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도로 어두워지는 구승훈의 얼굴에 안예서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대, 대표님이 들어오시기 몇 분 전에요.”구승훈의 미간이 꿈틀했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마케팅부를 나서자마자 업무용 번호로 강하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송유라 소송 건으로 그녀를 찾아온 심준호의 차에 타 있었다.핸드폰에 구승훈의 업무용 번호가 뜨자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승훈이에요?”운전하던 심준호가 웃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받아 봐요. 소송 건으로 찾는 걸지도 모르니까.”강하리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고 스피커를 눌렀다.“네, 승훈 씨.”생소한 호칭에 구승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강하리,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맘대로 이직해도 된댔어?”스피커폰으로 가라앉은 구승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인수인계도 끝났고 위약금도 물었는데 안될 게 뭐가 있죠? 의문점 있으시면 법무팀에 심 변호사님 찾으라고 하세요.”냉담한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이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와 다툴 생각은 없었다. 막을 수 없는 이직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무슨 수를 써도 안 통하는 강하리란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돈은? 어디서 났어?”“훔치거나 뺏은 건 아니니까 승훈 씨는 신경쓰실 필요 없고요. 이직도 다 끝난 마당에 가급적 연락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어디야? 지금 당장 만나.”“별로 그러고싶지 않아서요.”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고, 구승훈의 얼굴빛은 말이 아니었다.다시 강하리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낯선 번호가 들어왔다.통화 거절을 눌렀지만,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귀찮은 얼굴로 구승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송유라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 대표님, 빨리 좀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송유라 씨가 대표님이 없으면 안 하겠다고 자꾸 치료를 거부해서요.”구승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그럼 치료하지 말고 냅두세요.”“그건 좀
”왜 구애를 막으시는 겁니까?”정주현이 도통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양철을 바라보았다.“헛짓거리야. 그럴 시간에 네 엄마가 잡아둔 맞선이나 보는 게 훨 나아.”“이봐요 영감탱이. 나 연성에 보냈을 때랑은 말이 틀리잖아요.”정주현이 잠시 멈췄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혹시 아버지가 찜해놓은 건 아니죠? 왠지 저보다 더 하리 씨를 팍팍 밀어준다는 느낌이-.”“이노무 시키가 못 하는 말이 없어!”정양철이 번쩍 쳐든 주먹에 정주현이 줄행량을 놓았다.……대양에서 나온 강하리는 그 길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앞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는 찰나.날카로운 뭔가가 강하리의 허리춤에 들이밀어졌다.따끔한 촉감과 함께,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입 뻥긋하면 찔러버린다.”강찬수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뭐 하는 겁니까.”전신이 굳은 채, 강하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강찬수가 강하리를 끌고 옆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용건을 말해요.”순간, 날카로운 칼이 강하리의 허리춤으로부터 목덜미에 옮겨졌다.약간의 따끔함 뒤에 이어지는 서늘함.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순간 강하리는 이 미친 인간이 여차하면 서슴없이 자신을 죽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용거어언? 네년 때문에 내 일이 틀어졌으니 네년이 대신 갚아줘야 할 거 아니야!”강찬수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원래는 장진형을 찾아가 협박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장진영은 자신이 대놓고 불지 못할 걸 확신이라도 하듯 만나 주지도 않았다.사실이었다. 장진영을 불었다간 그 칼잡이가 된 자신도 밝혀질 거니까.그래서 부득이하게 찾아온 게 강하리였다.“또 돈 얘긴가요? 얼마 필요한데요?”“진작 그럴 것이지. 많이도 필요 없고, 전에 말했던 10억만.”강찬수가 능글맞기 웃었다.“꼭 무슨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내가 은행도 아니고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을 구해요.”“건 내 알 바 아
피로 얼룩진 강하리의 옷과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구승훈의 눈에 들어왔다.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기로 가득찬 눈길로 뒤를 쫓는 강찬수를 응시했다.구승훈을 본 강찬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곧 두 사람이 헤어졌단 걸 기억해내곤 낮은 소리로 을러멨다.“구 대표님, 이미 헤어진 남 일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강찬수는 더 기고만장해졌다.“강하리,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강하리의 미간이 꿈틀했다.설마 저 미친 인간이 구승훈 앞에서 자신을…….퍼억!순간 강찬수가 골목 안쪽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벽에 부딪쳐 찍소리 못 하고 쓰러졌다.그제야 강하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잠시 숨을 고른 뒤,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고맙습니다.”구승훈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또 말 뿐이지.”“그러면 안 고마운 걸로 하죠.”구승훈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고맙단 말 말고, 다른 할 말은 없고?”“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데요?”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 그 구슬은 어떻게 된 거야.”강하리가 멈칫했다가 잠시 뒤에야 물었다.“무슨 구슬요?”“시치미 뗄래? 나 생일선물로 주려고 하룻밤을 꿇어 받아왔다던 그 구슬.”“아, 그거요.”강하리가 속눈썹을 내리 깔았다.“승재 씨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거 사실 아기한테 선물하려고 받아온 거였어요.”구승훈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슴속에 뭔가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마구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속 한쪽 구석에 잊고 있었던 아기.그게 살짝만 건드려도 아픈 상처로 곪아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 일부러 이러는 거지?”강하리는 어떤 얘기로 이 남자의 질척거림을 멈출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강하리가 돌아서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들어 안았다.“왜, 왜 이래요? 이거 놔요!”주해찬의 여자친구라는 신분을 잊지 않은 지라, 강하리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하지만 구승훈은 도통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강하리가 버둥거리는
강하리의 뒷모습이 구승훈의 눈망울에 오롯이 맺혔다.먹물 한 방울이 물에 퍼지듯, 구승훈의 가슴 속에 아픔이 퍼지기 시작했다.강하리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나한테 없는 그 감정, 주해찬에게는 있냐고.하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입을 꾹 다문 구승훈은 강하리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뒤돌아 꿇어앉았다.“업히는 건 괜찮겠지? 그 속도로 언제 병원까지 걸어가.”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살짝 어지럽던 차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길게 난 터라 피가 멈추질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들쳐업었다.“언제까지 밍기적거릴 거야. 과다출혈로 쓰러질 판에.”강하리가 업힌 자세로 얼어붙었다.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나지 않았다.겨우 입을 열어 한 마디 부탁했다.“강찬수 붙잡아 줘요.”“이 시점에 그 인간이 대수야?”퉁명스런 구승훈의 음성에 강하리는 겨우 힘을 짜내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서요.”구승훈이 뭐라 더 하려는 찰나, 목에 뜨뜻한 액체 한 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하리의 상처에서 스며나온 피가 옷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야 강하리! 잠들지 마. 나랑 얘기 좀 해!”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강하리가 잠꼬대하듯 대답했다.“무슨 얘기……요?”“아무거나. 요즘 일상, 일 얘기, 뭐든.”“여기는……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구승훈의 낯빛이 순간 흐려졌다.사실 하루종일 송유라를 달래느라 병원에 짱박혀 있다가 막 나오던 중이었다.저만치 강하리와 그녀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는 강찬수를 발견하고 따라왔던 거였다.“그냥,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거짓말. 송유라 이 병원에 있는 거 다 아는데.”강하리가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나랑 유라 사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그냥 여동생 같은 사이라고.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졌다고?”승재의 전화를 받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지금 바로 사람 풀어서 주위를 뒤져. 멀리는 못 갔을 거야.”바로 지시를 내린 뒤, 한 마디 덧붙였다.“찾으면 일단 적당한 곳에 가둬두고, 강하리한테는 도망갔다고 알려주면 돼.”“왜?”핸드폰 저편 승재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시키는 대로만 해.”느긋하게 대답하는 구승훈. 더 해석 없이 통화를 마쳤다.힘들게 잡은 사람을 공짜로 강하리에게 넘길 수는 없지.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예를 들면, 자신의 전화번호 차단을 해제한다든가.속으로 계산기 팍팍 두드리며 응급실로 돌아와 보니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봄날같은선배]액정에 뜬 수신인에 구승훈이 미간을 팍 구기며 가차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얼마 못 가 또 걸려오는 전화.이번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양아, 퇴근했어?”따뜻한 주해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봄날이 따로 없는 음성이었다.물론 구승훈의 귀에는 너무나도 거슬리는 목소리였지만.“강하리 피곤해서 잡니다. 용건 말해주면 이따가 전해줄게요.”핸드폰 저편이 잠시 고요해졌다.뜬금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구 대표님? 하양이 바꿔주시죠.”봄날은 오간데 없이 사라진 서늘한 음성으로 바뀌었다.“자고있다고 했잖습니까.”심드렁한 구승훈의 대답. 주해찬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하리의 눈가가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병상 머리맡에 앉아있는 주해찬이었다.그리고, 조각 같은 얼굴에 난 상처.“선배? 언제 오셨어요? 얼굴에 그 상처는 뭐고요?”상처와는 별개로 주해찬의 얼굴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했다.강하리 앞에서는 모든 감정이 부드러워지는 주해찬이었다.고개를 휙휙 저어본 강하리가 목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다.“괜찮아요. 그보다 선배, 혹시 누구랑 싸웠어요?”“아니야.”주해찬이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이불을 여며준다.강하리의 미간이 살짝
주해찬의 눈길이 강하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퇴사가 잘 안 되는 거야?”잠시 망설이던 강하리가 대답했다.“사실은…… 구승훈과 계약 해지할 때 위약금 100억이 있었는데, 그걸 차용하느라 정양철 회장과 수익담보 협약을 맺었거든요.”주해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하리야. 나 네 남자친구 맞아?”강하리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선배,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아무리 남자친구라지만, 이제 겨우 사귄 지도 얼마 안 된 사이에 돈 얘기를 들먹일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자신의 능력으로 그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강하리였다.손 내미는 사람의 고개가 숙여지는 법.강하리는 평등한 관계의 연애를 하고 싶었다.주해찬이 미간을 좁히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전에 구승훈과 같이 있을 때 강하리가 어땠는지는 보지 못했지만.일이 있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구승훈에게 의지하게 되는 강하리란 건 알 수 있었다.자신이 아니라, 구승훈.급해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전 감정에서 나와 다음 감정에 들어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단 것도 알았다.하지만 왜인지 조바심이 났다.구승훈이란 위기감이 시도때도 없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바로 그때, 강하리가 주해찬의 손을 꼭 잡아쥐었다.“선배, 6개월만 기다려 줘요.”“하리야. 만약에 말이야…….”주해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구승훈이 다시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쩔 거야?”……병원 다른 쪽.얼굴이 일그러진 승재가 복도에 서 있었다.그 옆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구승훈이 서 있었다. 눈빛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어디서 발견했지?”“그 골목에서 멀지 않은 폐가 안에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주위 CCTV는?”“근처 슈퍼 앞에 한 대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찍힌 게 없었어.”한참을 대답이 없던 구승훈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부검 맡겨.”승재에게 지시를
강하리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분노에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나 할 거면 나가세요.”“말 다했어?”구승훈의 눈매가 급 가늘어졌다.강하리가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선배, 나 배고파요.”주해찬이 옆에 놓았던 보온통에서 죽 한 그릇을 담아냈다.“연지 씨가 끓인 거야. 일단 이거 먹고 이따가 맛있는 거 사올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이 죽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강하를 마주하고 앉았다.그리고 한 숟갈씩 강하리에게 죽을 떠 먹이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무거운 눈길이 숟가락을 쥔 주해찬의 손과 오물오물 죽을 받아먹는 강하리의 입술 사이를 방황했다.“강하리, 강찬수가 죽었어.”구승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한 마디.강하리가 굳어졌다. 숟가락을 쥔 주해찬의 손도 허공에 멈춰졌다.“뭐라고요?”“너 병원에 데려다 놓은 뒤에 승재한테 찾으라고 시켰는데, 오늘 찾았어. 시체를.”강하리의 입매가 꽉 조여졌다.강찬수의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픔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엄마를 밖으로 밀어내던 그 인간에게 죽으라고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는데.도박에 술에 흥청망청 놀면서도 목숨만은 질기던 인간이.물어볼 게 생기자마자 죽었다고?“어떻게 죽은 거예요? 사망 원인은요?”“몰라. 지금쯤 부검 중일걸. 나중에 경찰이 너 찾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해.”강하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속을 솜뭉치로 틀어막은 듯 답답한 느낌이었지만, 일단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때 주해찬의 핸드폰이 울렸다.오늘 외교부에서 주최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지만, 다 제쳐두고 강하리에게 달려왔던 그였다.외교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었다.“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잠깐만.”주해찬이 나간 뒤, 구승훈이 입을 삐죽였다.“저 사람이 혹시 네 로망 속 남자친구야? 저 프로뒷북러가?”“맞는데요. 프로참견러 님.”“뭐어? 야, 너 일 날 때마다 곁에 나타나준 게 누군데!”“나한테 일 나게 만들어
얼굴을 일그러뜨린 구승훈을 무시한 채, 강하리는 생각에 잠겼다.강찬수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을까?그 전까지 긴가민가했다면, 강찬수의 죽음을 들은 지금은 확신이 섰다.아니면 이토록 공교로운 일이 해석이 안 되니까.뭔가를 알고있기 때문에 들이닥친 죽음, 그것이 유일한 해석이었다.“송유라는 요즘 어때요?”의심의 꼬투리가 가장 먼저 향하는 요주인물 1호, 송유라.“송유라는 왜?”구승훈이 눈매를 늘어뜨린다.“송유라 의심하는 거야? 걔일 리가 없어. 내가 사람 붙여서 시시각각 감시하고 있거든.”구승훈이 콧방귀를 뀌며 하는 말이 강하리에게는 송유라를 변호하는 말로 들렸다.그러면 그렇지.“또 자살할까 봐 사람 붙여놓은 거야.”구승훈이 한 마디 덧붙였지만 별 설득력은 없었다.마침 그때 주해찬이 들어왔고, 의사 몇이 따라 들어와 강하리를 진찰하기 시작했다.큰 문제가 없어 퇴원 가능하고, 일정 시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정말 괜찮은 겁니까? 상처가 벌어지거나 하면 어쩌려고요.”미간을 찌푸린 구승훈의 채근에 의사들이 식은땀이 삐질 났다.“안 벌어집니다. 손목 그은 것도 아니고.”강하리가 픽 웃었다. 구승훈의 얼굴이 급 어두워졌다.“걱정돼서 하는 말에 꼭 그렇게 뼈 있는 토를 달아야겠어?”“듣기 거북하면 걱정 넣어두시든가요.”구승훈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물었다.“무슨 전화예요? 급한 일이면 먼저 가 봐요 선배.”“급한 거 아니야. 움직이기 불편한 텐데 당분간은 내가 보살펴 줄게. 방금 휴가도 냈어.”구승훈의 관자놀이가 푸들 뛰었다.주해찬이 강하리를 보살펴?그 말인 즉슨.둘이 동거한단 소린데.“강하리, 당분간은 병원에 있어야겠어.”어쩔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강하리의 손목이 덥석 잡혔다.“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구승훈 씨.”주해찬의 눈길이 싸해짐과 동시에, 냉랭한 음성이 강하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러나 구승훈의 눈길과 손아귀는 꿋꿋하기만 했다.“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
개자식, 항상 중요한 것만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묻지 않았다.구승훈이 뭘 하든 그녀를 해칠 일은 없다고 믿었으니까.강하리는 휴대폰 속 영상 아래 적힌 글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난 두렵지 않아.”멈칫한 구승훈은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이해했다.그녀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영상이 폭로되는 것도, 남들이 수군거리는 것도.그러니 진시연의 한 마디 협박 때문에 물러서지 말라는 뜻이었다.“우리는 당당하게 서로 사랑하는데 왜 그 여자를 무서워하겠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운 눈동자엔 온통 남자의 모습만 비치고 있었다.구승훈은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듯 뜨거운 고통을 느꼈다.분명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결혼했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물러서겠나.진시연이 앞으로 또 어떤 수작을 부리든 그저 강하리만 지키면 그만이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승훈이 무기력한 웃음을 내뱉었다.“그럼 지금 혼인신고 하러 갈까?”필요한 서류는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다.사진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며 10분 만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마쳤고 구청을 나오는 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 그렇게 행복해?”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얌전히 살아. 유부남이라는 것 잊지 말고.”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네, 사모님.”문득 강하리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한때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제 진짜로 구승훈의 아내, 사모님이 되었다.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기 너머 심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오늘 집으로 와.”강하리는 막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연정이를 본 지 이틀이 지났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었는데 심준호가 특별히 당부하자 문득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졌다.“삼촌, 무슨 일 있어요?”심준호는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구승훈은 눈앞에 나타난 강하리를 바라보며 문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가 밤낮으로 결혼하길 고대하던 여자가 지금은 마치 그에게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 같았다.감히 거절하기만 하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듯이.강하리는 책상 뒤에 앉아 미소를 짓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화가 나서 무심코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내리쳤다.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강하리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날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미안해.”그가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한 발짝 물러섰다.자신과 구승훈 사이엔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과 아쉬움이 있었기에 하루빨리 그들 관계를 확정 짓고 남은 날들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내고 싶었는데 늘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이젠 강요 안 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자 구승훈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서둘러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지 마, 내가 설명할게.” 남자는 무력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아니에요. 강요하지 않을게요, 구 대표님. 억지로 가져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구승훈의 입꼬리가 파들 떨리며 몸을 굽혀 그녀를 안고 사무실 의자에 앉힌 뒤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아 품 안에 가두었다.“일부러 약속 어긴 건 아니야.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어.”강하리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구승훈은 약간 복잡한 표정이었다.“문자를 하나 받았어.”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서?”구승훈은 곧장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영상이 눈앞에서 재생되자 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영상에서 그녀가 주해찬에게 한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음이 났다.그토록 애정이 담긴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
구승훈의 프러포즈는 온라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돌아간 기자가 JM 건물 아래에서 찍은 영상을 전부 인터넷에 올렸고 동시에 주해찬으로부터 받은 진시연과의 채팅 기록과 진시연이 주해찬을 찾아와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녹취록도 있었다.영상과 채팅 기록이 공개되자마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여자에게 약을 먹이는 나쁜 행위에 원래도 치를 떨던 네티즌들은 진씨 가문 양딸이 친딸에게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것에 분노했다.진시연은 머리 검은 짐승이라며 양심이 없다고 욕하는 댓글을 보며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대체 왜?대체 왜 강하리는 프러포즈로 화제가 되는데 그녀는 욕이나 먹고 있는 걸까.대체 왜!진시연의 눈가에 잘 숨겨져 있던 증오가 터져 나왔다.구승훈이 정말 강하리와 주해찬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가을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리시안셔스도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바스락거리는 단풍잎 사이로 한 남자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시선을 내린 채 길거리에 서 있었다.그가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고 여전히 가상 번호였다.구승훈의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용을 클릭하니 안에는 강하리가 주해찬에게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그 아래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강하리와 결혼하지 마.]휴대폰을 쥔 구승훈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짙고 검은 눈동자에는 무거운 분노와... 살기가 일렁거렸다.그는 나문빈에게 번호를 보낸 뒤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이 생겨서 혼인신고는 다음에 하자.]그렇게 말한 뒤 그는 포장된 꽃을 차에 던지고 시동을 걸어 진씨 가문을 향해 차를 몰았다.구승훈이 찾아오자 진시연의 눈에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구승훈 씨, 무슨 일이에요?”구승훈은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쥐었다.“진시연,
“말도 안 돼. 우리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시연이는...”“주해찬 씨로부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말을 마친 기자는 두 어르신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를 떠났고 노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이야? 당신들 이 영상을 어디에 내보내려는 거야? 당신들...”이정숙이 기자를 따라잡기도 전에 기자와 카메라맨은 함께 차를 몰고 떠났다.이정숙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되면 이시연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태형이한테 전화해. 이 일이 알려지면 태형이도 망신당할 거야.”진강석이 서둘러 말하자 이정숙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태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강하리가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고 기자 앞에서 말문이 막힌 진강석 내외를 보며 한참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누가 시킨 건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구승훈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있을까.강하리는 문득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걸 느꼈다.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모든 안정감은 이 남자로부터 온다는 것을.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 줄 것 같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강하리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시선을 떨군 강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구승훈, 혼인신고 하러 가자.”전화기 너머 구승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래.”그가 웃으며 답했다.“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강하리는 구승훈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하리야, SNS 봐!”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왜 그래? 또 무
JM회사 아래층에서 늘 정교하게 치장하던 석미란은 지금 전혀 화장하지 않은 상태였다.창백한 안색에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불과 며칠 만에 아들은 유치장에 들어갔고 남편은 해당 부문에서 조사받고 있다.멀쩡하던 가정이 여자 하나 때문에 파괴되었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석미란은 내키지 않았고 여전히 강하리가 미웠다.어디선가 튀어나온 잡종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석미란의 뒤에 서 있던 석연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석미란과 석연란 외에도 진씨 가문 어르신 내외가 경호원 몇 명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JM회사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왜 아직도 안 와?”이정숙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원래는 곧장 심씨 가문으로 가서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없어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사까지 찾아왔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정숙의 말애 석씨 자매의 표정도 한층 더 일그러졌다.누가 봐도 강하리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누구 앞에서 텃세를 부리는 거야!”이정숙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고 진강석이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다들 강하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올 줄이야.그들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자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여러분들은 인터넷에서 강하리 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여기 계신 건가요?”그 말에 석미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게다가 얼마 전에 강하리 씨 출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서 고소당해 법원까지 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석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헛소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망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연란이 옆에서 끌어당겼고 석미란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