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빠, 이 사람들은 뭐, 뭐예요?”송유라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구 대표님, 아무리 구 대표님이시라지만, 아직 채 낫지도 않은 애를 이렇게 놀래키시면 어떡해요! “곁에 있던 장진영이 다급히 외쳤다.“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눈빛 하나로 장진영이 입을 다물게 만든 구승훈이 송유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자살 시도하면 그 죄가 다 용서될 줄 알았어? 그러면 뭐, 매번 죄 지을 때마다 자살시도로 때우게?”송유라의 눈빛이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당신 때문에 죽을 작정까지 했는데 저런 말이 나온다고?강하리가 없었어도 저런 소리가 나왔을까?강하리, 죽어!“오빠, 정말 나한테 이럴 거예요? 강하리만 있으면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송유라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하지만 구승훈은 변함 없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유라야, 다른 사람 목숨도 목숨이야.”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다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송유라의 병실에서 나와버렸다.“형, 형!”승재가 급급히 들어왔다.“꼭 내가 그렇게 해야 해?”구승훈은 대답 없이 흡연실로 걸어갔다. 승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흡연실에는 둘 밖에 없었다.“시킨 건 어떻게 됐어?”“둘째 형이 진술 바꿨어. 자기 혼자 주도한 거라고. 심 변호사도 알게 됐는데, 형에게후회하지 말라고 전해달라 그러더라.”구승훈이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형, 정말 그럴 거야? 강 부장 버릴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숨 막히는 정적에 참지 못한 승재가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달라질 게 뭔데. 남친까지 생겼다는데.”“아닛, 이혼도 막 하는 세상에, 결혼한 것도 아니고 고작 남친이잖아. 그게 뭐 어때서.”구승훈이 대답 없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쌉싸름한 담배 연기가 기도를 통해 페를 휘감고 나왔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어젯밤 왜 그렇게 물었는지 강하리는 너무나도
”승재 너, 사는 게 재미없어졌지?”냉기가 뿜어질 듯 차가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승재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주절이기 시작했다.“강 부장이 아깝지. 재난을 막아주는 영험한 구슬이 있단 소릴 듣고 형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찰에 하룻밤을 꼬박 꿇어앉아 기다렸는데. 송유라는 형한테 해 준게 뭔데.”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뭐라고?”움찔한 승재. 하지만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맞잖아. 송유라한테 그걸 시키면 5분도 못 버티고 힘들다고 징징거릴걸 아마.”“그거 말고. 무슨 구슬?”“형 생일선물로 준 그 구슬 말야.”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지난번 강하리가 짐을 쌀 때 언뜻 보이던, 염주 모양으로 꿴 영롱한 빛의 구슬이 생각났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액세서리려니 하고 넘겼다.“그게 나 주려고 꼬박 하룻밤을 꿇어 받은 거라고?”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구승훈을 승재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당연하지. 나도 받았어. 다만 내 건 구슬이 아니고 부적.”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담배를 끄고 밖으로 걸어나갔다.성큼성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막 달리기 시작했다.막 병실을 나서는 송유라의 앞을 쌩 지나쳤다. 구승훈을 부르려던 송유라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그 뒤로 나타난 승재가 픽 웃었다.“봤어요? 우리 형 강 부장 만나러 막 뛰어가는 거.”“그 입 다물어욧!”빼액 소리지른 송유라가 아차 싶었던 건, 승재의 눈에서 번득이는 살기를 본 순간이었다.스팟!날카로운 빛이 송유라의 팔을 그어 지났고,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끼아악!!”짜악!비명을 지르는 송유라의 뺨이 삽시에 벌겋게 부어올랐다.“팔은 강 부장 몫, 싸대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네년 때문에 죽어버린 내 조카 몫.”서늘한 승재의 음성이 울렸다.“그리고 이건 강 부장을 납치한 죗값.”승재가 송유라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끄으윽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구승훈의 얼굴에 안예서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대, 대표님이 들어오시기 몇 분 전에요.”구승훈의 미간이 꿈틀했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마케팅부를 나서자마자 업무용 번호로 강하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송유라 소송 건으로 그녀를 찾아온 심준호의 차에 타 있었다.핸드폰에 구승훈의 업무용 번호가 뜨자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승훈이에요?”운전하던 심준호가 웃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받아 봐요. 소송 건으로 찾는 걸지도 모르니까.”강하리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고 스피커를 눌렀다.“네, 승훈 씨.”생소한 호칭에 구승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강하리,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맘대로 이직해도 된댔어?”스피커폰으로 가라앉은 구승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인수인계도 끝났고 위약금도 물었는데 안될 게 뭐가 있죠? 의문점 있으시면 법무팀에 심 변호사님 찾으라고 하세요.”냉담한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이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와 다툴 생각은 없었다. 막을 수 없는 이직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무슨 수를 써도 안 통하는 강하리란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돈은? 어디서 났어?”“훔치거나 뺏은 건 아니니까 승훈 씨는 신경쓰실 필요 없고요. 이직도 다 끝난 마당에 가급적 연락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어디야? 지금 당장 만나.”“별로 그러고싶지 않아서요.”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고, 구승훈의 얼굴빛은 말이 아니었다.다시 강하리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낯선 번호가 들어왔다.통화 거절을 눌렀지만,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귀찮은 얼굴로 구승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송유라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 대표님, 빨리 좀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송유라 씨가 대표님이 없으면 안 하겠다고 자꾸 치료를 거부해서요.”구승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그럼 치료하지 말고 냅두세요.”“그건 좀
”왜 구애를 막으시는 겁니까?”정주현이 도통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양철을 바라보았다.“헛짓거리야. 그럴 시간에 네 엄마가 잡아둔 맞선이나 보는 게 훨 나아.”“이봐요 영감탱이. 나 연성에 보냈을 때랑은 말이 틀리잖아요.”정주현이 잠시 멈췄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혹시 아버지가 찜해놓은 건 아니죠? 왠지 저보다 더 하리 씨를 팍팍 밀어준다는 느낌이-.”“이노무 시키가 못 하는 말이 없어!”정양철이 번쩍 쳐든 주먹에 정주현이 줄행량을 놓았다.……대양에서 나온 강하리는 그 길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앞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는 찰나.날카로운 뭔가가 강하리의 허리춤에 들이밀어졌다.따끔한 촉감과 함께,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입 뻥긋하면 찔러버린다.”강찬수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뭐 하는 겁니까.”전신이 굳은 채, 강하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강찬수가 강하리를 끌고 옆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용건을 말해요.”순간, 날카로운 칼이 강하리의 허리춤으로부터 목덜미에 옮겨졌다.약간의 따끔함 뒤에 이어지는 서늘함.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순간 강하리는 이 미친 인간이 여차하면 서슴없이 자신을 죽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용거어언? 네년 때문에 내 일이 틀어졌으니 네년이 대신 갚아줘야 할 거 아니야!”강찬수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원래는 장진형을 찾아가 협박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장진영은 자신이 대놓고 불지 못할 걸 확신이라도 하듯 만나 주지도 않았다.사실이었다. 장진영을 불었다간 그 칼잡이가 된 자신도 밝혀질 거니까.그래서 부득이하게 찾아온 게 강하리였다.“또 돈 얘긴가요? 얼마 필요한데요?”“진작 그럴 것이지. 많이도 필요 없고, 전에 말했던 10억만.”강찬수가 능글맞기 웃었다.“꼭 무슨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내가 은행도 아니고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을 구해요.”“건 내 알 바 아
피로 얼룩진 강하리의 옷과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구승훈의 눈에 들어왔다.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기로 가득찬 눈길로 뒤를 쫓는 강찬수를 응시했다.구승훈을 본 강찬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곧 두 사람이 헤어졌단 걸 기억해내곤 낮은 소리로 을러멨다.“구 대표님, 이미 헤어진 남 일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강찬수는 더 기고만장해졌다.“강하리,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강하리의 미간이 꿈틀했다.설마 저 미친 인간이 구승훈 앞에서 자신을…….퍼억!순간 강찬수가 골목 안쪽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벽에 부딪쳐 찍소리 못 하고 쓰러졌다.그제야 강하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잠시 숨을 고른 뒤,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고맙습니다.”구승훈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또 말 뿐이지.”“그러면 안 고마운 걸로 하죠.”구승훈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고맙단 말 말고, 다른 할 말은 없고?”“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데요?”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 그 구슬은 어떻게 된 거야.”강하리가 멈칫했다가 잠시 뒤에야 물었다.“무슨 구슬요?”“시치미 뗄래? 나 생일선물로 주려고 하룻밤을 꿇어 받아왔다던 그 구슬.”“아, 그거요.”강하리가 속눈썹을 내리 깔았다.“승재 씨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거 사실 아기한테 선물하려고 받아온 거였어요.”구승훈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슴속에 뭔가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마구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속 한쪽 구석에 잊고 있었던 아기.그게 살짝만 건드려도 아픈 상처로 곪아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 일부러 이러는 거지?”강하리는 어떤 얘기로 이 남자의 질척거림을 멈출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강하리가 돌아서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들어 안았다.“왜, 왜 이래요? 이거 놔요!”주해찬의 여자친구라는 신분을 잊지 않은 지라, 강하리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하지만 구승훈은 도통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강하리가 버둥거리는
강하리의 뒷모습이 구승훈의 눈망울에 오롯이 맺혔다.먹물 한 방울이 물에 퍼지듯, 구승훈의 가슴 속에 아픔이 퍼지기 시작했다.강하리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나한테 없는 그 감정, 주해찬에게는 있냐고.하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입을 꾹 다문 구승훈은 강하리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뒤돌아 꿇어앉았다.“업히는 건 괜찮겠지? 그 속도로 언제 병원까지 걸어가.”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살짝 어지럽던 차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길게 난 터라 피가 멈추질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들쳐업었다.“언제까지 밍기적거릴 거야. 과다출혈로 쓰러질 판에.”강하리가 업힌 자세로 얼어붙었다.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나지 않았다.겨우 입을 열어 한 마디 부탁했다.“강찬수 붙잡아 줘요.”“이 시점에 그 인간이 대수야?”퉁명스런 구승훈의 음성에 강하리는 겨우 힘을 짜내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서요.”구승훈이 뭐라 더 하려는 찰나, 목에 뜨뜻한 액체 한 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하리의 상처에서 스며나온 피가 옷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야 강하리! 잠들지 마. 나랑 얘기 좀 해!”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강하리가 잠꼬대하듯 대답했다.“무슨 얘기……요?”“아무거나. 요즘 일상, 일 얘기, 뭐든.”“여기는……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구승훈의 낯빛이 순간 흐려졌다.사실 하루종일 송유라를 달래느라 병원에 짱박혀 있다가 막 나오던 중이었다.저만치 강하리와 그녀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는 강찬수를 발견하고 따라왔던 거였다.“그냥,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거짓말. 송유라 이 병원에 있는 거 다 아는데.”강하리가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나랑 유라 사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그냥 여동생 같은 사이라고.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졌다고?”승재의 전화를 받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지금 바로 사람 풀어서 주위를 뒤져. 멀리는 못 갔을 거야.”바로 지시를 내린 뒤, 한 마디 덧붙였다.“찾으면 일단 적당한 곳에 가둬두고, 강하리한테는 도망갔다고 알려주면 돼.”“왜?”핸드폰 저편 승재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시키는 대로만 해.”느긋하게 대답하는 구승훈. 더 해석 없이 통화를 마쳤다.힘들게 잡은 사람을 공짜로 강하리에게 넘길 수는 없지.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예를 들면, 자신의 전화번호 차단을 해제한다든가.속으로 계산기 팍팍 두드리며 응급실로 돌아와 보니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봄날같은선배]액정에 뜬 수신인에 구승훈이 미간을 팍 구기며 가차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얼마 못 가 또 걸려오는 전화.이번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양아, 퇴근했어?”따뜻한 주해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봄날이 따로 없는 음성이었다.물론 구승훈의 귀에는 너무나도 거슬리는 목소리였지만.“강하리 피곤해서 잡니다. 용건 말해주면 이따가 전해줄게요.”핸드폰 저편이 잠시 고요해졌다.뜬금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구 대표님? 하양이 바꿔주시죠.”봄날은 오간데 없이 사라진 서늘한 음성으로 바뀌었다.“자고있다고 했잖습니까.”심드렁한 구승훈의 대답. 주해찬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하리의 눈가가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병상 머리맡에 앉아있는 주해찬이었다.그리고, 조각 같은 얼굴에 난 상처.“선배? 언제 오셨어요? 얼굴에 그 상처는 뭐고요?”상처와는 별개로 주해찬의 얼굴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했다.강하리 앞에서는 모든 감정이 부드러워지는 주해찬이었다.고개를 휙휙 저어본 강하리가 목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다.“괜찮아요. 그보다 선배, 혹시 누구랑 싸웠어요?”“아니야.”주해찬이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이불을 여며준다.강하리의 미간이 살짝
주해찬의 눈길이 강하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퇴사가 잘 안 되는 거야?”잠시 망설이던 강하리가 대답했다.“사실은…… 구승훈과 계약 해지할 때 위약금 100억이 있었는데, 그걸 차용하느라 정양철 회장과 수익담보 협약을 맺었거든요.”주해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하리야. 나 네 남자친구 맞아?”강하리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선배,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아무리 남자친구라지만, 이제 겨우 사귄 지도 얼마 안 된 사이에 돈 얘기를 들먹일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자신의 능력으로 그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강하리였다.손 내미는 사람의 고개가 숙여지는 법.강하리는 평등한 관계의 연애를 하고 싶었다.주해찬이 미간을 좁히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전에 구승훈과 같이 있을 때 강하리가 어땠는지는 보지 못했지만.일이 있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구승훈에게 의지하게 되는 강하리란 건 알 수 있었다.자신이 아니라, 구승훈.급해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전 감정에서 나와 다음 감정에 들어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단 것도 알았다.하지만 왜인지 조바심이 났다.구승훈이란 위기감이 시도때도 없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바로 그때, 강하리가 주해찬의 손을 꼭 잡아쥐었다.“선배, 6개월만 기다려 줘요.”“하리야. 만약에 말이야…….”주해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구승훈이 다시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쩔 거야?”……병원 다른 쪽.얼굴이 일그러진 승재가 복도에 서 있었다.그 옆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구승훈이 서 있었다. 눈빛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어디서 발견했지?”“그 골목에서 멀지 않은 폐가 안에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주위 CCTV는?”“근처 슈퍼 앞에 한 대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찍힌 게 없었어.”한참을 대답이 없던 구승훈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부검 맡겨.”승재에게 지시를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