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철과 강하리?”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바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고 내용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두 사람의 친자 확률은 99.99%입니다.]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확실해?”심준호는 의자에 기대었다.“심씨 가문 병원에서 한 건데 누가 감히 조작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친자확인서를 옆으로 던져버렸다.“다시 해봐. 심씨 가문 병원 말고 밖에 다른 사람 찾아서 해. 정양철이 진짜 강하리의 아버지라면 미현 이모를 해칠 이유가 없어. 게다가 강하리의 어머니가 심미현이라는 걸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했겠어?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야.”심준호가 차갑게 웃었다.“이미 샘플 보냈어.”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도 이 사실을 알아?”심준호는 고개를 저었다.“말할 생각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말하지 마. 정양철은 어떻게 할 거야?”심준호는 만년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어떻게 할 생각 없어. 그냥 죗값을 치르면 돼. 내 누나를 해쳤는데 누구 아버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준봉이었다.“대표님,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구승훈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안 머물고?”심준호가 참지 못하고 묻자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일이 생겨서 연성으로 돌아가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닫혀있던 강하리의 방문이 구승훈이 살며시 노크하자 잠시 후 열리며 강하리가 잠옷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야?”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우리 딸 보러 왔는데 괜찮아?”강하리는 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에 다시 삼켜버렸다.그녀가 문 옆으로 물러서자 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들어왔다.여전히 잠들어 있는 연정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든 연정이를
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구승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맙다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나.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괜찮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단순한 목적으로 연정이를 너한테 데려온 건 아니니까. 원래는 연정이를 연성으로 데려가서 사진만 보내려고 했어. 그러면 네가 자연스럽게 연성으로 올 테니까.”하지만 그는 강하리가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랐다.또한 그녀가 한동안 아이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로 그녀를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왜 이렇게 비열해?”구승훈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하리야, 난 너랑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지만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내가 하는 것 지켜봐 주면 안 돼?”강하리는 그를 외면했다.“이만 가, 나 잘 거야.”구승훈은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아마 밤에 깰 거야. 넌 원래도 잘 못 자는데 베이비시터 불러줄까?”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필요 없어.”그녀는 이제 연정이를 24시간 내내 자신의 시야에 두고 싶었다.구승훈은 그녀의 거부하는 표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꼬리를 문질렀다.“주씨 가문 사람들이랑 멀리 해. 감정에 휩쓸려서 넘어가지 마. 일 끝나면 너랑... 아이 보러 올게.”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 건드리지 마!”구승훈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연정이를 바라보았다.“너희 엄마 너무 못됐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고 바로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하리야, 나 기다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깊게 심호흡했다.마음이 혼란스러웠다.이 남자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옷을 챙긴 뒤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별장에서 나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와서 얘기해.”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다가갔다.“특이하게 작용하는 신경 약물인데 쉽게 말해서 짜증과 불안을 느끼고 이성을 잃게 만드는 약이야. 그래서 네가 짜증이 났던 것도 당연한 거고.”“그러면 해결책이 있나요?”준봉이 옆에서 물었다.노민준은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약으로 억제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러면 앞으로 불면증이 잦아지고 두통까지 생길 수 있어요.”옆에 앉은 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물었다.“억제하지 않으면?”“어떻게 될지 몰라.”노민준이 바로 대답하자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형 방법대로 해 보자.”노민준의 연구실을 나온 구승훈은 준봉을 보내고 홀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두 눈에는 차가운 조롱이 가득했다.여초연은 어떻게 하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고문할 수 있을지 정말 잘 알고 있었다.‘이성을 잃는다라... 누구한테 이성을 잃게 만드는 걸까, 강하리?’구승훈이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노민준이 때마침 연구실에서 나오며 홀로 서 있는 그를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해독제 빨리 만들 테니까.”구승훈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노민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더 이상 혈연이라는 것에 조금의 희망도 갖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뿐이었다.어쨌든 친어머니인데 그녀의 눈에 구승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노민준은 그와 함께 담배 하나를 태우고는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손에 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툭툭 털어 넣고는 곧장 차로 향했다.차에 타자마자 그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 어머니를 해친 경호원과 빚쟁이들 전부 복싱장으로 데려와.”구승재는 깜짝 놀랐다.“형, 무슨 일 있었어?”“아무 일 없어.”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구승훈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지만 핸들을 잡은 손에 어느새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얼마 후 경호원은 링 위에 쓰러진 채 꼼짝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의 주먹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일 기세였다.“형!”링 밖에 있던 구승재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그만해, 형! 그러다 죽어!”하지만 구승훈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마침내 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정서원 씨를 통제하라고 했습니다.”그의 얼굴로 날아들던 주먹이 코앞에서 멈추며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러면 누가 정서원을 건드리라고 시켰어?”그가 말하면서 손목의 관절을 돌렸다.경호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정양철, 정양철이요!”구승재는 멈칫하며 같이 온 사람들에게 황급히 그를 데려가라고 말했다.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링 아래를 바라보았다.“다음.”오전 내내 한 명씩 차례로 링에 올라갔다가 들려서 내려갔다.구승훈은 지치지도 않고 내내 링 위에 있었다.땀은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고 셔츠에 가려진 가슴으로 떨어졌다.얼굴에 상처가 생기긴 했어도 여전히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형, 그만해.” 구승재가 링 위로 올라갔다.구승훈은 이미 구승재만 남은 장내를 바라보다가 글러브를 벗어 옆으로 던졌다.옆에서 물 한 병을 집어 얼굴에 들이붓는 구승훈 옆에서 구승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형...”“괜찮아.” 그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죽이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봐주지 않았나.“가서 다친 데 치료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강하리 씨에게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연정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서 저 사람들 잘 감시하고 진술서 받아서 최대한 빨리 심준호한테 전해줘.”구승재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다른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했다.형이 먼저 말하기 전엔 물어봐도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다.하지만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이와 놀고 있던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확인하고 연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꽉 쥐며 심호흡하고는 바로 화제를 바꿨다.“무슨 일 있었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구승재가 전화했어?”강하리는 부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손에 들고 있던 블레이저를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느긋하게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복부에 몇 군데 멍이 들어 있었고 그는 상처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무시해. 별일도 아닌데 괜히 그러는 거야. 연정이는? 잘 적응하고 있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했다.“정말 괜찮아?”구승훈은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렇게 걱정돼?”“말하기 싫으면 됐어.”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는 것을 본 구승훈은 서둘러 말했다.“일이 좀 있긴 해.”강하리가 멈칫했다.“뭔데?”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네 생각에 몸이 반응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괜히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순식간에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다소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으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강하리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돌아왔고 백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승훈이야?”강하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백아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하리야, 할머니한테 네 진짜 마음을 말해줄 수 있어? 주씨 가문 일은 어떻게 할 거니? 승훈이한테는 아직 마음이 있는 거지? 너희한테는 연정이도 있잖아.”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 “주씨 가문과 약속했으니까 그건 지킬 거예요.”구승훈은...아직 그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한순간에 바로 지워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사랑도, 증오도 평생의 모든 감정을 그 남자에게 줬다.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이번에는 연정이가 무사히 고비를 넘겼지만 다음번에는?엄마처럼 되지는 않을까. 그녀의 고집과 감정 때문에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감히 모험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이 준 상처와 속임수, 숨겼던 진실과 저버린 믿음도 전부 없었던 일로 치부
녹음을 들은 정양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했지만 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심준호는 다른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강찬수, 당신이 도박으로 생긴 빚 1억은 내가 대신 해결해 줄게. 하지만 너도 날 위해 뭔가를 해줘야지. 일이 끝나면 크게 한몫 더 챙겨줄게.]그러자 강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뭔데?][교통사고를 조작해서 네 아내를 죽여.]강찬수의 형이 강찬수로부터 빼앗은 휴대전화에서 나온 녹음 파일이었다.구승훈은 강찬수도 정양철이 손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문득 이 휴대폰이 떠올랐다.뜻밖에도 그 휴대폰에서 실제로 녹취록이 발견될 줄이야.정양철은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마지막에 이런 일로 상황이 뒤집힐 줄은 몰랐다.심준호의 눈에서 매서운 기색이 번뜩이며 다가와 정양철의 옷깃을 잡았다.“정양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누나랑 같이 자랐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한테 잘해줬는데 왜 우리 누나를 해쳤어!”정양철의 얼굴은 잿빛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서글픈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이유는 없어. 그냥 해치고 싶었어. 안 되나?”그러자 심준호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순식간에 정양철의 잿빛 얼굴이 반쯤 부풀어 올랐다.평소 자주 화를 내지 않는 심준호였지만 그렇다고 힘이 약하지 않았다.그의 주먹을 맞은 정양철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기까지 했다.이윽고 심준호가 한 방을 더 날렸다.“이유를 말해!”하지만 정양철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가 피식 웃었다.“내 누나를 해치고 강하리를 해치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 아들을 이용하기까지 했어. 정양철,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정양철은 아내와 아들 얘기에 그제야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내가 한 짓이고 그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 없어.”심준호가 그를 놓아주자 의자에서 미끄러진 정양철의 두 눈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네 누나는 좋은 사람이지. 예쁘고 눈부셔서 나도 몰래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해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난... 선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심문석이 입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마중까지 다 나오고.”그렇게 말한 후 어르신은 앞으로 걸어갔다.그 순간 주변 사람들도 모두 구승훈 쪽으로 다가갔다.강하리는 가만히 서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호흡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사람들을 챙긴 뒤 강하리에게 다가갔다.“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았어?” 강하리는 그를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정이를 안았다.연정이도 구승훈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의 품에 안기자 더욱 들떠 있었다.강하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그는 연정이 아빠였다.“엄마 일은 고마워.”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날 원망만 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가자.”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심씨 가문 사람들과 걸음을 맞추며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뒤따르면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엄마 아직 화난 것 같네.”연정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옹알이했고 구승훈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괜찮아, 엄마 화 풀어줄 방법을 찾아보자, 알았지?”몇 대의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외곽에 있는 묘지를 향해 곧장 달렸다.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번에 온 건 심미현 때문이었다.강하리의 엄마가 심미현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백아영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와서 보든 심미현의 묫자리를 B시로 옮기든 홀로 이곳에 남겨두는 것보다 나았다.그런데 정양철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늦어진 것이다.오더라도 심미현에게 할 말이 있어야 했다.그래서 가족들은 정양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성으로 온 거다.묘지에서 백아영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딸이 이곳에 묻
구승훈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다.“어머님, 죄송합니다.”구승훈이 나지막이 말하자 강하리의 눈에 눈물이 다시 흘렀다.내내 구승훈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는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다.그녀는 지금도 구승훈을 데리고 심미현을 만나러 갔을 때 구승훈이 심미현 앞에서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는 정말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강하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고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훔치듯 닦아주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손을 피해버렸다.구승훈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린 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조금씩 닦아주었다.“미안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한번, 또 한 번...마치 분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미워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이 개자식이 뭐라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거듭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찾아와 괴롭히는 건지!대체 왜 자꾸만 이러는 걸까.이미 준 상처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구승훈은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강하리가 그동안 참아왔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연정이가 사라진 이후로 그녀는 마음속에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연정이가 돌아왔으니 이제 속에 쌓인 서러움을 표출해야 했다.구승훈은 그녀가 다 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품에 끌어안았다.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마치 과거의 사건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유산을 했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졌던 순간, 엄마가 사고를 당했던 순간,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 그리고 연정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을 들었던 순간.그 고통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강하리는 그를 홱 밀어냈다.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도망치듯 빠르고 다급했다.원하지도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마트까지 다녀와 한 상 가득 차렸는데 모두 구승훈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이었다.구승훈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후의 만찬은 아니지?”강하리가 눈을 흘겼다.“먹든 말든 맘대로 해.”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옆에서 해명했다.“사모님이 대표님께서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고 영양 보충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거예요. 대표님 입맛을 잘 아니까 앞으로 자주 요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구승훈은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 다가갔고 어느 틈에 그의 품에 안긴 강하리의 귓가에 한 마디가 들렸다.“강 대표님이 이러면 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지는데.”말하며 남자가 뒤에서 두 번 허리 짓까지 해대자 강하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고 가정부는 웃으며 연정이를 안은 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강하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구승훈을 홱 노려보았다.“좀 점잖게 굴 수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지금 충분히 점잖은 거야. 아주머니와 연정이가 없었으면 넌 지금 여기서 덮쳐졌어.”구승훈은 그 말을 하고 나면 강하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강하리가 뒤돌아서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조금만 참아. 오늘 밤엔 뭘 하든 다 들어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고 당황한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젠장, 이젠 정말 밥 생각이 사라졌다.손연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왔고 밥을 먹으며 강하리에게 일 얘기를 했다.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고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손연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어린이 의자에 앉아 밥을 집어 먹는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이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참 부럽다.”연정이가 숟가락을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손연지에게 건네며 입으로는 엄마라고 불렀다.손연지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
임희주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구승훈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다시는 사모님 찾아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의사인 제 말도 들어주셨으면 좋겠네요. 계속 이러시면 안 돼요.”“그건 임 선생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창문이 올라가고 검은색 마이바흐가 밤의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임희주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노민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차 안에서 준봉은 뒷좌석에 앉은 구승훈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차 밖의 불빛이 이따금 아른거리며 준봉은 상사의 안색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준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엔 임 선생님도 좋은 마음에 그런 건데 정말 서두르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말을 마친 준봉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임희주가 좋은 의도에서 그랬든 아니든 절대 강하리에게 찾아가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됐다.오늘 임희주와 강하리의 대화 내용은 구승훈이 일찌감치 카페의 카메라 영상을 도출해 알아냈다.누가 그에게 부담을 준다든지, 지나치게 강요한다든지, 이런 말을 어떻게 감히 강하리에게 하도록 내버려두겠나.준봉은 조용히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구승훈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서산 퍼스트 빌리지는 시내 한복판에 있었지만 무척 조용했고 준봉이 차를 세우자 별장 마당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불빛 아래 마당에서 연정이가 혼자서 강하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걸음마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적으로 걷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도 강하리는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연정이가 강하리에게 몇 걸음 다가서더니 강하리의 품으로 뛰어들었고 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연정이를 안자 모녀의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내내 싸늘했던 구승훈의 표정이 마침내 부드럽게 바뀌었고 강하리가 연정이를 품에 안은 채
“승훈아,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너만 원하면 내일 열 명이라도 보내줄게.”회의실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하며 늙은이들은 책상을 쾅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옆에서 지켜보는 준봉이 더 불안했지만 구승훈은 가만히 있었고 재밌는 연극이라도 치켜보는 듯 이따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두드렸다.“구승훈, 우리 말 듣고 있는 거야?”휴대폰 화면에 아내라는 글이 뜨자 구승훈의 눈빛이 단번에 부드러워지더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퇴근했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답했다.“언제 퇴근해?”구승훈은 회의실에서 하나같이 격앙된 표정을 짓는 늙은이들을 훑어보았다.“곧.”“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구승훈은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고 방금 강하리의 전화를 받을 때 보였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싸늘함만 남았다.“얘기 다 끝났습니까?”한 마디에 회의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고 구승훈은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여씨 가문 조상의 묘 하나 파헤친 걸로 왜들 그리 흥분하세요?”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안타깝지만 그런 수작 나한텐 안 통합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이 회사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장 나가도 좋습니다. 정안에 차고 넘치는 게 주주들이라서요. 하지만 여기 남아서 나와 내 아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당신들 조상 무덤까지 파헤칠 겁니다. 회의 끝.”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준봉은 그의 뒤를 따르며 회의실에 있는 주주들을 바라보았다.하나같이 표정들이 가관이었다.정안그룹이 과거 SH그룹보다 훨씬 대단했기에 주주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정안의 지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늙은이들이 한 방 먹은 모습을 보니 준봉도 속이 시원했다.그동안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남몰래 강하리
제 자리에 멈춰 선 여명희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강하리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진시연 또한 한번 들여보낸 이상 두 번을 못 할까.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심씨 가문으로 향했고 심준호는 여전히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오호, 시집갔다고 친정은 잊은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오지도 않았잖아.”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외숙모는 아직 안 돌아왔어요?”최근에야 애당초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심준호의 결혼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준호 본인이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을 부렸는지 모른다.결국 이 결혼은 심준호가 심예진을 곁에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반면 심예진은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만 받아들였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나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기에 심준호는 강하리가 숙모 얘기를 꺼내자 눈썹이 들썩거렸다.“다 커서 이젠 팔이 밖으로 굽네?”강하리는 웃으며 옆으로 가서 심준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삼촌, 숙모 찾으러 안 갈 거예요?”심준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네 숙모는 어디로 도망 못 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심준호에게 구승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이렇게 물었다.“삼촌한테는 얘기했어요?”심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소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승훈이가 말한 적은 없는데...”심준호는 문득 어렸을 때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승훈이는 어릴 때부터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어. 그리고 그 원인이 어머니였지.”심준호는 강하리에게 당시 본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고 무표정하던 강하리의 얼굴이 어느 순간부터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심준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도 정신과 치료로 받은 전기충격 치료 때문이었어. 그때 아마 9살 정도 됐겠네.”심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작은 꼬맹이가 한계까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