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끝에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이런 불안한 상태에서는 대개로 틀린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컸기에 일단 냉정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 생각이었다.서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돌아가려는 그때 1m 90 정도 되는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남자는 검은색 외투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가 세 개 정도 풀어 헤쳐져 있어 섹시한 쇄골이 여실히 드러났다.검은색 하의는 그의 탄탄한 엉덩이와 적당히 근육 잡힌 다리를 찰싹 감싸고 있었다.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남자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한기 때문에 실내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심슨’을 안고 우유 적적하게 귤을 까먹던 심이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그는 강아지의 온기를 느끼려고 심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그러자 심슨이 발버둥을 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짧은 다리로 금세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심이준은 빵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아지를 보더니 혀를 찼다.“제대로 안아보게도 못하게 하지 아주. 나랑 같은 성을 가졌으면서.”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누군가의 실루엣이 책상 유리면에 비쳤다.심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실루엣의 주인을 바라보았다.“이, 이 대표님?!”그는 빛을 등진 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색하게 굳은 입꼬리를 애써 위로 올렸다.“이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 남자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이승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요?”“...”심이준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이제야 정가혜의 집에서 며칠을 무단 취식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다.“하하, 이것 참. 이곳 역시 이 대표님 구역이었죠?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이만!”심이준이 과일이 든 접시를 들고 문밖으로 도망가
서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은근하게 물었다.“내가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려나?”잔뜩 삐진 이승하는 고개를 위로 들면서 흥하고 말했다.“그런 건 풀어주는 쪽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서유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런 이승하의 모습도 그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서유는 두 손을 들어 그의 목 뒤에 걸었다. 그러고는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가에 가볍게 뽀뽀했다.“풀렸어요?”이승하의 눈이 잠깐 흔들렸지만 다시 정신을 다잡고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서유는 그의 목을 감싸던 손을 풀고 서서히 그의 어깨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승하의 셔츠를 지나 벨트 쪽에서 손을 멈췄다.그녀는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곧바로 벨트를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려는데 이승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서유는 다시 한번 발꿈치를 들어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더니 나지막이 되물었다.“뭐 하는 것 같은데요?”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퍼지자 남자의 몸이 긴장하더니 줄곧 도도하던 그 눈이 점차 예쁘게 풀어졌다.이 여자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이승하는 시선을 내려 서유가 핑크빛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보더니 완전히 두손 두발을 들었다.그는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 가져가고 단숨에 자신의 몸 가까이 그녀를 끌어안았다.제대로 건드려진 남자를 당해낼 여자는 없었다. 서유는 지금 그의 거친 키스를 받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흐느끼는 소리에 이승하는 그제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건드릴 땐 언제고 왜 그만하래?”이 말을 건넬 때 그의 입술은 아직 서유의 입술 위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살살 깨물며 애간장을 태웠다.서유는 그와 닿은 모든 곳이 전류가 흐르듯 찌릿찌릿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져서 자신을 벽에 몰아세우는 남자를 향해 힘겹게 말을 뱉었다.“나, 나 요즘 몸이 피곤해서 못 할 것 같아요.”
서유는 그가 신경 쓰는 포인트가 지현우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저기요, 이승하 씨, 아무나 다 질투하면 어떡해요?”소파에 앉은 남자는 여전히 잔뜩 굳은 얼굴로 조금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맑고 투명했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조금 서려 있었다.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더니 맞은편에 앉은 서유도 서서히 입가의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지현우와 연락한 적은 없어요. 아까 조지랑 통화할 때 갑자기 끼어들어서 케이시한테 자신들이 지금 묘원에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라고 한 마디 한 게 다예요.”솔직하게 얘기하면 이승하도 표정을 푸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서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가더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승하 씨, 왜 그래요?”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에 이승하의 표정이 점차 풀어져 갔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서유를 자신의 옆에 앉힌 다음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네가 누군지 제대로 구분했어, 지현우가?”만약 지현우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김초희인 것이 된다.그런데 만약 지현우가 제대로 구분했다면 그때는... “아직은 잘 구분하지 못하지 않을까요?”서유도 지현우가 어떤 상태인 건지 몰라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그 모습에 이승하는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차라리 이대로 계속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이승하는 케이시의 명함을 다시 서유에게 건네주었다.“검사 결과 받아보고 나서 결정해.”서유는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검사 결과요?”“지현우와 연이의 친자확인검사 결과.”서유가 그 말에 어리둥절한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멀지 않은 곳에 대기 중이던 경호원 한 명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승하에게 다가와 건네주었다.“대표님, 택이 씨 전화입니다.”이승하가 통화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결과 나왔습니다.”“얘기해 봐.”택이는 옆에 있는 남자를
서유는 결과를 확인하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처음부터 연이가 지현우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으니까.이제 검사 결과가 확실히 눈앞에 놓였으니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만 강렬하게 들 뿐이었다.연이는 지현우의 딸이다. 그 말은 언니는 애초부터 지현우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지현우는 줄곧 애꿎은 상대를 원망해왔던 것이다.그리고 케이시는 연이가 지현우의 딸인 것을 뻔히 알면서 그에게 알리지 않았고 연이는 자기 딸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언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언니가 남기고 간 딸이라도 소유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지현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유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이승하가 경호원에게 손짓했다.“자료.”경호원은 빠르게 별장을 나가 차에서 자료 파일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이승하는 그 파일을 받지 않고 서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경호원은 곧바로 그 뜻을 알아채고 서류를 서유에게 건넸다.“사모님, 이건 지현우와 김초희 씨 관련 자료입니다.”“네, 고마워요.”서유는 파일을 건네받고 안에 있는 자료를 꺼내 자세히 바라보았다.“사실 이 자료, 며칠 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던 건데 유전자 검사 결과가 정확하지 않아서 여태 얘기 못 했어.”이승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고마워요, 승하 씨.”이승하는 지현우 때문에 그토록 상처를 받고도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하고 바로 조사를 해주었다.게다가 이렇게 자료를 받아놓고 또 사람을 시켜 지현우의 머리카락을 채취해 다시 한번 친자 확인 검사를 하게 했다. 자신의 언니는 절대 지현우를 배신할 리가 없다는 서유의 말 하나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그 믿음에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이승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저녁에 배로 갚아주기만 하면 되니까.”그의 행동에 감동받았던 서유는 그 말 한마디에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어떻게 감동이
서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마치 그의 환심을 사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쌌다.“그럼 지현우에게 직접 전화 걸어도 돼요?”“안 돼.”그의 단호한 거절에 서유가 풀이 죽어서 물었다.“왜요?”이승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강하게 경고했다.“지금 이 순간부터는 지현우와 만나지도 말고 얘기도 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마.”연락을 안 하면 언니가 그를 배신한 적도 없고 연이도 그의 친딸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려주지?서유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이승하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유는 화면 속 전화번호를 한번 보고 자료 속 전화번호도 한번 보더니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이승하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얘기할지언정 절대 서유에게는 전화를 걸지 못하게 했다.이 남자는 지금 질투라는 감정에 푹 젖어 있었다.이승하는 두 번 연달아 걸어도 상대방이 받지 않자 통화는 포기하고 이 자료들을 메시지로 보내주었다.그러고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양 휴대폰을 옆으로 던지고 서유를 바라보았다.“이제 됐지? 앞으로 지현우 관련 일에는 신경 쓰지 마.”지현우를 이상하리만큼 의식하는 그의 모습에 서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어쩐지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마음 한구석이 너무 불안했다.이승하는 아직도 마음에 걸려 하는 듯한 그녀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서유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승하는 그녀의 턱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하고 다시 물었다.“지현우가 걱정돼?”서유는 서둘러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그녀는 손을 들어 심장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여기 있는 거 언니 심장이잖아요. 이 심장이 지현우 일로 불안해하는 것 같아요.”이승하는 그녀의 가슴 쪽을 바라보고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지현우의 일은 이제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만약 지현우가 김초희의 심장을 서유의 몸에 넣
“오랜만이야.”케이시가 국화꽃을 든 채 경호원을 대동하고 지현우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무덤 앞에 있는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수중의 사진을 자신의 심장 가까이에 있는 주머니 안에 넣었다.케이시는 지현우가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그는 지현우의 옆으로 가 수중에 있는 꽃을 내려놓다가 묘비 위에 있던 여자의 사진을 발견했다.“서유 씨?”케이시는 그제야 자신이 왜 김초희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이 김초희가 아니라 서유라 애초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지현우는 김초희를 독차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 듯했다. 그래봤자 결국에는 그 김초희에게 배신당했지만...케이시는 입꼬리를 올리며 지현우에게 말했다.“이제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연이를 돌려줘야지?”줄곧 입을 꾹 닫고 있던 지현우가 케이시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김초희의 유언, 뭐였어?”케이시는 몸을 일으키고는 지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무덤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초희의 유언이라 너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가 보지?”지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놓고 답했다.“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야...”케이시는 곧 죽어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 그를 보며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지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하, 현우야, 너는 네 그 입 때문에 팔자가 꼬일 수밖에 없어.”케이시는 마치 세상만사를 다 경험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점이 지현우는 끔찍하게도 싫었다.그는 케이시의 손을 먼지 털 듯 털어냈다.“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싫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현우와는 달리 케이시는 아까부터 지나치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그는 지현우를 담담하게 웃었다.“초희의 유언은 꽤 긴 영상이야. 특별히 너를 위해 남긴 거지.”케이시는 그 말을 내뱉고는 서서히 웃음을 지워버렸다.“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해?”지현우는 어두운 표정을 여태 지우지 못했다.“줄 거면 빨리 주고 주기 싫으면
케이시는 허리춤에서 총 한 자루 꺼내 들며 손에서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다.“현우야, 연이한테 정 많이 들었지?”지현우는 까만 눈동자로 케이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8개월 동안 내 옆에서 지내게 한 이유가 내가 아이한테 정이 드나 안 드나 보려던 거였어?”지현우는 케이시의 목적은 알아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직 알지 못했다.딸 목숨으로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는 그를 협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케이시는 승기를 잡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현우야, 내가 널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지?”“너는 날 절대 못 죽여.”만약 케이시가 지현우를 죽이게 되면 지씨 가문에서는 아마 지현우의 무덤 옆에 케이시도 같이 묻어주려 할 게 분명했다.케이시는 피식 웃더니 총에 총알을 장전했다.“그래. 나는 널 못 죽여. 하지만 네 딸과 초희가 남긴 영상은 널 죽일 수 있을 거야.”“무슨 뜻이야?”케이시는 장전을 완료하고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긴 다음 지현우를 바라보았다.“나는 네가 초희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초희가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너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내 계획은 어그러졌어. 하지만 괜찮아.”케이시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8개월 전에 우연히 연이가 자주 하고 다니는 목걸이 안에서 메모리칩을 하나 발견했어. 하늘은 역시 내 편이구나 싶었지. 그 메모리칩이 글쎄 초희가 너한테 남긴 유언이더라고? 그 안에는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이 모두 다 들어있어.”“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 타이밍에 네가 마침 연이를 뺏으러 왔어. 잘됐다 싶었지. 제정신이 아닌 네가 연이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다가 8개월 뒤에 내가 진실을 말하는 순간 네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는 게 벌써 상상이 됐거든.”“하지만 내 예상과 달랐던 건 너는 연이에게 정을 주고 있었다는 거야. 눈앞의 아이가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피가 당겨 감정이 생긴다는 건 나한테는 너무 재미없는 일이었거든.”“그런데 다시 생각해보
케이시는 묘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후회막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현우를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아까 그랬지? 너는 네 그 입 때문에 팔자가 꼬일 수밖에 없다고. 어때? 이제야 내가 한 말이 뭔 뜻인지 알겠어?”지현우가 만약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독선적이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연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도 진작 알았을 것이고 말이다.지현우는 지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언제나 남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렸고 온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행동했다.그 당시 조그마한 우리 안에 갇혀있던 케이시는 지씨 가문의 장남은 자신일 텐데 대체 왜 자신은 그늘 속에 있어야 하고 지현우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활개를 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그를 낳은 어머니가 술집 여자라서?그는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이렇게 된 건 전부 지현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가 태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누려야 할 것들이 전부 다 사라지게 된 것이라며 말이다.지현우만 없었더라면 지씨 가문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떠돌이 생활했을 때 그는 김초희를 위해 음식을 뺏다가 죽을 듯이 맞아댄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지현우는 차 안에서 마치 천민에게 호의를 베풀듯 그저 ‘그만해.’라는 한마디만 던졌다.그리고 그날부터 김초희의 눈에는 오직 지현우밖에 없었다.지현우가 대체 뭐길래.만약 자신이 김초희가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돈을 지원해줬었다면, 만약 그날 차 안에서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지현우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달랐을까?그녀를 먼저 알게 된 것도 자신이었고 그녀 옆에서 어둡고 시린 밤을 함께 보내준 것도 자신이었다.그런데 그런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현우는 그저 한 번의 등장만으로 그 시간을 산산조각내버렸다.왜 지현우는 항상 자신의 것을 앗아가는 걸까.왜 가족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유일하게 남은 그의 빛마저 탐을 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