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링!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해찬이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얼떨떨한 기색이 묻어있었다.방금 전 일어난 일이 환상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강하리 곁에 좀 더 있으면서 현실감을 좀 더 키우고 싶었지만, 손연지의 집이라 외간 남자가 늦게까지 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현관을 가로질러 아파트를 나오던 주해찬이 우뚝 멈춰섰다.머리와 어깨에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정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해찬을 보는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오, 화살받이 씨 나오셨어요?”싸늘하게 빈정이는 음성.구승훈의 화를 막아줄 화살받이라고 비꼬는 말투.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질투는 면상을 일그러뜨리는 법이죠. 지금 참 못나 보이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대답이 없이 담배갑을 꺼냈다.“한 대 하실?”“저 담배 안 피웁니다. 하양이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요.”정중히 거절하는 주해찬의 말에 구승훈이 픽 웃었다.“첨 듣는 소리네. 내 옆에 있을 땐 싫은 소리 한 번 없던 강하리인데.”“싫다는 말을 안 한다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하양이 호불호도 모르는 구 대표님이 하는 말이라면, 신뢰도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구승훈이 말문이 꺽 막혔다. 장미꽃을 싫어한다며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강하리의 눈길이 뇌리를 때렸다.“내가 모르긴 뭘 몰라! 꼭 그쪽은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이봐요. 강하리와 3년을 같이 산 사람은 나라고! 그쪽이 아니라!”일단 정곡을 찔린 티가 안 나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아랑곳 없이 웃기지도 않는단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그들 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있는 주해찬이었다.3년을 같이 산 게 아니라, 강하리가 당신을 3년이나 참아줬던 거겠지.이런 인간과 더 말을 섞어봐야 무쓸모.“그럼 이만.”씩씩대는 구승훈을 지나친 주해찬이 아파트단지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언제 강하리한테 차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말풍선 옆의 1은 요지부동이었다.구승훈은 핸드폰을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하, 이렇게 쉽사리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강하리가 이토록 통제를 벗어날 줄 알았더라면.후회가 밀려들면서 이성이 점차 제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뼛속부터 피어오른 악랄한 기운이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강하리가 단식투쟁을 하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라도 잡아둬야 했었다.강하리의 모든 몸부림을 옥죄어서라도, 철창 속에 가둬서라도 자신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이성이 그를 말렸다.안 된다고. 그러면 강하리를 점점 더 밀어내는 거라고.차에 다시 탄 구승훈이 운전대를 쾅 내리쳤다.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갑자기 핸드폰 액정에 톡 하나가 떴다.강하리인 줄 알고 부리나케 집어든 구승훈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형, 송유라가 자살했어]승재가 보낸 톡이었다.회신을 하기도 전, 안현우의 전화가 들어왔다.“송유라가 너 가자마자 룸 화장실에서 손목 그었어. 지금 명인병원 응급실이야.”“알았어.”짧은 통화를 마쳤고, 구승훈이 명인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응급실 밖에는 룸에 있던 일동과 송동혁, 장진영 내외까지 있었다.장진영은 한바탕 울었던지 눈가가 벌개져 있었고, 송동혁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구승훈이 다가오자 모두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형, 송유라 위독하대.”승재가 다가왔다.구승훈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이상한 낌새 같은 것도 없었고?”“화장실에 다녀오겠다길래 그러려니 했지. 우리가 따라가 지켜볼 수도 없고.”승재는 약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자해까지 서슴지 않더니 자업자득이지 뭐, 라고 말하는 듯한.갑자기 장진영이 구승훈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구 대표님, 우리 유라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제발……!”그 말에 승재가 눈을 희번덕였다.지금 저걸
장진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보다 못한 안현우가 다가가 장진영을 일으켜 세웠다.“아주머니, 일단 일어나시죠. 승훈이가 나몰라라 하진 않을 겁니다.”구승훈은 눈매를 가늘게 늘어뜨릴 뿐 대답이 없었다.……밤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응급실에서 실려나온 송유라가 관찰실로 옮겨졌다.모두가 흩어진 후, 승재가 굳은 얼굴로 구승훈에게 다가왔다.“형, 또 송유라 뒤치다꺼리 해 주려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말 없이 서늘한 눈길로 병상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관찰실을 나섰다.“하리야, 강하리!”작은 목소리로 다급히 속삭이는 손연지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응? 왜?”손연지가 핸드폰을 넘겨주며 입모양으로 ‘구승훈’을 만들었다.꿀잠 날린 깊은 빡침을 미간에 새기며, 강하리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대표님, 잠 좀 잡시다 예?”“잠시 내려와. 한 가지만 묻자.”통화가 끊겼고, 손연지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뭐래? 말투 되게 수상하던데.”“몰라. 무시해. 자.”강하리가 핸드폰을 손연지에게 돌려주었다.손연지가 하품을 하며 사라진 후, 강하리는 한참을 뒤척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홀린듯 창가에 다가가 내려다보니 아래에 구승훈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강하리는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서 아랫층으로 내려갔다.아파트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었다. 편한 잠옷 차림에 패딩만 걸친 강하리가 눈동자에 맺혔다.순간, 구승훈은 송유라고 뭐고 다 떨쳐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오직 눈 앞의 이 여자가 원한다면.하지만 이내 충동을 억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유라였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짧게 끝내요. 용건이 뭐죠?”강하리의 덤덤한 말이 구승훈이 일렁이는 심정을 갈무리했다.“주해찬이랑 헤어질 수 있어?”한 마디 묻고.“잘 생각해보고 대답해.”한 마디를 덧붙였다.“아니요.”1초의 망설임도 없는 강하리의 대답.예상했단 듯, 구승훈의 차가운
강하리의 입매가 굳어졌다. 한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참이 지나셔야 입을 열었다.“’시도’라면, 안 죽었다는 얘기……네요?”“네. 좀 아쉽게도요.”맞장구를 친 승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말인데, 우리 형이 그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어쩌면 다시 송유라한테 관심을 줄지도.”그제야 강하리는 어젯밤 구승훈의 뜬금없는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택지 같은 거였다.자신이 돌아갈 마음이 있으면 약속했던 대로 송유라를 내버려 둘 거고.미련 없이 돌아선다면 다시 송유라를 감쌀 거라는.강하리는 냉소를 지었다.자신의 선택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구승훈이 짐작은 했을 거니까.그 남자는 그저, 자신이 박아주는 쐐기로 결정을 내릴 용기를 얻으려는 거였다.다른 의미로는, 송유라를 감싸줄 빌미를 얻으려는 것.그 뜻을 알아채자, 구승훈에 대한 증오가 더 깊어졌다.무슨 왕이 군림하듯 선택지를 내린 이유가 송유라를 위해서라니.자신과 아기의 목숨까지 노린 여자를.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이 배팅에 내던져진 코인 몇 개가 된 기분이었다.“승재 씨.”강하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유라의 자살 따윈 결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구승훈의 마음이지.”“뭐,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강 부장!”승재가 답답한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지금 형 마음속에는 강 부장이 우세예요. 형에게 조금만 기회를 주면 송유라 따윈 그냥 버릴 거라고요.”“승재 씨.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예?”그 자리에 굳어진 승재를 뒤로 한 채, 강하리가 회사에 들어섰다.입이 떡 벌어진 승재의 사고 회로가 그대로 멈췄다.남자친구?왜? 어떻게?우리 형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강 부장인데?……“부장님, 대표님 호출이에요. 지금 바로 올라오래요.”강하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예서가 도도도 달려왔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대표이사 사무실로
지이익-!소송취하서가 반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고드름 끝처럼 날카롭고 서늘한 강하리의눈빛이 드러났다.구승훈이 송유라 소송에 끼어들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심판 결과가 나온 뒤 인맥을 동원해 감형이나 보증석방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상상도 못 했었다. 소송을 아예 싹을 잘라버릴 궁리까지 했단 건.두 장이 되어버린 취하서를 냉랭한 눈길로 바라보는 구승훈.언짢은 기분과는 별개로 말 못할 안도감이 드는 구승훈이었다.적어도 강하리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는 입증이니까.“강 부장, 이게 뭐 하는 짓이지?”짐짓 언성을 높였다. 이글거리는 눈길로 강하리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희망이 피어있었다.혹시, 후회하는 건가?아니면 이 회사를 떠나기가 망설여졌을 수도?강하리가 꼭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위약금 내겠습니다.”한 마디에 구승훈의 눈에 맺혔던 희망이 파사삭 사그라져 버렸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한기가 서렸다.“무슨 수로? 주해찬이 대 주겠다고 그러던?”주씨 가문이 실력으로 손꼽히는 명문가이긴 하지만 돈이 수면 위에서 오가는 상업 명문은 아니었다.관직 명문가인 주씨 가문이 몇십억을 공공연히 내놓을 수 있을 리가.강하리는 대답 없이 돌아서 나갔다.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강하리를 그대로 보냈다.사무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상 위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 소리에 강하리가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멀어져갔다.……강하리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양철]“네, 정 회장님.”“하리 양, 생각은 잘 해봤어요?”“만나뵙고 얘기해도 될까요?”그렇게 대양지사와 에비뉴 사이 어딘가의 한 커피숍에 두 사람이 앉았다.“대양에 입사하겠습니다. 대신 조건 세 개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당찬 강하리의 발언에 정 회장의 눈썹이 흥미롭단 듯 꿈틀했다.“얘기해 보시죠.”“첫째는 공적인 업무 외 기타 요구는 상황에 따라 거절할 권리.”“두 번째, 연성 지사만큼은 모든
”세번쨰는 이겁니다.”강하리가 문서 한 뭉터기를 내밀었다.“이건?”받아들고 슥 훑어본 정양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여기 쓰여진 수익을 보증한다고요? 하리 양, 급전 필요하면 나나 우리 아들내미나 무이자 무기한으로 빌려줄 수 있는데, 이 정도 수익 보증은 리스크가 너무 큰 거 아닌가요?”“시도해보지도 않고 자신을 부정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강하리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좋습니다! 그 자신감! 역시 사람 제대로 본 것 같네요. 빠른 시일 내로 송금해줄 테니 에비뉴 쪽과도 가급적 빨리 마무리해주길 바랍니다.”두 사람의 악수로 대화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강하리가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정양철. 복잡한 눈길로 [수익보증협약서]라고 씌어진 문서를 바라보았다.에비뉴 대표이사실.구승훈의 핸드폰 너머로 송유라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찍이 떼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온 송유라가 가장 먼저 찾았다는 점이 감동은커녕 짜증이 되어 밀려왔다.“오빠, 저 보러 좀 와 주면 안돼요? 저 너무 무서워요 지금.””죽는 것도 안 무서워하는 애가 뭐가 무서워?”구승훈의 냉담한 반응에 송유라는 말문이 꺽 막혔다.“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너무 무서-.”뚜-.구승훈이 통화종료를 눌러버렸다.막장드라마 악녀도 아니고, 이렇게 저급적인 수단으로 나를 붙들어매려 해?어릴 적 유라가 지금처럼 자랐단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하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서늘한 얼굴을 한 채 구승훈이 대표이사실을 나섰다.명인병원 고급병실.울부짖음 소리와 함께 물건 깨지는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다.구승훈이 문을 여는 순간, 물컵 한 개가 그의 귓가를 스치며 날아 지나갔다.그 너머로 창백한 얼굴의 송유라가 멍해진 채 얼어붙었고.“오, 오빠?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에요.”“쌩쌩하네. 조사받는 것도 문제 없겠어.”구승훈이 문에서 비켜서자, 제복 차림의 사내 둘이 들어섰다.웅-!송유라의 머릿속에서 사이렌 비슷
”오……오빠, 이 사람들은 뭐, 뭐예요?”송유라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구 대표님, 아무리 구 대표님이시라지만, 아직 채 낫지도 않은 애를 이렇게 놀래키시면 어떡해요! “곁에 있던 장진영이 다급히 외쳤다.“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눈빛 하나로 장진영이 입을 다물게 만든 구승훈이 송유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자살 시도하면 그 죄가 다 용서될 줄 알았어? 그러면 뭐, 매번 죄 지을 때마다 자살시도로 때우게?”송유라의 눈빛이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당신 때문에 죽을 작정까지 했는데 저런 말이 나온다고?강하리가 없었어도 저런 소리가 나왔을까?강하리, 죽어!“오빠, 정말 나한테 이럴 거예요? 강하리만 있으면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송유라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하지만 구승훈은 변함 없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유라야, 다른 사람 목숨도 목숨이야.”그 한 마디를 남긴 채, 다시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송유라의 병실에서 나와버렸다.“형, 형!”승재가 급급히 들어왔다.“꼭 내가 그렇게 해야 해?”구승훈은 대답 없이 흡연실로 걸어갔다. 승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흡연실에는 둘 밖에 없었다.“시킨 건 어떻게 됐어?”“둘째 형이 진술 바꿨어. 자기 혼자 주도한 거라고. 심 변호사도 알게 됐는데, 형에게후회하지 말라고 전해달라 그러더라.”구승훈이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형, 정말 그럴 거야? 강 부장 버릴 거야?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숨 막히는 정적에 참지 못한 승재가 입을 열었다.“안 그러면 달라질 게 뭔데. 남친까지 생겼다는데.”“아닛, 이혼도 막 하는 세상에, 결혼한 것도 아니고 고작 남친이잖아. 그게 뭐 어때서.”구승훈이 대답 없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쌉싸름한 담배 연기가 기도를 통해 페를 휘감고 나왔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어젯밤 왜 그렇게 물었는지 강하리는 너무나도
”승재 너, 사는 게 재미없어졌지?”냉기가 뿜어질 듯 차가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승재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주절이기 시작했다.“강 부장이 아깝지. 재난을 막아주는 영험한 구슬이 있단 소릴 듣고 형 생일선물로 주려고 사찰에 하룻밤을 꼬박 꿇어앉아 기다렸는데. 송유라는 형한테 해 준게 뭔데.”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던 구승훈의 손이 멈칫했다.“뭐라고?”움찔한 승재. 하지만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맞잖아. 송유라한테 그걸 시키면 5분도 못 버티고 힘들다고 징징거릴걸 아마.”“그거 말고. 무슨 구슬?”“형 생일선물로 준 그 구슬 말야.”구승훈의 목울대가 요동쳤다.지난번 강하리가 짐을 쌀 때 언뜻 보이던, 염주 모양으로 꿴 영롱한 빛의 구슬이 생각났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액세서리려니 하고 넘겼다.“그게 나 주려고 꼬박 하룻밤을 꿇어 받은 거라고?”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구승훈을 승재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봤다.“당연하지. 나도 받았어. 다만 내 건 구슬이 아니고 부적.”구승훈의 입술이 실룩였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담배를 끄고 밖으로 걸어나갔다.성큼성큼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막 달리기 시작했다.막 병실을 나서는 송유라의 앞을 쌩 지나쳤다. 구승훈을 부르려던 송유라의 입술이 그대로 굳었다.그 뒤로 나타난 승재가 픽 웃었다.“봤어요? 우리 형 강 부장 만나러 막 뛰어가는 거.”“그 입 다물어욧!”빼액 소리지른 송유라가 아차 싶었던 건, 승재의 눈에서 번득이는 살기를 본 순간이었다.스팟!날카로운 빛이 송유라의 팔을 그어 지났고,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끼아악!!”짜악!비명을 지르는 송유라의 뺨이 삽시에 벌겋게 부어올랐다.“팔은 강 부장 몫, 싸대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네년 때문에 죽어버린 내 조카 몫.”서늘한 승재의 음성이 울렸다.“그리고 이건 강 부장을 납치한 죗값.”승재가 송유라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끄으윽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
‘심리 의사들은 원래 이렇게 강한 심장을 가진 걸까 아니면 이 임 선생이 유독 뻔뻔한 걸까? 만약 이 사람이 노민준 씨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대표님은 진작 화를 냈을지도 몰라.’하지만 임희주는 분위기를 살피고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치료 방안을 구승훈에게 설명했다.“간단히 말하면 이전 치료 방안은 증상을 억제하는 방식이었어요. 예를 들어 노민준 씨가 처방한 약들도 증상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런 억제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해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더 심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억제보다는 근본적인 해소를 목표로 하는 방향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약효를 완전히 끌어낸 뒤 점차 증상을 약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한 번에 모든 약효를 없애는 건 아니고 몸과 신경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이 방법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어요. 구승훈 씨가 신중히 고민한 후 결정하시면 좋겠습니다.”임희주가 말을 마치자 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준봉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이 방법을 선택하면 어떤 위험이 따를까요?”임희주는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약효를 모두 끌어낼 경우 증상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위험이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준봉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반면 구승훈은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구승훈이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방안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노민준인가요?”임희주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제가 만든 방안이지만 노민준 씨와도 논의했습니다. 그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어요.”구승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생각해 보겠습니다.”임희주는 한 발짝 다가서며 덧붙였다.“빠른 답변 부탁드려요.”구승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카페
구동근은 방에서 밤새 소란을 피운 끝에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실려 갔다.그는 병원에 가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도착한 후에도 구승훈의 철저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그가 난동을 부린 탓에 병실은 엉망이었지만 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도 부수고 있네요? 그럼 내가 잠깐 밖에서 기다렸다 들어올까요?”구동근은 화가 나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이미 말했잖아. 여초연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구승훈은 대꾸하지 않은 채 보온병에서 밥을 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건가요?”구동근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확실히 몰라. 여초연 씨가 떠날 때 난 보내주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 여초연 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 물론 나중에 행방을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얻은 단서는 거의 없었고 여초연 씨는 아마도 M국에 있을 거야. 그 팔찌는 어제 아침 하인이 집 앞에서 발견한 거야. 안에는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고 여초연 씨의 필체로 ‘너희 부인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어.”말을 마친 구동근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여초연 씨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결국 내가 여초연 씨에게 휘둘리고 있었더라고. 만약 그때 여초연 씨가 너에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넌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을까?”구동근은 말을 마친 뒤 묵묵히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때 너희가 여초연 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여초연 씨가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죠. 결국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구승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밖으로 나온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 속에는 조롱이 가득했다.그가 조롱하는 대상이 다른 사
강하리는 구승훈이 그 팔찌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그 감정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이 시점에서 여초연이 팔찌를 보내는 것은 분명 도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구승훈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꼈다.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내가 안아줄까?”구승훈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그럼 강 부장님은 어떻게 나를 위로할 생각이에요?”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키스해 주고 안아주고 오빠라고 불러주면서 달래주면 되지 않을까?”구승훈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빗속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그때 그는 매우 슬펐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 느꼈다.구승훈이 강가에 서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구승훈 오빠.”그가 돌아보자 한 어린 소녀가 비를 맞으며 구승훈에게 달려와 작은 분홍색 우산을 그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구승훈 오빠, 슬퍼하지 말아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젖은 옷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비가 내리는 중에 힘겹게 사탕 포장을 뜯고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달콤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빗속에서 소녀는 반달처럼 꺾인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달콤해요?”구승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저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있던 서글픈 감정이 점차 따뜻하게 변해갔다.그의 어린 시절은 아마도 온통 계산과 속임수로 가득했을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의 마음에 조금의 사랑도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잊힌 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그것은 구승훈의 삶에 존재한 빛과 같았고 아주 달콤했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말하지 않자 여전히 그가 마음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그녀의
구동근은 갑자기 침묵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소 힘겹게 걸으며 창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손에 쥔 채 시선을 내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구동근은 말없이 창가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다그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구동근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창밖으로 보이는 아래층 정원에서 기사가 가정부와 연정이를 데려다주었다.연정이는 진태형이 얼마 전 사준 작은 패딩에 토끼 목도리를 두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예쁜 머리핀 두 개를 하자 작고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웠다.차에서 내려와 강하리를 보자마자 아이는 신이 나서 가정부가 내려주기 바쁘게 뒤뚱거리며 강하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깔깔 웃었다.강하리가 다가가 연정이를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정원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유난히 선명하게 구동근의 눈에 각인되었다.희미한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솔직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구승훈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은 듯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아시게 됐을 때 다시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문을 나섰고 단호한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동근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주름진 노인의 얼굴엔 금세 화난 기색이 돌았다.“이 자식, 무슨 뜻이야? 날 가두는 거야?”구승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소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상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안위가 걱정돼서요. 오늘 피까지 토하셨는데 제가 잘 챙겨드려야죠.”“이놈 자식이!”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 문 앞에 있던 사람에게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방을 나선 구승훈은 혼자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저녁 바람은
구동근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민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할아버지에게 강요해서 무덤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젠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여? 우린 다 앞 못 보는 장님인 줄 알아? 네가 오늘 할아버지를 강요해 결혼을 진행해도 우린 인정하지 않아!”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할아버지, 제가 강요했어요?”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손자 하나는 참 잘 키웠다.구승훈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구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야. 심씨 가문에서 동의하면 앞으로 강하리는 구씨 가문의 당당한 며느리가 될 거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자 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한 겹 내려앉은 듯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 미쳤어요?” 구민성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구동근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해도 반대하지 말았을걸. 그러면 이 지경으로 되지도 않았고 구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텐데.구동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구동근의 체면을 생각해 별다른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구동근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곧장 입을 열었다.결혼 허락은 물론 예물까지 전부 준비할 생각이었다.SH그룹은 무너졌지만 구동근은 여전히 많은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일부는 구승훈의 예비 신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다. 연성 중심가에 있는 사무 빌딩, 그리고...원래 여초연의 손에 있던 팔찌까지.“승훈이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보낸 겁니다.”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말을 마친 구동근은 강하리에게 팔찌를 건넸다.하지만 강하리는 팔찌를 받을 생각이
강하리의 말에 진시연은 물론 이정숙도 당황했고 곧바로 이정숙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강하리, 주제넘게 굴지 마!”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저한테 잘해준다는 게 이런 건가요?”이정숙의 말문이 막히자 진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난 무릎은 꿇을 수 있지만 할머니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연세가 있고 그쪽 할머니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은 존중해야죠.”또다시 강하리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말에 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주머니, 손님 내보내세요.”오영숙이 서둘러 달려왔다.“어르신, 진시연 씨, 나가시죠.”오영숙이 말을 마치자 진시연은 이를 악문 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시연아!”소리를 지르며 이정숙은 진시연을 끌어당기려 했고 진시연의 몸도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앞으로 다시는 건드리거나 성가신 일 만들지 않을게요. 강하리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강하리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꺼져요. 앞으로 나랑 내 가족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진시연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숙과 함께 떠났고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들 눈에 강하리는 줄곧 만만하고 연약한 상대였다.그게 아니면 구승훈이 아니라 바로 강하리의 회사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다.그런데 지금 보니 구승훈이 만나는 여자가 진태형의 양딸과 어머니도 몰아붙일 만큼 독한 사람이고 거실에 있는 심씨 가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이었고 구동근은 더더욱 그러했다.그는 강하리가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출신이 비천한 데다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시골 출신인 계집이 성격도 연약하고 소심해서 훌륭한 안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섣부른 판단이었다.거실에서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