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보다 못한 안현우가 다가가 장진영을 일으켜 세웠다.“아주머니, 일단 일어나시죠. 승훈이가 나몰라라 하진 않을 겁니다.”구승훈은 눈매를 가늘게 늘어뜨릴 뿐 대답이 없었다.……밤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응급실에서 실려나온 송유라가 관찰실로 옮겨졌다.모두가 흩어진 후, 승재가 굳은 얼굴로 구승훈에게 다가왔다.“형, 또 송유라 뒤치다꺼리 해 주려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말 없이 서늘한 눈길로 병상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관찰실을 나섰다.“하리야, 강하리!”작은 목소리로 다급히 속삭이는 손연지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응? 왜?”손연지가 핸드폰을 넘겨주며 입모양으로 ‘구승훈’을 만들었다.꿀잠 날린 깊은 빡침을 미간에 새기며, 강하리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대표님, 잠 좀 잡시다 예?”“잠시 내려와. 한 가지만 묻자.”통화가 끊겼고, 손연지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뭐래? 말투 되게 수상하던데.”“몰라. 무시해. 자.”강하리가 핸드폰을 손연지에게 돌려주었다.손연지가 하품을 하며 사라진 후, 강하리는 한참을 뒤척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홀린듯 창가에 다가가 내려다보니 아래에 구승훈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강하리는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서 아랫층으로 내려갔다.아파트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었다. 편한 잠옷 차림에 패딩만 걸친 강하리가 눈동자에 맺혔다.순간, 구승훈은 송유라고 뭐고 다 떨쳐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오직 눈 앞의 이 여자가 원한다면.하지만 이내 충동을 억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유라였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짧게 끝내요. 용건이 뭐죠?”강하리의 덤덤한 말이 구승훈이 일렁이는 심정을 갈무리했다.“주해찬이랑 헤어질 수 있어?”한 마디 묻고.“잘 생각해보고 대답해.”한 마디를 덧붙였다.“아니요.”1초의 망설임도 없는 강하리의 대답.예상했단 듯, 구승훈의 차가운
강하리의 입매가 굳어졌다. 한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참이 지나셔야 입을 열었다.“’시도’라면, 안 죽었다는 얘기……네요?”“네. 좀 아쉽게도요.”맞장구를 친 승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말인데, 우리 형이 그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어쩌면 다시 송유라한테 관심을 줄지도.”그제야 강하리는 어젯밤 구승훈의 뜬금없는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택지 같은 거였다.자신이 돌아갈 마음이 있으면 약속했던 대로 송유라를 내버려 둘 거고.미련 없이 돌아선다면 다시 송유라를 감쌀 거라는.강하리는 냉소를 지었다.자신의 선택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구승훈이 짐작은 했을 거니까.그 남자는 그저, 자신이 박아주는 쐐기로 결정을 내릴 용기를 얻으려는 거였다.다른 의미로는, 송유라를 감싸줄 빌미를 얻으려는 것.그 뜻을 알아채자, 구승훈에 대한 증오가 더 깊어졌다.무슨 왕이 군림하듯 선택지를 내린 이유가 송유라를 위해서라니.자신과 아기의 목숨까지 노린 여자를.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이 배팅에 내던져진 코인 몇 개가 된 기분이었다.“승재 씨.”강하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유라의 자살 따윈 결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구승훈의 마음이지.”“뭐,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강 부장!”승재가 답답한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지금 형 마음속에는 강 부장이 우세예요. 형에게 조금만 기회를 주면 송유라 따윈 그냥 버릴 거라고요.”“승재 씨.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예?”그 자리에 굳어진 승재를 뒤로 한 채, 강하리가 회사에 들어섰다.입이 떡 벌어진 승재의 사고 회로가 그대로 멈췄다.남자친구?왜? 어떻게?우리 형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강 부장인데?……“부장님, 대표님 호출이에요. 지금 바로 올라오래요.”강하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예서가 도도도 달려왔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대표이사 사무실로
지이익-!소송취하서가 반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고드름 끝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강하리의눈빛이 드러났다.구승훈이 송유라 소송에 끼어들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심판 결과가 나온 뒤 인맥을 동원해 감형이나 보증석방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상상도 못 했었다. 소송을 아예 싹을 잘라버릴 궁리까지 했단 건.두 장이 되어버린 취하서를 냉랭한 눈길로 바라보는 구승훈.언짢은 기분과는 별개로 말 못할 안도감이 드는 구승훈이었다.적어도 강하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는 입증이니까.“강 부장, 이게 뭐 하는 짓이지?”짐짓 언성을 높였다. 이글거리는 눈길로 강하리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희망이 피어있었다.혹시, 후회하는 건가?아니면 이 회사를 떠나기가 망설여졌을 수도?강하리가 꼭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위약금 내겠습니다.”한 마디에 구승훈의 눈에 맺혔던 희망이 파사삭 사그라져 버렸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한기가 서렸다.“무슨 수로? 주해찬이 대 주겠다고 그러던?”주씨 가문이 실력으로 손꼽히는 명문가이긴 하지만 돈이 수면 위에서 오가는 상업 명문은 아니었다.관직 명문가인 주씨 가문이 몇십억을 공공연히 내놓을 수 있을 리가.강하리는 대답 없이 돌아서 나갔다.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강하리를 그대로 보냈다.사무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상 위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 소리에 강하리가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멀어져갔다.……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양철]“네, 정 회장님.”“하리 양, 생각은 잘 해봤어요?”“만나뵙고 얘기해도 될까요?”그렇게 대양지사와 에비뉴 사이 어딘가의 한 커피숍에 두 사람이 앉았다.“대양에 입사하겠습니다. 대신 조건 세 개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당찬 강하리의 발언에 정 회장의 눈썹이 흥미롭단 듯 꿈틀했다.“얘기해 보시죠.”“첫째는 공적인 업무 외 기타 요구는 상황에 따라 거절할 권리.”“두 번째, 연성 지사만큼은 모든
”세번쨰는 이겁니다.”강하리가 문서 한 뭉터기를 내밀었다.“이건?”받아들고 슥 훑어본 정양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여기 쓰여진 수익을 보증한다고요? 하리 양, 급전 필요하면 나나 우리 아들내미나 무이자 무기한으로 빌려줄 수 있는데, 이 정도 수익 보증은 리스크가 너무 큰 거 아닌가요?”“시도해보지도 않고 자신을 부정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강하리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좋습니다! 그 자신감! 역시 사람 제대로 본 것 같네요. 빠른 시일 내로 송금해줄 테니 에비뉴 쪽과도 가급적 빨리 마무리해주길 바랍니다.”두 사람의 악수로 대화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강하리가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정양철. 복잡한 눈길로 [수익보증협약서]라고 씌어진 문서를 바라보았다.에비뉴 대표이사실.구승훈의 핸드폰 너머로 송유라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찍이 떼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온 송유라가 가장 먼저 찾았다는 점이 감동은커녕 짜증이 되어 밀려왔다.“오빠, 저 보러 좀 와 주면 안돼요? 저 너무 무서워요 지금.””죽는 것도 안 무서워하는 애가 뭐가 무서워?”구승훈의 냉담한 반응에 송유라는 말문이 꺽 막혔다.“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너무 무서-.”뚜-.구승훈이 통화종료를 눌러버렸다.막장드라마 악녀도 아니고, 이렇게 저급적인 수단으로 나를 붙들어매려 해?어릴 적 유라가 지금처럼 자랐단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하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서늘한 얼굴을 한 채 구승훈이 대표이사실을 나섰다.명인병원 고급병실.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물건 깨지는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다.구승훈이 문을 여는 순간, 물컵 한 개가 그의 귓가를 스치며 날아 지나갔다.그 너머로 창백한 얼굴의 송유라가 멍해진 채 얼어붙었고.“오, 오빠?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에요.”“쌩쌩하네. 조사받는 것도 문제 없겠어.”구승훈이 문에서 비켜서자, 제복 차림의 사내 둘이 들어섰다.웅-!송유라의 머릿속에서 사이렌 비슷
”오……오빠, 이 사람들은 뭐, 뭐예요?”송유라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구 대표님, 아무리 구 대표님이시라지만, 아직 채 낫지도 않은 애를 이렇게 놀래키시면 어떡해요! “곁에 있던 장진영이 다급히 외쳤다.“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눈빛 하나로 장진영이 입을 다물게 만든 구승훈이 송유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자살 시도하면 그 죄가 다 용서될 줄 알았어? 그러면 뭐, 매번 죄 지을 때마다 자살시도로 때우게?”송유라의 눈빛이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당신 때문에 죽을 작정까지 했는데 저런 말이 나온다고?강하리가 없었어도 저런 소리가 나왔을까?강하리, 죽어!“오빠, 정말 나한테 이럴 거예요? 강하리만 있으면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송유라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하지만 구승훈은 변함 없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유라야, 다른 사람 목숨도 목숨이야.”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다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송유라의 병실에서 나와버렸다.“형, 형!”승재가 급급히 들어왔다.“꼭 내가 그렇게 해야 해?”구승훈은 대답 없이 흡연실로 걸어갔다. 승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흡연실에는 둘 밖에 없었다.“시킨 건 어떻게 됐어?”“둘째 형이 진술 바꿨어. 자기 혼자 주도한 거라고. 심 변호사도 알게 됐는데, 형에게후회하지 말라고 전해달라 그러더라.”구승훈이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형, 정말 그럴 거야? 강 부장 버릴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숨 막히는 정적에 참지 못한 승재가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달라질 게 뭔데. 남친까지 생겼다는데.”“아닛, 이혼도 막 하는 세상에, 결혼한 것도 아니고 고작 남친이잖아. 그게 뭐 어때서.”구승훈이 대답 없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쌉싸름한 담배 연기가 기도를 통해 페를 휘감고 나왔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어젯밤 왜 그렇게 물었는지 강하리는 너무나도
”승재 너, 사는 게 재미없어졌지?”냉기가 뿜어질 듯 차가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승재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주절이기 시작했다.“강 부장이 아깝지. 재난을 막아주는 영험한 구슬이 있단 소릴 듣고 형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찰에 하룻밤을 꼬박 꿇어앉아 기다렸는데. 송유라는 형한테 해 준게 뭔데.”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뭐라고?”움찔한 승재. 하지만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맞잖아. 송유라한테 그걸 시키면 5분도 못 버티고 힘들다고 징징거릴걸 아마.”“그거 말고. 무슨 구슬?”“형 생일선물로 준 그 구슬 말야.”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지난번 강하리가 짐을 쌀 때 언뜻 보이던, 염주 모양으로 꿴 영롱한 빛의 구슬이 생각났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액세서리려니 하고 넘겼다.“그게 나 주려고 꼬박 하룻밤을 꿇어 받은 거라고?”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구승훈을 승재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당연하지. 나도 받았어. 다만 내 건 구슬이 아니고 부적.”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담배를 끄고 밖으로 걸어나갔다.성큼성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막 달리기 시작했다.막 병실을 나서는 송유라의 앞을 쌩 지나쳤다. 구승훈을 부르려던 송유라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그 뒤로 나타난 승재가 픽 웃었다.“봤어요? 우리 형 강 부장 만나러 막 뛰어가는 거.”“그 입 다물어욧!”빼액 소리지른 송유라가 아차 싶었던 건, 승재의 눈에서 번득이는 살기를 본 순간이었다.스팟!날카로운 빛이 송유라의 팔을 그어 지났고,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끼아악!!”짜악!비명을 지르는 송유라의 뺨이 삽시에 벌겋게 부어올랐다.“팔은 강 부장 몫, 싸대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네년 때문에 죽어버린 내 조카 몫.”서늘한 승재의 음성이 울렸다.“그리고 이건 강 부장을 납치한 죗값.”승재가 송유라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끄으윽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구승훈의 얼굴에 안예서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대, 대표님이 들어오시기 몇 분 전에요.”구승훈의 미간이 꿈틀했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마케팅부를 나서자마자 업무용 번호로 강하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송유라 소송 건으로 그녀를 찾아온 심준호의 차에 타 있었다.핸드폰에 구승훈의 업무용 번호가 뜨자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승훈이에요?”운전하던 심준호가 웃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받아 봐요. 소송 건으로 찾는 걸지도 모르니까.”강하리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고 스피커를 눌렀다.“네, 승훈 씨.”생소한 호칭에 구승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강하리,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맘대로 이직해도 된댔어?”스피커폰으로 가라앉은 구승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인수인계도 끝났고 위약금도 물었는데 안될 게 뭐가 있죠? 의문점 있으시면 법무팀에 심 변호사님 찾으라고 하세요.”냉담한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이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와 다툴 생각은 없었다. 막을 수 없는 이직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무슨 수를 써도 안 통하는 강하리란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돈은? 어디서 났어?”“훔치거나 뺏은 건 아니니까 승훈 씨는 신경쓰실 필요 없고요. 이직도 다 끝난 마당에 가급적 연락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어디야? 지금 당장 만나.”“별로 그러고싶지 않아서요.”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고, 구승훈의 얼굴빛은 말이 아니었다.다시 강하리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낯선 번호가 들어왔다.통화 거절을 눌렀지만,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귀찮은 얼굴로 구승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송유라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 대표님, 빨리 좀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송유라 씨가 대표님이 없으면 안 하겠다고 자꾸 치료를 거부해서요.”구승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그럼 치료하지 말고 냅두세요.”“그건 좀
”왜 구애를 막으시는 겁니까?”정주현이 도통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양철을 바라보았다.“헛짓거리야. 그럴 시간에 네 엄마가 잡아둔 맞선이나 보는 게 훨 나아.”“이봐요 영감탱이. 나 연성에 보냈을 때랑은 말이 틀리잖아요.”정주현이 잠시 멈췄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혹시 아버지가 찜해놓은 건 아니죠? 왠지 저보다 더 하리 씨를 팍팍 밀어준다는 느낌이-.”“이노무 시키가 못 하는 말이 없어!”정양철이 번쩍 쳐든 주먹에 정주현이 줄행량을 놓았다.……대양에서 나온 강하리는 그 길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앞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는 찰나.날카로운 뭔가가 강하리의 허리춤에 들이밀어졌다.따끔한 촉감과 함께,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입 뻥긋하면 찔러버린다.”강찬수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뭐 하는 겁니까.”전신이 굳은 채, 강하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강찬수가 강하리를 끌고 옆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용건을 말해요.”순간, 날카로운 칼이 강하리의 허리춤으로부터 목덜미에 옮겨졌다.약간의 따끔함 뒤에 이어지는 서늘함.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순간 강하리는 이 미친 인간이 여차하면 서슴없이 자신을 죽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용거어언? 네년 때문에 내 일이 틀어졌으니 네년이 대신 갚아줘야 할 거 아니야!”강찬수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원래는 장진형을 찾아가 협박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장진영은 자신이 대놓고 불지 못할 걸 확신이라도 하듯 만나 주지도 않았다.사실이었다. 장진영을 불었다간 그 칼잡이가 된 자신도 밝혀질 거니까.그래서 부득이하게 찾아온 게 강하리였다.“또 돈 얘긴가요? 얼마 필요한데요?”“진작 그럴 것이지. 많이도 필요 없고, 전에 말했던 10억만.”강찬수가 능글맞기 웃었다.“꼭 무슨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내가 은행도 아니고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을 구해요.”“건 내 알 바 아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