 함께 이런 곳으로 올 수나 있었을까.서유도 감출 생각이 없었고 사실대로 말했다.“저도 멀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연지유 씨께서 기어코 저더러 김시후 씨를 접대하라고 하던데요.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돈을 배상하라고 하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와서 그를 접대할 수밖에 없었는걸요.”그녀의 말속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 앞에서 괴상야릇한 행동을 하지 말고 탓을 하려거든 연지유를 탓하라는 말이었다. 이승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피식 웃었다.“네가 김시후의 침대에 기어들지 않았다면 연지유가 너더러 그를 접대하라고 했을까?”이 말은 서유가 자진한 거란 말인가?역시나 연지유는 이승후의 여신님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절대 그녀를 질책하지 않을 거니까.서유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승하는 서유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에 밀어 붙이고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봤다.“김시후가 방금 공개적으로 이씨 가문과의 결혼을 파기한 게 너의 베갯밑송사 때문은 아니고?”김시후가 이씨 가문과의 결혼을 파기했다니?서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그녀 자신은 왜 김시후가 혼인을 파기하게 할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녀는 빨간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승하의 앞에서 해명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이승하는 그녀에게 더욱 밀착해 왔다. 청
이승하는 문을 나서기 전에 고개를 돌려 서유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김시후가 결혼을 파기했다고 해서 김씨 가문에서도 동의한 게 아니야. 김시후는 언제든지 이씨 가문 사위로 들어와야 할 거야. 너 침대에서 김시후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김시후가 널 위해서 온씨 가문과 대적하게 할 게 아니라면 말이야.”이승하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맞은편의 남자 화장실로 걸어갔다.그의 거만하고 낯선 뒷모습을 응시하며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매번 이승하를 대면할 때마다 그녀는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그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드러낼까 봐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 그녀는 다행히도 일시적인 통쾌감을 채우려고 의지와는 반대로 그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의 작은 속셈이 이승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조롱하고 오해할지 알 수 없었다.서유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서서 세면대 앞으로 가서 손을 씻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서유를 찾으러 가는 내내 김시후는 온희수에게 시달려 짜증이 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때 물이 잔뜩 묻어 있는 손을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서유를 보자 그는 온희수를 옆으로 밀어내고 서유에게로 다가갔다.“서유 씨, 우리 먼저 돌아가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시선으로 생각에 잠긴 듯 온희수를 힐끗 쳐다보았다.온희수는 자신이 방금 충동적으로 서유의 뺨을 때린 게 생각나 그녀가 김시후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봐 경고의 눈빛을 번뜩였다.서유는 온희수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는 그녀가 말할까 봐 두려워 절절매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그리고 온희수가 사람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지 알았다.서유는 온희수에게 따귀를 돌려주고 싶었지만 여기는 온씨 가문 영역이었고 만약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손찌검을 한다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그녀가 온희수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이슈가 되어 구설
서유는 아직도 김시후가 자신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 있었다. 그러나 온희수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모함하며 뒤집어씌우려고 하자 더 이상 따지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가 치밀었다. 서유가 막 온희수에게 자신이 뭐라고 욕했는지 물으려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희수 씨는 몇 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옳고 그름을 뒤집는 능력만 배웠나 보군요.”등 뒤에 있는 남자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불빛 아래에 서있는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서유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줬단 사실에 감격했지만,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승하의 시선이 슬그머니 서유와 김시우가 잡은 손을 흘기며 어둡고 흐릿한 기색을 내비쳤다.그는 계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와 온희수의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조금 전 온희수 씨가 사람을 모욕할 때 제가 마침 그곳을 지나갔거든요.” 이승하가 인정사정없이 온희수를 까발리자, 그녀의 얼굴은 삽시에 사색이 되어 계속 변명하려 애썼다. 이승하는 차디찬 요염한 눈으로 담담하게 그녀를 흘겨봤다.온희수는 이렇게 무서운 눈길은 생전 처음 마주했다. 그의 눈은 정말 예뻤지만, 그 속에 비친 기색은 사람을 얼려 죽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겁을 먹고 즉시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이때 온재빈은 그제야 자기 여동생에게 일이 닥친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뛰어왔다.온희수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이승하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온씨 가문 가정 교육은 실로 봐줄 만하군요.”이승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한 무리의 경호원을 데리고 온씨 저택을 떠났다.계속 옆에서 쇼를 구경하고 있던 이연석은 사색에 잠겨 둘째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둘째 형의 차갑고 덤덤한 성격상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서서 온씨 가문 아가
하지만 온희수는 당연히 서유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고 그저 그녀를 자기 얼굴을 깎아내린 장본인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연회가 끝나자 온희수는 온기태와 온재빈에게 불만을 쏟아냈다.“아빠, 오빠, 날 위해 정의 구현을 해줘야 해요!”온기태는 온희수의 칭얼대며 우는 소리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자기의 화도 다스리지 못하고 이승하에게 밉보이고는 뭘 잘했다고 울어!”온희수는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온기태를 바라보았다.“아빠, 지금 절 때린 거예요?”“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승하에게 밉보이고 김시후가 데리고 온 여자에게 감히 함부로 손찌검해? 한 사람은 서울에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부산에서 비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넌 그런 두 사람에게 다 밉보인 거고!”온기태는 화가나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온몸을 떨었다. 만약 온재빈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또 한 번 온희수에게 지독한 교훈을 줬을 것이다.온희수는 항상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며 지켜주던 아버지가 외부인 때문에 저에게 손찌검했다는 사실에 화가나 얼굴을 감싸쥐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온재빈은 자기 여동생이 토라져서 나가자, 애를 태우며 뒤를 쫓아갔다.온씨 가문의 맞선 연회가 난장판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서유는 김시후의 손에 이끌려 저택을 나갔다.김태진이 차를 가지러 가고 김시후는 서유의 손을 잡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서유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보며 자연스럽게 빼냈다.부드러운 작은 손이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김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서유는 방금 그가 자신을 도와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김 대표님, 아까는 고마웠어요.”그녀의 낯설고 예의 바른 목소리에 김시후의 실망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서유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며 자책했다.“제가 미안하죠. 저만 아니었다면 서유 씨가 다칠 일은 없었을 거잖아요.”서유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괜찮아요.”
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차갑고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승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한참 망설인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형, 언제 연지유랑 결혼할 거야?”이연석은 이승하와 연지유가 결혼하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 더 이상 걱정되고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이승하는 웃고 있는 듯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다.“너도 내가 그 여자랑 결혼하길 바라는 거야?”이연석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바라지 않아. 하지만...”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이연석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 이승하가 갑자기 담담하게 말했다.“결혼할 거야.”그의 목소리는 몹시 냉담했고 마치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연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둘째 형은 한 번도 기뻐했던 적이 없었다...김시후는 서유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에게 연고를 건네줬다.“부기를 빠지게 하는 거예요.”서유는 감사 인사를 하고는 거절했다.“집에 가서 얼음찜질하면 돼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김시후는 그녀의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응시하며 눈에는 다시 쓸쓸함이 드리웠다.김시후는 서유가 자신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 약간의 적개심까지 품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자, 김태진이 그에게 주의를 줬다.“김 대표님, 서유 씨는 지금 밀당을 하는 거예요. 절대 속으시면 안 됩니다.”김시후는 기억을 잃은 뒤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밀당이 뭔지 잘 몰랐고 김태진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반박했다.“그냥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은데 무슨 밀당이야.”“서유 씨가 일부러 미워하는 척하는 것은 대표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예요. 대표님이 안절부절못할 때면 다시 멀어지는 척했다가 일단 대표님이 서유 씨에게 마음을 다 내어주면 그렇게 그녀의 손에 잡히게 되는 거죠. 게다가...”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아까 서유 씨가 잔꾀를 부린 것을 발견하지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