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혼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일을 했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겨우 8장의 설계도만 마무리해서 심이준한테 건네줬다.“얼른 가지고 가서 제출해요. 돈 받아오는 거 잊지 말고요.”심이준은 책상에 앉아 사과를 먹으며 돈만 밝히는 서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 “엄청 부자인 남자랑 결혼하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요?”만약 그가 부잣집 여자한테 장가를 든다면 설계도는 고사하고 황금 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 덕 보고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뭐 하러 설계도를 그려?책상에 엎드려있던 서유는 다음 프로젝트의 자료를 넘겨보며 맥없이 입을 열었다.“이준 씨, 혼수는 준비해야 할 거 아니에요...”가족이 없는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 이것들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했으니 그녀 또한 남부럽지 않게 혼수를 준비해 가고 싶었다. 멋지게 시집갈 생각에 서유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심이준의 호주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이준 씨, JS 그룹에서 입금한 200억 말이에요. 이준 씨가 30%의 몫을 가져갔으니 지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것 같은데. 좀 빌려 줄 수 있어요?”심이준은 바로 호주머니를 감쌌다.“나한테 돈 빌릴 생각 하지 말아요. 나한테 부족한 건 돈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나처럼 가난한 사람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건 날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닌가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사과를 낚아챘다.“싫어요? 그럼 우리 집 사과 먹지 말아요.”사과를 먹지 말라고 하면 귤을 먹으면 되잖아.그의 손이 탁자 위에 놓인 과일 쟁반으로 향하자 그녀는 잽싸게 과일 쟁반을 들어 한쪽에 놓아두었다.최근에 정가혜가 입양한 반려동물 퍼그는 서유한테 달라붙는 걸 좋아했다. 그녀가 과일 한 접시를 내려놓자 퍼그가 달려와 그 위의 과일들을 모조리 핥아버렸다.귤은 껍질만 벗기면 그래도 먹을 수 있을 거야.구역질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먹
서유는 경호원들에게 케이시를 놓아주라고 한 뒤 그를 거실로 안내했고 노현정에게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동작과 표정이 모두 지현우와 비슷했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한 쌍의 눈이었다. 지현우의 눈은 어둡고 날카로웠지만 케이시의 눈은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담담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두 사람은 모두 쿨한 면이 있어 보였지만 말투가 완전히 달랐고 지현우보다 케이시가 더 젠틀한 것 같았다.그녀는 그를 자세히 훑어본 뒤 자리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요?”케이시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수십 명의 여자 경호원들을 쳐다보았다.그러고는 식탁에 앉아 사과를 들고 맛있게 먹으며 자신을 훑어보고 있는 이상한 남자도 한번 쳐다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서유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온화한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서유 씨, 긴장하지 말아요. 난 그저 우리 딸 연이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려고 온 겁니다.”그의 딸이라니... 정말 그의 딸이란 말인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서유는 꾹 참고 사실대로 대답했다.“연이는 현우 씨가 데리고 있어요.”지현우가 그의 손에서 연이를 빼앗아 갔는데 그가 연이의 행방을 모른다고? 나한테 그걸 물어보려고 왔다니?케이시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서유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은색 안경을 살짝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지현우가 딸아이를 데려가기 전에 8개월 후에 딸아이를 돌려주겠다고 나랑 약속했었어요.”“이제 그 약속 기한이 다 되었는데 난 지현우를 찾을 수 없게 되었죠.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그 말에 서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우가 연이를 해칠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던 건지? 아니면 지현우가 연이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리 기한을 정한 것인지? 그녀는 궁금증 투성이었지만 젠틀해 보이면서도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나한테
서유가 보기에 지현우는 케이시의 연적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한테 자신의 딸을 8개월 동안이나 보낸다고? 이게 말이 돼?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아이들은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정이 든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8개월이라는 기한을 정한 거예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그는 그녀가 이렇게 물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이렇게 긴 기한을 정한 건 솔직히 사심이 있어서입니다. 난 연이가 지현우와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랐거든요. 초희가 이 세상에 남겨둔 딸이 있다고 그한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연이를 봐서라도 초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랐죠. 그럼 다시는 나와 연이를 방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서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연이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가 정이라도 들어서 연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요?”그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초희의 유언 때문이라도 그는 반드시 연이를 돌려줄 겁니다.”그 말을 듣고 서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유언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지난번에 자살 시도를 했던 걸까?언니에 대한 지현우의 집착으로 봐서는 언니의 유언을 위해서라도 그는 악착같이 살려고 했을 것이다. 이승하에게 쫓기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지난번에는 스스로 그들을 찾아왔었다. 그가 자살하기 전, 끝내 말하지 않았던 답을 생각하며 서유는 점점 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김초희인지 서유인지 구분할 수 있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구분할 수 없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답을 찾지 못한 서유는 고개를 들어 케이시를 쳐다보았다.“언니의 유언이 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나요?”케이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미안하지만 초희가 신신당부했거든요. 그 영상은 지현우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고.”유언이 몇 마디가 아니라 동영상이라고?동영상이라면 그건 분명 언니의 영상일 것이다. 그녀는
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기 위해 그가 이런 옛날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자세히 케이시를 훑어보았다. 겉으로는 쿨하고 태연한 사람인 것 같아 보여도사실은 지현우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케이시의 속마음을 간파하지 못한 그녀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그의 말 속에 담긴 메시지를 근거로 케이시에게 되물었다.“현우 씨밖에 모르던 언니가 왜 갑자기 당신을 선택한 건가요? 그리고 현우 씨는 왜 감옥에 갇히게 된 거죠?”서유가 이렇게 지현우의 편을 들 줄 몰랐던 케이시는 경계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미안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왜죠?”그가 커피를 내려놓고는 손을 맞대고 진지하게 대답했다.“당신은 지현우의 사람이니까요. 미안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갔고 그녀는 급히 그를 불러세웠다.“잠깐만요.”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유를 돌아보는데 경계에 가득 찼던 그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저 담담한 모습이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서유는 그에게 다가가 우뚝 솟은 케이시를 올려다보며 해명했다.“난 현우 씨의 사람이 아니에요. 언니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를 뿐이에요.”지현우도 김초희가 10년 동안 그를 쫓아다녔다고 했고 케이시도 김초희한테는 지현우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케이시를 선택했다는 게 서유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만 바라본 여자가 그렇게 쉽게 마음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현우가 그전에 언니한테 상처 준 것이 아니라면 쉽게 사랑했던 사람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 이유와 속사정에 대해서 서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의 말 한마디 때문에 쉽게 누구를 믿거나 믿지 않는 일은 안 하기로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케이시는 눈빛이 점차 부드러워졌다.“서유 씨, 언니가 날 선택한 건 지현우
“이모...”연이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서유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연이, 이모 안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어요.”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을 위로 들어 뒤쪽을 돌았다.그러고는 얼굴을 화면 가까이에 대고 앙증맞은 손가락을 입 쪽으로 가져다 대며 낮게 속삭였다.“이모, 현우 삼촌이 나 데리고 묘원으로 왔는데요 여기서 이모 사진을 봤어요. 그런데 삼촌은 그게 이모가 아니라 엄마래요. 이모, 땅속에 있는 사람 정말 우리 엄마예요?”연이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화면 속에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유는 순간 심장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연이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에서 이런 것인지, 아니면 이 심장 주인인 언니가 딸 얼굴을 보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그녀는 손을 들어 심장 쪽을 꾹 누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삼촌이 거짓말 하는 거야. 믿지 마.”연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한 듯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는 지금 천국에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연이가 5살이 되는 해에 엄마가 나 보러온다고도 했고요. 물론 5살 생일 때 안 왔지만... 언젠가는 연이 보러 올 거라고 믿어요.”서유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연이에게 물었다.“연이야, 혹시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아?”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그럼요. 아빠가 말해줬어요. 천국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요. 또 예뻐야만 갈 수 있다고 했어요.”연이는 예쁜 것을 떠올리다 문득 얼마 전에 봤던 영화배우보다 더 예쁘고 잘생긴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아이는 조지에게서 그 멋있는 아저씨가 이모의 남자친구라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서유를 바라보았다.“이모, 이모 곧 있으면 이모 남자친구랑 결혼할 거죠? 그러면 이모도 나중에 이모 남자친구처럼 잘생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예요?”연이는 잔뜩 흥분했는지
서유는 꾹 참았던 눈물을 결국 떨구고야 말았다.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순진무구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이 아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연이는 서유가 눈물을 흘리자 얼른 휴대폰을 가까이하며 입술을 화면에 가져다 댔다.“이모 울지 마세요. 다음부터 절대 이모 속상하게 하는 말 안 할게요...”서유는 아직 어린 주제에 다른 사람 기분부터 생각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었다.그녀 역시 부모가 없었기에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항상 사람들의 기분부터 살피고 행동했다.그런데 설마 연이도 그녀와 똑같이 그 어린 나이에 눈치부터 볼 줄이야...서유는 연이가 커서 자신처럼 담도 작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그런 아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연이야, 앞으로 이모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 절대 숨기지 말고 다 해. 눈치 볼 필요 없어. 알겠지?”연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이모도 이제 울지 마세요.”“그래 알겠어.”서유는 손으로 눈물을 전부 닦아냈다.“연이야, 지금 어디 있어?”연이는 휴대폰을 들고 카메라를 전환해 정확하게 묘원 아래의 집을 가리켰다.“저기 작은 집에 있어요.”그 작은 오두막집은 지현우가 이곳에서 살겠다며 특별히 현지인에게 지으라고 한 집이었다.연이는 이곳이 싫었다. 매일 밤 귀신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 놀라서 깬 횟수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만약 조지마저 없었더라면 진작에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서유는 지현우가 아이를 데리고 묘원 아래서 산다는 것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연이야, 이모가 조지 삼촌이랑 얘기하고 싶은데 휴대폰 좀 가져다줄래?”연이는 손으로 잔디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나무 아래에 있는 조지 앞으로 다가갔다.“할아버지, 이모가 얘기하고 싶대요.”조지는 두 눈을 천천히 뜨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건네받더니 다른 한 손으로 연이의 빵빵한 배를 콕 찔렀다.“이제 40세밖에 안 됐다니까 자꾸 할아버지래. 아
서유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끝에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이런 불안한 상태에서는 대개로 틀린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컸기에 일단 냉정해지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 생각이었다.서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돌아가려는 그때 1m 90 정도 되는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남자는 검은색 외투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가 세 개 정도 풀어 헤쳐져 있어 섹시한 쇄골이 여실히 드러났다.검은색 하의는 그의 탄탄한 엉덩이와 적당히 근육 잡힌 다리를 찰싹 감싸고 있었다.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남자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한기 때문에 실내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심슨’을 안고 우유 적적하게 귤을 까먹던 심이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그는 강아지의 온기를 느끼려고 심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그러자 심슨이 발버둥을 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짧은 다리로 금세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심이준은 빵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아지를 보더니 혀를 찼다.“제대로 안아보게도 못하게 하지 아주. 나랑 같은 성을 가졌으면서.”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누군가의 실루엣이 책상 유리면에 비쳤다.심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실루엣의 주인을 바라보았다.“이, 이 대표님?!”그는 빛을 등진 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색하게 굳은 입꼬리를 애써 위로 올렸다.“이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 남자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이승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요?”“...”심이준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이제야 정가혜의 집에서 며칠을 무단 취식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다.“하하, 이것 참. 이곳 역시 이 대표님 구역이었죠?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그럼 이만!”심이준이 과일이 든 접시를 들고 문밖으로 도망가
서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은근하게 물었다.“내가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려나?”잔뜩 삐진 이승하는 고개를 위로 들면서 흥하고 말했다.“그런 건 풀어주는 쪽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서유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런 이승하의 모습도 그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서유는 두 손을 들어 그의 목 뒤에 걸었다. 그러고는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가에 가볍게 뽀뽀했다.“풀렸어요?”이승하의 눈이 잠깐 흔들렸지만 다시 정신을 다잡고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서유는 그의 목을 감싸던 손을 풀고 서서히 그의 어깨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승하의 셔츠를 지나 벨트 쪽에서 손을 멈췄다.그녀는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곧바로 벨트를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려는데 이승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야?”서유는 다시 한번 발꿈치를 들어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더니 나지막이 되물었다.“뭐 하는 것 같은데요?”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퍼지자 남자의 몸이 긴장하더니 줄곧 도도하던 그 눈이 점차 예쁘게 풀어졌다.이 여자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이승하는 시선을 내려 서유가 핑크빛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보더니 완전히 두손 두발을 들었다.그는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 가져가고 단숨에 자신의 몸 가까이 그녀를 끌어안았다.제대로 건드려진 남자를 당해낼 여자는 없었다. 서유는 지금 그의 거친 키스를 받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흐느끼는 소리에 이승하는 그제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건드릴 땐 언제고 왜 그만하래?”이 말을 건넬 때 그의 입술은 아직 서유의 입술 위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살살 깨물며 애간장을 태웠다.서유는 그와 닿은 모든 곳이 전류가 흐르듯 찌릿찌릿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녀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져서 자신을 벽에 몰아세우는 남자를 향해 힘겹게 말을 뱉었다.“나, 나 요즘 몸이 피곤해서 못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