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구승훈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심문석이 입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마중까지 다 나오고.”그렇게 말한 후 어르신은 앞으로 걸어갔다.그 순간 주변 사람들도 모두 구승훈 쪽으로 다가갔다.강하리는 가만히 서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호흡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사람들을 챙긴 뒤 강하리에게 다가갔다.“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았어?” 강하리는 그를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정이를 안았다.연정이도 구승훈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의 품에 안기자 더욱 들떠 있었다.강하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그는 연정이 아빠였다.“엄마 일은 고마워.”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날 원망만 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가자.”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심씨 가문 사람들과 걸음을 맞추며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뒤따르면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엄마 아직 화난 것 같네.”연정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옹알이했고 구승훈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괜찮아, 엄마 화 풀어줄 방법을 찾아보자, 알았지?”몇 대의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외곽에 있는 묘지를 향해 곧장 달렸다.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번에 온 건 심미현 때문이었다.강하리의 엄마가 심미현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백아영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와서 보든 심미현의 묫자리를 B시로 옮기든 홀로 이곳에 남겨두는 것보다 나았다.그런데 정양철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늦어진 것이다.오더라도 심미현에게 할 말이 있어야 했다.그래서 가족들은 정양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성으로 온 거다.묘지에서 백아영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딸이 이곳에 묻
구승훈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다.“어머님, 죄송합니다.”구승훈이 나지막이 말하자 강하리의 눈에 눈물이 다시 흘렀다.내내 구승훈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는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다.그녀는 지금도 구승훈을 데리고 심미현을 만나러 갔을 때 구승훈이 심미현 앞에서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는 정말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강하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고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훔치듯 닦아주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손을 피해버렸다.구승훈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린 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조금씩 닦아주었다.“미안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한번, 또 한 번...마치 분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미워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이 개자식이 뭐라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거듭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찾아와 괴롭히는 건지!대체 왜 자꾸만 이러는 걸까.이미 준 상처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구승훈은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강하리가 그동안 참아왔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연정이가 사라진 이후로 그녀는 마음속에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연정이가 돌아왔으니 이제 속에 쌓인 서러움을 표출해야 했다.구승훈은 그녀가 다 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품에 끌어안았다.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마치 과거의 사건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유산을 했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졌던 순간, 엄마가 사고를 당했던 순간,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 그리고 연정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을 들었던 순간.그 고통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강하리는 그를 홱 밀어냈다.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도망치듯 빠르고 다급했다.원하지도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았다.“선배가 회복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주씨 가문과 약속했어.”구승훈이 웃었다.“진짜 못 만나는 거야, 아니면 핑계가 필요한 거야?”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훈의 말이 다시 들렸다.“하리야, 너와 나 사이엔 헤어지더라도 이유는 딱 하나, 네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주씨 가문이든 주해찬이든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될 건 없어.”강하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해찬의 일로 핑계를 댄 건 맞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그녀를 구하기 위해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마음 편히 다른 사람과 사랑놀이나 하겠나.더군다나 그 사랑과 애정이 가져다준 씁쓸함 때문에 다시는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차는 도시 외곽의 한 별장까지 달렸다.구승훈은 먹고 지내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강하리는 별장으로 돌아와 연정이에게 분유를 먹인 뒤 방으로 안고 갔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막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준봉이 갑자기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어르신께서 오셔서 심씨 가문 어르신을 뵙고 싶답니다.”준봉의 말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고 심문석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해지며 콧방귀를 뀌었다.“날 만날 낯짝은 있고?”심금천, 백아영, 심지어 심준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이곳으로 온 이유 중에 심미현을 보는 것 외에 구동근에게 찾아가 따지는 것도 있었다.그런데 찾아가기도 전에 상대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할아버님, 만나고 싶지 않으면 돌려보내면 됩니다.”구승훈이 심문석을 바라보며 말하자 심문석은 그를 노려보았다.“개자식, 네가 연기하는 거 모를 줄 알아?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제가 알려준 게 맞아요. 따질 건 확실히 따져야죠.”심문석은 더 말하지 않았다.
구동근은 할 말이 없었다.“그땐 나도 몰랐잖아.”심금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넌 문씨 가문을 좋아하잖아. 그럼 문씨 가문에서 며느리 데려오길 기다려. 우리 심씨 가문은 감당 못 하겠으니까!”심금천이 갑자기 문씨 가문 얘기를 꺼내자 구동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고른 며느리가 감옥에 갔다.문씨 가문이 무너지면서 그의 체면도 한껏 깎여버렸다.“문씨 가문 얘기는 꺼내지 마. 나도 애초에 그놈들한테 속은 거야.”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백아영을 바라보았지만 백아영은 그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백아영 씨, 그간 우리가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그런데 백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다가와서 구동근의 뺨을 때렸다.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백아영은 때린 후에도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이제 와서 정을 운운해? 우리 딸 해칠 때는 왜 망설이지 않았는데!”구동근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누군가에게 맞아본 것은 처음이라 두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힘겹게 감정을 억눌렀다.지금 구씨 가문은 구승훈이 지배하고 있었고 정안그룹이 문씨 가문을 접수한 뒤로 구씨 가문보다 더 잘나가고 있었다.지금 심씨 가문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면 개자식 구승훈이 돌아가서 그를 어떻게 상대할지 몰랐다.그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내가 그쪽 딸을 해쳤다고 말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네요.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요.”하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받아쳤다.“구동근 씨, 이만 돌아가세요. 본인 잘못을 깨달았을 때 내 딸 무덤 앞에 가서 머리 조아리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내쫓았다.구동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감히 화를 내지 못했다.구승훈을 돌아봐도 그는 이미 일어나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할아버지, 돌아가세요. 다음번에 오실 땐 잘못을 뉘우치길 바라요.”구동근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
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발을 뻗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나 다 씻었으니까 이제 가.”반면 구승훈은 완전히 잠이 든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연기겠지?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꼬집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이번엔 그의 배를 꽉 잡자 구승훈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는 곧바로 강하리의 손을 낚아채 품에 끌어당기더니 몸을 뒤집어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눈치챘어?”“쓸데없는 소리, 당신 그렇게 안 자잖아.”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난 잘 때 어떤 모습인데?”다소 야릇한 말이었다.강하리는 그의 질문에 문득 지금 두 사람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그녀는 구승훈의 어깨를 두 번이나 세게 밀었다. “일어나.”가운만 입은 상태라 움직이지 않으면 모를까, 계속 움직이니 안쪽의 속살이 언뜻 드러났다.위에서 이 모습을 내려다보던 구승훈은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가 움찔하며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구승훈... 꺼져. 여기서 이상한 짓 하지 마!”강하리의 얼굴은 어색한 홍조로 뒤덮였다.이 개자식이 진짜로 반응할 줄이야!구승훈이 낮은 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어깨 움푹 들어간 곳에 고개를 파묻었다.“내 몸이 반응하는 건 내가 여전히 강 대표님을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이지. 그리웠어, 몸도 마음도.”“열렬히 사모는 무슨, 딸이 있는데 말 좀 가려서 할 수 없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할게. 앞으로는 이런 말은 딸이 없을 때 할게.”강하리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노려보았다.‘이 개자식이 대체 어디까지 뻔뻔해지려고 이러는 건지!’“일어나!”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구승훈!”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구승훈이 손목을 단단히 잡은 채 머리 위로 포박하고 있어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움직이지 마, 그냥 키
어찌 되었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연정이 옆에 누웠다.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었다.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던 강하리는 어깨에 숄을 두르고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날씨가 서서히 따뜻해지고 아래층 정원의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강하리는 발코니에 서서 정원의 커다란 리시안셔스 꽃밭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구승훈이 작은 어촌 마을에 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중에 엄청 많은 리시안셔스 심어줄게.”강하리는 순간 가슴과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지나간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돌리는데 어딘가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깊은 밤 정원의 불빛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였다.구승훈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손에 들고 정원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강하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둘렀던 옷을 꽉 움켜쥐었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자 강하리는 재빨리 뒤돌아 방으로 돌아갔다.들어온 후 그녀는 이미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구승훈은 휙 사라지는 강하리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내뱉었다.‘그렇게 보기 싫은가.’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일어나 꽃다발을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베개 옆에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강하리가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연정이가 몸을 뒤척이며 눈앞에 놓인 꽃다발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강하리는 깜짝 놀라다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연정이에게 꽃을 건넸다.“아빠가 준 거야.”그녀가 속삭이자 연정이가 꽃을 껴안고는 놓지 않았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연정이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안아주었다.“아가, 아빠 보고 싶어?”연정이는 여전히 손에 꽃을 들고 있다가 강하리를 잠시 쳐다보더니 달려들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은 연성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백아영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심문석은 이날 강하리의 정체를 대중에게 알릴 예정이었다.구승훈이 묘지에 연락해서 심미현의 무덤을 B시로 이장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다만 이장하는 날 진태형이 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최근 해외 손님을 맞이하느라 B시에 있을 때도 심씨 가문에 강하리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 하필 이럴 때 그가 나타났다.남자는 검은 우산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강하리는 진태형을 보고 문득 괴로워졌다.심미현과 진태형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 심미현이 실종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부러운 한 쌍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강하리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진 장관님.”진태형은 복잡한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시연이 이미 이틀 전에 강하리와 정양철의 친자 확인 검사 결과 강하리가 정양철의 딸로 판명됐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기대를 품고 있었다.혹시 심미현과 그의 딸이 아닐까.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백아영이 진태형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왔어요?”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사람... 보러 왔어요.”백아영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기뻐할 거예요.”진태형은 몸을 웅크리고 손을 뻗어 비석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에는 평소의 평온함은 온데간데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만이 남아있었다.“참 매정해. 나만 이렇게 두고 갔네. 약속했잖아, 분명 흰머리 될 때까지 함께하자고 했잖아.”진태형은 말하며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자리에 있던 누구도 말이 없었고 강하리는 시선을 돌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하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품에 안는 순간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사람이 살면서 가장 큰 한이 뭐냐고 한다면 당연히 생과 사의 이별이었다.구승훈은 그녀를 살며시 토닥였다.“울지 마. 우린 더
진시연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우리 아빠랑 미현 이모 사이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하리 씨가 아빠 딸은 아니지만 아빠는 분명 하리 씨를 친딸처럼 대할 거고 그러면 앞으로 우린 자매인 거죠.”멈칫한 강하리는 유골함을 들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사실 그녀는 자신이 진태형의 딸이 아닐지 늘 의심하고 있었다.하지만 심준호가 아직 확인 중이라고 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결과가 밝혀지면 아빠를 찾아갈 생각뿐이었다.그런데 진태형의 딸이 아니라니, 그러면 친아빠는 누구일까?강하리는 다소 무거운 숨을 뱉으며 진시연을 빤히 바라봤고 뒤에 있던 백아영도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실 심준호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심준호가 선뜻 말하지 않았는데 진시연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언급할 줄이야.“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하리가 태형 씨 딸이 아니라니?”진시연은 그때야 문득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낯빛이 창백해졌다.“몰랐어요? 죄송해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심준호는 살짝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입 다물어.”그가 깊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시연이 잘못한 듯 말했다.“죄송해요, 삼촌.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심준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강하리를 감쌌다.“가자, 돌아가서 얘기해줄게.” 강하리는 침묵하며 심준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참지 못하고 물었다.“삼촌은 우리 아빠가 누구인지 알죠?”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강하리 아버지에 대한 문제는 구승훈 외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친자 확인 검사가 조작됐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결국 누가 꼬리를 드러내는지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그런데 진시연일 줄이야.심준호는 뒤로 물러나 구승훈을 힐끗 쳐다봤고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심준호는 시선을 거두며 강하리를 두 팔로 감쌌다.“아직 확인하고 있어. 아빠가 누구인지 그렇게 궁금해?”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