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아는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엄청 아이러니했다.그녀는 이도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버렸다.“이 대표,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어. 네가 말하는 그 사모님의 자리조차도. 나는 손을 놓을 수 있었으니, 더는 미련이 없었어.”이도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소지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고,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항상 네가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제자리에 서서 2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다 정말 지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나아가다 보니, 봄바람이든, 여름의 매미든, 가을의 잎사귀든, 겨울의 눈이든, 세상 만물이 너보다 중요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소지아는 가볍게 손을 들었고,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이도윤, 나는 너를 철저히 잊지 않았어, 인정해.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난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을 거야. 너는 여전히 나의 감정에 영향을 줄 것이고, 나의 신경을 건드리겠지. 그러나…… 나는 정말 더 이상 너를 생각할 정력이 없어.”마지막으로 소지아의 손끝은 이도윤의 입술에 떨어졌다.“이도윤, 그동안 치근덕거리면서 피곤하지도 않아? 난 지쳤어. 더 이상 너와 백채원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불쾌해하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 우리는 각자 편안하게 지낼 수 없을까?”이도윤의 눈동자는 소지아의 얼굴을 똑똑히 비추었다. 분명히 이렇게 익숙하지만 또 낯설어 그로 하여금 종래로 본적이 없다고 느끼게 했다.이도윤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차가운 소리를 냈다.“소지아, 넌 그렇게도 나와 선을 긋고 싶은 거야?”소지아는 평온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 그녀는 두려워하지도 위장하지도 않았다.“응, 레오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도 널 찾아가지 않았을 거야. 비록 나는 백채원을 좋아하지 않지만, 더 이상 그녀가 되고 싶지 않아. 네가 결혼하려 할 때, 너와 끊임없이 얽히는 거 말이야
임건우는 소지아에게 근황을 이야기했다. 소지아는 줄곧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당초에 자신 때문에, 임건우는 이도윤에 의해 외국으로 보내졌다.임건우의 목소리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는 외국에서 연수하면서 이미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다.최근에는 성격이 좋은 여자친구까지 사귀었고, 몇 년 뒤 귀국하면 원장 자리까지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연수의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임건우는 소지아를 대신해서 내일 위 검사를 안배했다.“지아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다시 열심히 사려 하는 네 모습을 보니, 나도 정말 기쁘구나.”“선배, 난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하루든 한 달이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거고요.”전화기 쪽에서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 나 방금 또 망친 거 같아요…….”소지아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빨리 가봐요, 선배.”이날 밤, 소지아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목욕을 했다.심지어 그녀는 자신에게 와인을 반 잔 따랐는데, 테라스에 서서 바닷바람을 들으며 술잔을 들기도 했다.소지아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소지아, 꼭 살아있어야 해!”다음날 아침, 소지아는 휴가를 내고 간단한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김민아를 불러 모교로 돌아갔다.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학교 주변은 많이 변했고, 상가와 건물이 좀 더 많아졌다.아침 바람은 여자아이들의 머리카락과 막 싹을 틔운 푸른 잎을 흐트러뜨렸고, 새들은 재잘거리며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포장마차에서 군고구마를 굽는 난로는 바깥으로 가벼운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공기 속에는 갓 구운 만두 냄새가 가득했다.햇빛이 소지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자, 모든 것은 딱 좋았고, 그녀도 이 고통으로 뒤덮인 인간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김민아는 소지아의 귓가에 대고 쉴 새 없이 과거의 재미있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전 남친에 대해 이야기하면, 김민아는 여전히 실의에 빠졌다.소지아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민아
C팀에 들어서자, 모두의 열정적인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이 화면을 보고 소지아는 아주 웃기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빽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의 웃음은 여전히 이렇게 밝을까?이은리조차도 소지아가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하는 일에 한을 품지 않았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응원했다.“잘 해봐!”박금란은 서둘러 소지아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지아야, 그 강진이란 사람, 어젯밤에 또 그들 부서의 여자와 밥을 먹으러 갔는데, 쯧쯧, 얼마나 더럽게 구는지.”“그리고?”“마침 내가 그 여자와 관계가 좋거든. 그녀는 나를 대신해서 몇 마디 떠보았는데, 강진은 네가 예쁘고 몸매도 좋고 피부도 하얗다고 계속 말하며 조만간 너를…… 에헴.”뒤의 말은 박금란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런 것 외에 강진은 너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전에 너와 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소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그 사진은…….”“내 친구가 물어봤는데, 그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단지 그 오 사장도 너와 잘 수 있으니 자신도 조만간 너와 잘 것이라 말했을 뿐, 전혀 그에게서 전해진 줄 모르는 모양이더라.”이은리와 강진의 채팅 기록을 생각하니, 사진 말고는 다른 것이 없었다.“지아야, 내가 강진에 대해 아는 바에 의하면, 그의 업무 능력은 비록 괜찮지만, 업무를 제외하면 머릿속에는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밖에 없어. 그는 너와 원한이 없으니 이렇게 할 필요도 없고.”“만약 그가 아니라면, 사진은 왜 또 그가 보낸 것일까?”“그 남자는 여자를 너무 밝혀서, 그럭저럭 예쁜 사람이라면 바로 잘 수 있거든. 어느 여자가 강진의 핸드폰을 이용해, 그의 손을 빌려 팀장님에게 보냈을 수도 있지.”소지아는 눈이 밝아졌다.“네 말이 맞아.”그 주모자는 틀림없이 자폭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스스로 조사하려 한다 하더라도 주의력을 강진에게 돌릴 것이다.‘정말 음흉하군.’이렇게 되면 소지아는 어떤 사
소지아는 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변진희가 정말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지아도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손을 쓸 줄은 몰랐다.이 뺨은 소지아를 멍하게 만들었다.그녀의 인상 속의 변진희는 성질이 좀 차가웠고, 자신을 대할 때 무척 싸늘했다.그러나 그래도 변진희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어떻게 대중들 앞에서 막무가내로 자신을 때릴 수 있었을까?소지아는 얻어맞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크게 쉬고서야 마음속의 화를 억눌렀다.“백 부인, 설명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소지아, 네가 오늘처럼 이런 뻔뻔스러운 꼴이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난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 정말 나를 너무 실망시켰구나!”요 며칠간 즐거웠던 소지아의 심정은 변진희의 이 뺨에 의해 바람처럼 사라졌다.주위의 동료들이 궁금해하는 눈빛 속에서, 소지아는 너무나도 창피했다.“무슨 일 있으면 나가서 이야기해요.”변진희는 소지아의 손을 뿌리쳤다.“왜? 내가 네가 한 그 일들 폭로할까 봐 두려워? 나는 정말 네 아버지가 요 몇 년 동안 널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어. 뜻밖에도 널 이렇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키웠다니! 남은 이미 너와 선을 그었는데, 넌 왜 아직도 뻔뻔스럽게 회사로 쫓아왔지?”소지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백채원은 스스로 이도윤의 결정을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변진희에게 고자질했던 것이다.변진희는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구겼고, 소지아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하고 싶었다.이런 수단은 그다지 대단하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소지아는 변진희의 얼굴에 시선을 돌리고 다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내 엄마잖아요.”그녀는 자신의 친엄마이면서도 백채원을 두둔하는 변진희가 이해되지 않았다.변진희는 백채원이 소지아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백채원을 책망하지 않고 뜻밖에도 백채원의 부추김을 받아 회사로 달려와 소동을 일으켰다.변진희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소지아는 변진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외국으로 날아갔다.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변진희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딸인 자신을 잘 대하는 게 아닌가?이렇게 하면 자신의 명예를 망치고 엄마로서의 체면까지 구길 텐데, 변진희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변진희는 멍해지더니 곧 더욱 흉악해졌다.“소지아, 내가 말했지, 사람은 당당해야 한다고. 넌 천벌 받는 것도 두렵지 않니?”소지아는 손바닥을 꽉 쥐고 있어 이미 약간의 핏기가 배어 있었다.“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죠?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그녀일 텐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정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백 부인, 대표님께서 두 분 올라오시라고 합니다.”이 일은 뜻밖에도 이미 대표 사무실까지 전해졌고, 진환은 공손하게 한쪽에 서서 두 사람을 데려갔다.소지아는 줄곧 고개를 숙이고 변진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기억 속의 모습과 비슷했다.소지아는 단지 우습다고 느낄 뿐이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면, 소지아는 요 몇 년 동안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을까?문이 열리자 진환은 공손하게 변진희에게 말했다.“부인님, 앉으세요.”변진희가 앉자 진환은 소지아에게 손짓을 하려 했지만, 소지아는 바로 거절했다.“아니야, 난 서 있으면 돼.”이도윤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의 속도는 아주 빨라 소지아의 곁을 지날 때 찬바람이 불었다.이도윤은 변진희 맞은편에 앉아 말을 하지 않았고, 몸에 찬 기운이 만연했다.소계훈이든 백정일이든, 변진희 앞에서 항상 부드러운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변진희는 아랫사람의 카리스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회사에 오셨는데, 왜 미리 인사를 하지 않았죠. 사람 시켜 모시러 갈 수 있었는데.”이도윤은 테이블 앞에 앉아 스스로 차를 끓이며 컵을 씻었고, 그 수법은 마치 늙은 노인처럼 능숙했다.변진희는 아래층에서 떠벌리던 모습을 지우고, 손을 무릎에 얹고 대갓집 규수의 모습을 보였다
이도윤의 이 말은 소지아가 하고자 하는 말이었다. 그는 소지아가 변진희란 어머니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리워라던 사람이 귀국하자마자 그녀를 이렇게 대하다니, 소지아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도윤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변진희는 몰랐다.그녀는 소계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딸에 대해서도 매우 무관심했다.설사 백채원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히 백정일이 없으면, 백채원은 암암리에 변진희를 몰래 괴롭힌 횟수가 적지 않았다.그러나 사람의 천성은 또 이러했다. 보통 가장 부드러운 면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고, 몹시 욱하고 나쁜 면은 가족에게 남김없이 드러냈다.변진희가 백채원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다.마치 습관적으로 소지아를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개의치 않으며, 심지어 마음대로 버리는 것과 같았다.이도윤의 말에 변진희는 결코 반성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봐주지 않고 말했다.“나는 단지 지금 네가 채원과 약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야. 너와 지아는 이미 끝났어. 지아야, 엄마가 너에게 부탁할게. 도윤을 멀리하고 채원의 가정을 파괴하지 말자, 응?”소지아의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가까스로 불태운 생존 희망도 변진희에 의해 조금씩 사라졌다.“백 부인, 내가 무엇을 하든 다 잘못인 거죠?”“네가 정말 눈치가 있다면, 그의 회사에 남아 채원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야.”소지아는 그 냉담한 얼굴을 보면서 어릴 때 자신이 매번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본 다음, 만족스러운 답안지를 변진희에게 보여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도 바로 이런 표정이었다.무관심.“알았어, 손 씻고 밥 먹어. 오후에 혼자 집에서 피아노 수업 받고, 난 미용실에 다녀올 거야.”자신이 기대했던 칭찬은 한 마디도 없었고, 소지아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히 반 친구들은 모든 부모님들이 성적이 좋고 우수한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했다.‘엄마는
소지아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훤칠한 몸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이도윤은 변진희의 손을 잡았다.만약 전에 여전히 어른이라고 봐줬다면, 지금 이도윤의 눈에는 압박과 차가운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지금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변진희는 응석받이로 자라서 손목이 이도윤에게 쥐어지니까 무척 아팠다. 아파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이도윤, 나는 너를 돕고 있는데, 너는 또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도와준다고요?” 이도윤은 냉소하면서 손을 놓지 않고 은근히 힘을 더했다.“난 내 일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알겠어요?”변진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알았어, 일단 손부터 놔.”“당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잘 보세요. 그녀야말로 당신의 딸이라고요!”이도윤은 말하면서 손을 뿌리쳤다.변진희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자국이 생겼는데, 이도윤에게 잡혀 아파서 운 것이었다.변진희는 소지아를 바라보는 표정이 더욱 흉악하여 이도윤이 가져다준 고통을 소지아에게 더해주었다.“봐, 다 네가 한 짓이야. 네가 채원처럼 말을 잘 들었다면 나도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소지아는 자신의 위를 안고 화가 나서 피가 솟구쳤다.“당신이 떠난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나에게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변진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화를 냈다.“넌 결국 내 딸이야. 난 밤낮으로 너를 걱정하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매정한 말을 할 수 있니? 소계훈이 어떻게 너를 가르쳤는지 모르겠…….”이번에 그녀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소지아는 탁자 위에 방금 데운 찻잔을 들었고, 잔에는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소지아는 오히려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당장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변진희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녀는 또 망설였다.“내가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아빠 언급하지 마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요!”변진희도 소지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너, 너…
변진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내가 말했잖아. 틀림없이 이 계집애가 너를 귀찮게 하고 매달린 거라고. 지아 너도 들었지. 지금 가서 물건을 정리하고 엄마와 집에 가자.”변진희는 손을 뻗어 소지아의 손을 잡았다.“엄마는 방금 좀 흥분했어. 그러니 그 말들 마음에 두지 마. 나도 너를 위해서야. 이혼한 이상 깨끗하게 정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민폐라고…….”소지아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이 말이 맞네요. 이혼하면 깨끗하게 정리해야죠. 설령 전 남편이 곧 병으로 죽어도 볼 필요가 없겠죠.”변진희는 멍해졌다. 말하자면 그녀는 귀국한 후에 확실히 소계훈을 보러 가지 않았다.“너 지금 나 탓하는 거야? 내가 돌아왔을 때 너의 아버지는 ICU에 있었다고.”그녀의 설명에 소지아는 더욱 웃음이 나왔다.“변 여사님, 나는 정말 당신에게 도대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네요. 그때 변씨 집안은 파산위기에 처해있었고, 우리 아빠가 나서서 도왔죠. 당신이 그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아빠는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시집와서도 달갑지 않았죠. 그리고 이 혼인을 수치로 여겼고요. 그러나 우리 아빠는 무슨 잘못이 있죠? 당신은 애인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떠났고, 우리 아빠는 지금까지 장가들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서 당신은 누구든 원망할 수 있지만, 우리 아빠를 원망할 자격이 없어요.”소지아의 말에 변진희는 얼굴이 빨개졌다. 소지아는 지금 자신을 은혜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하고 있었다.말이 끝나자 소지아는 이도윤을 쳐다보았다.“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날 해고하는 거지?”이도윤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가 회사에 온 지 며칠 만에 적지 않은 일을 일으켜 회사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으니까. 우리 회사는 너 같은 직원 따윈 필요 없어. 인사팀으로 하여금 계약의 3배에 따라 너에게 배상하라고 할 테니까, 지금 내려가서 돈 받아.”소지아는 이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이도윤이 미웠다. 하필 자신이 사실을
뒤돌아보지 않아도, 지아는 자신을 향한 차가운 한 줄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오래 기다렸답니다.”지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키가 조금 작은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록 그 사람은 철저히 변장한 상태였으나, 지아는 단번에 그 사람의 눈을 알아보았다.“강세라!”지아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을 보고, 상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어떻게...” 지아를 위해 준비한 함정이 결국 자신을 묶는 족쇄가 되었음을 느낀 강세라는 자신의 목적을 되새기며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했다. 탕!총성이 울리자 강세라의 손목에 총알이 박혔고, 강세라가 들고 있던 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골목 입구에는 훈련받은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고, 강세라는 손목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저 X을 죽여!!” 모든 상황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졌다. 강세라의 부하들이 행동하기도 전에, 골목 입구 2층에서 몇 명이 뛰어내려 잽싸게 강세라의 부하들을 제압해 버렸으니 말이다. 혼란을 틈타 지아를 향해 총을 쏘려던 한 사람은 뒤에서 덮친 누군가의 일격으로 즉시 쓰러지기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세라가 데려온 여섯 명은 모두 능숙한 사람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강세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총을 쏜 사람을 바라보았다. 골목 입구에 서 있는 그는 키가 컸으나, 역광으로 인해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차가운 시선은 강세라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남자는 느릿느릿 걸어왔고, 말 한마디 없이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를 본 지아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여긴 왜 왔어?” 도윤이 지아 옆에 서더니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도윤은 먼 길을 고생하며 달려왔고,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해 목소리가 다소 쉰 듯했다. “더 늦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다정한 두 사람을 본 강세라는 욕설을 퍼부었다.“이 더러운 X아! 감시 시하 씨를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 난 이미 네 속셈을 알고 있었
지아는 자연스레 시하의 목을 끌어안으며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둘째 도련님은 꼭 나아질 거예요. 오빠의 몸까지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요.” 시하는 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깊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랐을 거야.” 지아는 얌전히 시하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고, 두 사람은 연인처럼 낮게 속삭였다. 지아는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자,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봐야겠어요. 맞다,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죠? 뭐 좀 사 올 테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람만 무사하면 다 잘될 거예요.” “그런 일은 경호원이 하면 돼.” “어차피 병원에선 제가 도울 일이 별로 없잖아요. 오빠의 입맛은 제가 더 잘 아니까 제가 다녀올게요.” 이 말을 끝으로 지아는 시하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지아는 병원을 떠나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나서는 기척을 느꼈다. 한편, 눈빛이 변한 시하가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어. 따라가서 소 선생님을 보호해!” 병원에는 환자와 가족들이 많아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경호원들은 지아를 따라나섰다. 지아는 고의로 시간을 끌며 강세라라는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 며칠 강세라는 질투심에 미쳐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간신히 기회를 찾아 행동에 나섰는데 강세라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지아는 근처 야시장으로 향했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지고 막 건너려던 순간, 멈춰 서 있던 차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지아를 향해 돌진했다.불빛도 경적도 없는, 뒤에서 덮치는 호랑이와 같은 기습 공격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때는 이미 차가 지아에게 근접한 상태였다. 다행히 지아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차가 다가오기 전에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운이 좋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인도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어떤 사람은 가까스로 달아났고, 어떤 사람은
시언은 지아가 왜 시월의 반응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월이를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이를 제 품에 안은 거죠. 이게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겁니까?” 지아는 차마 시언에게 냉혹한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아직은 증거를 모아야 해’ ‘이 사람들은 소시월을 너무도 아끼는 사람들이라, 늘 눈에 장밋빛 필터를 쓰고 있어.’ “아니요, 도련님은 정말 훌륭한 오빠였습니다. 저는 단지 당시 상황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그러니 조금만 진정해 보세요. 제가 시하 오빠의 다리를 고쳤듯이, 도련님의 손을 고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말입니까?”“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럼 시하의 다리가 이미 치료되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거죠?” 지아가 시언의 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소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는 검은 손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말인즉슨...”지아는 그제야 모든 계획을 시언에게 말했다.“죄송해요, 시언 도련님.”“그동안 도련님도 제 의심의 대상 중 한 명이였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곤경을 겪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시언은 잠시 멍하니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모든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다.그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다. 디자인에 몰두하던 사람이 오늘 병상에 누워서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계획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큰형이 계속 많은 경호원을 대동하라고 했던 거군요. 저는 그저 형의 과민 반응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형은... 제가 정말로 사고를 당할까 봐 두려웠던 거였어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소 선생님, 그 사람은 대체 누굴까요?”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 일로 약간의 실마리를 잡았어요.”“도련님, 제가 이 비밀을 말하는 이유는 도련님께서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소씨 가문은 지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도
지아도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한 적이 있었다. 그 칠흑같이 어둡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진흙탕 속에서, 하염없이 길을 헤매며 온몸에서 피를 흘렸으니 말이다. 지아는 수도 없이 더 이상 미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에게도 미래가 없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지아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견뎌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아는 화장실로 가서 깨끗한 수건을 적셨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천장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진 시언이 보였다.그는 그야말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심지어 손으로 눈물을 막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형, 울지 마. 다 잘 될 거야, 진짜 다 잘 될 거야...”“다 내 잘못이야. 내가 오빠가 작품을 완성할 수 없게 만든 거야. 이번 쇼도 나 때문에 취소될 거야... 엉엉...” 오직 지아만이 아무 말 없이 뜨거운 수건을 그의 눈 위에 덮어주었다. 이 순간, 시언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고, 그저 자신의 무력함을 가리고 싶을 것이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수건을 적셨지만, 그의 무력함과 방황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시언이 목젖을 움직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지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시월 아가씨도 오늘 교통사고를 겪었으니,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여기엔 제가 있을 테니, 여러분은 잠시 쉬세요.” “그럼 너는...” 지아가 말했다.“저는 의사잖아요. 여러분 보다 시언 도련님을 더 잘 돌볼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시언 도련님은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으실 거예요. 잠시 시간을 갖는 게 좋은 방법일지도 몰라요.” 시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지아는 문을 닫던 찰나, 침대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을 들었다.“선생님도 가세요. 저는... 혼자 있고 싶어요.” “도련님,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는...” “예전에 시하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저도 저런 식으로 위로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아는 더 이상 예전처럼 일이 생기면 긴장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빈틈없이 정리했고, 집에 시후가 있는 동안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시언의 수술이 막 끝났고, 그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지아가 도착했을 때, 시하는 시언의 곁을 지키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더 이상 팔을 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시는 디자인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팔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시언이 형은 분명히 무너지고 말 거야.’ “미안해, 오빠, 다 나 때문이야. 만약 오빠가 날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시하의 곁에는 시월이 서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상처 두 곳에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으며, 그저 슬픈 표정으로 시하의 옆에 서 있었다.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너라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 가문에는 더 이상 불행이 있어서는 안 돼.” “소희야, 왔어?” 지아가 엄숙한 얼굴로 다가갔다.“시언 도련님은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의사 선생님이 곧 깨어날 거라고 했어.”시하가 한숨을 쉬었다. 지아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얼마 후에 있을 시언의 쇼를 떠올렸다.‘팔을 다쳐버렸으니,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렸구나.’얼마 지나지 않아 시언을 깨어났는데, 여전히 교통사고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월아, 월아!!!”시월은 눈물을 흘리며 침대 옆으로 달려갔다.“오빠,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무사한 시월을 보고 나서야 시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월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시언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예전처럼 시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극도로 힘을 주고, 이마에 고통으로 찬 땀이 맺혔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시언이 이불 아래 자기 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 팔... 내 팔이 왜 이래?” “오빠, 미안해 다 내
지아는 시하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먼 길을 달려온 시후였다. 가족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조경숙은 시후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장 일어나려 했다.“우리 큰아들이 왔구나!” “사모님, 천천히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지아가 서둘러 조경숙을 부축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찰나, 시후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니, 저예요.” “어서 들어오렴.”시후가 문을 열고 들어와 지아와 눈을 맞추며 가볍게 인사했다.“도련님.” “손님이 계셨네요.”“그래, 아주 좋은 사람이야. 시하가 데려온 친구인데, 나랑도 정말 잘 맞더구나.” 조경숙이 시하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우리 아들, 많이 여위었구나.” 시후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조경숙의 손길이 마치 시각 장애인처럼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시후는 조경숙의 눈을 유심히 살폈는데, 흐릿한 그녀의 눈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어머니, 눈이 왜 그래요?”“별일 아니란다. 잘 안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너는 좀 어때? 몸은 괜찮아졌니?” 시후는 조경숙이 외부에서 요양하다가 시력마저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저는 괜찮아요. 오랜만에 어머니를 뵙고 싶었던 건데,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세요.” “그래, 네가 돌아오니 엄마 마음도 한결 놓이는구나.”“사모님, 저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시후야, 그분은 우리 집의 귀한 손님이니 잘 모셔야 해. 절대 소홀히 대해선 안 돼, 알겠지?” “알겠습니다.”“이쪽으로 오시죠, 선생님.” 지아는 시후와 함께 방을 나서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지금 상황은 어때요?” “시언이는 더 이상 팔을 쓸 수 없게 되었어.” “그럼 시월 아가씨는요?”“교통사고 당시, 시언이가 월이를 감싸 안아 모든 충격과 유리를 대신 맞았더라고. 시월이는 약간의 찰과상 정도만 입었고, 다른 문제는 없어. 하
“사모님, 시언 도련님의 쇼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시월 아가씨와 시하 오빠가 도와주러 가게 됐어요.”지아가 말했다.조경숙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시언이 쇼에 문제가 생기다니요? 그리고 시월이가 도와주러 가는 건 그렇다 쳐도, 시하는 거기에 왜 간 거죠?” “사실 시언 도련님께서 시하 오빠에게 고급 맞춤 정장을 만들어 주셨거든요. 휠체어의 힘을 빌려서라도 쇼 런웨이에 서보라고 하셨는데, 세상 모든 이에게 몸이 불편하더라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물론 시하 오빠에게 용기를 주려는 목적이 컸겠지만요.” “그래도 시언이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우리는 모두 그 아이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그 아이의 쇼장에 가길 원했어요. 비록 지금은 가문이 이렇게 산산조각 났지만요...” “다 잘될 거예요.”지아가 조경숙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요?” 임현숙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시언 도련님은 지금 병원에 있는 데다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조차 알 수 없는데...’“사모님, 당분간 그분들을 기다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언 도련님은 작품에 아주 까다로우시잖아요. 이번에도 시하 오빠와 언제까지 수정할지 모르는 일이고요.” 지아가 부드럽게 말했다.“그것도 그러네요. 그나저나, 우리 집 사람들을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조경숙이 중요한 점을 포착했다. 자료를 여러 번이고 검토한 지아가 어찌 이런 정보조차 모를 수 있겠는가. 지아가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저는 며칠 동안 시하 오빠와 함께 있었잖아요. 모두 오빠가 이야기해 준 내용이에요.” 옆에 있던 임현숙이 헛기침을 했다.“소 선생님, 아직 시하 도련님과 확실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닌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가요? 아직 소씨 가문의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임 집사, 손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사모님, 저는 단지 소 선생님께서 자신의 신분을 똑바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벌써 소씨
한참을 돌아다닌 후, 지아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상황은 좀 어때요?”시하의 목소리에는 다소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별로 좋지 않아. 내가 도착했을 때 둘째 형이 팔을 심하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월이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아직도 의식이 없고.]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하필 팔이라니, 디자이너가 팔을 못 쓰게 된다면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시하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가 예전에 다친 곳은 발이지 않은가. [운전자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는데,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해 운전자가 마약을 한 상태였대. 돈도 없고, 결혼도 못한 마약 중독자였던 거지. 약물을 과다 복용한 채로 도로를 질주한 모양인데, 체포된 후에 경찰서에서 목숨을 거뒀어. 이제 증거가 없어서 막다른 길에 놓인 셈인데... 어쩌지?]지아는 시하의 억눌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오빠,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니면 제가 가서 한번 볼까요? 어쩌면 시언 도련님의 팔을 되살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참, 네 의술이라면 문제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어머니는...”시하는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 “여긴 안전할 거예요. 경호원들과 무무를 남겨둘 거거든요.” 시하는 지아가 왜 무무를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냥 세 살짜리 아이라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비록 시하도 원치 않았지만, 상황이 불투명한 데다가, 어둠 속에 있는 상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 꼴이 되어버린 꼴이었다. ‘둘째 형의 팔이 그 지경이라면, 더 나은 방법이 없겠어.’ 지아가 전화를 끊고 무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무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지아의 옷깃을 꽉 잡았는데, 아무래도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엄마는 반드시 조심할 거야.”“아가, 너는 원봉 아저씨와 함께 있어. 그분이 널 지켜주실 거야. 엄마는 금방 다녀올게.” 지아는 떠나기 전에 또 원봉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게다가 조경숙에게 작별 인사를 할
조경숙이 명담의 손등을 두드렸다.“명담아, 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잘 알지만, 지난 6개월간 그렇게 많은 의사들이 왔다 갔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어. 내 눈은 아마...” “큰어머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꼭 좋아지실 거예요.”“우선 앉아서 물 한잔하세요.” 조경숙이 물잔을 받아서 들었다.“명담아, 이렇게 자주 와줘서 늘 고맙게 생각해. 네가 없었으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구나.” “큰어머니, 큰어머니를 돌볼 수 있다는 건 제 복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지아는 조용히 옆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명담에게는 의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조경숙을 바라보는 눈빛은 결코 가식적이지 않았다. ‘만약 저게 연극이라면, 정말 대단한 수준인 거야.’ 조경숙은 물을 다 마시고 나서야 옆에 있던 지아와 무무의 윤곽을 보았다. 그녀가 지아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소 선생님, 이리 와보시겠어요?” “사모님.”지아가 얌전히 조경숙의 곁에 섰다. “사양하지 말고 앉으세요. 부디 여기가 소 선생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전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정말 즐거웠거든요.”“참, 시하는 어디 갔나요?” 지아는 조경숙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았다.“시하 오빠는 객실에서 쉬고 있어요. 제가 사모님 곁에 있어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저랑 여기저기 좀 걸을까요? 시하는 저녁 먹을 때쯤 깨우면 되니까요.” 조경숙의 얼굴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얼굴은 지아가 다소 어색함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조경숙이 말을 걸 때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지아는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조경숙의 얼굴에는 인위적인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일부 부잣집 사모님들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얼굴에 갖은 노력을 들이지만, 그런 얼굴은 지속성이 훌륭하지 않아서 단번에 알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소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