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래그래, 하리 먼저 쉬게 해.”그녀는 강하리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그냥 엄마 방에 있어도 괜찮겠니?”심미현을 잃어버렸을 때 이 집은 없었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느 집에 살든 심씨 가문은 언제나 심미현을 위한 방을 마련하고 있었다.강하리의 심장이 미어졌다.‘엄마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다지 내색은 하지 않았다.이미 백아영은 이 일로 상처를 받았는데, 또 그런 모습을 보이면 더 슬퍼할 것 같았다.방은 따뜻하게 꾸며져 있었고 백아영은 그녀를 이끌고 방 안을 돌아다녔다.“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 아가...”백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백아영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할머니, 울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저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예요.”“그럴 리가, 할머니는 행복해.”백아영은 한참을 강하리와 함께 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심준호는 백아영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고 모든 이야기를 꺼냈다.그때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네 누나가 살해당했다고?”백아영의 얼굴에 분노가 번뜩였다.강하리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몰랐다.멀쩡하던 자기 딸이 남의 손에 살해당했을 줄은 몰랐다! 그 일로 손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심금천도 탁자를 쾅 내리쳤다.“감히 정양철이?”심준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정양철을 잡아야 정확한 진상을 알 수 있어요.”심금천이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연락해서 수색하라고 해야지.”심금천이 전화하는 동안 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하리 아기는 어떻게 된 거야?”심준호가 다시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들은 심문석은 화를 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문원진 그 늙은 놈이 감히 우리 손녀를 여러
정양철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있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려 애썼다.미소를 짓는 얼굴이 태연했다.“무슨 일이죠?”경찰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정양철 씨, 정서원 씨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저희와 함께 가서 수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정양철은 당황했다.“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단지 출장을 가는...”“구동근 씨가 이미 자백했습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경찰이 그의 말을 가로채자 정양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그 사건은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니고 자백했다면 구동근이 최초 살인범이 되기 때문에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다 얘기했다고?정양철의 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졌다.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계산했지만 이미 여러 명의 제복 입은 남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갑자기 정양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그러나 이내 그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고 그는 침착함을 되찾았다.상대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양철은 마치 진정제를 먹은 것처럼 상대를 힐끗 쳐다보더니 경찰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알겠습니다, 경찰 수사에 협조하죠.”그렇게 말한 후 그는 저쪽을 다시 한번 흘끗 쳐다보고는 순순히 경찰을 따라갔다.정양철이 체포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정양철의 사진을 온라인에 올리고 그 상황이 빠르게 퍼졌다.연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구동근의 병실 문도 그 순간 외부에서 열고 들어왔다.구동근은 가볍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뭐야, 또 네 형을 도와서 날 조사하는 거야?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구승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할아버지, 정양철이 체포돼서 아주머니를 해친 일에 대해 자백했어요.”구동근은 당황했다.“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구동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재는
구동근은 혈압이 올라갈 정도로 화가 났다.“죽이고 싶었어, 강하리도 같이! 근데 네 형이랑 완전히 등 돌리고 싶지는 않아.”구승재는 경찰을 불러 구동근의 진술을 받아냈고 경찰이 모두 떠난 뒤에야 말을 꺼냈다.“참 할아버지, 아직 모르시죠? 강하리 씨 심씨 가문의 외손녀예요. 아영 이모 외손녀라고요.”구동근은 깜짝 놀랐다.“뭐라고?”구승재는 피식거렸다.“얼마나 아쉬워요, 형이 이렇게 좋은 혼사를 놓친 게. 이제 강하리 씨는 형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구승재는 말을 마친 후 뒤돌아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구동근이 뒤에서 소리쳤다.“거기 서!”구승재는 걸음을 멈췄다.“강하리가 정말 백아영의 손녀야?”구승재는 웃었다.“할아버지께서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봐요. 참, 할아버지한테 간접적으로 살해당한 아주머니가 아영 이모 친딸이네요.”구동근의 얼굴은 순식간에 극도로 굳어지고 병동에서 나온 구승재는 구승훈을 불렀다.“형이 시킨 대로 다 말했어.”멀리 외국에 나가 있던 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다.“다 말했어?”“말했어. 형, 정양철한테 이용당한 것 같아.”하지만 구승훈은 그저 비웃기만 했다.“이용해도 그게 뭐?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으면 정양철도 이용하지 못했어.”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자기가 저지른 짓이니 대가를 치러야지.”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나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움직여.”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에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은 아직 밤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호텔로 들어갔다.호텔 꼭대기 층의 어느 방에서 여초연은 온화한 가면을 진즉 벗어던졌다.그녀는 창가로 다가와 싸늘하게 웃었다.“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네, 꽤 예리해.”그 말에 방에 있던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어쩌죠? 지금 바로 정면으로 부딪칠까요?”여초연은 잠시 침묵했다.“지금은 때가 아니야.”아이가 사라진 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짧은 시간만으로
맨 위 옥상에서 헬리콥터의 굉음이 귀를 찢을 듯이 들렸고 기체는 여전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여초연과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고 그 뒤로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모습을 보니 경호원 같았다.헬기가 착륙하려는 순간 갑자기 굉음과 함께 헬기 해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대로 쓰러지며 다음 순간 착륙해야 할 헬기가 갑자기 위로 날아올랐다.여초연은 당황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옆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키가 큰 형체가 불빛 밖으로 걸어 나왔다.찬 바람이 몰아쳤고 바람에 흩날리는 남자의 옷자락은 독수리가 펼친 깃털 날개처럼 살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자랑스러워해야 할 아들이지만 구승훈의 모습을 본 순간 여초연의 눈에는 증오가 번뜩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빨리 왔네.”부드러운 목소리는 헬리콥터 소리에 거의 집어삼켜졌지만 구승훈은 그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훤칠한 그의 실루엣이 몇 걸음 떨어져 멈춰 섰다.“내 딸을 구하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지. 당신이 납치당하면 천천히 움직여줄 순 있어.”그를 향해 돌린 여초연의 시선엔 독기가 가득했다.하지만 구승훈의 눈빛은 오직 연정에게 향했다.못 본 사이 꼬마 녀석이 꽤 큰 것 같지만 전보다 야윈 것 같았다.여린 얼굴에 눈물방울이 맺혀있던 아이는 구승훈을 보는 순간 더 세게 울었고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마음이 아파서 애써 연정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그러다 마침내 여초연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동안 정말 잘 숨겨왔네.”여초연이 웃었다.“승훈아, 오해하는 것 같은데?”구승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나와 강하리를 이어주는 척 우릴 떼어놓을 생각이겠지.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까 봐 안달 났나 봐. 사람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하고 또다시 갖은 수단으로 내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 당신 참 대단해.”여초연이 웃었다.“승훈아,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나는 이 아이 말고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연정이도 지키기 위해 그랬을 뿐이야.”“아무 짓도
여초연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품에서 연정이를 데려와 작은 목을 잡았다.“애 죽고 싶으면 이리 와.”동시에 여초연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연정이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고 너무 울어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구승훈은 눈을 내리깔고 싸늘한 얼굴로 여초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원하는 게 뭐야?”여초연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헬기 착륙시켜.”“내가 바보인 줄 알아? 헬기가 착륙하고 당신이 연정이랑 떠나면 내가 괜한 걸음 하게 되잖아.”그런데 여초연의 손이 갑자기 힘을 주었다.“그러면 아이가 죽게 놔두던지.”연정이가 더 세게 울었고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서늘한 섬광이 번뜩였지만 이내 그가 손짓했다.준봉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중앙에서 멀어졌다.헬기가 천천히 내려왔다.여초연의 손은 여전히 연정이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구승훈은 그녀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만큼은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쥐도 새도 모르게 여초연이 정말 연정이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진짜 움직이면 연정이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여초연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헬기에 탑승했다. 뒤따라오던 남자는 두 사람을 끝까지 보호했다.세 사람이 헬기에 오르자 경호원 4명이 뒤를 따랐다.구승훈은 조금씩 상승하는 헬기를 바라보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기내에서 기내 문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가 연정이를 안아 들었다.구승훈의 눈빛이 번뜩이며 옆에 있는 준봉을 바라보았고 준봉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종석에 있는 조종사의 어깨로 칼이 날아들어 박히자 기체가 순식간에 휘청거렸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해야 했다.기체가 이쪽으로 기울어지는 그 순간 구승훈의 총도 방아쇠를 당겼다.연정이를 안고 있던 남자의 팔에서 갑자기 피가 솟구쳤고 연정
퍽!준봉이 남자를 발로 차자 남자는 입에서 피 한 모금을 뿜으며 곧바로 실신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구승훈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 하나 없이 발밑에 떨어진 주사기를 바라보았다.“괜찮아. 주사기 챙겨.”준봉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구승훈은 이미 연정이를 안은 채 자리를 떠났고 준봉은 바닥에 놓인 주사기를 바라보다가 저쪽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사람 데려가!”밤이 깊어 연정이가 구승훈의 품에 안겨 잠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준봉은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앞을 향해 달렸다.구승훈은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이미 다 녹아내렸다.“대표님, 그 약...”구승훈이 멈칫하다가 연정이 얼굴을 쓰다듬었다.“하리한테는 말하지 마.”“하지만...”“걱정하지 마, 돌아가서 민준이 형 찾아가면 돼. 아직 두 모녀랑 오래 있고 싶거든.”이 말을 듣고 준봉은 안도했지만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그 시각 국내에서 강하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심준호의 도움으로 전문의들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강하리가 창백한 얼굴로 중환자실 앞에 서 있는데 심준호가 부드럽게 토닥였다.“너무 걱정하지 마.”강하리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하리야, 네가 다칠까 봐 보호한 거지 너한테 부담이 되고 싶어서 지켜준 게 아니야.”강하리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잘 안다. 당연히 선배는 자신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지켜줬겠지.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렇게 좋은 사람이 자신 때문에 평생 이렇게 의식불명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건가?심준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두 사람이 심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정오가 되어 있었다.백아영은 특별히 강하리가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했는데 가족들이 음식을 먹기 직전, 밖에서 도우미가 달려왔다.“어르신, 사모님, 주씨 가문 사람들이
강하리는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미란은 그 모습에 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오늘 그쪽에서 데려온 전문의도 진단했고 해찬이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다들 다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해찬이는 아직 젊고 결혼도 못했는데 앞으로 결혼도 어렵게 됐어요. 그래서 우린 다른 건 필요 없고 하리가 해찬이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심문석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어림도 없어!”백아영도 얼굴이 굳어졌다.평소 성실하고 능력도 있어 눈여겨보던 후배 주해찬이 이런 사고를 겪게 된 게 안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용해 손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절대 안 돼!”그녀는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두 번의 거침없는 거절에 석연란은 순식간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버님, 언니,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강하리 때문에 우리 해찬이 그렇게 됐으니까 하리가 평생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심준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숙모, 뭐가 당연하다는 거죠? 막말로 해찬이는 본인이 원해서 하리를 지켜준 거예요. 본인이 원한 건 원칙에 따라 타인에게 보상을 강요할 수가 없어요.”“너!”석연란은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원칙 따위는 상관없어. 어쨌든 해찬이가 하리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해찬이 책임져야지!”심준호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왜요, 하리한테 강요라도 하시게요?”석연란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해졌다. 이제 강하리는 심씨 가문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정말 강요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강하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죄송하지만 전 못해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심준호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하리가 죄책감 때문에 동의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주해찬의 현재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주해찬이 괜찮다고 해도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그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강하리
구승훈은 심준호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씨 가문에서 결혼이라도 주선하게?”심준호가 헛웃음을 지었다.“우리 집이 구씨 가문이랑 같은 줄 알아?”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조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면 뭐야?”심준호는 한숨을 쉬었다.“주씨 가문에서 하리에게 주해찬을 책임지라면서 하리한테 주해찬과 결혼하라고 강요해.”구승훈의 가슴이 내려앉았다.“강하리는? 동의했어?”심준호의 눈빛이 번뜩였다.“비슷해.”구승훈은 숨이 턱 막혔다.“비슷하다는 건 무슨 말이야?”심준호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아이는?”구승훈은 품에 안겨 잠든 말랑한 아기를 바라보며 괜한 복수심에 심준호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삼촌, 제 아내 좀 지켜주세요. 주해찬은 조카사위로 적합하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이륙까지 얼마나 남았어?”“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대답한 준봉이 망설이며 다시 물었다.“대표님, 몸 괜찮으세요? 지금이라도 병원에...”구승훈이 그를 쳐다보았고 준봉은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삼켰다.“돌아가서 얘기해.”준봉이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구승훈은 그를 바라보며 지시했다.“가서 아기 용품 좀 사와. 가는 길에 쓸 수 있게.”준봉은 당황했다.“대표님, 저는...”“노진우는 하는데 넌 못 해?”“... 할게요!”준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그가 떠난 뒤에야 구승훈은 다리를 슥 만졌다.그러고는 잠시 후에야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여초연 여사, 이대로 날 죽게 할 생각은 아니지?”반면 석씨 가문 자매는 심씨 가문에서 나오자마자 석미란이 석연란의 손을 뿌리쳤다.“왜 날 막아?” 석미란은 석연란을 노려보았다.석연란은 답답한 표정이었다.“어르신이랑 백아영 표정 못 봤어? 그리고 심준호도. 심씨 가문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 세 사람 건드리면 언니가 아니라 어르신이 와도
아무리 멍청해도 지금 강하리가 그녀에게 한 방 먹였다는 걸 깨달은 여명희는 가슴 속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고 이를 갈며 강하리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진태형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별일 없으면 전 가볼게요. 외할머니댁에 다녀와야 해서.”진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조심히 가.”강하리가 대답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려는데 여명희가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거기 서요.”말을 마친 그가 진태형을 돌아보았다.“진 장관님은 계속 사적인 일에 권력을 행사하실 건가요? 그쪽 따님은 잘못해도 벌을 받지 않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진태형에게 집중됐다.그동안 외교부 내부에서는 진태형이 권력을 남용해 JM과 계약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하리의 비즈니스 능력과 JM의 업무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게다가 외교부에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사가 부족했기에 소문이 돌아도 진정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이제 여명희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사람들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명희를 돌아보았다.“여명희 씨는 사람을 모함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네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죠?”“통역할 때 실수하지 않았나요?”여명희의 말이 끝나자 진태형 옆에 서 있던 통역실 주임이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의 번역은 한 치의 실수도 없었는데 그러는 여명희 씨는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여명희는 깜짝 놀랐다.“뭐라고요? 강하리가 실수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하지만 아까는... 나한테 거짓말했어? 또 날 속였네! 망할 년, 강하리 이 망할 년, 네가 진 장관님 딸이라고...”“입 다물어!”여명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호통을 쳤고 진태형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외교부가 당신들이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오늘 통역에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당신들 중 누가 그 책임을 질 건데!”진태형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무도 감히 소리를
강하리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지금 원고를 찾으러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옆에 있는 독일어 번역본을 살펴본 뒤 다시 돌려주었다.러시아어 번역을 맡은 강하리는 회의 과정을 간단히 종이에 적고 헤드셋을 착용했다.여명희는 강하리의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원고가 없어졌는데 잘난 척은.’비록 강하리의 통역 실력은 외교부 내에서 전설과 같은 존재였지만 오늘 회의의 번역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은 참석한 모든 번역가가 알고 있었다.10년 차 베테랑 통역사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가 많은데 강하리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동시통역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강하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그녀를 외교부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여명희는 비웃으며 시선을 돌려 헤드셋을 들어 올렸고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긴 회의가 이어졌다.강하리는 마침내 헤드셋을 벗고 나지막이 한숨을 쉰 뒤 고개를 돌려 여명희를 바라봤다. 여명희의 얼굴은 극도로 일그러져 있었다.회의가 시작된 후 강하리 일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산만해져 초반에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미 당황한 상태였다.이후에는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전체 번역 과정에서 그녀의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뛰어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대학생들보다 뒤처지는 수준이었다.여명희는 헤드셋을 탁자 위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는데 강하리는 이미 시선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야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참, 오늘 통역본 누가 담당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순식간에 장내에 고요함이 찾아왔다.회의 시작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주임님께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나가려는데 여명희가 그녀
강하리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최근 증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떤 치료를 받고 있나요?”임희주는 그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사실 지금은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데 유난히 조급하세요.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사모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아세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일상에서 누가 부담을 주고 있나요?”강하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커피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임희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금 증상이 어떤지,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세요.”임희주는 잠시 침묵했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말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제가 아내인 데도요?”“죄송해요.”강하리가 웃었다.“임 선생님, 만약 구승훈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야 할 사람이 나란 건 알고 있죠?”임희주의 입꼬리가 움찔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죄송해요.”강하리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부담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임희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강하리가 떠난 뒤에야 임희주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사모님 상대하기 너무 힘드네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 아내를 만났습니까?”“네, 우연히 만났어요.”임희주가 커피를 살며시 저었다.“미안해요. 아직 대표님 상황에 대해 모르는 줄 모르고 서두르지 않게 설득해 달라던 참이었는데.”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속도 늦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말 못 알아들으세요?”“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할 말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고 다시는 내 아내한테 찾아가지 마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임희주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구승훈
노민우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고 손연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아쉬워?”강하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에서 묻자 돌아보는 손연지의 눈에 머금은 눈물이 보였다.강하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연지를 토닥였다.“그렇게 아쉬우면 돌아오라고 해. 울긴 왜 울어?”하지만 손연지는 웃으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돌아오라고 하겠어. 하리야, 지금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야.”“그럼 넌?”강하리는 손연지의 다소 부은 눈을 바라보니 어젯밤에 운 게 분명했다.“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지. 돈, 돈, 돈을 벌 거야. 난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손연지는 말을 마친 후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참, 나 몸조리 끝나면 이사 갈 거야. 계속 너희 집에서 애정행각이나 보면서 신세 질 수는 없어.”그녀가 구승훈을 흘끗 쳐다보며 말하자 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손 선생님은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네요?”손연지는 그를 흘겨보며 강하리를 안았다.“아니면 하리야, 나랑 같이 나가서 살래?”순간 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손 선생님은 B시에서도 쫓겨나고 싶은 건 아니죠?”손연지는 강하리에게 기대었다.“자기야, 나 B시에서 쫓아낼 거야?”강하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얼른 출근이나 해.”구승훈은 다가와 손연지의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일단 약부터 바르자.”강하리의 어깨는 사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물집이 더 커진 상태였다.구승훈은 이틀 정도 쉬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오늘 외교부 회의가 있어 출근해야 했다.약을 바르고 나니 손연지도 준비를 마친 뒤라 강하리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자리를 잡게 도와준 뒤 이렇게 덧붙였다.“연지야, 난 그래도 네가 나와 함께 좀 더 지냈으면 좋겠어.”노민우는 약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갔지만 이미 약혼한 이상 그렇게 쉽게 파혼할 리 만무했다.그 과정에서 분명 손연지도 끌어들일 텐
손연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던 샴푸를 집어 들어 그에게 던졌다.“나가!”노민우는 샴푸를 피하며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씻으면서 얘기하자.”“얘기하긴 뭘... 읍...”손연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민우가 그녀의 입을 막았고 몇 번이나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욕실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닿은 두 몸이 곧바로 욕망에 달아올랐다.노민우는 손연지의 입술을 깨물었다.“이젠 해도 돼?”손연지가 다리를 들어 가격하자 노민우는 중요 부위를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익숙한 행동에 괜히 안쓰러웠지만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손연지를 능글맞게 바라봤다.“농담이야. 아직 몸이 성치 않은데 못한다는 거 알아.”손연지가 타월을 꺼내 몸을 감싸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노민우도 서둘러 수건을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안 해도 되니까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손연지, 앞으로 1년 동안 못 볼 수도 있잖아.”머리를 말리던 손연지의 손이 멈칫하며 이렇게 말했다.“바닥에서 자.”“네.”노민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래층에서 강하리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손연지가 놀라며 옷을 입고 내려가려고 하자 노민우가 말렸다.“가지 마. 승훈이가 있잖아.”손연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내려가지 않았다.다행히도 구승훈이 강하리를 품에 안고 올라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엿들은 뒤 노민우는 절뚝거리며 바닥으로 돌아갔다.손연지가 침대 옆에 기댄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자 노민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바보가 됐네?”정신을 차린 손연지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들자 노민우는 손연지의 발목을 잡았다.“마지막 밤인데 나 좀 그만 찰 수는 없어?”손연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고 싶었지만 노민우는 놓지 않았다.“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거 놓으면 또 발길질할 거잖아.”손연지는 이를 갈며 베개를 집어 들어 노민우의 얼굴에 내리쳤다.“나가서 자!”노민우는 베개를 껴안은 채 바닥에
노민우는 식사를 마치고 손연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손연지가 그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노민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의 모친이었다.노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손연지를 바라봤지만 손연지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그녀는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기 전 한 마디만 남겼다.“난 쉴 거니까 넌 가.”노민우는 혀를 차고는 어머니의 전화를 끊은 뒤 손연지를 끌어당겼다.“손연지, 우리 제대로 얘기 좀 하면 안 돼?”손연지가 눈을 흘겼다.“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얘기하다 내 기분 망치면 넌 끝장이야!”노민우가 손연지에게 다가왔다.“화내지 마.”손연지는 노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누구는 화내고 싶어서 내는 줄 알아?’“할 말 있으면 빨리 해.”노민우는 잠시 머뭇거렸다.“손연지, 나 기다려줄 수 있어? 1년만 기다리면 내가 가서 집에서 정해준 약혼 해결할 테니까 우선 파혼하고 우리 둘이 어떤 관계로 지낼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응?”옷을 든 손연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노민우를 바라봤다.“어떻게 할 건데?”노민우는 사실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혼했고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은 언젠가 취소해야 하는 것이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여차하면 승훈이처럼 인연 끊으면 되지.”손연지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진심이야?”“당연히 진심이지.”“그래.”노민우는 손연지가 이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손연지에게 1년 더 기다리라고 하면 그를 한대 쥐어패기라도 할 줄 알았다.“정말 동의하는 거야?”손연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볼게.”노민우는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껴안았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내가 헛소리 한 거라고 생각해.”노민우는 말을 마치고 손연지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이 틈에 손연지와 가까워지려
입안의 술맛이 남자의 입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을 때쯤 구승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화 풀어, 응? 아니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강하리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해봐.”구승훈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게 웃었다.“무릎을 꿇다 다리가 아프면 밤에 너 챙겨주지 못하잖아.”강하리는 웃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고는 그를 밀어낸 뒤 식탁에 앉아 다시 한 잔을 따랐다.식당에는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고 강하리의 실크 가운은 구승훈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려가 불빛에 붉어진 그녀의 어깨가 선명하게 보였다.구승훈은 순간 멈칫하며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어쩌다 이런 거야?”강하리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맞춰봐.”구승훈이 가운을 잡아당겨 어깨 전체가 드러나도록 했다.붉게 물든 어깨에는 물집까지 생겼다.“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왜 나한테 말...”말하던 구승훈은 이내 알아차리고 다소 무기력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렇게 화났어? 다친 걸 얘기하지도 않을 만큼?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었어.”강하리는 어지러워 손가락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훑다가 한참 후 욕설을 뱉었다.“개자식, 그러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동안 내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알아? 구승훈, 대체 언제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건데? 이 나쁜 놈! 망할 놈!”강하리의 욕설이 커졌고 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큰 별장에는 그렇게 적막이 감돌고 구승훈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하지만 강하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히 분명했다.그런 추하고 더러운 가족을 강하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정을 조절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미안해, 자기야.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응?”구승훈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안쓰러워 사실 더 화를
노민우는 멈칫하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연지에게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손연지가 발을 들어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꺼져, 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화를 내며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강하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보니 어깨의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실크 가운을 집어 들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는데 손연지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 구승훈이랑 싸웠어?”“아니.” 강하리가 웃으며 말했다.“동료랑 갈등이 있었어.”손연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물어보려던 찰나 강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몸조리도 끝나지? 내가 일자리 마련해 놨으니까 바로 출근하면 돼.”손연지는 깜짝 놀랐다.“그렇게 빨리?” 강하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왜, 노민우랑 집에서 며칠 더 놀고 싶어?”손연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내가 그 자식이랑 놀기는. 그러는 넌 얼른 쫓아내기나 해. 짜증 나 죽겠어.”강하리가 혀를 찼다.“내가 볼 땐 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데?”“어딜 봐서 내 기분이 좋다는 거야? 난 그냥, 그냥...”“알아, 다 알아.”강하리가 웃으며 대꾸한 뒤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노민우는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가족들을 이기기 힘들 거야. 손연지, 저 사람이 파혼만 하면 너도 시도해 볼 수 있어. 물론 이건 그냥 내 단순한 조언이고 난 네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걸 원하지 않아. 하지만 네 선택을 응원해.”손연지는 입술을 달싹이며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알아.”하지만 문제는 노민우가 그녀를 좋아할까?조금 전 아래층에서 노민우가 보이던 반응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강하리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손연지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방문이 닫히자 강하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강하리는 한 번도 상대하지 않았다.애초에 민감한 신분이고 만약 반격하면 진태형에게 성가신 일이 생길 테니까.그래서 오늘도 강하리가 예전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감히 그녀에게 물을 붓다니.여명희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강하리 씨, 감히 나한테 물을 뿌려요?”강하리가 비웃었다.“못 할 것 있나요? 아니면 나는 그쪽이 물을 뿌려도 반격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여명희는 너무 화가 나서 원래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아, 그러면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래도 구승훈의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데 어깨가 너무 아프고 자료도 다 젖어 여기서 시간 낭비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런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여명희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붙잡았다.“강하리 씨,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요? 진 장관님 딸이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강하리가 여명희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괴롭히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여명희 씨, 아무리 진시연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날 만만하게 보지는 마요.”그렇게 말한 후 강하리는 여명희의 손을 뿌리친 뒤 뒤돌아 가버렸고 여명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려는데 누군가 말렸다.“명희 씨, 그만해요. 괜히 건드리지 마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통역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가끔은 진태형과 부녀 사이인 것을 인정한 게 잘못된 것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겠나.강하리는 홀로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이제 막 차가 멈춰 서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진태형이었다.강하리는 심호흡하고 전화를 받았다.“아빠.”“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아빠한테 얘기 안 해?”강하리는 문득 참아왔던 서글픔이 속절없이 치밀어 올랐다.분명 그녀의 친아빠인데 왜 사람들은 진시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