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건우는 소지아에게 근황을 이야기했다. 소지아는 줄곧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당초에 자신 때문에, 임건우는 이도윤에 의해 외국으로 보내졌다.임건우의 목소리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는 외국에서 연수하면서 이미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다.최근에는 성격이 좋은 여자친구까지 사귀었고, 몇 년 뒤 귀국하면 원장 자리까지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연수의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임건우는 소지아를 대신해서 내일 위 검사를 안배했다.“지아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다시 열심히 사려 하는 네 모습을 보니, 나도 정말 기쁘구나.”“선배, 난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하루든 한 달이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거고요.”전화기 쪽에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 나 방금 또 망친 거 같아요…….”소지아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빨리 가봐요, 선배.”이날 밤, 소지아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목욕을 했다.심지어 그녀는 자신에게 와인을 반 잔 따랐는데, 테라스에 서서 바닷바람을 들으며 술잔을 들기도 했다.소지아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소지아, 꼭 살아있어야 해!”다음날 아침, 소지아는 휴가를 내고 간단한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김민아를 불러 모교로 돌아갔다.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 주변은 많이 변했고, 상가와 건물이 좀 더 많아졌다.아침 바람은 여자아이들의 머리카락과 막 싹을 틔운 푸른 잎을 흐트러뜨렸고, 새들은 재잘거리며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포장마차에서 군고구마를 굽는 난로는 바깥으로 가벼운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갓 구운 만두 냄새가 가득했다.햇빛이 소지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자, 모든 것은 딱 좋았고, 그녀도 이 고통으로 뒤덮인 인간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김민아는 소지아의 귓가에 대고 쉴 새 없이 과거의 재미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전 남친에 대해 이야기하면, 김민아는 여전히 실의에 빠졌다.소지아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민아
C팀에 들어서자, 모두의 열정적인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이 화면을 보고 소지아는 아주 웃기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빽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의 웃음은 여전히 이렇게 밝을까?이은리조차도 소지아가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하는 일에 한을 품지 않았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응원했다.“잘 해봐!”박금란은 서둘러 소지아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지아야, 그 강진이란 사람, 어젯밤에 또 그들 부서의 여자와 밥을 먹으러 갔는데, 쯧쯧, 얼마나 더럽게 구는지.”“그리고?”“마침 내가 그 여자와 관계가 좋거든. 그녀는 나를 대신해서 몇 마디 떠보았는데, 강진은 네가 예쁘고 몸매도 좋고 피부도 하얗다고 계속 말하며 조만간 너를…… 에헴.”뒤의 말은 박금란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런 것 외에 강진은 너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전에 너와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소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그 사진은…….”“내 친구가 물어봤는데, 그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단지 그 오 사장도 너와 잘 수 있으니 자신도 조만간 너와 잘 것이라 말했을 뿐, 전혀 그에게서 전해진 줄 모르는 모양이더라.”이은리와 강진의 채팅 기록을 생각하니, 사진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지아야, 내가 강진에 대해 아는 바에 의하면, 그의 업무 능력은 비록 괜찮지만, 업무를 제외하면 머릿속에는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밖에 없어. 그는 너와 원한이 없으니 이렇게 할 필요도 없고.”“만약 그가 아니라면, 사진은 왜 또 그가 보낸 것일까?”“그 남자는 여자를 너무 밝혀서, 그럭저럭 예쁜 사람이라면 바로 잘 수 있거든. 어느 여자가 강진의 핸드폰을 이용해, 그의 손을 빌려 팀장님에게 보냈을 수도 있지.”소지아는 눈이 밝아졌다.“네 말이 맞아.”그 주모자는 틀림없이 자폭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스스로 조사하려 한다 하더라도 주의력을 강진에게 돌릴 것이다.‘정말 음흉하군.’이렇게 되면 소지아는 어떤 사
소지아는 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변진희가 정말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지아도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손을 쓸 줄은 몰랐다.이 뺨은 소지아를 멍하게 만들었다.그녀의 인상 속의 변진희는 성질이 좀 차가웠고, 자신을 대할 때 무척 싸늘했다.그러나 그래도 변진희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어떻게 대중들 앞에서 막무가내로 자신을 때릴 수 있었을까?소지아는 얻어맞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크게 쉬고서야 마음속의 화를 억눌렀다.“백 부인, 설명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소지아, 네가 오늘처럼 이런 뻔뻔스러운 꼴이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난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 정말 나를 너무 실망시켰구나!”요 며칠간 즐거웠던 소지아의 심정은 변진희의 이 뺨에 의해 바람처럼 사라졌다.주위의 동료들이 궁금해하는 눈빛 속에서, 소지아는 너무나도 창피했다.“무슨 일 있으면 나가서 이야기해요.”변진희는 소지아의 손을 뿌리쳤다.“왜? 내가 네가 한 그 일들 폭로할까 봐 두려워? 나는 정말 네 아버지가 요 몇 년 동안 널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어. 뜻밖에도 널 이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키웠다니! 남은 이미 너와 선을 그었는데, 넌 왜 아직도 뻔뻔스럽게 회사로 쫓아왔지?”소지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백채원은 스스로 이도윤의 결정을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변진희에게 고자질했던 것이다.변진희는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구겼고, 소지아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하고 싶었다.이런 수단은 그다지 대단하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소지아는 변진희의 얼굴에 시선을 돌리고 다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내 엄마잖아요.”그녀는 자신의 친엄마이면서도 백채원을 두둔하는 변진희가 이해되지 않았다.변진희는 백채원이 소지아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백채원을 책망하지 않고 뜻밖에도 백채원의 부추김을 받아 회사로 달려와 소동을 일으켰다.변진희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소지아는 변진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외국으로 날아갔다.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변진희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딸인 자신을 잘 대하는 게 아닌가?이렇게 하면 자신의 명예를 망치고 엄마로서의 체면까지 구길 텐데, 변진희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변진희는 멍해지더니 곧 더욱 흉악해졌다.“소지아, 내가 말했지, 사람은 당당해야 한다고. 넌 천벌 받는 것도 두렵지 않니?”소지아는 손바닥을 꽉 쥐고 있어 이미 약간의 핏기가 배어 있었다.“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죠?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그녀일 텐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정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백 부인, 대표님께서 두 분 올라오시라고 합니다.”이 일은 뜻밖에도 이미 대표 사무실까지 전해졌고, 진환은 공손하게 한쪽에 서서 두 사람을 데려갔다.소지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변진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기억 속의 모습과 비슷했다.소지아는 단지 우습다고 느낄 뿐이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면, 소지아는 요 몇 년 동안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을까?문이 열리자 진환은 공손하게 변진희에게 말했다.“부인님, 앉으세요.”변진희가 앉자 진환은 소지아에게 손짓을 하려 했지만, 소지아는 바로 거절했다.“아니야, 난 서 있으면 돼.”이도윤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의 속도는 아주 빨라 소지아의 곁을 지날 때 찬바람이 불었다.이도윤은 변진희 맞은편에 앉아 말을 하지 않았고, 몸에 찬 기운이 만연했다.소계훈이든 백정일이든, 변진희 앞에서 항상 부드러운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변진희는 아랫사람의 카리스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회사에 오셨는데, 왜 미리 인사를 하지 않았죠. 사람 시켜 모시러 갈 수 있었는데.”이도윤은 테이블 앞에 앉아 스스로 차를 끓이며 컵을 씻었고, 그 수법은 마치 늙은 노인처럼 능숙했다.변진희는 아래층에서 떠벌리던 모습을 지우고, 손을 무릎에 얹고 대갓집 규수의 모습을 보였다
이도윤의 이 말은 소지아가 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그는 소지아가 변진희란 어머니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리워라던 사람이 귀국하자마자 그녀를 이렇게 대하다니, 소지아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도윤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변진희는 몰랐다.그녀는 소계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딸에 대해서도 매우 무관심했다.설사 백채원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히 백정일이 없으면, 백채원은 암암리에 변진희를 몰래 괴롭힌 횟수가 적지 않았다.그러나 사람의 천성은 또 이러했다. 보통 가장 부드러운 면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고, 몹시 욱하고 나쁜 면은 가족에게 남김없이 드러냈다.변진희가 백채원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마치 습관적으로 소지아를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개의치 않으며, 심지어 마음대로 버리는 것과 같았다.이도윤의 말에 변진희는 결코 반성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봐주지 않고 말했다.“나는 단지 지금 네가 채원과 약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야. 너와 지아는 이미 끝났어. 지아야, 엄마가 너에게 부탁할게. 도윤을 멀리하고 채원의 가정을 파괴하지 말자, 응?”소지아의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가까스로 불태운 생존 희망도 변진희에 의해 조금씩 사라졌다.“백 부인, 내가 무엇을 하든 다 잘못인 거죠?”“네가 정말 눈치가 있다면, 그의 회사에 남아 채원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야.”소지아는 그 냉담한 얼굴을 보면서 어릴 때 자신이 매번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본 다음, 만족스러운 답안지를 변진희에게 보여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도 바로 이런 표정이었다.무관심.“알았어, 손 씻고 밥 먹어. 오후에 혼자 집에서 피아노 수업 받고, 난 미용실에 다녀올 거야.”자신이 기대했던 칭찬은 한 마디도 없었고, 소지아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히 반 친구들은 모든 부모님들이 성적이 좋고 우수한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했다.‘엄마는
소지아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훤칠한 몸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이도윤은 변진희의 손을 잡았다.만약 전에 여전히 어른이라고 봐줬다면, 지금 이도윤의 눈에는 압박과 차가운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지금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변진희는 응석받이로 자라서 손목이 이도윤에게 쥐어지니까 무척 아팠다. 아파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이도윤, 나는 너를 돕고 있는데, 너는 또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도와준다고요?” 이도윤은 냉소하면서 손을 놓지 않고 은근히 힘을 더했다.“난 내 일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알겠어요?”변진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알았어, 일단 손부터 놔.”“당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잘 보세요. 그녀야말로 당신의 딸이라고요!”이도윤은 말하면서 손을 뿌리쳤다.변진희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자국이 생겼는데, 이도윤에게 잡혀 아파서 운 것이었다.변진희는 소지아를 바라보는 표정이 더욱 흉악하여 이도윤이 가져다준 고통을 소지아에게 더해주었다.“봐, 다 네가 한 짓이야. 네가 채원처럼 말을 잘 들었다면 나도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소지아는 자신의 위를 안고 화가 나서 피가 솟구쳤다.“당신이 떠난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나에게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변진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화를 냈다.“넌 결국 내 딸이야. 난 밤낮으로 너를 걱정하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매정한 말을 할 수 있니? 소계훈이 어떻게 너를 가르쳤는지 모르겠…….”이번에 그녀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소지아는 탁자 위에 방금 데운 찻잔을 들었고, 잔에는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소지아는 오히려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당장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변진희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녀는 또 망설였다.“내가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아빠 언급하지 마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요!”변진희도 소지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너, 너…
변진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내가 말했잖아. 틀림없이 이 계집애가 너를 귀찮게 하고 매달린 거라고. 지아 너도 들었지. 지금 가서 물건을 정리하고 엄마와 집에 가자.”변진희는 손을 뻗어 소지아의 손을 잡았다.“엄마는 방금 좀 흥분했어. 그러니 그 말들 마음에 두지 마. 나도 너를 위해서야. 이혼한 이상 깨끗하게 정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민폐라고…….”소지아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이 말이 맞네요. 이혼하면 깨끗하게 정리해야죠. 설령 전 남편이 곧 병으로 죽어도 볼 필요가 없겠죠.”변진희는 멍해졌다. 말하자면 그녀는 귀국한 후에 확실히 소계훈을 보러 가지 않았다.“너 지금 나 탓하는 거야? 내가 돌아왔을 때 너의 아버지는 ICU에 있었다고.”그녀의 설명에 소지아는 더욱 웃음이 나왔다.“변 여사님, 나는 정말 당신에게 도대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네요. 그때 변씨 집안은 파산위기에 처해있었고, 우리 아빠가 나서서 도왔죠. 당신이 그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아빠는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시집와서도 달갑지 않았죠. 그리고 이 혼인을 수치로 여겼고요. 그러나 우리 아빠는 무슨 잘못이 있죠? 당신은 애인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떠났고, 우리 아빠는 지금까지 장가들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서 당신은 누구든 원망할 수 있지만, 우리 아빠를 원망할 자격이 없어요.”소지아의 말에 변진희는 얼굴이 빨개졌다. 소지아는 지금 자신을 은혜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하고 있었다.말이 끝나자 소지아는 이도윤을 쳐다보았다.“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날 해고하는 거지?”이도윤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회사에 온 지 며칠 만에 적지 않은 일을 일으켜 회사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으니까. 우리 회사는 너 같은 직원 따윈 필요 없어. 인사팀으로 하여금 계약의 3배에 따라 너에게 배상하라고 할 테니까, 지금 내려가서 돈 받아.”소지아는 이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이도윤이 미웠다. 하필 자신이 사실을
소지아가 물건을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맞은편에서 늠름한 자태의 한 여자가 걸어왔다. 바로 B팀 팀장이었다.손승옥은 두 손을 가슴에 안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뭐랬어. 남자를 의지하고 올라오면 오래가지 못한다니깐.”인간의 추악함은 바로 전에 모르던 사람이 단지 몇 마디의 루머로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악의를 품을 수 있단 것이다.바로 손승옥처럼, 소지아가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손송옥은 소지아를 향해 침을 뱉을 수 있었다.소지아는 한창 화가 났기에 몸을 곧게 펴고 받아쳤다.“화장실에 가서 똥이라도 먹은 거예요? 말이 왜 이렇게 더러워요.”“뭐라고?” 손승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소지아는 차갑게 그녀의 시선을 맞이했다.“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당신만 이렇게 찾아와서 욕을 먹으려 하고 있잖아요. 우리 아는 사이에요? 왜 자꾸 달려와서 사람 성질 건드리는 거죠? 이번에 잘 들었어요? 안 들려요? 안 들리면, 당신이 죽을 때 내가 사람 시켜 당신 묘비에 이 말을 새길게요.”손승옥도 어쨌든 팀장이었기에, 여태껏 남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바로 변했다.소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아서 직접 손승옥을 부딪치더니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빌딩을 나서자 날씨조차 좋지 않았고,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지만, 지금은 비가 내렸다.소지아는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그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이도윤이 꼭대기 층의 창문 앞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높이에서 소지아는 이도윤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마치 두 사람은 하늘과 땅인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은 어울리지 않았다.소지아는 입가를 구부렸다.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번거로움과 문제를 모두 혼인에 맡겼기 때문이다.그리고 혼인은 자질구레한 문제들로 가득 찼다.소지아는 홀로 여길 왔으니 깔끔하게 떠났다.요 며칠 소지아의 생활은 조용해졌고, 매일 그녀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소계훈의 곁에 머물었다.
“사모님, 시언 도련님의 쇼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시월 아가씨와 시하 오빠가 도와주러 가게 됐어요.”지아가 말했다.조경숙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시언이 쇼에 문제가 생기다니요? 그리고 시월이가 도와주러 가는 건 그렇다 쳐도, 시하는 거기에 왜 간 거죠?” “사실 시언 도련님께서 시하 오빠에게 고급 맞춤 정장을 만들어 주셨거든요. 휠체어의 힘을 빌려서라도 쇼 런웨이에 서보라고 하셨는데, 세상 모든 이에게 몸이 불편하더라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물론 시하 오빠에게 용기를 주려는 목적이 컸겠지만요.” “그래도 시언이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우리는 모두 그 아이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그 아이의 쇼장에 가길 원했어요. 비록 지금은 가문이 이렇게 산산조각 났지만요...” “다 잘될 거예요.”지아가 조경숙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요?” 임현숙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시언 도련님은 지금 병원에 있는 데다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조차 알 수 없는데...’“사모님, 당분간 그분들을 기다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언 도련님은 작품에 아주 까다로우시잖아요. 이번에도 시하 오빠와 언제까지 수정할지 모르는 일이고요.” 지아가 부드럽게 말했다.“그것도 그러네요. 그나저나, 우리 집 사람들을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조경숙이 중요한 점을 포착했다. 자료를 여러 번이고 검토한 지아가 어찌 이런 정보조차 모를 수 있겠는가. 지아가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저는 며칠 동안 시하 오빠와 함께 있었잖아요. 모두 오빠가 이야기해 준 내용이에요.” 옆에 있던 임현숙이 헛기침을 했다.“소 선생님, 아직 시하 도련님과 확실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닌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요? 아직 소씨 가문의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임 집사, 손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사모님, 저는 단지 소 선생님께서 자신의 신분을 똑바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벌써 소씨
한참을 돌아다닌 후, 지아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상황은 좀 어때요?”시하의 목소리에는 다소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별로 좋지 않아. 내가 도착했을 때 둘째 형이 팔을 심하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월이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아직도 의식이 없고.]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하필 팔이라니, 디자이너가 팔을 못 쓰게 된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시하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예전에 다친 곳은 발이지 않은가. [운전자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는데,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해 운전자가 마약을 한 상태였대. 돈도 없고, 결혼도 못한 마약 중독자였던 거지. 약물을 과다 복용한 채로 도로를 질주한 모양인데, 체포된 후에 경찰서에서 목숨을 거뒀어. 이제 증거가 없어서 막다른 길에 놓인 셈인데... 어쩌지?]지아는 시하의 억눌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오빠,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니면 제가 가서 한번 볼까요? 어쩌면 시언 도련님의 팔을 되살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참, 네 의술이라면 문제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어머니는...”시하는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여긴 안전할 거예요. 경호원들과 무무를 남겨둘 거거든요.” 시하는 지아가 왜 무무를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냥 세 살짜리 아이라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비록 시하도 원치 않았지만, 상황이 불투명한 데다가, 어둠 속에 있는 상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꼴이 되어버린 꼴이었다. ‘둘째 형의 팔이 그 지경이라면, 더 나은 방법이 없겠어.’ 지아가 전화를 끊고 무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무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지아의 옷깃을 꽉 잡았는데, 아무래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엄마는 반드시 조심할 거야.”“아가, 너는 원봉 아저씨와 함께 있어. 그분이 널 지켜주실 거야. 엄마는 금방 다녀올게.” 지아는 떠나기 전에 또 원봉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게다가 조경숙에게 작별 인사를 할
조경숙이 명담의 손등을 두드렸다.“명담아, 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잘 알지만, 지난 6개월간 그렇게 많은 의사들이 왔다 갔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어. 내 눈은 아마...” “큰어머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꼭 좋아지실 거예요.”“우선 앉아서 물 한잔하세요.” 조경숙이 물잔을 받아서 들었다.“명담아, 이렇게 자주 와줘서 늘 고맙게 생각해. 네가 없었으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구나.” “큰어머니, 큰어머니를 돌볼 수 있다는 건 제 복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지아는 조용히 옆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명담에게는 의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조경숙을 바라보는 눈빛은 결코 가식적이지 않았다. ‘만약 저게 연극이라면, 정말 대단한 수준인 거야.’ 조경숙은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옆에 있던 지아와 무무의 윤곽을 보았다. 그녀가 지아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소 선생님, 이리 와보시겠어요?” “사모님.”지아가 얌전히 조경숙의 곁에 섰다. “사양하지 말고 앉으세요. 부디 여기가 소 선생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전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정말 즐거웠거든요.”“참, 시하는 어디 갔나요?” 지아는 조경숙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았다.“시하 오빠는 객실에서 쉬고 있어요. 제가 사모님 곁에 있어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저랑 여기저기 좀 걸을까요? 시하는 저녁 먹을 때쯤 깨우면 되니까요.” 조경숙의 얼굴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얼굴은 지아가 다소 어색함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조경숙이 말을 걸 때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아는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조경숙의 얼굴에는 인위적인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일부 부잣집 사모님들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얼굴에 갖은 노력을 들이지만, 그런 얼굴은 지속성이 훌륭하지 않아서 단번에 알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소씨
흰색 정장을 입은 채 다가오는 남자, 그는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세련된 느낌을 풍기는 소명담이었다. “먹이를 너무 많이 주면, 과식한 물고기들이 소화불량에 걸릴 뿐만 아니라, 수질도 나빠질 수 있거든.”“뭐든 적당한 게 가장 좋은 법이잖아? 선을 넘으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겉으로는 물고기에 대해 걱정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지아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지아는 무무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공식적인 미소를 띠었다.“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아이가 아직 철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쪽은...?” “소명담이라고 합니다. 오늘 시하 형님께서 의사인 친구분을 모셔 왔다길래 와봤는데, 그쪽인가 보군요. 젊은 나이에 시하 형님의 만성적인 두통을 치료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무래도 저를 과하게 칭찬한 모양이네요. 시하 오빠의 병은 마음의 매듭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래서 그 매듭을 풀자마자 깊은 잠을 자게 된 것뿐이고요.” “절대 제 의술이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명담이 지아를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젊고 겸손한 의사는 드문데 말이죠. 그래서 시하 형님도 특별히 대하시는가 봅니다.” 눈앞의 여인은 평범한 외모에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도 없었지만, 솔직히 기품이 넘쳤다.‘나를 마주하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잖아? 저 눈동자도... 정말 아름답네.’ “저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지아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명담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왜 시하 형님은 안 보이죠?” 지아는 명담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만약 이번 일이 저 남자와 관련이 있다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 거야.’ “방금 시언 도련님과 시월 아가씨께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갔어요. 정말 큰 일이죠...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어떤 상황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시언 형님과 월이는 괜찮은 겁니까?” “구체적인 상황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
조경숙은 몸이 약해 매일 잠깐씩 잠을 잤다. 시하는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야 지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물었다.“지아야, 솔직하게 말해줘. 어머니 상태는 어때?” 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모님께서도 중독된 증상이 있었어요. 게다가 사모님의 눈도 과도한 눈물로 망가져 버린 게 아니라, 독으로 인해 망막이 손상된 것 같아요.” 시하는 얼굴 가득 분노가 서렸다.“대체 어떤 새X가 겁도 없이 우리 어머니까지 해치려 한 거지?!” “오빠, 듣기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오빠와 사모님의 검사 결과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그 사람은 손을 써서 모든 걸 덮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거고, 소씨 가문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일 거예요.” “지아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저는 그 사람이...”지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난처한 표정은 임현숙이 급히 달려왔다.“큰일 났습니다!”“도련님, 방금 전화가 왔는데, 시언 도련님께서 오시는 길에 사고를 당했고, 시월 아가씨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답니다!” “뭐라고요?!”시하는 걱정돼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지아가 빠르게 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임 집사님,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둘째 형한테 교통사고가 났는데, 왜 월이까지 다친 거죠?” “제가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시언 도련님은 여기로 오던 길에 시월 아가씨와 만나셨고, 같은 차를 타고 오다가 사고가 난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둘째 형에게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했었는데, 이런 문제가 생겼을 줄이야!’ “일단 병원에 가봐야겠어요.”“소 선생은 우리 어머니의 곁에 있어 줘. 어머니께서도...” “천천히요.”지아가 시하를 붙잡았다.“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둘째 형과 월이가 다쳤어! 우리 소씨 가문은 더 이상 어떠한 위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다급한 상황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것은 누구나 알 만한 이치였다. 하지만 어둠
지아는 잠시 후 눈썹을 찌푸렸다. “어때?”시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지아가 손을 거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께서는 몸이 아주 허약하세요. 아무래도 출산 때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아요. 천천히 조리하면 조금 나아지실 거예요.” “제 몸은 이제 조리로 나아질 상태가 아니에요. 하루하루 연명하면서 살면 그만인 거죠.”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시하는 조경숙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자꾸나.”“배도 고플 텐데,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지아는 곧장 조경숙을 부축하며 물었다.“여긴 참 아름다워요. 하지만 오랜 시간 혼자 계시면 아주 적적하시겠어요.” “저는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해요. 게다가 우리 소씨 가문은 단합이 잘 돼서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시하 오빠가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으니, 앞으로 사모님의 곁에서 계속 함께 할 거예요.” 시하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단지 식사하러 왔을 뿐, 함께 머물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아와 지내며 그녀가 침착한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조경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네요. 아들이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서 늘 걱정했는데, 이제부터 함께 지낼 수 있다니 정말 좋아요. 더군다나 선생님과 아이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네요.” 조경숙은 곧장 임현숙에게 객실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시하 오빠의 다리도 다 나을 날이 올 거예요.”“자녀분들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사모님께서도 몸을 잘 돌보셔야 하고요, 아셨죠?” “그래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는 건 저도 잘 아니까요.” “조심하세요, 앞에 계단이 있어요.”지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단 쪽으로 다가가자 계단 앞에 달린
지아는 눈앞의 귀부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정한 면 소재 원피스를 입은 채,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젊어 보이는 피부 덕분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서른다섯 살 쯤의 언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조경숙의 눈동자는 약간 흐릿했고, 먼지가 낀 보석처럼 빛을 잃은 상태였다. “사모님께서는 매일 자녀들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다가 눈이 망가지셨어요. 하지만 시하 도련님께서 다시 일어섰으니, 사모님께서도 마음이 놓이실 겁니다.” “시하야, 이 엄마한테 얼굴 좀 보여주렴.”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시하가 그녀의 치마를 살짝 잡아당겼다. 조경숙은 몸을 숙여 어린 시절처럼 시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우리 시하가 이렇게 컸구나. 이 엄마는 잘 볼 수 없지만 말이야.” 그녀는 겨우 윤곽 정도만 식별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사물을 볼 수는 없었다.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시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경숙을 잡았다. “사모님께서는 도련님의 감정이 더 나빠질까 걱정하시면서 비밀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시월 아가씨 외에는 아무도 몰랐지요.” “아버지도 모르시나요?” “네, 대표님께서는 요즘 너무 바쁘신 탓에 지난 6개월간 집에 오지도 못하셨거든요.” “됐어요,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고요.”“시하야, 오늘 친구를 데려왔다고?”조경숙의 시선이 지아 쪽으로 향했다. 지아는 조경숙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있었다.‘이 일에도 소시월이 관련되어 있다니...!’ ‘어디를 가든 그 여자의 이름이 들리는 게 어쩐지 꺼림칙해.’하지만 지아는 조경숙의 질문에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사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이분이 바로 소희 선생님이에요. 제 불면증과 마음의 병을 고쳐준 사람이죠.” “정말 명의이신가 보네요. 그동안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시하를 진찰했지만, 병이 호전되기는커녕 악화하기만 했거든요. 소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사모님, 과찬이세
차가 서쪽 교외 호숫가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잔잔한 바람이 갈대를 스치고, 물새들이 무리를 지어 호수 위를 날며, 연잎 위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잔잔히 일렁이는 호수와 호숫가에 흩어진 꽃잎이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더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그렇지? 어머니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셔야 하거든.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좋아야 어머니 마음도 편안하실 테니까.”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통일된 복장을 한 고용인들이 정돈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깔끔한 인상의 중년 여성 집사가 차 문을 열며 공손히 인사했다.“셋째 도련님,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셨군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곳은 ‘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소씨 가문의 오래된 본가는 도심 한 가운데에 있었지만, 요양에는 적합하지 않아 부모님께서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에게는 그다지 정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으나, 그들 형제자매에게는 부모님이 계신 곳이 바로 집이었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는 이상, 이곳이 집이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특히 소씨 가문처럼 부유한 가문에서는 부모님이 집안의 중심이자 뿌리였다. 즉, 부모님이 머무르는 곳이 그들의 안식처인 셈이었다. “임 집사님,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건강해 보시여서 정말 다행입니다.”임현숙은 시하의 어머니를 오랜 세월 보필했던 믿음직한 사람으로, 소씨 가문의 자녀들을 손수 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휠체어를 내리자, 지아도 무무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임 집사님, 소 선생님과 무무입니다.” “전화로 들었습니다. 소씨 가문의 큰 은인이시라고요... 소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사모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네.”지아는 상대가 자신의 출신을 의식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임현숙의 태도는 무한한 감사로 가득
이튿날 아침, 시하는 소씨 가문 가족들에게 미리 연락해 지아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알렸다.그는 지아를 곁에 앉히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씨 가문은 아주 큰 가문이고, 여러 산업을 이끌고 있었어. 원래 우리 가문은 번창하고 있었지만, 큰형이 신장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로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지.”“큰형은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았고, 넷째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어. 오빠들이 모습을 감추던 와중에 시영이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사고를 당하면서, 우리 집안은 사실상 시월이가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셈이야.” “그럼 아버님, 어머님은요?”“소씨 가문의 사업은 너무 커서, 아버지는 세계 각지의 사업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으셔. 어머니는 월이를 낳은 후로 계속 요양하시면서 외출도 하지 않으시지. 심지어 내가 자살을 시도했던 일도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시하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오늘은 단지 우리 가족끼리 만나는 자리니까 너무 부담 가질 거 없어.” 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린 그 배후에 있는 자를 밝혀내는 게 목적이잖아요. 진짜로 시댁에 인사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긴장하겠어요?” “하긴.”“참, 이 집사님이 어머니께 너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께서 장말 기뻐하셨대.” 지아는 소씨 가문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으니, 사모님께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지 짐작이 가요.” “지금이라도 오빠가 다시 일어나 주니, 정말 기쁘시겠죠.” “오빠, 진상을 조사하는 것 외에, 제가 사모님의 건강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참, 네 의술이 훌륭하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어! 내 동생 지아야, 그럼 부탁 좀 할게. 어머니께서 너를 만나면 틀림없이 아주 좋아하실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너의 양어머니인 셈이니 호칭을 바꾸는 게 어떨까?”지아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소씨 가문의 자녀들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야. 사모님도 분명히 우아한 어른이시겠지?’ 지아는 미리 정성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