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혜와 시답잖은 말 몇 마디를 나누던 김시후는 다시 서유를 언급하자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지난 몇 년간 서유랑 이승하는 연인보다는 계약으로 묶인 관계에 가까웠어.""근데 서유가 이승하를 좋아했던 건 맞아.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서유는 아직도 많이 힘들어했을 거야."가혜는 숨기는 것 없이 김시후에게 말했다. 가혜도 김시후가 빨리 그 아픔 속에서 헤여나오길 바랬다.모든 일은 김시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김시후를 잊기 위해 서유가 이승하를 사랑했던 것이니.김시후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더 착잡해졌다. 마음속에 난 구멍이 점점 더 커져가 김시후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한번 놓치면 이번 생엔 기회 없어. 빨리 잊어."가혜는 말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김시후는 시트에 기댄 채 하도 울어 이미 충혈된 눈을 감았다.그때 부산에서 걸려 온 연락을 받은 경호원이 차창을 두드렸다."대표님, 이사장님 전화 오셨습니다."김시후는 마음을 추스리고 핸드폰을 받아들었다.수화기 너머로 낮고 힘 없는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시후야, 이제 그만 부산으로 돌아와."김시후는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서유가 살고 있는 그곳을 쳐다봤다.김씨 가문, 그 망할 놈의 김씨 가문 때문에 김시후는 서유를 잃었다.서유가 몸을 판 일로 크게 싸웠을 때 화가 난 서유가 뛰쳐나간 틈을 타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왔다.그때는 큰형이 아니라 집사가 와서 싫다는 김시후를 억지로 납치해 갔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김시후는 차에서 뛰여내리기 까지 하며 발버둥 쳐봤지만 결국은 예정된 결말이었다.큰형이 말하길 그들은 쌍둥이고 태어날 때 일이 좀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김씨 가문의 승계권을 탐내 온 가족을 납치했었단다. 그 사이에 사고가 생겨 어머니는 그 자리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셨다. 그때 유괴범에게 잡혀간 김시후는 2년이 지나서야 양부모를 찾았는데 그들마저 죽자 고아원에 보내진 것이다.큰형은 다행히도 아버지가 목숨걸고 지키신 덕에 살아남았
주서희는 코트를 고급져 보이는 쇼핑백에 넣어 들고는 별장을 나갔다. 서재 문을 여니 석양이 진 하늘의 노을빛이 통창 너머로 이승하의 얼굴에 드리워지며 그의 몸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이승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고고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에 꽂혀있는 담배는 한 눈에 들어왔다.담배 연기가 이승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어딘가 더 고귀하고 신비로워 보이면서 유혹적으로 다가왔다.주서희는 쓰레기통에 작은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담배꽁초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알던 이승하는 담배를 피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터 손을 대기 시작 한건지 이미 제대로 인이 박힌 것 같았다.하지만 주서희는 이승하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기에 그저 못본 척 하며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들어와."이승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마치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주서희는 쇼핑백을 들고 들어갔다."대표님, 서유씨가 돌려보낸 옷입니다."쇼핑백을 건네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승하가 차갑게 말했다."버려."지나치게 담담하게 내뱉는 그 말은 마치 이 물건이 이승하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네."주서희는 짧게 답을 하고는 쇼핑백을 들고 방을 나섰다.주서희는 이승하가 버리라고 할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어찌됐든 이승하의 물건은 그녀가 함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서희가 문 앞까지 걸어가 쇼핑백을 버리려 할 때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렸다."거기 그냥 둬."주서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지만 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다.여전히 노을 아래에서 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는 한 모금 한 모금 빨아들이고 있었다."그럼 이 대표님, 전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서희가 떠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걸쳤던 옷일 뿐인데, 그저 옷 한 벌일 뿐인데, 그 옷 하나가 언제나 단호했던
김시후는 서울을 떠나기 전 서유에게 문자를 남겼다.[나 갈게. 앞으로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잘 지내.]짧은 한 문장에도 서유를 향한 존중이 담겨있었다.문자를 본 서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송사월은 송사월일 때도, 김시후일 때도 서유를 힘들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알겠다고 답장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제가 한 모진 말들이 상처가 되였을 사람에게 또 여지를 주는 것 같아 감정을 억누르며 핸드폰을 내려놓고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서유는 김시후, 이승하와의 관계를 비소로 완전히 정리했다. 이젠 누구도 서유를 찾지 않을 것이기에 서유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그전에 동아 그룹에 가서 퇴직 절차를 끝내고 가혜에게도 기회를 봐 얘기를 해야 했다.동아 그룹에 도착한 서유는 바로 대표실로 찾아갔다. 금방 돌아온 연지유는 여느 때처럼 다리를 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서유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지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꼰 채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듯 서유를 쳐다봤다."서유 씨, 김 대표님 안 모시고 회사엔 어쩐 일이야?"비꼬는 듯한 말투의 연지유는 서유가 무단결근한 것을 언급하려는 듯 보였다.서유는 이미 일상이 되여버린 연지유의 비아냥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말했다."김 대표님은 부산으로 돌아가셨어요. 대표님 이젠 약속 지키셔야죠. 사직서 수리 부탁드립니다."사실 서유는 이런 퇴사증명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죽기 전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싶었다.김시후가 이렇게 빨리 부산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던 연지유가 잠시 멈칫하다가 서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김 대표가 널 안 데려갔어?"김시후가 서유를 맘에 들어 했다면 데려갔을 텐데.그러면 서유를 동아 그룹의 부산 지사로 보내 김시후를 이용 할 생각이었다.김시후도 역시 다른 남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여자를 장난감 취급하는 건 똑같네. 서유도 뭐 별거 없네.연지유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연지유는 이래뵈도 자본가였기에 쓸모 없어진 말은 폐기처
서유도 다른 말 않고 자료를 넣어두었던 서랍 열쇠와 고객 정보, 그리고 다른 보안 파일들까지 다 원영에게 넘겨주었다.인수인계를 마친 서유가 인사팀에 가 퇴사 절차를 마무리 하려고 일어섰는데 대표 비서실을 나가기도 전에 파일을 한가득 안고 오는 최민지를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김 대표님 새 애인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을까?"얼굴에 조소를 띈 채 최민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그래, 김 대표님이 서유 씨를 데려가실 리가 없지. 왜, 대표님 한테 버림받고 갈 데 없으니까 동아로 다시 온 거에요?"그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있던 원영이 참지 못하겠는지 한마디 했다."서유 씨 회사 그만뒀어요."최민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김 대표한테 버림받아 놓고 회사도 그만 두다니, 뭐 새로운 스폰서라도 찾은 거야?'최민지는 예쁘장한 서유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얼굴 하나 믿고 남자를 몇이나 후리고 다니는 거야.'심지어 꼬시는 것마다 다 서유한테 넘어갔다. 자신이 몇 년 동안 그 짓거리를 해도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는데 그걸 번번이 해내는 서유에 독이 제대로 오른 최민지였다.서유는 그런 최민지를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인수인계 서류를 가지고 인사팀으로 향했다.서유에게 무시를 당하자 화가 난 최민지가 소리를 질렀다."저 불여시! 그런 인생도 언젠가는 끝날 거야!"참다 못한 서유도 그런 최민지를 향해 쏘아붙였다."없는 당신보단 낫죠 제가."정곡을 제대로 찔린 최민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해왔다."더러운 년!"서유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더러운 걸로 치면 민지 씨만 할까요 제가. 나이 사십에 아직도 남자랑 한번 자보려고 발악하는 게 더 추악해요. 부끄러운 걸 알아야지 사람이."서유는 말을 마치고 최민지가 뭐라 하든 더는 대꾸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아래층에 있는 인사팀에 가서 서류를 건네주고 몇 가지만 더 작성하면 이 지긋지긋한 회사도 끝이었다. 이온 인터내셔널을 나서는 서유는 홀가분한
산부인과에 들어갈 수 없었던 강은우는 임산부를 들여보내고는 휴게실에서 쉬려고 했다.그런데 뒤를 도는 순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서유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깜짝 놀란 강은우는 뒷걸음을 치더니 겨우 바로 서서 서유를 바라보았다."서, 서유 씨가 여긴 어떻게...""은우 씨는 어쩐 일인데요? 빚 갚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있냐고요."서유의 말을 들은 강은우의 얼굴에는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유가 자신이 빚 갚으러 간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가혜와 서유는 오래된 절친 사이니 물론 가혜가 말을 해줬겠지만 결혼 후에도 이런 부부 사이의 사소한 일까지 서유에게 알려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잠시 당황했던 강은우는 이내 침착하게 말을 했다."빚 갚으러 간 거 맞아요. 지금은 동생이 몸이 불편하대서 병원 데리고 온거고요."강은우의 본가는 서울 외곽에 있으니 세 시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또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여동생이요?"서유는 강은우의 여동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강은우는 산부인과에 앉아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는 임산부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요. 여동생이 임신 중이라 결혼식엔 못 왔어요. 그래서 못 봤을 거에요. 가혜는 알고 있는데 아마도 서유 씨 한테 얘기 안 했나 보네요."강은우의 뒷마디는 어딘가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죽고 못 사는 절친이라도 우정은 별거 없다고 비웃는 듯 싶었다.그 말을 들은 서유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강은우의 눈빛이 전처럼 우호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서유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갔다. 하지만 바로 문을 닫진 않고 구석에 숨은 채 산부인과 쪽을 지켜보았다. 강은우는 서유가 간 줄로만 알고 산부인과 쪽으로 손을 젓자 아까 그 임산부가 걸어나왔다. 뭐라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강은우의 팔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듯 보였다. 강은우는 그런 여자의 코끝을 살짝 튕겨냈다. 지나치게 다정한 두 사람
서유는 그들이 들어간 병실을 기억해 놓고 병원 근처 마트로 가서 과일 바구니 두 개를 샀다. 다 사고 돌아올 때 마침 병원으로 들어가려 하는 가혜를 보았다."서유야, 넌 병원엔 왜 온 거야? 혹시 또 심장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상간녀'를 잡으러 급히 온 가혜가 서유를 보더니 바로 멈춰서서 서유 몸 상태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나 괜찮아. 서희 씨가 약 몇 개 가져가라고 해서 온 거야."가혜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괜찮으면 다행이라고 했다.서유는 손에 든 과일바구니를 가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새언니가 병문안 가는 데 과일 정도는 들고 가야지."가혜는 병실 문을 연 뒤 어떤 일이 생겨도 흥분하지 말라는 서유의 뜻을 알아차렸다.일단은 새언니가 병문안 온 걸로 하고 사건의 사실여부를 밝힌 뒤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했다.가혜는 서유에게서 과일바구니를 받아 들고 말했다."그러게. 내가 생각이 짧았네."서유는 가혜의 팔짱을 끼며 기죽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서유는 서둘러 약을 가지러 가지 않고 계속 가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가혜 옆에 있어 주기 위해서였다.가혜가 무엇을 보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가혜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어야 했다. 서유가 있어 가혜도 좀 차분해진 마음으로 병실로 향했다.병실 문을 열기 전 투명한 창으로 가혜는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그 임산부는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젊은 아가씨였다.몸매도 흠잡을 데 없었고 얼굴도 어린 티가 확 나보였다.눈썹은 반달 눈웃음과 함께 예쁘게 호선을 그렸고 포도알 처럼 진하고 큰 눈동자는 참 맑고 순수해 보였다.여자인 가혜가 봐도 이렇게 예쁘고 챙겨주고 싶은데 남자들은 오죽할까.강은우는 침대 옆에 앉아 빨대를 꽂은 컵을 들고 임산부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었다.별다른 행동은 없었지만 물을 마실 때조차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두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일단 들어가자."가혜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서유의 말에 잠시
평소에 가혜 앞에선 그렇게 돈타령을 해대던 강은우가 여동생은 이렇게 비싼 사립병원에 데려오다니, 가혜는 그 4천 만원이 이 병원비로 쓰인 건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만약 정말 여동생이라면 4천 만원을 썼대도 이해 할 것이다. 근데 그게 아니라면...가혜가 강은우를 향해 눈을 치켜뜨자 강은우도 많이 놀랐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강은우는 가혜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며 말했다."얘 남편 이 정도 능력은 있어. 해외에 있어서 바로 올 수 없었던 것 뿐이야."눕 듯이 기대있던 여자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 새언니죠, 남편이 아직 안 왔는데 태동이 오는 바람에... 오빠가 또 마침 집에 왔길래 병원 좀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강은우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오빠 탓이야. 새언니 한테 미리 얘기하라니까. 오빠가 하도 긴장해서 나도 깜빡했잖아."그녀가 말한 '새언니 맞죠' 에서부터 기분이 확 상한 가혜였다. 그 뒤로 또 이어진 '너무 긴장해서 나도 깜빡했다'는 말에 가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여우짓이야, 다 보이는 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가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이 사람이 얘기 안 해도 새언닌데 아가씨 보러 와야죠."일부러 새언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침대에 앉아있던 여자의 표정도 보기좋게 구겨졌다.그 둘의 대화를 눈여겨보던 서유가 여자의 작은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여자가 새언니라는 말에 유독 반응을 하자 서유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했다."가혜야, 은우 씨가 너 힘들까 봐 말 안했나봐. 아니면 네가 새언니니까 여동생이 아프다는데 어쨌든 와봐야 하잖아."말을 마친 서유가 강은우를 쏘아보며 말했다."그쵸, 형부?"서유는 강은우를 형부라고 부르며 자신과 가혜는 친자매 같은 사이임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주었다.만약 가혜를 힘들게 한다면 동생으로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강은우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여기까지 말한 강은우는 질책하는 듯한 눈빛으로 강이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신 같은 큰일도 숨기고, 내가 집에 안 갔으면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었어 쟤."그러고는 다시 가혜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동생 데리고 집에 가니까 난리도 아니었어. 빚쟁이 들이 한 번에 몰려왔는데 얘가 알아서 빚 다 갚았더라고. 그래서 매제가 아프리카에서 하는 사업도 꽤 잘되고 임신한 거 알고 나서 매달 생활비도 보낸다는 거 다 오늘 알게 된 거야. 그러니까 마음이 좀 놓이더라고.""근데 부모님이 결혼식 안 올리고 임신부터 한 걸 아시고는 좀 화를 내셨어. 얘도 같이 감정이 격해지다 보니까 태동이 왔나봐. 그래도 심한 건 아니래, 의사 선생님이 일단 입원해서 경과 지켜보자고 하셨어."강은우는 한참을 해명하고는 카드를 가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빚 갚으려고 가져갔던 4천만 원이야, 동생이 다 갚았으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어."강은우의 말을 다 듣고 카드까지 받은 가혜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은우를 한번, 서유를 한번 바라보았다. 마치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강은우의 말에는 어떤 틈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아까 산부인과 입구에서의 달달한 행동들을 목격하지만 않았더라면 서유도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뻔했다.가혜가 집 대출금 뿐만 아니라 일상 지출까지 담당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서유는 강은우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도 빼도 박도 못할 약점이 잡힌 상황에서 임기응변인지 모를 말빨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으니 서유는 강은우가 결코 그리 단순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런 말들을 당사자 앞에서 했다가는 괜히 경계심만 높이는 꼴이 될 터였다.서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혜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가혜야, 형부가 너 돈 힘들게 버는 거 알고 너한테 맡기는 건가 봐."서유는 가혜에게 일단 카드부터 받으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들은 가혜가 강은우의 손에서 카드를 가져갔다.강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