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직원이 멈칫했다.“심준호 씨, 이 팔찌 말인가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꺼내서 보여주세요.”직원은 머뭇거릴 틈도 없이 서둘러 꺼냈고 팔찌를 받는 순간 심준호의 눈빛이 그대로 넋을 잃었다.사실 그는 심미현의 팔찌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하지만 할아버지가 그 재료로 팔찌 한 쌍과 방아쇠 반지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두 팔찌는 각각 누나와 그의 약혼녀에게 줬는데 약혼녀에게 줬던 건 아직 심예진의 손에 있었다.그리고 이 팔찌는 심예진의 것과 똑같았다.게다가...천인배의 독특한 문양에 손가락을 가져간 그의 심장이 박차를 가했다.그 해 천인배는 이 팔찌를 조각할 때 특별한 문양을 새겼는데 보통의 문양은 그린 듯한 물결 모양이지만 그 두 팔찌에는 특별히 시옷 자를 더했다.시옷은 아주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물결이 밖으로 휙 삐져나온 것처럼 보인다.옆에 있던 돋보기를 집어 들고 살펴보던 심준호는 숨이 턱 막히며 카운터에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팔찌는 어디서 났어요?”직원은 똑똑했다.“손님이 복구해달라고 맡긴 건데...”“이름이 뭐죠?” 심준호는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였는데 구 대표님하고 같이 왔어요. 원래 오늘 가지러 온다고 해서 카운터에 두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세요?”심준호는 시옷 자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사고가 나서 못 오게 됐어요. 연락해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해요. 내가 갖다줄게요.”직원은 서둘러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심준호의 시선은 그 팔찌에 머물러 있었다.강하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에 차례로 떠올랐다.그러다 돌아가신 강하리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손에 쥔 팔찌를 바라보았다.만약 진짜라면 그가 대체 뭘 놓쳤던 걸까?직원은 재빨리 통화를 끝냈다.“구 대표님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가져가라고 하시네요.”심준호는
그런데 결국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연미숙은 당당했다.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경찰을 따라 경찰서로 향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구승훈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남자는 창문 앞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밖에서 비추는 햇빛에 잘생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눈가에 머금은 서늘함을 감추고 알 수 없는 표정만 보였다.연미숙은 발걸음을 멈칫하다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구 대표도 여기 있었네요? 이런 우연이.”구승훈은 냉정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연미숙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우연 아닙니다. 연미숙 씨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주해찬과 강하리를 살해하려 했던 혐의가 있어서 그쪽에 대해 알아봐야겠어요.”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말끔히 사라지더니 곧 한참 후 피식 웃었다.“구 대표가 오해했네요. 난 한 번도 그 사람들을 죽이려 한 적 없어요. 게다가 난 그 사람들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요?”“저도 궁금하네요,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아무런 원한도 없이 문연진과 손을 잡고 여러 번 강하리를 건드렸죠. 누굴 속이시려고요?”남자가 조금씩 다가올수록 연미숙의 얼굴은 창백해졌다.문연진이 잡힌 후로 언젠가 이 모든 게 드러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강하리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짓을 한 적이 없었기에 드러나더라도 누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큰 걱정 없이 지냈다.하지만 이제 교통사고에 연루되니 누명을 벗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연미숙은 이미 앞으로 다가온 구승훈을 바라보며 가슴을 들썩거렸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훈이 입을 열었다.“게다가 연미숙 씨 계좌로 운전기사에게 돈을 보냈던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연미숙은 당황했다.“말도 안 돼요! 난 그런 적 없...”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구승훈의 표정이 이미 그 돈이 그녀의 계좌로 넘어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연미숙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자신 외에 계좌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정양철과 정주현뿐이었기 때문이었다.주현이가
구승훈은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온 송금 기록을 손에 들고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사실 정양철의 돈은 연미숙의 계좌를 거치지 않았고 그가 꾸며낸 것에 불과했다.그런데 이런 결말이라니.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라고?말도 안 되는 소리다.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와 정양철의 친자 확인 좀 해줄래?”심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말이야?”“방금 연미숙이 강하리에게 접근한 이유가 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심준호는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리가.”강하리가 정말 누나의 딸이라면 절대 정양철의 딸이 될 수는 없다.그는 누나와 진태형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똑똑히 기억했고 누나가 정양철과 바람을 피웠다는 건 죽어도 믿을 수 없었다.구승훈 역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일단 친자 확인부터 하고 누가 손대지 않게 잘 감시해.”연미숙은 이미 친자 확인을 했다고 여러 번 강조했지만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큰 가능성은 정양철이 연미숙을 칼자루로 삼아 그걸 이용해 강하리를 노린다는 거다.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강하리가 자기 딸이라는 걸 공개하면 그걸 방패로 삼아 자기가 했던 파렴치한 짓을 감출 수 있었다.강하리가 그의 딸이라면 아버지로서 강하리와 그녀의 모친을 해칠 수가 없으니까.오늘 사건도 마찬가지다. 모두 강하리가 정양철의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그를 의심하기나 할까.주해찬이 엿들었던 통화가 그의 계획을 망친 거다.입을 막으려 했지만 급하게 준비한 탓에 빈틈을 보였다.구승훈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잠시 후 다시 말을 꺼냈다.“정양철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구승훈이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병동 문 앞에 심준호가 전화기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오는 것을 본 심준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우리 쪽 사람들이 갔을 땐 이미 늦었어. 그래도 공항과 역 주변을 막았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그는
“하리 씨, 이 팔찌 하리 씨 거예요? 어머님이 주신 거죠?”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팔찌를 바라보다가 심준호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엄마가 남기고 간 거예요. 심 변호사님... 이 팔찌, 그리고 우리 엄마를 아세요?”심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아픔이 가득했다.“그냥 아는 게 아니라 아주 잘.”그렇게 말하며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안에 있던 심미현의 사진을 꺼냈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움찔하며 살짝 위로 올렸다.“심 변호사님, 우리 엄마 사진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두 사람...”심준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짐작이 맞다면 하리 씨 어머니가 제 누나예요. 하리 씨, 제가 외삼촌이에요.”강하리는 멍하니 심준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외삼촌?”그녀가 눈물을 툭 떨구었다.“심 변호사님이 정말 제 삼촌이에요?”“아마도요. 친자 검사했으니까 곧 결과가 나올 거예요.”그의 말에 강하리는 입을 다물었다.심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심준호 씨, 신청하신 친자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심준호는 다가와 검사 결과를 받아 들고 심호흡을 한 후 열어보았다.혈연관계가 존재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눈가가 시큰거렸다.정말이다, 정말...강하리도 그 글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한 방울, 한 방울이 사람의 마음을 때려 옆에서 지켜보는 구승훈도 마음이 아팠다.심준호는 휴지를 꺼내 조금씩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울지 마. 하리야, 울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갑자기 그를 껴안고 더 세게 울었다.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삼촌, 엄마가 그렇게 되고 너무 무서웠어요...”심준호는 순간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사로잡혔다.진작 그들을 찾았어야 했다.조금 더 빨리 알았
석미란은 그 말에 폭발했다.“너 미쳤어? 강하리 그 망할 년과 해찬이를 이어주라고?”석연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찬이가 걔를 지켜주려고 이렇게 됐으니 해찬이를 책임지라고 하는 게 맞지 않겠어?”“하지만 걔는 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았잖아! 해찬이가 아무리 식물인간이 됐다고 해도 걔가 어딜 감히!”석연란이 웃었다.“만약 심씨 가문 사람이라면? 심미현 딸인 것 같아.”석미란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심씨 가문 사람이라고?강하리 그 망할 년이?B시에서 그 누가 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겠나.게다가 심씨 가문의 첫째인데!“언니, 심씨 가문 첫째 딸이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떻게 놓쳐?”“확실해?” 석미란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강하리가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일까.분명 아무런 집안도, 배경도 없는 천한 것인데.석연란이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직접 심준호 입으로 자기가 강하리 삼촌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그리고 강하리 그년이 심미현과 닮기도 했으니까 대충 맞는 것 같아.”“근데 해찬이는...”“해찬이도 그 여자 좋아하지 않아?”석미란은 조금 흔들린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하리가 사실 심씨 가문 딸일 줄이야.진작 알았더라면 애초에 말리는 게 아닌데...강하리는 한참을 울다가 멈췄다.드디어 기댈 곳이 생겼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아이, 엄마, 정말 마음속에 억울한 것들이 너무 많지만 과거에는 누구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오랫동안 쌓여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터져 나온 거다.심지어 아직도 엄마의 가족을 찾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한바탕 크게 울었다.실컷 울고 나서야 그녀는 부끄러운 듯 심준호를 바라보았다.“죄송해요, 심 변호사님...”심준호가 웃었다.“날 뭐라고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삼촌.”삼촌이라는 호칭이 나오자 그녀의 눈시울이 다시 살짝 붉어졌다.심준호는 그런 그
구승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심준호가 말렸다.“나가서 얘기해.”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강하리의 눈물을 억지로 닦아낸 뒤 심준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심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강하리 삼촌의 입장이 되어보니 정말 이 자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그를 탓할 수만은 없고 지금 강하리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리가 견뎌온 고통은 어찌하나.심준호의 마음속에 아릿한 고통이 퍼져갔다.“승훈아, 앞으로는 하리가 조금의 억울함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전 일이 전부 네 탓이 아닌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하리가 힘들어했으니까 내가 아니어도 우리 집 어르신들이 분명 너한테 뭐라고 할 거야.”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가렸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피식 웃었다.“제가 자초한 거죠, 삼촌.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에요.”그의 탓이 맞든 아니든 강하리가 견딘 고통은 전부 그가 불러온 것이었다.심준호는 삼촌이라는 호칭에 피를 토할 뻔했다.“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구승훈은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삼촌.”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둘은 함께 자랐고, 어릴 적부터 형이라고도 부른 적 없던 자식이 이젠 태연하게 삼촌이라고 부른다.“닥쳐! 하리랑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내가 무슨 삼촌이야! 함부로 들러붙지 마.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너희 둘은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답했다.“시간 문제야.”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는 심준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훈아, 하리의 정체를 우리 부모님이 알면 아마 동의하지 않으실 거야. 어쨌든 누나가 너희 집 어르신과 관련이 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심씨 가문 어르신이 억지를 부릴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딸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병동에서는 심준호가 강하리를 위해 과일을 깎고 있었다.“마음의 준비 되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연락드려서 오라고 할게. 아니면 집에 가도 되고.”집이라는 말에 강하리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이제부터 그녀에게도 집이 생긴 건가?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심준호가 건네는 사과를 받아먹었다.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면밀히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강하리가 시선을 들었지만 밖에서 구승훈이 들어온 뒤 문을 닫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문 너머로 어렴풋이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칼만 보였다.문밖에 있던 진시연은 문이 닫히는 순간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곧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병실 안으로 들어온 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왜?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구승훈의 뻔뻔한 말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렸다.“삼촌, 나 집에 갈래요.”심준호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을 바라봤다.“그래, 집에 가자.”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나도 같이 갈까?”강하리가 거절하려는데 심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안 데려가면 안 올 거야?”구승훈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어두웠다.강하리가 눈에 띄게 그를 거부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심씨 가문의 딸이 되고 나면 앞으로 주변에 온갖 종류의 남자들이 더 많아질 텐데.구승훈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튕겼다.그는 연정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심준호는 재빨리 강하리의 퇴원 수속을 도왔고 퇴원을 앞둔 강하리는 주해찬을 다시 만나러 갔다.주해찬의 상태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고 강하리는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밖에 서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석미란이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심지어 얘기까지 나누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선배가 이렇게 돼서.”석미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때문인 걸 알면 보상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강하리.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게 아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은발의 세 어르신을 코끝이 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반평생 자기 딸과 손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다.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제가 선물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세 사람은 그녀의 호칭에 당황하다가 2초 뒤 정신을 차린 백아영이 벌떡 일어났다.“아가, 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강하리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할머니.”백아영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었다.그녀는 강하리와 심준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심준호는 강하리의 팔찌와 친자 확인서를 꺼냈다.“엄마, 하리가 누나 딸이에요.”백아영은 친자확인서를 든 채 손가락을 떨었다.손에 쥔 팔찌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심금천 역시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백아영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황급히 품에 끌어안았다.너무 잘 알았다.이 눈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딸을 위해 흘리는 거다.남자인 심금천마저 두 눈이 붉어졌다.“울지 말고 애부터 챙기자고.”심문석은 한참을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아가, 정말 미현이 딸이야?”심준호가 시큰거리는 눈으로 말했다.“맞아요, 할아버지.”어르신의 두 눈이 눈물로 앞이 흐려졌다. 강하리를 통해 기억 속 그 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왔으니 됐어, 돌아왔으니 됐다.”강하리가 그를 끌어안았다.“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어요.”재벌가 아가씨인 심미현이 그녀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심문석은 한숨을 쉬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네가 엄마 때문에 고생했지.”강하리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보냈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에 비해 그들은 심미현을 위해 해준 게 없었다.백아영은 붉어진 눈으로 강하리 곁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강하리는 애써 눈가에 담긴 아픔을 감췄다.“아니에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