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아, 내가 왜 너를 만나러 온 줄 알아? 연지유 씨가 핍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아니면 절대 다시는 널 만나지 않았을 거야.”“난 너 완전히 잊었어. 그러니 너도 날 잊어줬으면 해. 부산에 돌아가서 화진 그룹을 잘 운영해. 그 곳이 바로 네 집이야.”서유는 단숨에 말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김시후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그는 여자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서유야, 나 절대 너 못 잊어. 평생. 나 버리고 가지 마.”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김시후는 이승하처럼 도도하고 오만하지 않아, 여자의 독한 말 몇 마디에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그와 깨끗하게 헤어지려면 반드시 더 독해야 했다.서유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돌아서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김시후, 똑똑히 들어. 네가 날 잊든 말든 난 더 이상 너 사랑하지 않아. 네가 계속 매달린다면 난 네가 귀찮고 싫증 날 거야.”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남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뜯으며 계속 차갑게 말했다.“네 형이 나를 발로 걷어찼는데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절대 불가능해. 그 일 때문에 난 너를 더 미워하게 됐으니까. 그리고 네가 계속 부산에 돌아가지 않으면 난 어쩔 수 없이 계속 너와 만나야 하고, 그럼 난 네가 더 미워질 거야...”김시후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미워한다까지, 그저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김시후는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서유야...”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서유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 아리따운 서유가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김시후, 세상에 여자는 많아. 왜 한 나무에만 목매는 건데? 게다가 난 널 진작에 사랑하지 않아.”김시후는 상처 가득한 눈으로 서유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서유는 손바닥을 쥐어짜고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계속 너 접대하기 싫으니까 제발 부산으로 돌아가 줘. 앞으로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짜증 나니까.”그녀는 이 말
서유는 김시후가 밖에 있는 걸 알았지만 쫓지 않았다. 김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김시후가 계속 부산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두지 않을 것이며 김시후는 곧 사람들에게 끌려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서랍을 열어 전에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었다.주서희가 준 특효약과 휴대폰 같은 것도 깜빡하고 챙겨오지 않았다.그때 급하게 나오느라 이승하의 옷만 걸치고 김시후를 부축해 별장을 나왔다.서유는 남자의 향기가 담긴 코트를 집어 들고 손으로 만져보며 아쉬움이 가득했다.그러나 이승하가 자신의 귓가에 한 말을 생각하니 곧 정신이 들었다.유서는 여전히 서랍 속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서유는 ‘이승하’라는 세 글자가 적힌 종이를 찾았다.펜을 들어 한 줄 더 써넣었다.[그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망상을 버리라고 했다. 그는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아마 요 며칠간 힘들어서인지 서유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말기 환자는 잠이 많았고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문밖의 남자는 문에 기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마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밤새도록 기다렸지만, 그녀는 문을 열지 않았다.남자의 눈에는 이미 모든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이씨 가문 별장.주서희는 평소대로 재검사를 하려고 의료 상자를 들고 왔다.하지만 주태현은 서유가 이미 떠났으니 앞으로 치료하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주서희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으니 서유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 떠난 줄 알았다.‘그래, 어찌 보면 떠나는 것도 좋은 일이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이니 이 집 별장에서 죽어서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되지.’주서희는 주태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료 상자를 들고 병원으로 돌아가려는데 위층에서 소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서희야, 대표님이 뵙자고 하셔.”주서희는 그 말을 듣고 순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오빠, 대표님이 왜 찾으세요?”소수빈은 주서희의 사촌 오빠였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심장을 찾게 되면 네가 데리고 가서 이식 수술을 하고, 앞으로 서유와 관련된 일은 나에게 보고할 필요 없어.’그의 차가운 한마디가 주서희의 추측을 끊어놓았다.정말 신경 쓴다면 절대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이건 분명 서유 씨를 뻥 차버리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조지 의사가 심장을 찾을 수 있을지, 서유 씨가 살 수 있을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잖아? 그렇지 않으면 왜 앞으로 서유 씨에 관한 일을 보고하지 말라고 하겠어?’‘보아하니, 두 사람 완전히 인연을 끊었나 보네.’‘다만 대표님이 헛수고하실까 봐 그게 걱정이네. 지금 서유 씨의 상태는 적절한 심장을 기다리지 못할 것 같은데...’주서희는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이승하가 서유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떠났다.주서희가 나가고 이승하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펜을 꽉 쥐었다.서재에서 나온 주서희는 주소를 묻는 것을 깜빡했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 앞에 서 있는 소수빈에게 물었다.“오빠, 서유 씨 집 주소 알아요?”소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하는 늘 그 작은 아파트로 서유를 데리러 갔으니 당연히 그녀의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내가 데려다줄까? 아니면 주소만 보내줘?”주서희는 손에 든 약을 보더니 말했다.“주소만 줘요. 대표님이 언제 찾을지 모르니 오빠 자리를 비워둘 수 없잖아요.”소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꺼내 주서희에게 주소를 보냈다.주서희는 서유의 물건을 들고 내비게이션을 켜고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과 화진 그룹의 김시후가 보였다.김시후는 문 앞에 기대어 몸과 마음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주서희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의학을 배우게 된 것이 바로 김시후 때문이었으니 말이다.주서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주서희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서유가 잠에 빠졌을 거로 생각해 어떻게 문을 열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당신들 누구예요? 남의 집 문 앞에서 뭐 하고 있어요?”정가혜는 요 며칠 서유와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가 돌아왔는지 보려고 찾아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왔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열몇 명을 보았고, 김시후와 주서희가 그 사람들에게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집에 강도라도 든 줄 알고 복도에 경비 할아버지가 남겨둔 빗자루를 들고 앞으로 달려가 소리 질렀다.그녀는 집주인의 기세로 이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김시후는 정가혜의 목소리를 듣고 경호원에게 길을 비키라고 명령했다.그제야 정가혜는 김시후를 발견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야?”정가혜는 김시후를 보자마자 퉁명스럽게 힐끗 쳐다보았다. ‘우리 서유를 발로 차 놓고, 이제는 집까지 찾아와서 때릴 생각인가?’김시후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가혜 누나. 서유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정가혜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차갑게 말했다.“이승하가 데려갔다고 했잖아?”아직 서유가 돌아온 줄 모르는 정가혜는 그저 김시후를 쫓아낼 생각이었다.하지만 남자의 핏발 선 눈을 본 순간, 모진 말들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예뻐하던 동생이었으니 차마 모진 말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서유 돌아왔어요. 저를 보고 싶지 않아 해요.”정가혜는 다시 한번 남자를 흘겨보았다.“네가 서유에게 한 짓이 있지. 그런데 널 보고 싶겠니?”김시후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그렇다, 그가 직접 한 짓이 아니더라도, 그의 친형이 한 짓이다.김시후는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서유가 그를 원망하는 것도 당연했다.다만 김시후가 슬픈 이유는, 서유가 자신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잊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에 주서희는 아무 대답 없이 덤덤히 정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정가혜는 당황할 정도였다.정가혜는 두 사람을 소파에 앉힌 후, 몸을 돌려 방문을 두드렸다.“서유야, 손님 왔어.”방 안의 서유는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미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났다.그들이 밖에서 대화하는 것도 모두 들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이제 몸을 가누고 일어나려고 할 때, 정가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일어나려다 일어나지 못하는 서유의 모습을 본 정가혜가 곧장 달려갔다.“서유야, 괜찮아?”김시후와 주서희도 소리를 듣고 들어왔다.김시후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주서희가 한발 앞서 말했다.“의사인 제가 있는데 물러나시죠.”주서희는 김시후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서유의 이마를 짚고 체온을 쟀다.“비 맞았어요?”체온은 그리 높지 않지만, 서유에게 이 정도의 고온은 치명적이었다.아까 이승하의 별장에서 나올 때 비가 내렸었다. 김시후가 외투로 비를 막아줬지만 그래도 비를 좀 맞았다.김시후는 자책하는 얼굴로 서유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피했다.서유는 주서희를 의식해 남자의 손만 피했을 뿐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그녀의 행동에 김시후는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서유가 아니었다...예전에 그녀가 화났을 때 심한 말을 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두 사람은 약속했었다.그녀의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달래주면 반드시 용서해주겠다고 했다.하지만 김시후는 이미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서유는 돌아오지 않았다.주서희는 두 사람의 작은 행동을 보고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진찰을 핑계로 왔을 뿐이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미열이 조금 있으니 해열제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주서희는 해열제를 준 후 가방과 그 약을 건네주었다.“이건 서유 씨가 두고 간 물건이라고 대표님께 전해주라고 하셨어요...”주서희는 원래 약을 몇 갑 더 주려고 했지만 서유가 계속 눈짓을
김시후는 고개를 돌려버린 서유를 보자 가슴에 사무치는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의 몸도 같이 휘청거렸다."정말 이승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거냐고...""서유야, 내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넌 알잖아. 근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말을 하는 김시후의 눈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매정한 서유를 향한 원망이었고 제가 아닌 다른 이를 마음에 품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서유는 김시후를 한번 쳐다보더니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그래, 나 이승하 좋아해. 너도 나랑 만났으니까 알잖아. 사랑할 때의 내가 어떤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승하야. 그래서 너한테 여지 줄 생각 없어. 너도 나 좀 그만 놔주면 안돼?"서유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김시후의 가슴에 비수가 되여 꽂혔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휘청거리던 몸도 주체 못하고 더욱 거세게 떨려왔다. 김서하는 화가 난 발걸음으로 한걸음에 서유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쥐여잡고는 입을 맞췄다.강압적인 입맞춤은 예전과 같았다. 하나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유가 더 이상 그 입맞춤에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아무런 반응도 없는 서유를 놓아주고 증오가 서린 차가운 그녀의 표정을 보았을 때, 김시후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자각했다."언젠가는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김시후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고 벽에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한 채 밖으로 나갔다.그 안쓰러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유도 코끝이 찡해오며 눈물을 흘렸다.그런 서유를 본 가혜는 분명 아직도 김시후를 잊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까지 모질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서유야, 혹시 그때 김시후가 너를 때린 것 때문에 그래?"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일은 그냥 오해였어. 김시후가 그런 게 아니야."이번에는 가혜가 묻기도 전에 서유가 먼저 김시후의 쌍둥이 형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혜는 오랫
서유는 귤을 받아 입에 넣고 여러 번 씹어봤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귤을 삼킬 때는 위산이 역류하는 듯 쓰라린 느낌 때문에 도로 뱉어낼 뻔한걸 가혜가 걱정할까 봐 겨우 참아냈다.아무래도 마음이 뒤숭숭한 가혜가 서유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사과만 깎고 있었다.다 깎은 사과는 또 서유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유는 이번엔 받기만 하고 먹진 않았다. 사과를 침대맡에 놓으며 서유가 물었다."가혜야, 은우 씨 빚은 얼마나 되는지 너한테 얘기했어?""응."가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4천 만원이래."강은우는 4천 만원이라는 큰 빚을 지고 가혜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빚 갚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은우 돈으로 갚는댔어. 내껀 손도 안 댄다고..."가혜는 서유가 혹시 또 무어라 말을 할까 다급히 한마디 보탰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유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었다.강은우가 해온 신혼집은 대출은 가혜가 갚는데 강은우는 결혼 후에도 경제권을 가혜에게 넘기지 않고 있었다.결혼 후 대출금 뿐만 아니라 평소에 먹고 쓰는 것 까지 다 가혜 월급에서 나간다는 것을 서유가 알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화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가혜는 결혼 후에 일들은 서유가 걱정할까 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화난 서유를 보고 가혜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 하고 나서 은우가 좀 달라진 것 같긴 했어. 여전히 나한테 잘해주긴 하는데 그냥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아. 뭐라고 정확히 말은 못하지만..."강은우가 가혜를 아끼는 것은 그냥 다정한 몇 마디 말 뿐이 아니라 같아 살면서 작은 것 하나에도 다 묻어나 있었다. 퇴근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출장 갔다 돌아오면 집안일부터 다 해놓고 밥이나 빨래도 모두 혼자 도맡았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혜를 배려하고 있었다.항상 애정을 갈구하던 가혜가 이렇게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제 마음을 남김없이 내어주었고 강은우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한숨을 쉬는 서유를 보며 가혜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서유를 위로하고 나섰다."에이, 괜찮아. 그거 얼마나 한다고, 내가 술 몇 병만 더 팔면 금방 다시 모을 수 있어."하지만 서유가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가혜가 몇 년 동안 집을 사겠다고 어떻게 돈을 모아왔는지 뻔히 아는데. 다 손님들에게 술을 팔아 벌어들인 팁들이었다. 조금 조금씩 힘들게 모아온 돈이었다.서유는 가혜가 그렇게 일하다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되었지만 가혜는 괜찮다며 말했다."네가 지금 걱정해야 될건 너랑 송사월 그리고 이승하 사이의 문제야. 나는 진짜 괜찮다니까.""나 이제 그 사람들이랑 아무 관계도 없어. 이미 끝난 사이야. 나한텐 너만 남았으니까 당연히 너를 걱정하지.""진짜 진짜 괜찮아. 나 아직 젊고 일할 수 있는 나이잖아.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가혜는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강은우를 믿고 있었고 또 믿고 싶었기에 이 일을 더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만약 강은우가 정말 자신에게 해선 안될 짓을 했거나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땐 아무 미련없이 관계를 끊어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가혜는 마음이 약했지만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했다. 마음에서 떠나버린 것이라면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서유보다도 더 모질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가혜는 서유와 좀 더 얘기를 나누다 밥이라도 해먹여야 겠다며 일어났다. 뭐라도 좀 먹이고 나서 가혜는 또 급히 저녁 일을 하러 나갔다.가혜가 나가자 서유도 점점 차분해졌다. 원래 자신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얘기해주려 했는데 지금 가혜는 자신의 상황만으로도 벅찰 것 같아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주서희가 준 특효약이 있는 한 당장은 죽지 않을 테니까.급히 내려간 가혜는 집 아래에 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열린 창문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보였다. 가혜는 한 눈에 그들이 김시후의 사람들임을 알아차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