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대로 가버렸다.복도에 서 있던 강하리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저 개 같은 남자가 대체 뭘 하려고...’강하리는 양육권을 놓고 싸우겠다고 했으니 그가 무슨 짓이든 못 할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이 남자는 갖은 수단으로 자신을 몰아붙일 거다.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뒤돌아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아래층에는 이미 진시연이 떠난 뒤였다.심준호는 우울한 얼굴로 내려오는 구승훈을 보고 눈썹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백아영 부부와 심문석은 모두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세 노인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이전까지 심준호는 이들에게 구동근에 대한 언급 없이 정양철이 심미현에게 한 짓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하지만 조금 전 진시연이 떠난 뒤, 심준호는 구동근이 한 짓까지 모두 이야기했다.강하리에게든 심미현에게든 그런 짓을 했으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심준호를 바라봤고 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이 심호흡을 하고 세 노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할아버님, 할머님, 증조할아버님, 하리와 아주머니한테 일어난 일은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저 때문에 고생했으니 마음껏 때리고 욕하세요.”갑자기 무릎을 꿇은 구승훈의 행동에 세 사람은 모두 당황했지만 이내 다들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난 자네 같은 손자도 없고 구씨 가문 사람들과는 감히 엮이지 못하겠으니까.”“할아버님...”그러나 심금천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심문석은 너무 화가 나서 지팡이를 집어 들고 그의 몸을 격하게 내리쳤다.“이놈의 자식, 하리를 얼마나 고생시켰어! 걔가 뭘 잘못했다고 몇 번이고 그런 짓을 해!”구승훈은 피할 틈도 없이 지팡이가 이마에 직격탄을 날렸고 피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증조할아버님, 할아버님, 할머님, 제가 다 보상해 줄 겁니다. 할아버지도 제가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 저랑 하리 반대만 하지 말아
“정양철과 강하리?”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바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겼고 내용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두 사람의 친자 확률은 99.99%입니다.]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확실해?”심준호는 의자에 기대었다.“심씨 가문 병원에서 한 건데 누가 감히 조작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친자확인서를 옆으로 던져버렸다.“다시 해봐. 심씨 가문 병원 말고 밖에 다른 사람 찾아서 해. 정양철이 진짜 강하리의 아버지라면 미현 이모를 해칠 이유가 없어. 게다가 강하리의 어머니가 심미현이라는 걸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했겠어?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야.”심준호가 차갑게 웃었다.“이미 샘플 보냈어.”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도 이 사실을 알아?”심준호는 고개를 저었다.“말할 생각 없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말하지 마. 정양철은 어떻게 할 거야?”심준호는 만년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어떻게 할 생각 없어. 그냥 죗값을 치르면 돼. 내 누나를 해쳤는데 누구 아버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준봉이었다.“대표님,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구승훈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여기서 안 머물고?”심준호가 참지 못하고 묻자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일이 생겨서 연성으로 돌아가야 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닫혀있던 강하리의 방문이 구승훈이 살며시 노크하자 잠시 후 열리며 강하리가 잠옷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야?”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우리 딸 보러 왔는데 괜찮아?”강하리는 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에 다시 삼켜버렸다.그녀가 문 옆으로 물러서자 구승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들어왔다.여전히 잠들어 있는 연정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구승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든 연정이를
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구승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맙다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나.구승훈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괜찮아, 고마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단순한 목적으로 연정이를 너한테 데려온 건 아니니까. 원래는 연정이를 연성으로 데려가서 사진만 보내려고 했어. 그러면 네가 자연스럽게 연성으로 올 테니까.”하지만 그는 강하리가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랐다.또한 그녀가 한동안 아이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로 그녀를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왜 이렇게 비열해?”구승훈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하리야, 난 너랑 가까워지고 싶을 뿐이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지만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예전 일은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내가 하는 것 지켜봐 주면 안 돼?”강하리는 그를 외면했다.“이만 가, 나 잘 거야.”구승훈은 연정이를 바라보았다.“아마 밤에 깰 거야. 넌 원래도 잘 못 자는데 베이비시터 불러줄까?”강하리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필요 없어.”그녀는 이제 연정이를 24시간 내내 자신의 시야에 두고 싶었다.구승훈은 그녀의 거부하는 표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꼬리를 문질렀다.“주씨 가문 사람들이랑 멀리 해. 감정에 휩쓸려서 넘어가지 마. 일 끝나면 너랑... 아이 보러 올게.”강하리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 건드리지 마!”구승훈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연정이를 바라보았다.“너희 엄마 너무 못됐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고 바로 그때 구승훈이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하리야, 나 기다려.”그렇게 말한 뒤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강하리는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깊게 심호흡했다.마음이 혼란스러웠다.이 남자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옷을 챙긴 뒤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별장에서 나
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노민준은 잠시 침묵했다.“와서 얘기해.”구승훈은 담배를 끄고 다가갔다.“특이하게 작용하는 신경 약물인데 쉽게 말해서 짜증과 불안을 느끼고 이성을 잃게 만드는 약이야. 그래서 네가 짜증이 났던 것도 당연한 거고.”“그러면 해결책이 있나요?”준봉이 옆에서 물었다.노민준은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약으로 억제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러면 앞으로 불면증이 잦아지고 두통까지 생길 수 있어요.”옆에 앉은 구승훈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물었다.“억제하지 않으면?”“어떻게 될지 몰라.”노민준이 바로 대답하자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형 방법대로 해 보자.”노민준의 연구실을 나온 구승훈은 준봉을 보내고 홀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두 눈에는 차가운 조롱이 가득했다.여초연은 어떻게 하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고문할 수 있을지 정말 잘 알고 있었다.‘이성을 잃는다라... 누구한테 이성을 잃게 만드는 걸까, 강하리?’구승훈이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노민준이 때마침 연구실에서 나오며 홀로 서 있는 그를 바라봤다.“걱정하지 마, 해독제 빨리 만들 테니까.”구승훈이 무심하게 대꾸했다.노민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더 이상 혈연이라는 것에 조금의 희망도 갖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뿐이었다.어쨌든 친어머니인데 그녀의 눈에 구승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노민준은 그와 함께 담배 하나를 태우고는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손에 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툭툭 털어 넣고는 곧장 차로 향했다.차에 타자마자 그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 어머니를 해친 경호원과 빚쟁이들 전부 복싱장으로 데려와.”구승재는 깜짝 놀랐다.“형, 무슨 일 있었어?”“아무 일 없어.”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구승훈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지만 핸들을 잡은 손에 어느새 핏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얼마 후 경호원은 링 위에 쓰러진 채 꼼짝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의 주먹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일 기세였다.“형!”링 밖에 있던 구승재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그만해, 형! 그러다 죽어!”하지만 구승훈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마침내 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정서원 씨를 통제하라고 했습니다.”그의 얼굴로 날아들던 주먹이 코앞에서 멈추며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러면 누가 정서원을 건드리라고 시켰어?”그가 말하면서 손목의 관절을 돌렸다.경호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정양철, 정양철이요!”구승재는 멈칫하며 같이 온 사람들에게 황급히 그를 데려가라고 말했다.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링 아래를 바라보았다.“다음.”오전 내내 한 명씩 차례로 링에 올라갔다가 들려서 내려갔다.구승훈은 지치지도 않고 내내 링 위에 있었다.땀은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고 셔츠에 가려진 가슴으로 떨어졌다.얼굴에 상처가 생기긴 했어도 여전히 감출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형, 그만해.” 구승재가 링 위로 올라갔다.구승훈은 이미 구승재만 남은 장내를 바라보다가 글러브를 벗어 옆으로 던졌다.옆에서 물 한 병을 집어 얼굴에 들이붓는 구승훈 옆에서 구승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형...”“괜찮아.” 그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죽이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봐주지 않았나.“가서 다친 데 치료해.”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강하리 씨에게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연정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서 저 사람들 잘 감시하고 진술서 받아서 최대한 빨리 심준호한테 전해줘.”구승재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다른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했다.형이 먼저 말하기 전엔 물어봐도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다.하지만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이와 놀고 있던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확인하고 연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꽉 쥐며 심호흡하고는 바로 화제를 바꿨다.“무슨 일 있었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구승재가 전화했어?”강하리는 부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손에 들고 있던 블레이저를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느긋하게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복부에 몇 군데 멍이 들어 있었고 그는 상처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무시해. 별일도 아닌데 괜히 그러는 거야. 연정이는? 잘 적응하고 있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했다.“정말 괜찮아?”구승훈은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렇게 걱정돼?”“말하기 싫으면 됐어.”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는 것을 본 구승훈은 서둘러 말했다.“일이 좀 있긴 해.”강하리가 멈칫했다.“뭔데?”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네 생각에 몸이 반응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괜히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순식간에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다소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으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강하리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돌아왔고 백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승훈이야?”강하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백아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하리야, 할머니한테 네 진짜 마음을 말해줄 수 있어? 주씨 가문 일은 어떻게 할 거니? 승훈이한테는 아직 마음이 있는 거지? 너희한테는 연정이도 있잖아.”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 “주씨 가문과 약속했으니까 그건 지킬 거예요.”구승훈은...아직 그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한순간에 바로 지워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사랑도, 증오도 평생의 모든 감정을 그 남자에게 줬다.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이번에는 연정이가 무사히 고비를 넘겼지만 다음번에는?엄마처럼 되지는 않을까. 그녀의 고집과 감정 때문에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감히 모험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이 준 상처와 속임수, 숨겼던 진실과 저버린 믿음도 전부 없었던 일로 치부
녹음을 들은 정양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했지만 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심준호는 다른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강찬수, 당신이 도박으로 생긴 빚 1억은 내가 대신 해결해 줄게. 하지만 너도 날 위해 뭔가를 해줘야지. 일이 끝나면 크게 한몫 더 챙겨줄게.]그러자 강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뭔데?][교통사고를 조작해서 네 아내를 죽여.]강찬수의 형이 강찬수로부터 빼앗은 휴대전화에서 나온 녹음 파일이었다.구승훈은 강찬수도 정양철이 손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문득 이 휴대폰이 떠올랐다.뜻밖에도 그 휴대폰에서 실제로 녹취록이 발견될 줄이야.정양철은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마지막에 이런 일로 상황이 뒤집힐 줄은 몰랐다.심준호의 눈에서 매서운 기색이 번뜩이며 다가와 정양철의 옷깃을 잡았다.“정양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누나랑 같이 자랐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한테 잘해줬는데 왜 우리 누나를 해쳤어!”정양철의 얼굴은 잿빛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서글픈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이유는 없어. 그냥 해치고 싶었어. 안 되나?”그러자 심준호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순식간에 정양철의 잿빛 얼굴이 반쯤 부풀어 올랐다.평소 자주 화를 내지 않는 심준호였지만 그렇다고 힘이 약하지 않았다.그의 주먹을 맞은 정양철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기까지 했다.이윽고 심준호가 한 방을 더 날렸다.“이유를 말해!”하지만 정양철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가 피식 웃었다.“내 누나를 해치고 강하리를 해치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 아들을 이용하기까지 했어. 정양철,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정양철은 아내와 아들 얘기에 그제야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내가 한 짓이고 그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 없어.”심준호가 그를 놓아주자 의자에서 미끄러진 정양철의 두 눈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네 누나는 좋은 사람이지. 예쁘고 눈부셔서 나도 몰래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해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난... 선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심문석이 입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마중까지 다 나오고.”그렇게 말한 후 어르신은 앞으로 걸어갔다.그 순간 주변 사람들도 모두 구승훈 쪽으로 다가갔다.강하리는 가만히 서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호흡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사람들을 챙긴 뒤 강하리에게 다가갔다.“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았어?” 강하리는 그를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정이를 안았다.연정이도 구승훈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의 품에 안기자 더욱 들떠 있었다.강하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그는 연정이 아빠였다.“엄마 일은 고마워.”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날 원망만 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가자.”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심씨 가문 사람들과 걸음을 맞추며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뒤따르면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엄마 아직 화난 것 같네.”연정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옹알이했고 구승훈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괜찮아, 엄마 화 풀어줄 방법을 찾아보자, 알았지?”몇 대의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외곽에 있는 묘지를 향해 곧장 달렸다.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번에 온 건 심미현 때문이었다.강하리의 엄마가 심미현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백아영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와서 보든 심미현의 묫자리를 B시로 옮기든 홀로 이곳에 남겨두는 것보다 나았다.그런데 정양철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늦어진 것이다.오더라도 심미현에게 할 말이 있어야 했다.그래서 가족들은 정양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성으로 온 거다.묘지에서 백아영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딸이 이곳에 묻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