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연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나한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우리 아빠랑 미현 이모 사이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하리 씨가 아빠 딸은 아니지만 아빠는 분명 하리 씨를 친딸처럼 대할 거고 그러면 앞으로 우린 자매인 거죠.”멈칫한 강하리는 유골함을 들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사실 그녀는 자신이 진태형의 딸이 아닐지 늘 의심하고 있었다.하지만 심준호가 아직 확인 중이라고 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결과가 밝혀지면 아빠를 찾아갈 생각뿐이었다.그런데 진태형의 딸이 아니라니, 그러면 친아빠는 누구일까?강하리는 다소 무거운 숨을 뱉으며 진시연을 빤히 바라봤고 뒤에 있던 백아영도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실 심준호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심준호가 선뜻 말하지 않았는데 진시연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언급할 줄이야.“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하리가 태형 씨 딸이 아니라니?”진시연은 그때야 문득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낯빛이 창백해졌다.“몰랐어요? 죄송해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심준호는 살짝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입 다물어.”그가 깊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시연이 잘못한 듯 말했다.“죄송해요, 삼촌.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심준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강하리를 감쌌다.“가자, 돌아가서 얘기해줄게.” 강하리는 침묵하며 심준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참지 못하고 물었다.“삼촌은 우리 아빠가 누구인지 알죠?”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강하리 아버지에 대한 문제는 구승훈 외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친자 확인 검사가 조작됐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결국 누가 꼬리를 드러내는지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그런데 진시연일 줄이야.심준호는 뒤로 물러나 구승훈을 힐끗 쳐다봤고 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심준호는 시선을 거두며 강하리를 두 팔로 감쌌다.“아직 확인하고 있어. 아빠가 누구인지 그렇게 궁금해?”
구승훈의 질문에 진시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구승훈 씨, 오해에요.”그녀는 다소 억울한 듯 말했다.“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강하리 씨가 정말 아빠 딸이라면 전 더할 나위 없이 기쁘죠. 아빠가 미현 이모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고 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텐데 어떻게 강하리 씨가 아빠 딸이 아니기를 바라겠어요?”진시연을 바라보는 구승훈의 검은 눈동자엔 온통 칠흑 같은 차가움뿐이었고 진시연은 그의 시선에 더욱 억울해져 눈시울을 붉히며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아빠, 정말 아니야.”진태형은 이쪽으로 걸어오며 진시연을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그럼 승훈이 질문에 대답만 해.”진시연은 멈칫하더니 다소 쓴웃음을 지었다. “아빠, 아빠도 날 의심하는 거야?” 진태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시연아, 당당하면 겁낼 게 없어. 네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아무도 널 의심 안 해.”진시연은 여전히 억울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유전자 담당 동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양철 사건이 워낙 크게 터져서 사람들이 호기심에 수군거리는 건 당연하죠. 강하리 씨가 아빠 딸인 줄 알고 계속 주시했을 뿐이에요.”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구승훈과 심준호의 눈빛은 어둡기만 했다.반면 강하리는 정양철의 이름을 언급하자 속이 더 답답해졌다.그녀는 심호흡하며 말했다.“이만 가죠.”그녀가 돌아서서 차 쪽으로 향했는데 진태형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강하리 씨.”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려 진태형과 두 눈을 마주했다.“네, 진 장관님.”진태형은 가슴 아픈 눈빛으로 그녀 앞에 서서 말했다.“B시로 돌아가면 나랑 친자 확인 검사 해봐요.”그의 말이 나오는 순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굳어버렸다.그동안 진태형과 강하리의 친자 확인 검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혹시나 결과가 아니라고 나오면 두 사람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 걱정돼서였다.그런데 진시연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진태형이 원할 줄이야.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움찔했다.“진 장관님, 저
구승훈이 심준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저 여자 짓일까?”심준호는 말없이 진태형의 차를 바라봤다.진시연은 진태형 친구의 딸이다. 진태형이 신세를 졌던 친구인데 심준호의 누나가 사라진 후 진태형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나중에 그 친구가 사고를 당했을 때 진시연을 데려왔고 아이가 곁에 있으니 마침내 생기를 되찾았다.진태형은 그동안 진시연을 친딸처럼 대했다.그리고 진태형 때문에 심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진시연을 가족처럼 대했다.그래서 심준호는 진시연이 그런 짓을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알아볼게.”구승훈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심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강하리가 있는 한 심씨 가문에서 절대 억울한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그는 심씨 가문 사람들을 공항에 내려준 뒤 곧장 강하리 곁으로 걸어갔다.“아까 고마웠어.”강하리가 속삭이자 구승훈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고맙다는 인사는 조금 더 실질적인 걸로 받고 싶은데.”강하리는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어서 그를 노려보았다.구승훈은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이런 일 마음에 담아두지 마. 누가 친아빠면 어때?”말하며 그의 눈동자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넌 그냥 너야.”말을 마치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눈동자에 조금 전 어두운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 마음속에 넌 그냥 너고 다른 사람이랑 아무 상관 없어.”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고마워.”구승훈은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말에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그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무슨 상관이겠나.어차피 30년 가까이 그녀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고 과거 송동혁과 강찬수까지 겪었는데 정양철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상관이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했다.“난 괜찮아.”전에는 속이 답답했는데 이젠 정말 괜찮았다.구승훈이 웃으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그럼 웃어봐.”강하리는 그를
강하리의 걸음이 멈칫하며 숨이 가빠오고 몸마저 경직되었지만 잠시 후 꿋꿋이 앞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얕게 올라갔다.매정한 여자 같으니라고.다른 사람에게도, 그에게도 똑같이 매정한 사람이었다.구승훈은 심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B시로 가지 않았다.아직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심씨 가문 일행은 B시로 돌아온 뒤 심미현을 심씨 가문 조상들이 묻힌 곳에 잘 묻어주었다.진태형과 진시연도 왔다.의식이 끝난 후 진태형은 강하리를 데리고 친자 확인 검사를 받기로 했지만 부서에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나중에 전화할게요.” 진태형이 강하리를 바라보자 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진태형이 떠난 뒤에야 강하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진태형의 단호함 때문이었을까, 그녀도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백아영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버지가 누구든 네가 이 백아영의 손녀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애교 섞인 몸짓으로 백아영을 끌어안았다.“당연하죠, 할머니는 저를 버릴 수 없죠.”백아영은 웃음이 났고 진시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다가왔다.“강하리 씨.”강하리는 뒤돌아 진시연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얼굴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네, 진시연 씨.”진시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강하리 씨, 미안해요.”강하리가 웃었다.“괜찮아요.”하지만 진시연은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그래도 나 때문에 속상하게 했잖아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하리 씨. 그리고 뭐가 됐든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진시연이 진심을 담아 말해도 강하리는 그저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었다.“고마워요.”진시연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강하리가 백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저 연정이 보러 갈게요.”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유
눈앞에 있는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강하리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구승훈이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나 보고 싶었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드레스 보냈어?”구승훈이 웃었다.“마음에 들어?”강하리는 전화기를 들고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었다.“구승훈, 나...”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강하리는 잠시 멈칫했고 입가에 맴돌던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구승훈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응?”강하리는 순간 조금 짜증이 났다.“아니야.”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끊고 나서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구승훈 개자식!’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녀의 일상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있는 건지.어제는 밥 먹기 전에 구승훈이 보낸 음식을 받았고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구승훈이 사람을 시켜 아침 식사를 보내왔다.심지어 연정이에게 필요한 것들, 먹는 것과 입는 것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겨주었다.누가 보면... 그가 매일 매 순간 그들 모녀를 떠올리는 줄 알겠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문밖에서 도우미가 그녀를 재촉하자 강하리는 대답하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그녀는 드레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들었다.찬란한 불빛, 화려한 조명이 번뜩였다.백아영은 생일 파티를 크게 주최할 생각이 없었지만 강하리 때문에 심씨 가문은 B시의 유명 인사들을 모두 초대했다.심씨 가문의 손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B시 상류층에 쫙 퍼졌다.강하리는 백아영에게 이끌려 한명 한명 인사하느라 바빴는데 누가 봐도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다들 입을 모아 축하하기 바빴다.백아영과 함께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던 강하리의 시선이 이따금 홀을 두리번거렸다.백아영은 다른데 정신이 팔린 강하리를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찾는 사람이라도 있어?”강하리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누굴
석미란은 고개를 돌려 서리를 머금은 듯한 구승훈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했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상대는 그녀를 어른으로서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석미란은 더더욱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조금 전 휴대폰으로 받은 사진은 구승훈이 공항에서 강하리와 키스하는 장면이었다.아들은 아직 중환자실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데 이 망할 남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주해찬이 깨어날 때까지 연애하지 않겠다더니, 꼭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석미란은 차갑게 웃었다.“내가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너희들이 사람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건 아니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들고 때리려던 사람치고 당당하시네요?”석미란은 그를 노려봤다.“때릴 만하니까 때리는 거지!”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사람들한테 말해볼까? 심씨 가문과 구씨 가문이 우리 주씨 가문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정말 우리 주씨 가문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거야?”아무리 구씨 가문이나 심씨 가문보다 못하다고 해도 주씨 가문에는 아직 어르신 주호준이 있었고 심문석도 그를 만날 땐 예의를 갖춰야 했다.다만 주호준은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하며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들은 강하리 때문에 저 지경이 됐는데 망할 강하리는 뻔뻔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전부 다 석연란 때문이다. 애초에 강하리와 주해찬이 결혼하게 밀어붙여야 했는데!두 사람의 다툼은 진작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석미란이 이렇게 말을 하자 사람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기까지 했다.게다가 심씨 가문에 막 돌아온 오늘의 주인공과도 관련이 있으니 사람들은 더더욱 흥미가 당겼다.심씨 가문 사람들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가 이쪽에서 소란이 들리자 그제야 가까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지?”심준호가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인상을 찌푸린 채 석미란을 슬쩍 보니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무슨 일이냐고? 다 네 잘난 조카가 한 짓 때문이지!”
“여사님,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으시면 더 할 얘기가 없네요.”석미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준호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이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강하리에게 이런 식으로 욕설을 퍼붓게 놔둘 수는 없었다.멈칫하던 석미란이 다시는 나쁜 년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이렇게까지 하면서 안 만난다고?”심준호의 올곧은 시선이 구승훈에게 향했다.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구승훈이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그가 나서야 했다.강하리가 입술을 굳게 다물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제가 강제로 키스했어요.”말문이 막힌 석미란이 구승훈을 노려보았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하지만 구승훈은 차가운 웃음만 내뱉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난 차라리 다들 하리가 내 여자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네요.”석미란은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이대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아들과 이어져야 할 여자가 지금 다른 남자와 얽히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다시는 구승훈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렇게는 못 한다.뭐라고 해도 구승훈은 연정이 아빠고 연정이를 위해서라도 구승훈을 만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피식 웃는 구승훈의 미소엔 조롱이 가득 담겼다.“왜요, 또 감정적으로 몰아붙이시려고요? 아니면 은인이라는 이유로 협박하시려고요?”석미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감정적으로 몰아붙이다니? 애초에...”“하리가 주해찬과 만날 때 둘을 어떻게 갈라놨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당신들 입으로 하리는 주해찬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이제 하리가 심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니까 서둘러 결혼시키고 싶으세요? 교통사고도 주해찬이 쓸데없는 말을 들어서 생긴 거고 하리를 지킨 것도 본인 선택인데 왜 하리에게 주해찬 목숨의 대가를 치르라고 하세요? 주씨 가문에선 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나요?”구승훈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구승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주호준은 강하리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강하리도 나지막이 답했다.“제가 죄송하죠.”더 단호하게 거절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주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주씨 가문에서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강하리는 주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른다.결국 잘못을 저지른 건 그들 주씨 가문이었다.주호준은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심문석을 바라봤지만 심문석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저 아이의 고집만 아니었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강하리가 평생 마음 편히 살기 힘들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됐어, 이만 가서 쉬어.”그는 다가가 강하리를 토닥였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구승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조금씩 호전될 기미를 보이던 관계가 오늘 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주해찬 때문에.허...할 수만 있다면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차라리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소란이 끝나고 파티는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수군거렸다.강하리도 파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만 당당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은 상관없었다.와인 한 잔을 들고 3층 테라스로 나갔다.아래층의 웃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테라스 문이 열리고 구승훈이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연기가 피어오르자 남자의 복잡하고 씁쓸한 눈빛이 연기 속으로 감춰졌다.강하리는 그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다소 쓸쓸한 밤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살짝 몸이 떨렸다.강하리는 잔에 든 와인을 다 마시고 뒤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