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이라는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뇌 질환으로 죽었던 이시원을 떠올렸다.설마 몇 년 뒤 이승하도 똑같은 뇌 질환, 그것도 뇌종양이 발견될 줄이야.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이승하가 이 사실을 숨기려 하고 수술을 받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없었더라면 이씨 가문 사람들은 앞으로도 쭉 몰랐을 것이다.항상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이승연은 부원장의 말을 듣더니 분노가 치솟았다.“기가 막혀서!”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부원장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가뜩이나 뇌종양이 있었는데 충격이 더해지는 바람에 지금 승하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요?”부원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네, 의학적 견해로 48시간 안에 깨어나지 못하면 높은 확률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될 겁니다. 기적적으로 깨어나신다고 해도 재발할 우려도 크고요...”점점 더 가관인 상태에 이승연은 숨이 턱하고 막히더니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다.“승하는 이제껏 이런 고비를 잘 넘겨왔어요. 그러니 그깟 종양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그녀는 말을 마친 후 걱정 가득한 얼굴의 소수빈을 바라보았다.“서유 씨는?”이승하가 목숨처럼 아끼는 서유가 옆에 있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소수빈은 이승연에게 연중서가 서유를 납치했던 것과 이승하가 그녀를 위해 다치게 된 것까지 전부 보고했다.“현재 경호원들이 서유 씨 행방을 찾는 중이긴 합니다만 아직 어디로 데려간 건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더니 핵심을 찔렀다.“그런데 연중서가 서유 씨는 왜 납치한 거지?”소수빈은 그녀의 위압감에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냉정하게 분석했다.“동아 그룹을 인수당한 것에 앙심을 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소수빈은 연중서가 서유를 납치한 것이 단지 복수 때문이라고만 얘기해주었다. 사실은 김씨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게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은 구태여 얘기하지 않았
이연석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승연에게서 모든 걸 전해 들은 그는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감히 우리 형을 건드려? 지금 당장 죽여버릴 거야!”이연석은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연중서에게 복수하러 가겠다면서 몸을 돌렸다.“이연석, 진정해!”하지만 이승연의 한마디에 곧바로 자리에 멈춰 섰다.어렸을 때부터 이승연을 무서워했던지라 그녀의 고함 한 번에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이승연은 침착한 얼굴로 이연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연석, 우리 중에서 임시 대표직을 맡은 적 있었던 사람은 너뿐이니까 당분간 네가 회사를 관리해. 그리고 절대 그 누구에게도 승하 상태를 털어놓아서는 안 돼, 알겠어?”이승하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에 회사 관리 같은 건 맡고 싶지 않았던 이연석은 곧바로 거절하려고 했다.하지만 막 입을 떼려는데 이승연의 시선이 옆에 있던 정가혜에게로 향했다.“그쪽은 누구시죠?”정가혜는 서유가 납치됐다는 말에 꽂혀 지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이에 이연석이 대신해서 답했다.“서유 씨 가장 친한 친구 정가혜 씨예요.”이승연은 두 사람이 손깍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가혜라면 그녀 역시 들어본 적이 있다. 고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클럽에서 일하고 이혼하고 나서는 자기 명의의 클럽을 차렸다고 말이다.그 덕에 경제적으로 여유는 생겼겠지만 이러한 배경의 여자를 이연석 부모님이 허락해주실 리가 없다. 며느리를 고르는 기준에 재산 유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정가혜는 이혼한 경력이 있고 직업 특성상 클럽에 상주한다는 이 두 가지만으로 벌써 며느리 후보에서는 제외될 것이다.뭐가 됐든 이승연은 이연석의 연애에 관여할 생각이 없기에 아무런 조언도 없이 그저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눈치가 빠른 정가혜는 그 짧은 눈 맞춤에서 이승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저는 일단 서유 찾으러 갈게요. 승하 씨가 깨어나면 연락 줘요.”말을 마친 정가혜가
줄곧 자다가 드디어 천천히 눈을 뜬 서유는 눈을 깜빡이다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화려한 샹들리에에 프랑스풍 인테리어, 창문밖에는 영국식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에메랄드빛 바다도 보였다.이곳은... Y 국이다!그리고 지금 이 집은 지현우와 김초희의 별장이다.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서유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피로감과 어지러움이 밀려와 다시 침대에 털썩 쓰러져버렸다.서유는 흰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어쩌다 Y 국에 오게 된 건지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한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지현우는 인기척을 느끼고 탁자에 있는 물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계속 생각하던 서유는 지현우의 모습이 보이자 예쁜 미간을 단번에 찌푸렸다.“나한테 약 먹였어요?”머리와 몸이 무겁고 의식마저 또렷하지 않은 것이 약물 효과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수면제를 먹였어요. 그 덕에 푹 자서 좋지 않았어요?”지현우는 뻔뻔하게 인정하더니 손에 든 물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조금 더 잘래요?”서유는 그가 진짜 단단히 미친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후 얼굴을 들어 물었다.“승하 씨는 어떻게 됐어요?”분명 이승하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가 지현우의 손에 의해 기절했었다.중간에 언뜻언뜻 눈을 뜬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도 수면제를 지속해서 투여 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오늘이 며칠인 건지도 모르고 있다.서유는 지금 당장 이승하에게로 가 몸은 괜찮은지 많이 아팠었는지 물어본 다음 그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지현우는 물컵을 옆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은 다음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죽었어요.”죽어?서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뭐라고 했어요?”지현우는 그녀를 힐끗 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이미 들었으면서 왜 다시 물어보는 거죠?”침대 시트
“이승하 뇌종양 있는 거 몰랐죠?”지현우의 이마에 난 피가 서유의 미간과 이마에 뚝뚝 떨어졌다.하지만 서유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마치 인형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뇌 질환이 있는 상태에서 외부 충격까지 받았는데 무사하길 바라는 게 더 웃긴 거 아닌가?”사람 목숨 따위 어찌 돼도 좋다는 듯한 그의 말이 너무나도 잔혹하게 들려왔다.서유는 시트를 꽉 쥔 채 마치 기계처럼 입을 열었다.“당신이 하는 말 단 한마디도 안 믿을 거예요.”전에 검사했을 때 분명히 편두통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뇌종양이라는 건 지현우의 거짓말일 것이다.“안 믿는 다고요?”지현우는 코웃음을 쳤다.“그러면 당신 명의로 된 막대한 자산이 어디서 온 건지 한번 확인해 보던가요.”서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지현우는 입가의 미소를 서서히 지우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이승하가 당신 신분을 되찾아준 건 자산을 전부 당신 명의로 돌리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남은 생을 편히 살게 하려고 유서까지 적어놓은 상태라고요. 알겠어요?”지현우의 말에 서유는 순간 정체 모를 한기를 느꼈다.“거짓말! 내 신분을 되찾아 준 건 내 이름으로 JS 그룹 본부를 설계해줬으면 해서예요. 그리고 자산을 넘겨준 것도 내가 괜히 주눅 들까 봐 그런 거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 속이려 하지 마요. 그 사람은 절대 쉽게 죽지 않아요. 승하 씨는 절대 쉽게 죽지 않는다고요!”서유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지현우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분노에 사로잡힌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그리고 그 싸늘한 시선에 서유는 점점 더 큰 절망을 느꼈다.그러다 문득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했던 이승하의 말이 떠올랐다.“이 사진 지우지 마. 기념으로 남겨 둬.”3년 전 서유 역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기념으로 그에게 사진을 건네주었다.‘설마... 정말 죽은 거야...?
지현우는 가만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에 대한 미련이 점점 사라지는 듯한 눈을 확인한 지현우는 순간 심장이 철렁해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한 손에 쥐고 물었다.“이승하가 죽었다니까 같이 죽고 싶기라도 해요?”서유는 눈물 젖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긍정의 뜻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지현우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이번에는 그 희망마저 짓밟아버렸다.“당신이 죽으려고 하면 나는 당신을 살려낼 겁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려낼 거에요. 그러니까 멋대로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왜요?”왜 이승하와 함께 죽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지현우는 허리를 숙인 채 서유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당신은 한평생 초희 심장으로 살아가야 하니까.”서유는 그 말에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웃음을 터트렸다.눈물을 계속 흘린 채 큰소리로 웃는 그녀의 모습에 지현우가 멈칫하다가 물었다.“왜 웃어요?”서유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누운 채 실성한 듯 울고 또 웃었다.지현우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왜 웃는지 말해봐요.”서유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제는 기괴한 웃음소리까지 냈다.지현우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 나 몸을 일으킨 후 바로 조지를 불렀다.“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닌지 한번 봐봐요.”조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어차피 현우 씨가 원하는 건 초희 씨 심장 아니에요? 그러면 서유 씨가 충격받아서 미치광이가 되면 오히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닌가요?”그 말에 지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이 나를 속여서 Y 국으로 오게 한 거 아직 잊지 않습니다.”“현우 씨를 속인 건 당신이 서유 씨를 곁에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겁니다. 서유 씨는 초희 씨가 아니에요. 그저 초희 씨 심장을 가진 사람일 뿐이라고요. 이러는 거 서유 씨한테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 한 번도 안
지현우는 서유가 자살 시도를 하지 못하게 사람을 시켜 그녀의 두 손과 두 발을 침대에 묶어버렸다.침에 위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된 서유는 더 이상 발버둥 치지도,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감시 겸 보살핌을 명 받은 도우미는 서유의 눈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서유는 흐느낌 하나 없이 바다만을 바라보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사람 같기도 했다.그 뒤로 일주일 동안 서유는 이대로 죽기라도 하려는 듯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지현우는 그녀를 이대로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영양 수액을 끊임없이 맞게 했다. 일단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조지는 영양 수액을 바꾸려 왔다가 공허한 서유의 눈을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들어 서유의 눈앞에서 휘휘 저어보니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조지가 황급히 약 보관함을 열어 눈을 치료하는 약을 그녀의 입에 넣었다.하지만 서유는 약을 삼키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뱉어버리기까지 했다.조지가 그녀를 설득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서유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아까, 승하 씨가 나 데리러 온 걸 봤어요... 그러니까 나 이대로 내버려 둬요...”그녀는 이대로 이승하를 따라가 죽으려는 것이다.조지는 침대 곁에 서서 말라가는 여자를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줄곧 그녀를 감시하던 지현우를 향해 물었다.“초희 씨 동생을 잘도 이렇게 만들어놨네요. 이제 만족해요?”지현우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 유유하게 조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의 임무는 저 여자를 살리는 것이지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게 아닐 텐데요.”“이대로라면 서유 씨는 죽을 수도 있어요!”조지의 호통에 지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그럼 차라리 식물인간이 되는 약이라도 먹여요.”지현우는 전처럼 서유가 얌전히 침대 위에서 울지도 않고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조지는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
지현우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에 떨어졌다.“그렇게도 이승하가 보고 싶어요?”서유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뒤에 누가 있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얼굴이었다.지현우는 익숙하다는 듯 소파에 기대앉아 긴 다리를 꼬며 말했다.“전에 이승하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나한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고작 몇 개월 못 본 사이에 같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사랑이 깊어진 거죠?”그는 서유가 침묵할 줄 알았다는 듯 그녀 대신 대답했다.“그사이 사랑이 더 깊어진 게 아니라 애초에 계속 이렇게 사랑했던 거죠. 그동안은 그저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뿐이고요. 그런데 이제 영영 보지 못하게 되고 나서 사랑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죽겠다고 난리라니... 참 웃긴 일이에요, 그렇죠?”지현우는 마치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듯 제삼자의 시각에서 서유를 질책했다.“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지현우가 다시 물었다.“전에 내가 조사했을 때 이승하는 당신을 5년이나 비밀 애인 취급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전혀 소중히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손을 올려 죽일 뻔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렇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거죠?”서유는 이승하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전부 용서하고 심지어는 그를 위해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는데 왜 김초희는 자신을 떠난 거지?지현우는 대답을 얻으려는 듯 서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하지만 서유는 그저 앞만 응시한 채 그의 말에 흥미도, 대답해줄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사실 지현우도 그녀에게서 대답을 얻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입을 통해 ‘괜찮아. 나 너 다 용서했어.’라는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물론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지현우는 이승하보다 더 한 짓을 김초희에게 했으니까.지현우는 자조하듯 웃더니 줄에 묶여 빨갛게 된 서유의 손목과 발목을 바라보았다.김초희를 곁에 둘 수 없게 됐을 때도 그는 이런 식으로 김초희를 옆에 묶어버렸다.그때 김초희는 반항하고 화를 내
서유의 몸은 점점 더 야위어갔다.조지는 갖은 영양 수액으로 그녀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살 의지가 없었다.조지는 생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링거를 놓으려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행여 자신이 쓸데없이 입을 놀리기라도 할까 봐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이제 더 이상 안 돼요. 서유 씨 이만 놓아주세요.”지현우는 서유 쪽을 힐긋 보더니 다시 조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놓으세요.”“서유 씨를 살릴 방법이 뭔지 잘 알고 있잖아요!”조지는 그에게 이승하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압박했다.Y 국은 신사의 나라로 지현우가 이런 식으로 여성을 학대하는 모습을 조지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서유 씨가 죽으면 초희 씨 심장도 없어지는 거라고요.”지현우는 꼰 다리를 풀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대 조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그러니까 죽지 않게 살리라고요.”지현우는 서유의 생사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얼굴로 서유를 살리라고 하고 있다.조지는 한숨을 길게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침대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결국 다시 그녀의 팔에 링거를 꽂아주고 옆에 앉아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한참 뒤 서유는 뻑뻑한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가장 먼저 조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지가 끊임없이 약을 먹이는 바람에 그녀의 시력이 점차 회복되었다.하지만 이건 서유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고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나 좀... 내버려 둬요...”조지는 서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서유 씨 임신했어요.”그 말에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마치 검은색 세상에 한 줄기 빛이라도 스며든 것처럼.서유는 조지의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고 그와 눈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