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 너, 사는 게 재미없어졌지?”냉기가 뿜어질 듯 차가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승재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주절이기 시작했다.“강 부장이 아깝지. 재난을 막아주는 영험한 구슬이 있단 소릴 듣고 형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찰에 하룻밤을 꼬박 꿇어앉아 기다렸는데. 송유라는 형한테 해 준게 뭔데.”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뭐라고?”움찔한 승재. 하지만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맞잖아. 송유라한테 그걸 시키면 5분도 못 버티고 힘들다고 징징거릴걸 아마.”“그거 말고. 무슨 구슬?”“형 생일선물로 준 그 구슬 말야.”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지난번 강하리가 짐을 쌀 때 언뜻 보이던, 염주 모양으로 꿴 영롱한 빛의 구슬이 생각났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액세서리려니 하고 넘겼다.“그게 나 주려고 꼬박 하룻밤을 꿇어 받은 거라고?”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구승훈을 승재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당연하지. 나도 받았어. 다만 내 건 구슬이 아니고 부적.”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담배를 끄고 밖으로 걸어나갔다.성큼성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막 달리기 시작했다.막 병실을 나서는 송유라의 앞을 쌩 지나쳤다. 구승훈을 부르려던 송유라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그 뒤로 나타난 승재가 픽 웃었다.“봤어요? 우리 형 강 부장 만나러 막 뛰어가는 거.”“그 입 다물어욧!”빼액 소리지른 송유라가 아차 싶었던 건, 승재의 눈에서 번득이는 살기를 본 순간이었다.스팟!날카로운 빛이 송유라의 팔을 그어 지났고,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끼아악!!”짜악!비명을 지르는 송유라의 뺨이 삽시에 벌겋게 부어올랐다.“팔은 강 부장 몫, 싸대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네년 때문에 죽어버린 내 조카 몫.”서늘한 승재의 음성이 울렸다.“그리고 이건 강 부장을 납치한 죗값.”승재가 송유라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끄으윽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구승훈의 얼굴에 안예서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대, 대표님이 들어오시기 몇 분 전에요.”구승훈의 미간이 꿈틀했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마케팅부를 나서자마자 업무용 번호로 강하리에게 전화했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송유라 소송 건으로 그녀를 찾아온 심준호의 차에 타 있었다.핸드폰에 구승훈의 업무용 번호가 뜨자 강하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구승훈이에요?”운전하던 심준호가 웃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받아 봐요. 소송 건으로 찾는 걸지도 모르니까.”강하리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고 스피커를 눌렀다.“네, 승훈 씨.”생소한 호칭에 구승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강하리,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맘대로 이직해도 된댔어?”스피커폰으로 가라앉은 구승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인수인계도 끝났고 위약금도 물었는데 안될 게 뭐가 있죠? 의문점 있으시면 법무팀에 심 변호사님 찾으라고 하세요.”냉담한 강하리의 대답에 구승훈이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와 다툴 생각은 없었다. 막을 수 없는 이직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무슨 수를 써도 안 통하는 강하리란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돈은? 어디서 났어?”“훔치거나 뺏은 건 아니니까 승훈 씨는 신경쓰실 필요 없고요. 이직도 다 끝난 마당에 가급적 연락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강하리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어디야? 지금 당장 만나.”“별로 그러고싶지 않아서요.”그렇게 통화는 끝이 났고, 구승훈의 얼굴빛은 말이 아니었다.다시 강하리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낯선 번호가 들어왔다.통화 거절을 눌렀지만,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귀찮은 얼굴로 구승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송유라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 대표님, 빨리 좀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송유라 씨가 대표님이 없으면 안 하겠다고 자꾸 치료를 거부해서요.”구승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그럼 치료하지 말고 냅두세요.”“그건 좀
”왜 구애를 막으시는 겁니까?”정주현이 도통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양철을 바라보았다.“헛짓거리야. 그럴 시간에 네 엄마가 잡아둔 맞선이나 보는 게 훨 나아.”“이봐요 영감탱이. 나 연성에 보냈을 때랑은 말이 틀리잖아요.”정주현이 잠시 멈췄다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혹시 아버지가 찜해놓은 건 아니죠? 왠지 저보다 더 하리 씨를 팍팍 밀어준다는 느낌이-.”“이노무 시키가 못 하는 말이 없어!”정양철이 번쩍 쳐든 주먹에 정주현이 줄행량을 놓았다.……대양에서 나온 강하리는 그 길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병원 앞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는 찰나.날카로운 뭔가가 강하리의 허리춤에 들이밀어졌다.따끔한 촉감과 함께,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겨왔다.“입 뻥긋하면 찔러버린다.”강찬수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뭐 하는 겁니까.”전신이 굳은 채, 강하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강찬수가 강하리를 끌고 옆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용건을 말해요.”순간, 날카로운 칼이 강하리의 허리춤으로부터 목덜미에 옮겨졌다.약간의 따끔함 뒤에 이어지는 서늘함.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순간 강하리는 이 미친 인간이 여차하면 서슴없이 자신을 죽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용거어언? 네년 때문에 내 일이 틀어졌으니 네년이 대신 갚아줘야 할 거 아니야!”강찬수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원래는 장진형을 찾아가 협박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장진영은 자신이 대놓고 불지 못할 걸 확신이라도 하듯 만나 주지도 않았다.사실이었다. 장진영을 불었다간 그 칼잡이가 된 자신도 밝혀질 거니까.그래서 부득이하게 찾아온 게 강하리였다.“또 돈 얘긴가요? 얼마 필요한데요?”“진작 그럴 것이지. 많이도 필요 없고, 전에 말했던 10억만.”강찬수가 능글맞기 웃었다.“꼭 무슨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내가 은행도 아니고 어디서 그리 많은 돈을 구해요.”“건 내 알 바 아
피로 얼룩진 강하리의 옷과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구승훈의 눈에 들어왔다.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기로 가득찬 눈길로 뒤를 쫓는 강찬수를 응시했다.구승훈을 본 강찬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곧 두 사람이 헤어졌단 걸 기억해내곤 낮은 소리로 을러멨다.“구 대표님, 이미 헤어진 남 일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시죠?”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강찬수는 더 기고만장해졌다.“강하리,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강하리의 미간이 꿈틀했다.설마 저 미친 인간이 구승훈 앞에서 자신을…….퍼억!순간 강찬수가 골목 안쪽으로 날아들어가더니 벽에 부딪쳐 찍소리 못 하고 쓰러졌다.그제야 강하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잠시 숨을 고른 뒤,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고맙습니다.”구승훈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또 말 뿐이지.”“그러면 안 고마운 걸로 하죠.”구승훈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고맙단 말 말고, 다른 할 말은 없고?”“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데요?”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강하리. 그 구슬은 어떻게 된 거야.”강하리가 멈칫했다가 잠시 뒤에야 물었다.“무슨 구슬요?”“시치미 뗄래? 나 생일선물로 주려고 하룻밤을 꿇어 받아왔다던 그 구슬.”“아, 그거요.”강하리가 속눈썹을 내리 깔았다.“승재 씨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거 사실 아기한테 선물하려고 받아온 거였어요.”구승훈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슴속에 뭔가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마구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속 한쪽 구석에 잊고 있었던 아기.그게 살짝만 건드려도 아픈 상처로 곪아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강하리, 일부러 이러는 거지?”강하리는 어떤 얘기로 이 남자의 질척거림을 멈출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강하리가 돌아서는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들어 안았다.“왜, 왜 이래요? 이거 놔요!”주해찬의 여자친구라는 신분을 잊지 않은 지라, 강하리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하지만 구승훈은 도통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강하리가 버둥거리는
강하리의 뒷모습이 구승훈의 눈망울에 오롯이 맺혔다.먹물 한 방울이 물에 퍼지듯, 구승훈의 가슴 속에 아픔이 퍼지기 시작했다.강하리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나한테 없는 그 감정, 주해찬에게는 있냐고.하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입을 꾹 다문 구승훈은 강하리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 뒤돌아 꿇어앉았다.“업히는 건 괜찮겠지? 그 속도로 언제 병원까지 걸어가.”강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살짝 어지럽던 차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길게 난 터라 피가 멈추질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들쳐업었다.“언제까지 밍기적거릴 거야. 과다출혈로 쓰러질 판에.”강하리가 업힌 자세로 얼어붙었다.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나지 않았다.겨우 입을 열어 한 마디 부탁했다.“강찬수 붙잡아 줘요.”“이 시점에 그 인간이 대수야?”퉁명스런 구승훈의 음성에 강하리는 겨우 힘을 짜내 대답했다.“물어볼 게 있어서요.”구승훈이 뭐라 더 하려는 찰나, 목에 뜨뜻한 액체 한 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하리의 상처에서 스며나온 피가 옷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저도 모르게 구승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야 강하리! 잠들지 마. 나랑 얘기 좀 해!”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강하리가 잠꼬대하듯 대답했다.“무슨 얘기……요?”“아무거나. 요즘 일상, 일 얘기, 뭐든.”“여기는……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구승훈의 낯빛이 순간 흐려졌다.사실 하루종일 송유라를 달래느라 병원에 짱박혀 있다가 막 나오던 중이었다.저만치 강하리와 그녀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는 강찬수를 발견하고 따라왔던 거였다.“그냥,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거짓말. 송유라 이 병원에 있는 거 다 아는데.”강하리가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렸다.“…….”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나랑 유라 사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그냥 여동생 같은 사이라고.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졌다고?”승재의 전화를 받은 구승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지금 바로 사람 풀어서 주위를 뒤져. 멀리는 못 갔을 거야.”바로 지시를 내린 뒤, 한 마디 덧붙였다.“찾으면 일단 적당한 곳에 가둬두고, 강하리한테는 도망갔다고 알려주면 돼.”“왜?”핸드폰 저편 승재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시키는 대로만 해.”느긋하게 대답하는 구승훈. 더 해석 없이 통화를 마쳤다.힘들게 잡은 사람을 공짜로 강하리에게 넘길 수는 없지.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예를 들면, 자신의 전화번호 차단을 해제한다든가.속으로 계산기 팍팍 두드리며 응급실로 돌아와 보니 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봄날같은선배]액정에 뜬 수신인에 구승훈이 미간을 팍 구기며 가차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얼마 못 가 또 걸려오는 전화.이번에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양아, 퇴근했어?”따뜻한 주해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봄날이 따로 없는 음성이었다.물론 구승훈의 귀에는 너무나도 거슬리는 목소리였지만.“강하리 피곤해서 잡니다. 용건 말해주면 이따가 전해줄게요.”핸드폰 저편이 잠시 고요해졌다.뜬금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구 대표님? 하양이 바꿔주시죠.”봄날은 오간데 없이 사라진 서늘한 음성으로 바뀌었다.“자고있다고 했잖습니까.”심드렁한 구승훈의 대답. 주해찬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강하리의 눈가가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병상 머리맡에 앉아있는 주해찬이었다.그리고, 조각 같은 얼굴에 난 상처.“선배? 언제 오셨어요? 얼굴에 그 상처는 뭐고요?”상처와는 별개로 주해찬의 얼굴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했다.강하리 앞에서는 모든 감정이 부드러워지는 주해찬이었다.고개를 휙휙 저어본 강하리가 목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다.“괜찮아요. 그보다 선배, 혹시 누구랑 싸웠어요?”“아니야.”주해찬이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이불을 여며준다.강하리의 미간이 살짝
주해찬의 눈길이 강하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퇴사가 잘 안 되는 거야?”잠시 망설이던 강하리가 대답했다.“사실은…… 구승훈과 계약 해지할 때 위약금 100억이 있었는데, 그걸 차용하느라 정양철 회장과 수익담보 협약을 맺었거든요.”주해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하리야. 나 네 남자친구 맞아?”강하리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선배,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아무리 남자친구라지만, 이제 겨우 사귄 지도 얼마 안 된 사이에 돈 얘기를 들먹일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자신의 능력으로 그 누구한테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강하리였다.손 내미는 사람의 고개가 숙여지는 법.강하리는 평등한 관계의 연애를 하고 싶었다.주해찬이 미간을 좁히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전에 구승훈과 같이 있을 때 강하리가 어땠는지는 보지 못했지만.일이 있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구승훈에게 의지하게 되는 강하리란 건 알 수 있었다.자신이 아니라, 구승훈.급해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전 감정에서 나와 다음 감정에 들어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단 것도 알았다.하지만 왜인지 조바심이 났다.구승훈이란 위기감이 시도때도 없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바로 그때, 강하리가 주해찬의 손을 꼭 잡아쥐었다.“선배, 6개월만 기다려 줘요.”“하리야. 만약에 말이야…….”주해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구승훈이 다시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쩔 거야?”……병원 다른 쪽.얼굴이 일그러진 승재가 복도에 서 있었다.그 옆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구승훈이 서 있었다. 눈빛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어디서 발견했지?”“그 골목에서 멀지 않은 폐가 안에서.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주위 CCTV는?”“근처 슈퍼 앞에 한 대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찍힌 게 없었어.”한참을 대답이 없던 구승훈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부검 맡겨.”승재에게 지시를
강하리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분노에 찬 눈길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나 할 거면 나가세요.”“말 다했어?”구승훈의 눈매가 급 가늘어졌다.강하리가 주해찬에게 고개를 돌렸다.“선배, 나 배고파요.”주해찬이 옆에 놓았던 보온통에서 죽 한 그릇을 담아냈다.“연지 씨가 끓인 거야. 일단 이거 먹고 이따가 맛있는 거 사올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주해찬이 죽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강하를 마주하고 앉았다.그리고 한 숟갈씩 강하리에게 죽을 떠 먹이기 시작했다.구승훈의 무거운 눈길이 숟가락을 쥔 주해찬의 손과 오물오물 죽을 받아먹는 강하리의 입술 사이를 방황했다.“강하리, 강찬수가 죽었어.”구승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한 마디.강하리가 굳어졌다. 숟가락을 쥔 주해찬의 손도 허공에 멈춰졌다.“뭐라고요?”“너 병원에 데려다 놓은 뒤에 승재한테 찾으라고 시켰는데, 오늘 찾았어. 시체를.”강하리의 입매가 꽉 조여졌다.강찬수의 죽음에 대한 가슴 아픔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엄마를 밖으로 밀어내던 그 인간에게 죽으라고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는데.도박에 술에 흥청망청 놀면서도 목숨만은 질기던 인간이.물어볼 게 생기자마자 죽었다고?“어떻게 죽은 거예요? 사망 원인은요?”“몰라. 지금쯤 부검 중일걸. 나중에 경찰이 너 찾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해.”강하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속을 솜뭉치로 틀어막은 듯 답답한 느낌이었지만, 일단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때 주해찬의 핸드폰이 울렸다.오늘 외교부에서 주최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지만, 다 제쳐두고 강하리에게 달려왔던 그였다.외교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었다.“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잠깐만.”주해찬이 나간 뒤, 구승훈이 입을 삐죽였다.“저 사람이 혹시 네 로망 속 남자친구야? 저 프로뒷북러가?”“맞는데요. 프로참견러 님.”“뭐어? 야, 너 일 날 때마다 곁에 나타나준 게 누군데!”“나한테 일 나게 만들어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
주해찬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주해찬은 정말 강하리에게 계속 사실을 숨길 생각도, 진시연을 도울 생각도 없었다.그냥... 강하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러면 강하리의 마음속 망가진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그런데 구승훈이 이토록 매몰차게 굴 줄은 몰랐다.아버지가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패한 관리들처럼 부정부패와 뇌물 수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고 할아버지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둘 리 없었다.하지만 부패를 철저히 타도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작은 선물을 몇 개 받은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된다.게다가 구승훈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관련 부서에 실명으로 가차 없이 신고했다.구승훈은 결코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가 원하는 건 주해찬의 타협과 강하리 앞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는 것이었다.사실 구승훈이 처음 병원에서 그를 떠봤을 때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다만 줄곧 비현실적인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주해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완전한 패배라는 걸.“미안해, 하리야.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인터넷에 너에 대한 루머를 유포한 것도 이모가 한 짓이야. 이모한테도 사과하라고 할게. 그리고 하리야, 내 다리...”주해찬은 말하며 심호흡하듯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의 다 나았어.”강하리는 당황했고 주해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조금만 더 나랑 같이 있어 주길 바라서, 구승훈이랑 다시 만나서 네가 또 상처받을까 봐 내가...”“선배.” 강하리가 갑자기 주해찬의 말을 가로챘다.“고마워요.”그녀가 고맙다고 말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강하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예전에 여러 번 날 도와주고 날 이렇게 생각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 나서서 진실을
두 사람 관계에 있어서 누가 봐도 을인 모습이었다.사무실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에비뉴와 정안그룹이 강하리 명의로 되어 있다고?그렇다면 강하리 혼자서도 B시 재벌과 맞먹는 것 아닌가.여러 기자가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씨 가문의 권력자 구승훈이 자신은 아내 덕분에 먹고 사는 놈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제법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그러면 강 대표님이 구 대표님과 송유라 씨 사이에 개입했다는 건...”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제가 우리 강 대표님과 언제 만났는지 아세요?”기자는 고개를 저었고 구승훈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왼쪽 약지에 낀 반지를 살며시 돌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웃었다.“아홉살 때 만났어요. 그 여자가... 제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죠.”구승훈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자기야, 미안해. 오랜 세월 많이 힘들었지? 오늘 여기서 맹세할게. 나 구승훈은 평생 강하리의 것이란 걸.”강하리는 화면 속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개자식, 인터뷰만 할 것이지 왜 저런 말을 해서는.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구승훈의 말에 그녀의 마음속에 작게나마 남아있던 불편함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인터넷에 그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있었다.구승훈의 인터뷰는 곧 화제성을 끌어모았고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댓글 창에는 축복의 글이 가득했다.강하리는 휴대폰에 달린 축복의 댓글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강 대표님, 나 보고 싶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오늘 밤 일찍 돌아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맛있는 음식만 있어?” 강하리는 멈칫했다.“또 뭘 원해?”“다리. 자기야, 한번 해보자.”강하리는 이를 갈며 그냥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정양철은 죽었지만 애초에 그가 강하리 어머니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이대로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정양철과 관련된 또 다른 단서가 나올 줄이야.“확실해요?”“물론이죠.”구승훈은 전화를 끊고 심준호에게 연락했고 그와 대화를 마친 뒤 밖을 향해 말했다.“시작하지.”잠시 후 비서가 기자 10여 명을 데리고 구승훈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문빈이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자 강하리를 욕하던 사람들은 모두 SNS로 옮겨갔고 과거 여러 번 검색어에 오르며 욕을 먹었던 흑역사도 전부 밝혀졌다.SNS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사주했는지 갈수록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안예서는 점점 더 고조되는 SNS의 화제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처리하는 강하리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대표님, 이걸 제대로 밝힐 방법을 찾아야겠어요.”강하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욕하다 지치면 자연스레 그만두겠지.”안예서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설득하려는 그녀는 이미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안진 그룹 총괄팀장과 약속 잡아줘.”안예서는 다소 무력한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 사무실을 나섰다.그녀가 사무실을 나간 뒤에야 강하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고 손가락이 SNS 아이콘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클릭했다.하지만 들어가서 보니 그녀를 욕하는 내용은 사라지고 안예서가 말했던 것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대신 라이브 방송 하나가 떠서 클릭해 본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구승훈이었다.뒤에 비치는 장소는 그의 사무실 같았다.남자는 검은 셔츠를 입은 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엔 어느새 반지를 끼고 있었다.자세히 보면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 같은 모델이지만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크지 않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낀 반지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각 왠지 모르게 인터넷에서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다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무슨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