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찾게 되면 네가 데리고 가서 이식 수술을 하고, 앞으로 서유와 관련된 일은 나에게 보고할 필요 없어.’그의 차가운 한마디가 주서희의 추측을 끊어놓았다.정말 신경 쓴다면 절대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이건 분명 서유 씨를 뻥 차버리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조지 의사가 심장을 찾을 수 있을지, 서유 씨가 살 수 있을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앞으로 서유 씨에 관한 일을 보고하지 말라고 하겠어?’‘보아하니, 두 사람 완전히 인연을 끊었나 보네.’‘다만 대표님이 헛수고하실까 봐 그게 걱정이네. 지금 서유 씨의 상태는 적절한 심장을 기다리지 못할 것 같은데...’주서희는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이승하가 서유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떠났다.주서희가 나가고 이승하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펜을 꽉 쥐었다.서재에서 나온 주서희는 주소를 묻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 앞에 서 있는 소수빈에게 물었다.“오빠, 서유 씨 집 주소 알아요?”소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하는 늘 그 작은 아파트로 서유를 데리러 갔으니 당연히 그녀의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내가 데려다줄까? 아니면 주소만 보내줘?”주서희는 손에 든 약을 보더니 말했다.“주소만 줘요. 대표님이 언제 찾을지 모르니 오빠 자리를 비워둘 수 없잖아요.”소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꺼내 주서희에게 주소를 보냈다.주서희는 서유의 물건을 들고 내비게이션을 켜고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과 화진 그룹의 김시후가 보였다.김시후는 문 앞에 기대어 몸과 마음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주서희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의학을 배우게 된 것이 바로 김시후 때문이었으니 말이다.주서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주서희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서유가 잠에 빠졌을 거로 생각해 어떻게 문을 열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당신들 누구예요? 남의 집 문 앞에서 뭐 하고 있어요?”정가혜는 요 며칠 서유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가 돌아왔는지 보려고 찾아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왔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열몇 명을 보았고, 김시후와 주서희가 그 사람들에게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집에 강도라도 든 줄 알고 복도에 경비 할아버지가 남겨둔 빗자루를 들고 앞으로 달려가 소리 질렀다.그녀는 집주인의 기세로 이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김시후는 정가혜의 목소리를 듣고 경호원에게 길을 비키라고 명령했다.그제야 정가혜는 김시후를 발견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야?”정가혜는 김시후를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 서유를 발로 차 놓고, 이제는 집까지 찾아와서 때릴 생각인가?’김시후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가혜 누나. 서유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정가혜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차갑게 말했다.“이승하가 데려갔다고 했잖아?”아직 서유가 돌아온 줄 모르는 정가혜는 그저 김시후를 쫓아낼 생각이었다.하지만 남자의 핏발 선 눈을 본 순간, 모진 말들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예뻐하던 동생이었으니 차마 모진 말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서유 돌아왔어요. 저를 보고 싶지 않아 해요.”정가혜는 다시 한번 남자를 흘겨보았다.“네가 서유에게 한 짓이 있지. 그런데 널 보고 싶겠니?”김시후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그렇다, 그가 직접 한 짓이 아니더라도, 그의 친형이 한 짓이다.김시후는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서유가 그를 원망하는 것도 당연했다.다만 김시후가 슬픈 이유는, 서유가 자신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에 주서희는 아무 대답 없이 덤덤히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정가혜는 당황할 정도였다.정가혜는 두 사람을 소파에 앉힌 후, 몸을 돌려 방문을 두드렸다.“서유야, 손님 왔어.”방 안의 서유는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미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났다.그들이 밖에서 대화하는 것도 모두 들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이제 몸을 가누고 일어나려고 할 때, 정가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일어나려다 일어나지 못하는 서유의 모습을 본 정가혜가 곧장 달려갔다.“서유야, 괜찮아?”김시후와 주서희도 소리를 듣고 들어왔다.김시후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주서희가 한발 앞서 말했다.“의사인 제가 있는데 물러나시죠.”주서희는 김시후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서유의 이마를 짚고 체온을 쟀다.“비 맞았어요?”체온은 그리 높지 않지만, 서유에게 이 정도의 고온은 치명적이었다.아까 이승하의 별장에서 나올 때 비가 내렸었다. 김시후가 외투로 비를 막아줬지만 그래도 비를 좀 맞았다.김시후는 자책하는 얼굴로 서유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피했다.서유는 주서희를 의식해 남자의 손만 피했을 뿐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그녀의 행동에 김시후는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서유가 아니었다...예전에 그녀가 화났을 때 심한 말을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두 사람은 약속했었다.그녀의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달래주면 반드시 용서해주겠다고 했다.하지만 김시후는 이미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서유는 돌아오지 않았다.주서희는 두 사람의 작은 행동을 보고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진찰을 핑계로 왔을 뿐이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미열이 조금 있으니 해열제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주서희는 해열제를 준 후 가방과 그 약을 건네주었다.“이건 서유 씨가 두고 간 물건이라고 대표님께 전해주라고 하셨어요...”주서희는 원래 약을 몇 갑 더 주려고 했지만 서유가 계속 눈짓을
김시후는 고개를 돌려버린 서유를 보자 가슴에 사무치는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의 몸도 같이 휘청거렸다."정말 이승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거냐고...""서유야,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넌 알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말을 하는 김시후의 눈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매정한 서유를 향한 원망이었고 제가 아닌 다른 이를 마음에 품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서유는 김시후를 한번 쳐다보더니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그래, 나 이승하 좋아해. 너도 나랑 만났으니까 알잖아. 사랑할 때의 내가 어떤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승하야. 그래서 너한테 여지 줄 생각 없어. 너도 나 좀 그만 놔주면 안돼?"서유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김시후의 가슴에 비수가 되여 꽂혔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휘청거리던 몸도 주체 못하고 더욱 거세게 떨려왔다. 김서하는 화가 난 발걸음으로 한걸음에 서유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쥐여잡고는 입을 맞췄다.강압적인 입맞춤은 예전과 같았다. 하나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유가 더 이상 그 입맞춤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아무런 반응도 없는 서유를 놓아주고 증오가 서린 차가운 그녀의 표정을 보았을 때, 김시후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자각했다."언젠가는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김시후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고 벽에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한 채 밖으로 나갔다.그 안쓰러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유도 코끝이 찡해오며 눈물을 흘렸다.그런 서유를 본 가혜는 분명 아직도 김시후를 잊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까지 모질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서유야, 혹시 그때 김시후가 너를 때린 것 때문에 그래?"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일은 그냥 오해였어. 김시후가 그런 게 아니야."이번에는 가혜가 묻기도 전에 서유가 먼저 김시후의 쌍둥이 형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혜는 오랫
서유는 귤을 받아 입에 넣고 여러 번 씹어봤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귤을 삼킬 때는 위산이 역류하는 듯 쓰라린 느낌 때문에 도로 뱉어낼 뻔한걸 가혜가 걱정할까 봐 겨우 참아냈다.아무래도 마음이 뒤숭숭한 가혜가 서유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사과만 깎고 있었다.다 깎은 사과는 또 서유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유는 이번엔 받기만 하고 먹진 않았다. 사과를 침대맡에 놓으며 서유가 물었다."가혜야, 은우 씨 빚은 얼마나 되는지 너한테 얘기했어?""응."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4천 만원이래."강은우는 4천 만원이라는 큰 빚을 지고 가혜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빚 갚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은우 돈으로 갚는댔어. 내껀 손도 안 댄다고..."가혜는 서유가 혹시 또 무어라 말을 할까 다급히 한마디 보탰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유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었다.강은우가 해온 신혼집은 대출은 가혜가 갚는데 강은우는 결혼 후에도 경제권을 가혜에게 넘기지 않고 있었다.결혼 후 대출금 뿐만 아니라 평소에 먹고 쓰는 것 까지 다 가혜 월급에서 나간다는 것을 서유가 알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화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가혜는 결혼 후에 일들은 서유가 걱정할까 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화난 서유를 보고 가혜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 하고 나서 은우가 좀 달라진 것 같긴 했어. 여전히 나한테 잘해주긴 하는데 그냥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아. 뭐라고 정확히 말은 못하지만..."강은우가 가혜를 아끼는 것은 그냥 다정한 몇 마디 말 뿐이 아니라 같아 살면서 작은 것 하나에도 다 묻어나 있었다. 퇴근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출장 갔다 돌아오면 집안일부터 다 해놓고 밥이나 빨래도 모두 혼자 도맡았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혜를 배려하고 있었다.항상 애정을 갈구하던 가혜가 이렇게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제 마음을 남김없이 내어주었고 강은우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한숨을 쉬는 서유를 보며 가혜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서유를 위로하고 나섰다."에이, 괜찮아. 그거 얼마나 한다고, 내가 술 몇 병만 더 팔면 금방 다시 모을 수 있어."하지만 서유가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가혜가 몇 년 동안 집을 사겠다고 어떻게 돈을 모아왔는지 뻔히 아는데. 다 손님들에게 술을 팔아 벌어들인 팁들이었다. 조금 조금씩 힘들게 모아온 돈이었다.서유는 가혜가 그렇게 일하다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되었지만 가혜는 괜찮다며 말했다."네가 지금 걱정해야 될건 너랑 송사월 그리고 이승하 사이의 문제야. 나는 진짜 괜찮다니까.""나 이제 그 사람들이랑 아무 관계도 없어. 이미 끝난 사이야. 나한텐 너만 남았으니까 당연히 너를 걱정하지.""진짜 진짜 괜찮아. 나 아직 젊고 일할 수 있는 나이잖아.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가혜는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강은우를 믿고 있었고 또 믿고 싶었기에 이 일을 더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만약 강은우가 정말 자신에게 해선 안될 짓을 했거나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땐 아무 미련없이 관계를 끊어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가혜는 마음이 약했지만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했다. 마음에서 떠나버린 것이라면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서유보다도 더 모질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가혜는 서유와 좀 더 얘기를 나누다 밥이라도 해먹여야 겠다며 일어났다. 뭐라도 좀 먹이고 나서 가혜는 또 급히 저녁 일을 하러 나갔다.가혜가 나가자 서유도 점점 차분해졌다. 원래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얘기해주려 했는데 지금 가혜는 자신의 상황만으로도 벅찰 것 같아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주서희가 준 특효약이 있는 한 당장은 죽지 않을 테니까.급히 내려간 가혜는 집 아래에 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열린 창문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보였다. 가혜는 한 눈에 그들이 김시후의 사람들임을 알아차
가혜와 시답잖은 말 몇 마디를 나누던 김시후는 다시 서유를 언급하자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지난 몇 년간 서유랑 이승하는 연인보다는 계약으로 묶인 관계에 가까웠어.""근데 서유가 이승하를 좋아했던 건 맞아.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서유는 아직도 많이 힘들어했을 거야."가혜는 숨기는 것 없이 김시후에게 말했다. 가혜도 김시후가 빨리 그 아픔 속에서 헤여나오길 바랬다.모든 일은 김시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김시후를 잊기 위해 서유가 이승하를 사랑했던 것이니.김시후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더 착잡해졌다. 마음속에 난 구멍이 점점 더 커져가 김시후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한번 놓치면 이번 생엔 기회 없어. 빨리 잊어."가혜는 말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김시후는 시트에 기댄 채 하도 울어 이미 충혈된 눈을 감았다.그때 부산에서 걸려 온 연락을 받은 경호원이 차창을 두드렸다."대표님, 이사장님 전화 오셨습니다."김시후는 마음을 추스리고 핸드폰을 받아들었다.수화기 너머로 낮고 힘 없는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시후야, 이제 그만 부산으로 돌아와."김시후는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서유가 살고 있는 그곳을 쳐다봤다.김씨 가문, 그 망할 놈의 김씨 가문 때문에 김시후는 서유를 잃었다.서유가 몸을 판 일로 크게 싸웠을 때 화가 난 서유가 뛰쳐나간 틈을 타 김씨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왔다.그때는 큰형이 아니라 집사가 와서 싫다는 김시후를 억지로 납치해 갔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김시후는 차에서 뛰여내리기 까지 하며 발버둥 쳐봤지만 결국은 예정된 결말이었다.큰형이 말하길 그들은 쌍둥이고 태어날 때 일이 좀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김씨 가문의 승계권을 탐내 온 가족을 납치했었단다. 그 사이에 사고가 생겨 어머니는 그 자리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셨다. 그때 유괴범에게 잡혀간 김시후는 2년이 지나서야 양부모를 찾았는데 그들마저 죽자 고아원에 보내진 것이다.큰형은 다행히도 아버지가 목숨걸고 지키신 덕에 살아남았
주서희는 코트를 고급져 보이는 쇼핑백에 넣어 들고는 별장을 나갔다. 서재 문을 여니 석양이 진 하늘의 노을빛이 통창 너머로 이승하의 얼굴에 드리워지며 그의 몸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이승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고고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에 꽂혀있는 담배는 한 눈에 들어왔다.담배 연기가 이승하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어딘가 더 고귀하고 신비로워 보이면서 유혹적으로 다가왔다.주서희는 쓰레기통에 작은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담배꽁초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알던 이승하는 담배를 피지 않았었는데 언제부터 손을 대기 시작 한건지 이미 제대로 인이 박힌 것 같았다.하지만 주서희는 이승하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기에 그저 못본 척 하며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들어와."이승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마치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주서희는 쇼핑백을 들고 들어갔다."대표님, 서유씨가 돌려보낸 옷입니다."쇼핑백을 건네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승하가 차갑게 말했다."버려."지나치게 담담하게 내뱉는 그 말은 마치 이 물건이 이승하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네."주서희는 짧게 답을 하고는 쇼핑백을 들고 방을 나섰다.주서희는 이승하가 버리라고 할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어찌됐든 이승하의 물건은 그녀가 함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서희가 문 앞까지 걸어가 쇼핑백을 버리려 할 때 담담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렸다."거기 그냥 둬."주서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지만 이승하는 여전히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다.여전히 노을 아래에서 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는 한 모금 한 모금 빨아들이고 있었다."그럼 이 대표님, 전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서희가 떠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서유가 걸쳤던 옷일 뿐인데, 그저 옷 한 벌일 뿐인데, 그 옷 하나가 언제나 단호했던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