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에서는 심준호가 강하리를 위해 과일을 깎고 있었다.“마음의 준비 되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연락드려서 오라고 할게. 아니면 집에 가도 되고.”집이라는 말에 강하리의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이제부터 그녀에게도 집이 생긴 건가?강하리는 시선을 내린 채 심준호가 건네는 사과를 받아먹었다.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면밀히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강하리가 시선을 들었지만 밖에서 구승훈이 들어온 뒤 문을 닫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문 너머로 어렴풋이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칼만 보였다.문밖에 있던 진시연은 문이 닫히는 순간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곧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병실 안으로 들어온 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왜?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구승훈의 뻔뻔한 말에 강하리는 고개를 돌렸다.“삼촌, 나 집에 갈래요.”심준호는 멈칫하다가 구승훈을 바라봤다.“그래, 집에 가자.”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나도 같이 갈까?”강하리가 거절하려는데 심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안 데려가면 안 올 거야?”구승훈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어두웠다.강하리가 눈에 띄게 그를 거부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구승훈은 마음이 답답했다.심씨 가문의 딸이 되고 나면 앞으로 주변에 온갖 종류의 남자들이 더 많아질 텐데.구승훈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튕겼다.그는 연정이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심준호는 재빨리 강하리의 퇴원 수속을 도왔고 퇴원을 앞둔 강하리는 주해찬을 다시 만나러 갔다.주해찬의 상태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고 강하리는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밖에 서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석미란이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심지어 얘기까지 나누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선배가 이렇게 돼서.”석미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때문인 걸 알면 보상할 방법을 생각해야지, 강하리.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게 아
강하리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은발의 세 어르신을 코끝이 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반평생 자기 딸과 손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다.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제가 선물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세 사람은 그녀의 호칭에 당황하다가 2초 뒤 정신을 차린 백아영이 벌떡 일어났다.“아가, 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강하리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할머니.”백아영은 멍하니 강하리를 바라보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었다.그녀는 강하리와 심준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심준호는 강하리의 팔찌와 친자 확인서를 꺼냈다.“엄마, 하리가 누나 딸이에요.”백아영은 친자확인서를 든 채 손가락을 떨었다.손에 쥔 팔찌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심금천 역시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백아영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황급히 품에 끌어안았다.너무 잘 알았다.이 눈물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딸을 위해 흘리는 거다.남자인 심금천마저 두 눈이 붉어졌다.“울지 말고 애부터 챙기자고.”심문석은 한참을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아가, 정말 미현이 딸이야?”심준호가 시큰거리는 눈으로 말했다.“맞아요, 할아버지.”어르신의 두 눈이 눈물로 앞이 흐려졌다. 강하리를 통해 기억 속 그 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왔으니 됐어, 돌아왔으니 됐다.”강하리가 그를 끌어안았다.“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어요.”재벌가 아가씨인 심미현이 그녀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심문석은 한숨을 쉬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네가 엄마 때문에 고생했지.”강하리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보냈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그에 비해 그들은 심미현을 위해 해준 게 없었다.백아영은 붉어진 눈으로 강하리 곁으로 다가와 강하리의 손을 잡았다.“아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강하리는 애써 눈가에 담긴 아픔을 감췄다.“아니에
강하리는 구승훈의 포옹에 순식간에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구승훈!”구승훈이 웃었다.“기회 줄 거야?”강하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눈꼬리가 아직 붉은 걸 보아 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했지만 대답은 이례적으로 단호했다.“기회는 없어. 이거 놔!”심지어 과거 한번, 또 한 번 기회를 준 게 후회되었다. 아니면 그녀가 거듭 상처받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구승훈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며 깨달았다.이번엔 정말 그녀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여전히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야릇했다.“괜찮아, 내가 쟁취하면 돼. 하리야, 우린 평생 함께할 거야. 넌 도망 못 가.”말하며 고개를 숙여 강하리에게 키스하려는데 강하리의 입술에 닿기 직전 심문석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이 자식, 그 손 못 놔?”그렇게 말하면서 심문석은 지팡이를 이쪽으로 휘둘렀다.하지만 구승훈은 피하지 않고 지팡이를 맞으며 동시에 강하리의 입술을 머금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밀어냈다.가볍게 입을 맞춘 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심금천이 얼굴을 찡그리며 강하리를 자기 뒤로 보냈고 심문석은 때릴 기세로 달려들었다.고리타분한 늙은이는 아니었지만 하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이 자식이 계속 강요하는 걸 보니 심문석은 지팡이를 휘둘렀다.구승훈은 물러서지 않고 또다시 심문석의 매를 맞았고 그제야 심문석은 지팡이를 다시 내려놓았다.“이 개자식, 또다시 동의 없이 하리한테 손대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다.”하지만 구승훈은 엄숙한 표정으로 심문석과 심금천을 바라보았다.“제가 하리한테 미안한 게 많습니다. 지팡이로는 해결이 안 되니 돌아와서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강하리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구승훈은 목울대가 꿈틀거리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뒤돌아 문을 나섰다.심준호는 강하리와 구승훈의 뒷모
백아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래그래, 하리 먼저 쉬게 해.”그녀는 강하리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그냥 엄마 방에 있어도 괜찮겠니?”심미현을 잃어버렸을 때 이 집은 없었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느 집에 살든 심씨 가문은 언제나 심미현을 위한 방을 마련하고 있었다.강하리의 심장이 미어졌다.‘엄마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다지 내색은 하지 않았다.이미 백아영은 이 일로 상처를 받았는데, 또 그런 모습을 보이면 더 슬퍼할 것 같았다.방은 따뜻하게 꾸며져 있었고 백아영은 그녀를 이끌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 아가...”백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백아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할머니, 울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저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예요.”“그럴 리가, 할머니는 행복해.”백아영은 한참을 강하리와 함께 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심준호는 백아영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고 모든 이야기를 꺼냈다.그때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네 누나가 살해당했다고?”백아영의 얼굴에 분노가 번뜩였다.강하리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몰랐다.멀쩡하던 자기 딸이 남의 손에 살해당했을 줄은 몰랐다! 그 일로 손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심금천도 탁자를 쾅 내리쳤다.“감히 정양철이?”심준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정양철을 잡아야 정확한 진상을 알 수 있어요.”심금천이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연락해서 수색하라고 해야지.”심금천이 전화하는 동안 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하리 아기는 어떻게 된 거야?”심준호가 다시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들은 심문석은 화를 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문원진 그 늙은 놈이 감히 우리 손녀를 여러
정양철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있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려 애썼다.미소를 짓는 얼굴이 태연했다.“무슨 일이죠?”경찰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정양철 씨, 정서원 씨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저희와 함께 가서 수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정양철은 당황했다.“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단지 출장을 가는...”“구동근 씨가 이미 자백했습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경찰이 그의 말을 가로채자 정양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그 사건은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니고 자백했다면 구동근이 최초 살인범이 되기 때문에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다 얘기했다고?정양철의 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졌다.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계산했지만 이미 여러 명의 제복 입은 남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갑자기 정양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그러나 이내 그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고 그는 침착함을 되찾았다.상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양철은 마치 진정제를 먹은 것처럼 상대를 힐끗 쳐다보더니 경찰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알겠습니다, 경찰 수사에 협조하죠.”그렇게 말한 후 그는 저쪽을 다시 한번 흘끗 쳐다보고는 순순히 경찰을 따라갔다.정양철이 체포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정양철의 사진을 온라인에 올리고 그 상황이 빠르게 퍼졌다.연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구동근의 병실 문도 그 순간 외부에서 열고 들어왔다.구동근은 가볍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뭐야, 또 네 형을 도와서 날 조사하는 거야?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구승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할아버지, 정양철이 체포돼서 아주머니를 해친 일에 대해 자백했어요.”구동근은 당황했다.“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구동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재는
구동근은 혈압이 올라갈 정도로 화가 났다.“죽이고 싶었어, 강하리도 같이! 근데 네 형이랑 완전히 등 돌리고 싶지는 않아.”구승재는 경찰을 불러 구동근의 진술을 받아냈고 경찰이 모두 떠난 뒤에야 말을 꺼냈다.“참 할아버지, 아직 모르시죠? 강하리 씨 심씨 가문의 외손녀예요. 아영 이모 외손녀라고요.”구동근은 깜짝 놀랐다.“뭐라고?”구승재는 피식거렸다.“얼마나 아쉬워요, 형이 이렇게 좋은 혼사를 놓친 게. 이제 강하리 씨는 형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구승재는 말을 마친 후 뒤돌아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구동근이 뒤에서 소리쳤다.“거기 서!”구승재는 걸음을 멈췄다.“강하리가 정말 백아영의 손녀야?”구승재는 웃었다.“할아버지께서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봐요. 참, 할아버지한테 간접적으로 살해당한 아주머니가 아영 이모 친딸이네요.”구동근의 얼굴은 순식간에 극도로 굳어지고 병동에서 나온 구승재는 구승훈을 불렀다.“형이 시킨 대로 다 말했어.”멀리 외국에 나가 있던 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다.“다 말했어?”“말했어. 형, 정양철한테 이용당한 것 같아.”하지만 구승훈은 그저 비웃기만 했다.“이용해도 그게 뭐?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으면 정양철도 이용하지 못했어.”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자기가 저지른 짓이니 대가를 치러야지.”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나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움직여.”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은 아직 밤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호텔로 들어갔다.호텔 꼭대기 층의 어느 방에서 여초연은 온화한 가면을 진즉 벗어던졌다.그녀는 창가로 다가와 싸늘하게 웃었다.“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네, 꽤 예리해.”그 말에 방에 있던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어쩌죠? 지금 바로 정면으로 부딪칠까요?”여초연은 잠시 침묵했다.“지금은 때가 아니야.”아이가 사라진 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짧은 시간만으로
맨 위 옥상에서 헬리콥터의 굉음이 귀를 찢을 듯이 들렸고 기체는 여전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여초연과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고 그 뒤로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모습을 보니 경호원 같았다.헬기가 착륙하려는 순간 갑자기 굉음과 함께 헬기 해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대로 쓰러지며 다음 순간 착륙해야 할 헬기가 갑자기 위로 날아올랐다.여초연은 당황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옆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키가 큰 형체가 불빛 밖으로 걸어 나왔다.찬 바람이 몰아쳤고 바람에 흩날리는 남자의 옷자락은 독수리가 펼친 깃털 날개처럼 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자랑스러워해야 할 아들이지만 구승훈의 모습을 본 순간 여초연의 눈에는 증오가 번뜩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빨리 왔네.”부드러운 목소리는 헬리콥터 소리에 거의 집어삼켜졌지만 구승훈은 그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훤칠한 그의 실루엣이 몇 걸음 떨어져 멈춰 섰다.“내 딸을 구하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지. 당신이 납치당하면 천천히 움직여줄 순 있어.”그를 향해 돌린 여초연의 시선엔 독기가 가득했다.하지만 구승훈의 눈빛은 오직 연정에게 향했다.못 본 사이 꼬마 녀석이 꽤 큰 것 같지만 전보다 야윈 것 같았다.여린 얼굴에 눈물방울이 맺혀있던 아이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더 세게 울었고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마음이 아파서 애써 연정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그러다 마침내 여초연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동안 정말 잘 숨겨왔네.”여초연이 웃었다.“승훈아, 오해하는 것 같은데?”구승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나와 강하리를 이어주는 척 우릴 떼어놓을 생각이겠지.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까 봐 안달 났나 봐. 사람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하고 또다시 갖은 수단으로 내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 당신 참 대단해.”여초연이 웃었다.“승훈아,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나는 이 아이 말고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연정이도 지키기 위해 그랬을 뿐이야.”“아무 짓도
여초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품에서 연정이를 데려와 작은 목을 잡았다.“애 죽고 싶으면 이리 와.”동시에 여초연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연정이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너무 울어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고 싸늘한 얼굴로 여초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원하는 게 뭐야?”여초연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헬기 착륙시켜.”“내가 바보인 줄 알아? 헬기가 착륙하고 당신이 연정이랑 떠나면 내가 괜한 걸음 하게 되잖아.”그런데 여초연의 손이 갑자기 힘을 주었다.“그러면 아이가 죽게 놔두던지.”연정이가 더 세게 울었고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서늘한 섬광이 번뜩였지만 이내 그가 손짓했다.준봉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중앙에서 멀어졌다.헬기가 천천히 내려왔다.여초연의 손은 여전히 연정이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만큼은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쥐도 새도 모르게 여초연이 정말 연정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진짜 움직이면 연정이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여초연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헬기에 탑승했다. 뒤따라오던 남자는 두 사람을 끝까지 보호했다.세 사람이 헬기에 오르자 경호원 4명이 뒤를 따랐다.구승훈은 조금씩 상승하는 헬기를 바라보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기내에서 기내 문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가 연정이를 안아 들었다.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이며 옆에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고 준봉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종석에 있는 조종사의 어깨로 칼이 날아들어 박히자 기체가 순식간에 휘청거렸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기체가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그 순간 구승훈의 총도 방아쇠를 당겼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의 팔에서 갑자기 피가 솟구쳤고 연정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