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도 다른 말 않고 자료를 넣어두었던 서랍 열쇠와 고객 정보, 그리고 다른 보안 파일들까지 다 원영에게 넘겨주었다.인수인계를 마친 서유가 인사팀에 가 퇴사 절차를 마무리 하려고 일어섰는데 대표 비서실을 나가기도 전에 파일을 한가득 안고 오는 최민지를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김 대표님 새 애인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을까?"얼굴에 조소를 띈 채 최민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그래, 김 대표님이 서유 씨를 데려가실 리가 없지. 왜, 대표님 한테 버림받고 갈 데 없으니까 동아로 다시 온 거에요?"그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있던 원영이 참지 못하겠는지 한마디 했다."서유 씨 회사 그만뒀어요."최민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김 대표한테 버림받아 놓고 회사도 그만 두다니, 뭐 새로운 스폰서라도 찾은 거야?'최민지는 예쁘장한 서유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얼굴 하나 믿고 남자를 몇이나 후리고 다니는 거야.'심지어 꼬시는 것마다 다 서유한테 넘어갔다. 자신이 몇 년 동안 그 짓거리를 해도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는데 그걸 번번이 해내는 서유에 독이 제대로 오른 최민지였다.서유는 그런 최민지를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인수인계 서류를 가지고 인사팀으로 향했다.서유에게 무시를 당하자 화가 난 최민지가 소리를 질렀다."저 불여시! 그런 인생도 언젠가는 끝날 거야!"참다 못한 서유도 그런 최민지를 향해 쏘아붙였다."없는 당신보단 낫죠 제가."정곡을 제대로 찔린 최민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해왔다."더러운 년!"서유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더러운 걸로 치면 민지 씨만 할까요 제가. 나이 사십에 아직도 남자랑 한번 자보려고 발악하는 게 더 추악해요. 부끄러운 걸 알아야지 사람이."서유는 말을 마치고 최민지가 뭐라 하든 더는 대꾸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아래층에 있는 인사팀에 가서 서류를 건네주고 몇 가지만 더 작성하면 이 지긋지긋한 회사도 끝이었다. 이온 인터내셔널을 나서는 서유는 홀가분한
산부인과에 들어갈 수 없었던 강은우는 임산부를 들여보내고는 휴게실에서 쉬려고 했다.그런데 뒤를 도는 순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서유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깜짝 놀란 강은우는 뒷걸음을 치더니 겨우 바로 서서 서유를 바라보았다."서, 서유 씨가 여긴 어떻게...""은우 씨는 어쩐 일인데요? 빚 갚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있냐고요."서유의 말을 들은 강은우의 얼굴에는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유가 자신이 빚 갚으러 간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가혜와 서유는 오래된 절친 사이니 물론 가혜가 말을 해줬겠지만 결혼 후에도 이런 부부 사이의 사소한 일까지 서유에게 알려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잠시 당황했던 강은우는 이내 침착하게 말을 했다."빚 갚으러 간 거 맞아요. 지금은 동생이 몸이 불편하대서 병원 데리고 온거고요."강은우의 본가는 서울 외곽에 있으니 세 시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또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여동생이요?"서유는 강은우의 여동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강은우는 산부인과에 앉아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는 임산부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요. 여동생이 임신 중이라 결혼식엔 못 왔어요. 그래서 못 봤을 거에요. 가혜는 알고 있는데 아마도 서유 씨 한테 얘기 안 했나 보네요."강은우의 뒷마디는 어딘가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죽고 못 사는 절친이라도 우정은 별거 없다고 비웃는 듯 싶었다.그 말을 들은 서유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강은우의 눈빛이 전처럼 우호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서유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갔다. 하지만 바로 문을 닫진 않고 구석에 숨은 채 산부인과 쪽을 지켜보았다. 강은우는 서유가 간 줄로만 알고 산부인과 쪽으로 손을 젓자 아까 그 임산부가 걸어나왔다. 뭐라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강은우의 팔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듯 보였다. 강은우는 그런 여자의 코끝을 살짝 튕겨냈다. 지나치게 다정한 두 사람
서유는 그들이 들어간 병실을 기억해 놓고 병원 근처 마트로 가서 과일 바구니 두 개를 샀다. 다 사고 돌아올 때 마침 병원으로 들어가려 하는 가혜를 보았다."서유야, 넌 병원엔 왜 온 거야? 혹시 또 심장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상간녀'를 잡으러 급히 온 가혜가 서유를 보더니 바로 멈춰서서 서유 몸 상태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나 괜찮아. 서희 씨가 약 몇 개 가져가라고 해서 온 거야."가혜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괜찮으면 다행이라고 했다.서유는 손에 든 과일바구니를 가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새언니가 병문안 가는 데 과일 정도는 들고 가야지."가혜는 병실 문을 연 뒤 어떤 일이 생겨도 흥분하지 말라는 서유의 뜻을 알아차렸다.일단은 새언니가 병문안 온 걸로 하고 사건의 사실여부를 밝힌 뒤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했다.가혜는 서유에게서 과일바구니를 받아 들고 말했다."그러게. 내가 생각이 짧았네."서유는 가혜의 팔짱을 끼며 기죽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서유는 서둘러 약을 가지러 가지 않고 계속 가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가혜 옆에 있어 주기 위해서였다.가혜가 무엇을 보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가혜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어야 했다. 서유가 있어 가혜도 좀 차분해진 마음으로 병실로 향했다.병실 문을 열기 전 투명한 창으로 가혜는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그 임산부는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젊은 아가씨였다.몸매도 흠잡을 데 없었고 얼굴도 어린 티가 확 나보였다.눈썹은 반달 눈웃음과 함께 예쁘게 호선을 그렸고 포도알 처럼 진하고 큰 눈동자는 참 맑고 순수해 보였다.여자인 가혜가 봐도 이렇게 예쁘고 챙겨주고 싶은데 남자들은 오죽할까.강은우는 침대 옆에 앉아 빨대를 꽂은 컵을 들고 임산부에게 물을 먹여주고 있었다.별다른 행동은 없었지만 물을 마실 때조차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두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일단 들어가자."가혜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서유의 말에 잠시
평소에 가혜 앞에선 그렇게 돈타령을 해대던 강은우가 여동생은 이렇게 비싼 사립병원에 데려오다니, 가혜는 그 4천 만원이 이 병원비로 쓰인 건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만약 정말 여동생이라면 4천 만원을 썼대도 이해 할 것이다. 근데 그게 아니라면...가혜가 강은우를 향해 눈을 치켜뜨자 강은우도 많이 놀랐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강은우는 가혜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받아 들며 말했다."얘 남편 이 정도 능력은 있어. 해외에 있어서 바로 올 수 없었던 것 뿐이야."눕 듯이 기대있던 여자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 새언니죠, 남편이 아직 안 왔는데 태동이 오는 바람에... 오빠가 또 마침 집에 왔길래 병원 좀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강은우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오빠 탓이야. 새언니 한테 미리 얘기하라니까. 오빠가 하도 긴장해서 나도 깜빡했잖아."그녀가 말한 '새언니 맞죠' 에서부터 기분이 확 상한 가혜였다. 그 뒤로 또 이어진 '너무 긴장해서 나도 깜빡했다'는 말에 가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여우짓이야, 다 보이는 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가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괜찮아요, 이 사람이 얘기 안 해도 새언닌데 아가씨 보러 와야죠."일부러 새언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침대에 앉아있던 여자의 표정도 보기좋게 구겨졌다.그 둘의 대화를 눈여겨보던 서유가 여자의 작은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여자가 새언니라는 말에 유독 반응을 하자 서유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했다."가혜야, 은우 씨가 너 힘들까 봐 말 안했나봐. 아니면 네가 새언니니까 여동생이 아프다는데 어쨌든 와봐야 하잖아."말을 마친 서유가 강은우를 쏘아보며 말했다."그쵸, 형부?"서유는 강은우를 형부라고 부르며 자신과 가혜는 친자매 같은 사이임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주었다.만약 가혜를 힘들게 한다면 동생으로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강은우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여기까지 말한 강은우는 질책하는 듯한 눈빛으로 강이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신 같은 큰일도 숨기고, 내가 집에 안 갔으면 끝까지 말 안 할 생각이었어 쟤."그러고는 다시 가혜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동생 데리고 집에 가니까 난리도 아니었어. 빚쟁이 들이 한 번에 몰려왔는데 얘가 알아서 빚 다 갚았더라고. 그래서 매제가 아프리카에서 하는 사업도 꽤 잘되고 임신한 거 알고 나서 매달 생활비도 보낸다는 거 다 오늘 알게 된 거야. 그러니까 마음이 좀 놓이더라고.""근데 부모님이 결혼식 안 올리고 임신부터 한 걸 아시고는 좀 화를 내셨어. 얘도 같이 감정이 격해지다 보니까 태동이 왔나봐. 그래도 심한 건 아니래, 의사 선생님이 일단 입원해서 경과 지켜보자고 하셨어."강은우는 한참을 해명하고는 카드를 가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빚 갚으려고 가져갔던 4천만 원이야, 동생이 다 갚았으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어."강은우의 말을 다 듣고 카드까지 받은 가혜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은우를 한번, 서유를 한번 바라보았다. 마치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강은우의 말에는 어떤 틈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아까 산부인과 입구에서의 달달한 행동들을 목격하지만 않았더라면 서유도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뻔했다.가혜가 집 대출금 뿐만 아니라 일상 지출까지 담당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서유는 강은우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도 빼도 박도 못할 약점이 잡힌 상황에서 임기응변인지 모를 말빨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으니 서유는 강은우가 결코 그리 단순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런 말들을 당사자 앞에서 했다가는 괜히 경계심만 높이는 꼴이 될 터였다.서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혜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가혜야, 형부가 너 돈 힘들게 버는 거 알고 너한테 맡기는 건가 봐."서유는 가혜에게 일단 카드부터 받으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들은 가혜가 강은우의 손에서 카드를 가져갔다.강
가혜의 말을 듣고 몇 마디 더 하려던 강이설은 말을 멈췄다.그제서야 가혜는 아니꼽게 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들어 강은우에게 말했다."나 저녁에 또 출근 해야해. 아가씨는 여보가 잘 챙겨줘."강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키를 챙기며 말했다."데려다줄게.""괜찮아, 나 차 가지고 왔어."서유와 가혜가 나가자 강이설이 강은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말했다."얘기만 잘하면 됐지, 돈은 왜 돌려줘?"강은우는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서야 낮게 말했다."돈 안 돌려주면 쟤가 믿을 것 같아?"강이설은 삐진 척을 하며 말했다."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줘야 하는 거야?"강이설은 여자의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착하지 아가, 쟤가 대출금만 다 갚으면 너 데리고 서울 갈 거야."서울로 데려갈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분노가 서렸던 눈빛이 다시 유순해졌다.서유는 병실을 나선 뒤 가혜에게 찍었던 영상들을 보여주며 말했다."강은우가 아까 나한테는 여동생이 임신 때문에 결혼식 못 왔다고 했는데 너한테 얘기할 때는 임신한 거 오늘 알았다고 했어.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 조심 좀 해. 강은우랑 그 여동생 둘 다 수상해."가혜는 영상 속의 강은우가 자신을 대하듯 여자의 코끝을 튕기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수상한 게 아니라 이건 불륜이 분명해!""남맨데 설마 불륜이겠어?""남매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가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가족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를 속여도 내가 어떻게 알겠어?"서유는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가족이 문제야. 며느리를 집에 안 들이는 시댁이 어딨어?"이 말을 들은 가혜는 다급히 말했다."나 그 본가에 한번 다녀와야겠어. 이웃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서유는 가혜의 손을 잡아 오며 말했다."혼자서는 너무 위험해."강은우의 본가가 어떤데인지도 모르는데 혼자 갔다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 날 수도 있었다.서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서유는 머리가 맑고, 강은우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지 않은 정가혜를 보며 마음이 많이 놓였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정가혜가 또 강은우에게 배신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정가혜는 어떻게 해야 하지?그 생각을 하니 서유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셀 수 없는 많은 근심이 마음속에 차올라 그녀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가혜는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걱정 마. 내가 무슨 남자한테 빠지면 불물 안 가리는 성격도 아니고. 남자 때문에 내 인생 망치는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가슴에 드리운 웨이브 머리를 뿌리치며 도도하게 말을 이어갔다.“난 단호하고 쿨한 사람이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서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돈 벌러 간다.”그녀의 말에 서유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운전 조심해.” 고개를 끄덕이던 정가혜는 선글라스를 끼고는 차에 올라타더니 멋지게 후진하여 병원을 떠났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유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우렁찬 뺨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마침 화려한 옷차림의 한 여인이 원장실 문 앞에 서서 주서희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주서희는 아무 말도 없이 반격조차 하지 않고 있었고 서유는 냉큼 다가가서 주서희를 확 잡아당겼다. “주 선생님, 괜찮아요?”붉게 부어오른 주서희의 얼굴을 보며 서유는 마음이 아팠다. “괜찮아요.”주서희는 서유를 향해 고개를 가로젓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박하선 씨, 뺨 열 대면 충분하겠죠?”박하선은 주서희를 도와주는 서유를 보며 굳은 얼굴에 경멸에 찬 표정을 지었다.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는 손목을 돌리며 주서희의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갔다. “나한테 주서희 씨를 혼내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죠?”주서희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그 모습에 박하선은 피식 웃으며 손
그녀의 말은 서유한테는 모욕이었지만 주서희한테는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주서희는 급히 서유의 앞을 가로막으며 연신 사과했다.“박하선 씨, 이 환자는 당신의 신분을 잘 몰라요. 그래서 무례를 범한 것이니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죄송해요.”자신을 위해 비천한 모습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주서희를 보며 서유는 마음이 안 좋았다.“주 선생님...”그녀는 자신 때문에 이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서희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서유 씨, 당신은 그저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예요. 나와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요. 또다시 박하선 씨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난 더 이상 당신을 진찰하지 않을 거예요.”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는 걸 눈치가 빠른 서유는 단번에 알아차렸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이 너무 오만방자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주서희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고 주서희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하선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했다.“주 원장님, 참 의리가 있는 사람이네요. 자기 코도 석 자인데 환자까지 보호하고 있으니.”말을 잇지 못한 주서희는 고개를 슥인 채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화를 삼켰다.“주 원장님, 마음에 내키지 않은 거예요?”주서희는 이내 주먹을 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리가요. 박하선 씨는 명문 가문의 아가씨인데 당연히 받아들이죠.”박하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나한테 복종한다면 이 여자를 나한테 맡겨요.”그 말에 깜짝 놀란 주서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차라리 날 데려가요. 이 여자는 안 돼요...”서유는 한때 이승하의 여인이었다. 근데 어찌 박하선이 업소로 끌고 가는 걸 보고만 있겠는가?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서희를 보며 박하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방금은 이 여자랑 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요?”“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대신해 자신이 업소 아가씨가 되겠다고 하다니. 이건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주서희는 심호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