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가 물건을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는데, 맞은편에서 늠름한 자태의 한 여자가 걸어왔다. 바로 B팀 팀장이었다.손승옥은 두 손을 가슴에 안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뭐랬어. 남자를 의지하고 올라오면 오래가지 못한다니깐.”인간의 추악함은 바로 전에 모르던 사람이 단지 몇 마디의 루머로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악의를 품을 수 있단 것이다.바로 손승옥처럼, 소지아가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손송옥은 소지아를 향해 침을 뱉을 수 있었다.소지아는 한창 화가 났기에 몸을 곧게 펴고 받아쳤다.“화장실에 가서 똥이라도 먹은 거예요? 말이 왜 이렇게 더러워요.”“뭐라고?” 손승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소지아는 차갑게 그녀의 시선을 맞이했다.“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당신만 이렇게 찾아와서 욕을 먹으려 하고 있잖아요. 우리 아는 사이에요? 왜 자꾸 달려와서 사람 성질 건드리는 거죠? 이번에 잘 들었어요? 안 들려요? 안 들리면, 당신이 죽을 때 내가 사람 시켜 당신 묘비에 이 말을 새길게요.”손승옥도 어쨌든 팀장이었기에, 여태껏 남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바로 변했다.소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아서 직접 손승옥을 부딪치더니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빌딩을 나서자 날씨조차 좋지 않았고,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지만, 지금은 비가 내렸다.소지아는 구름 속으로 우뚝 솟은 그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이도윤이 꼭대기 층의 창문 앞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높이에서 소지아는 이도윤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다.마치 두 사람은 하늘과 땅인 것처럼, 처음부터 그들은 어울리지 않았다.소지아는 입가를 구부렸다.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번거로움과 문제를 모두 혼인에 맡겼기 때문이다.그리고 혼인은 자질구레한 문제들로 가득 찼다.소지아는 홀로 여길 왔으니 깔끔하게 떠났다.요 며칠 소지아의 생활은 조용해졌고, 매일 그녀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소계훈의 곁에 머물었다.
소지아와 채의사는 시간을 정했고, 이번 금요일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하늘에서 내려오는 가랑비를 보면서 소지아는 우산을 쓰고 김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김민아의 목소리는 무기력하게 들렸고, 연결되자마자 불평하기 시작했다.“귀찮아 죽겠어. 두 밤을 지새웠는데, 새로 온 사장은 정신이 나갔는지 아주 일중독이야.”소지아는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장이 멋있다고 말한 거 기억하는데.”“잘생기면 또 뭐가 어때서? 내 남자친구도 아닌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직장을 바꾸지 말았어야 했어. 전의 회사에서 매일 노는 것도 나쁠 게 없었지.”김민아는 전 남친과 헤어진 후, 전 남친이 그녀의 원래 회사에 가서 매일 애원을 했고, 김민아는 화가 나서 바로 사직하였다.김민아는 예전처럼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이도윤의 초청을 거절하고 업계에서 매우 소문난 부동산 회사로 갔다.비록 그 후 매일 김민아는 사장님을 직원들의 뼈다귀까지 갉아먹는 사람이라 욕했지만.“참, 민아야, 너 금요일에 시간 있어?”“아니, 사장님이 나더러 B시로 같이 출장 가자고 했는데, 왜?”소지아는 김민아가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사장님을 욕하고 있지만, 사실 김민아는 출세하길 원했다.지금이 바로 그녀의 업무 상승기이니, 김민아도 당연히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소지아는 할 말을 삼켰다.“아무것도 아니야. 너와 밥을 먹고 싶어서. 그럼 다음에 먹자.”“좋아, 아직 시간이 많잖아. 지아야, 내가 B시의 특산물 사다줄게.”김민아는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고, 또 방안을 고쳐야 했다.소지아는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비가 자욱한 화면을 보며 소지아는 손을 뻗어 빗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시원한 물기는 소지아로 하여금 비로소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소지아는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처럼 두 무릎을 안고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보고 있었다.망망한 세상에
주원은 소지아의 눈에 비친 실망을 보지 못한 듯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지나갈 때 누나를 보았는데, 길을 잃은 거예요, 아니면 발을 삐었던 거예요?”소지아는 주원의 부축을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나 하는 수없이 웃었다.“방금 약간 넋을 잃고 무슨 일을 생각하느라 어느새 여기에 멈추었어.”“요 근처가 우리 집인데, 개의치 않는다면 하루를 보러 갈 수 있어요. 하루는 줄곧 누나가 보고 싶었거든요.”소지아는 이 이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따뜻한 차 안과 밖은 선명한 대조를 이뤘고 주원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밀크티 한 잔을 건넸다.“집에 가서 마시려고 했는데, 누나 몸 좀 녹여요.”소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았다. 대추차였다.“고마워.”“뭐가 고마운 거예요?” 주원은 웃으며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소지아는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 대추차는 원래 주원이 그녀에게 사준 것이고, 그가 자신을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착각이 들었다.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깨끗해서 이상한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소지아는 자신의 그런 이상한 환상을 지웠다.“누나, 왜 날 그렇게 봐요?”소지아는 따뜻한 대추차를 안고 한 모금 들이켰다.“나는 단지 감탄하고 있을 뿐이야. 그때의 꼬마가 이렇게 컸다니.”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앳된 기운과 젖살이 없었고, 팽팽한 턱선은 유창하며, 은근히 날카로운 기운이 배어 있지만, 수염은 조금도 없었다.주원이 핸들을 잡을 때, 손목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다.‘신기해.’소년의 풋풋함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인의 진중함도 뒤섞여 있다니, 이 두 가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풍격은 뜻밖에도 그의 몸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주원은 차를 길가에 세우고 입가를 구부렸다.“누나, 잠깐만 기다려요.”말하면서 그는 큰비 속으로 뛰어들었고, 10분 후에 돌아왔는데, 손에는 큰 가방과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신선한 과일이 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복도 한 벌 있었다.주원은 가방을 소지아의 품에 건네
소지아는 사람의 마음이 정말 간단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도윤과 변진희에게서 상처를 받았지만, 주원이 만든 맛있는 음식에 그녀는 바로 치유되었다.사랑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따뜻함에 쉽게 감동을 받는다.주원은 결국 소지아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물었다.“누나,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어요?”“내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아무도 나에게 사인해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거든. 나 참 못났지?”소지아가 가볍게 말을 할 때, 주원의 눈밑에는 애틋한 빛이 흘렀다.“누나, 사람마다 실패에 대한 정의가 달라요. 내가 보기에 누나는 가장 좋은 누나예요. 실패하지 않았다고요. 불행한 결혼은 기껏해야 인생에서 저지른 잘못일 뿐이죠.”“그런데 인생이 무척 길었으니 누구도 신이 아니었기에, 미래를 알 수 없었고, 실수를 범하는 것도 정상이죠.”소지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 일에 대해 아는 거야?”“지난번 배에서 나는 이 대표님이 안고 있던 사람이 누나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병원에 있던 날, 사실 나도 어렴풋이 말다툼하는 내용을 들었고요. 미안해요. 나는 고의로 엿들은 게 아니에요.”소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밥을 사러 그렇게 오래 갔더라니.’“괜찮아, 다 사실인걸.”주원은 디저트를 소지아 앞으로 밀었다.“누나, 만약 개의치 않는다면, 내가 대신해서 사인할 수 있어요. 무슨 수술을 하는 거예요?”“위 절제 수술.”주원의 평온한 얼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누나, 설마…….”“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야.”“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누나는 이렇게 젊은데, 어떻게 이런 불치병에 걸릴 수 있죠?”주원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소지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괜찮아, 주원아, 난 준비가 다 됐거든. 하물며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아. 나는 약물치료를 한 번 받은 적이 있고, 그 효과도 아주 좋거든.”소년의 얼굴은 백지장 같았고 희로애락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뽀얀 얼굴에는 걱정으로 가득 찼고 눈시울은 다소 붉
이도윤은 조용히 소지아를 주시했다. 요 며칠간 그녀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기껏해야 며칠 전에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매우 길었다. 소계훈의 몸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니 소지아가 효도를 다하려는 것도 정상이었다.요 며칠 소지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 외에 다른 곳에 가지 않았고, 김민아도 오지 않았다.소지아는 베이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미풍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고 있었고, 벚꽃이 그녀의 주위에서 춤추며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날 떠나면,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군.’소지아는 멀리서 이도윤과 눈을 마주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떠났다.이도윤은 마음이 심하게 답답했다. 분명히 이미 결정을 내렸고, 분명히 백채원에게 약속을 했지만 그는 또 한번 소지아를 위해 자신의 약속을 어겼다.소지아가 가려는 것을 보고 이도윤은 앞으로 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소지아는 담담하게 그를 보며 경고했다.“이 대표님.”이도윤은 여전히 양복 차림이었지만 넥타이가 약간 비뚤어졌고 지난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머리카락도 좀 늘어졌다.‘그답지 않은데.’내일이면 약혼식인데, 이치대로라면 이도윤은 엄청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왜 쓸쓸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이도윤은 침을 삼켰다.“좀 불안해서.”이도윤은 자신이 소지아를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불안한 느낌은 이미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어.” 소지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담담하게 이도윤을 바라보았다.날은 어두워지자 머리 위의 가로등이 살며시 켜졌다.이도윤의 커다란 그림자는 가로등의 빛에 휩싸였고 얼굴에도 예전의 냉정함이 없어졌다.“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이도윤은 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몰랐다. 지난번에 이렇게 불안한 느낌을 받았을 때는 2년 전 소지아가 바다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이도윤은 자꾸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소지아는 고개를 들어 이도윤의 눈을 마주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이제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변진희이었다. 전에 소지아는 밤낮으로 그녀가 그리웠지만, 지금은 한 번만 더 봐도 마음이 아팠다.‘이도윤이 약혼을 했는데, 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다 찾아왔지.’“지아야, 5분만.”“5초도 주고 싶지 않아요.” 소지아는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마침 이웃이 문을 열고 나오려 하자, 소지아는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아 먼저 문을 열었고 변진희는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이것은 변진희가 귀국한 후 처음으로 소지아의 거처에 온 것이다.만약 전의 소지아였다면 매우 열정적으로 변진희를 접대했을 것이다. 오늘의 소지아는 냉담하게 신발을 바꾸고 자신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말해요.”변진희는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 아파트는 크지 않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다.“지아야, 나는 채원이 특별히 소씨 집안 본가를 사서 너에게 주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넌 어째서 이사를 가지 않는 거야? 여기가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살 수 있겠니?”소지아는 물컵을 내려놓았다. 이 말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그녀는 어디서부터 받아쳐야 할지 몰랐다.“하긴,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금이야 옥이야 하며 자란 아가씨였죠. 별장에서 살았고, 입은 것도 명품, 차도 고급차였으니 당신 눈에는 이런 작은 아파트가 아마 거지들이 사는 곳이겠죠. 당신은 내가 아니었으니 어떻게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알 수 있겠어요?”변진희는 얼른 다가와 소지아의 손을 잡았다.“디아야, 소씨 집안은 비록 최고의 명문 집안은 아니지만, 너도 부족함 없이 자랐잖아. 엄마는 소씨 집안이 파산할 줄 몰랐어. 만약 진작 알았다면, 너를 내 곁으로 데려왔을 거야.”소지아는 재빨리 손을 빼냈다. 그녀는 변진희처럼 종래로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입이 닿도록 설명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능청스럽게 굴지 말고 말해요, 오늘 또 뭐 하러 왔어요? 백채원과 관계가 있는 거 아니에요?”말하자면 참 슬펐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번 찾아
소지아는 백정일이 도대체 변진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몰랐다. 분명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인데, 어째서 아직도 이렇게 순진한 것일까?“내가 왜 그들을 축복해야 하죠? 백채원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축복해야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엄마도 너희들의 이야기를 좀 들었어. 지아야, 너의 그 아이는 사고였어. 채원도 바다에 빠졌고, 하마터면 너와 같은 일을 당할 뻔했지. 다만 그녀는 행운스럽게 아이를 낳았을 뿐이야. 너는 그녀를 탓할 수 없어.”소지아는 백채원이 또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 흑백을 전도하고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가장 슬픈 것은 백채원이 무슨 말을 하든 변진희는 믿었고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러 왔다는 것이다.“백 부인, 지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지 아세요? 내가 비행기표를 끊어줄 테니까 얼른 가서 그 아이들이나 잘 챙겨줘요.”“지아야, 나는 진심으로 널 그들의 약혼식으로 초대하고 있는데, 너 이게 무슨 태도니? 오늘에 이르러 또 놓을 수 없는 게 뭐가 있다고. 너는 좀 얌전하게 엄마를 안심시키는 딸이 될 수 없니?”변진희의 매 한 마디 말은 소지아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가장 슬픈 것은 변진희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오히려 반복적으로 자신의 상처에 톱질을 하여 자신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백채원, 이번엔 네가 철저히 이긴 셈이군.’남자를 이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조차도 완전히 설득했다니.소지아는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고 가볍게 한마디 물었다.“한가지 질문에 대답해요. 만약 나와 백채원이 동시에 위험한 상황에 빠져 단 한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거예요?”“당연히 너지. 넌 내 딸이잖아. 엄마가 한 모든 것은 다 널 위한 거야.”변진희는 한숨을 쉬었다.“엄마의 말이 듣기 거북할 수도 있지만, 난 확실히 네가 더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너는 엄마가 낳은 아이이니,
그동안 소지아도 오정인과 만나자고 부르며 그를 통해 계속 조사할 생각을 했다.그러나 그녀는 또 그들을 놀라게 할까 봐 줄곧 움직이지 않았다.뜻밖에도 오정인이 먼저 찾아왔다니.소지아는 연결 버튼을 눌렀다.“네, 정인 오빠.”“아가씨, 지금 어디에 있죠? 전에 조사하라고 한 조율에 관해 새로운 단서가 생겼어요!”상대방의 목소리가 너무 초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위장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소지아는 떠보며 물었다.“무슨 단서요?”“조율의 생전 핸드폰이요. 이미 부서졌지만 전에 아주 흥미가 있었던 거 같아서 전화해서 물어보는 거예요.”“그녀가 전에 살던 집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임대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녀의 시체는 또 바다에서 건졌고요. 그럼 이 핸드폰은 어디에서 온 거죠? 이미 고장난 이상 당신은 또 어떻게 이것이 조율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죠?”소지아는 침착하게 모든 수상한 점을 물었다.상대방은 소지아가 이 단서를 듣자마자 당황하여 바로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소지아가 이렇게 빨리 허점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오정인이 멍한 틈을 타서 소지아는 입을 열었다.“정인 오빠, 나는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 아빠의 후원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우리 아빠가 없으면 당신은 오늘의 성과가 없었을 텐데. 은혜를 알고 보답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적어도 사람을 한심하게 하지 말았어야죠.”“큭.”수화기 너머에서 가볍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역시 이미 눈치챘군요.”소지아는 전효가 한 그 말을 명심하고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오늘은 이도윤의 약혼날인데 상대방은 이때 자신을 유혹하여 무엇을 하려고 할까?“정인 오빠, 나는 당신이 누구의 사람인지 모르지만, 사람은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 하죠. 만약 돈을 위해서라면, 나와 협력하는 건 어때요? 내가 돈을 두 배, 심지어 더 많이 줄 수 있는데.”“좋아요, 그럼 밀스 카페로 와요. 우리 얘기 좀 하죠.”“나 오늘 일이 있어 좀 불편한데,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