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
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진짜 주해찬을 건드렸다면 어떻게 할래?”강하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살인은 대가를 치러야 해. 구승훈 당신은 나한테 특별할 게 없어.”구승훈의 마음속이 온통 씁쓸함으로 물들었다.그는 쓴웃음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말을 이어갔다.“아직 몰라. 의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하지만 강하리의 마음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때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가 그렇게 말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배 좀 보고 올게.”구승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막지 않았다.그녀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 불안해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중환자실 밖에서 여전히 울고 있는 석미란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저쪽으로 걸어갔다.다만 아직 중환자실 앞으로 가기도 전에 걸음이 뚝 멈췄다.정양철과 정주현이 거기 있을 줄이야.그녀가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자 정양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는 문득 정서원이 납치되었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떠오르며 손가락을 말아쥐었다.정서원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양철이 병원에 나타났다.그녀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지 확인하러 온 듯이.구승훈은 강하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정양철을 힐끗 쳐다보더니 큰 손으로 강하리의 뒤 허리를 살며시 그러잡았다.강하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정주현은 강하리를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강하리 씨, 좀 어때요?”강하리가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가 중환자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드디어 주해찬이 보였다.항상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는 현재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에 여러 개의 튜브를 삽입하고 누워 있었다.강하리의 마음이 아팠다.밀려오는 죄책감이 그녀를 익사시킬 것만 같았
강하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뭐라고요?”석미란은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해찬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이제 만족해?”강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가볼래요.”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지만 구승훈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도 소용없어. 중환자실에 있어서 못 만나.”그때 석미란이 갑자기 강하리를 붙잡았다.“망할 년,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해찬이를 보러 가! 해찬이가 정말로 못 깨어나면 내가 네 목숨을 가져갈 거야!”석미란이 말하며 강하리의 목을 조르려고 달려들자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내동댕이쳤다.“여사님, 말 가려서 하세요. 대체 누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는 겁니까? 지금 전부 하리 탓으로 돌리는데 만약 주해찬 때문에 하리가 피해를 본 거면 저도 하리 복수를 위해 중환자실로 가서 주해찬을 죽여도 됩니까?”석미란은 눈이 빨개진 채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주해찬이 깨어나지 못할 위험에 처해있는데 죽여버리겠다고?“구승훈, 이 살인자 새끼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랑 강하리, 너네 둘 다 살인자야! 내가 죗값 치르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 망할 네년은 해찬이 목숨값 내놔!”석미란의 울부짖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고 준봉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여사님, 방금 경찰에서 그 차가 구 대표님 번호판을 덧씌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대표님은 누명을 쓴 겁니다.”석미란은 여전히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구승훈이 진짜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듯이.“경찰을 매수하면 그만인 줄 알아? 구승훈, 내가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강하리는 준봉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졌다.구승훈은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다.“여사님 나가시라고 해.”준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미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여사님, 이만 나가 주세요.”석미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주해찬의 아버지에게 제지당했다.주해찬을 닮은 외모에 겉과 속이 모두 반듯한
주해찬의 표정이 확 바뀌며 핸들을 꺾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보호했고 강하리의 시선은 다가오는 차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구승훈의 차다.차 번호판도 똑같았다.구승훈이 B시에 올 때마다 몰던 차였다.순식간에 강하리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강하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좀 어때?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남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 당신이야?”구승훈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심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하리야, 너 정말 나라고 의심하는 거야?”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는 강하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차는 분명 구승훈의 것이었다.하지만 구승훈이 아니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늘한 구승훈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선배는?”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네가 신경 쓰는 건 주해찬밖에 없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날 구해준 사람이야.”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구승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내가 널 구해준 적은 없어? 하리야, 너 정말 사람 마음 아프게 한다.”강하리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지금은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주해찬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에 그는 꽤 심하게 다쳤을 거다.처음부터 주해찬에겐 미안한 것투성이였다.오랜 시간 동안 그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그에게 해줄 대답이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의 차로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선배는 어떻게 됐어?”여전히 똑같은 말에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주해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지금 강하리의 태도로 볼 때, 주해찬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
주해찬의 표정이 잠시 번뜩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정양철에게로 향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정양철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가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해찬아, 여긴 무슨 일이야?”주해찬이 미소를 지었다.“친구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아저씨랑 만났네요.”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럼 가서 일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알았어요.”주해찬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정양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꽉 쥐었다.한편 주해찬은 안에서 나오기 바쁘게 훅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었다.방금 정양철이 한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강하리나 구승훈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손을 댔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정주현에게 선을 긋던 강아리의 모습과 연관 짓자 주해찬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가 샤워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선배?”하지만 강하리가 전화를 받을 때 주해찬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적어도 제대로 알아보고 강하리에게 알려줘야지 무턱대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아니야, 그냥 내일 나랑 같이 팔찌 가지러 가자고.”“선배,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강하리가 여전히 거절하려는데 주해찬이 말을 막았다.“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 밤엔 일찍 쉬어.”주해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이른 아침, 준봉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강하리에게 아침을 가져다주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강하리 방 앞에 두 사람이 수상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를 보자마자 뒤돌아 복도 쪽으로 달려갔고 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들을 쫓아갔다.일직 강하리가 묵고 있는 호텔 아래층에 도착한 주해찬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정양철의 그 말 때문에 거의 밤을 새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