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 노인과 다정은 한쪽 방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다. 남준과 준재는 떠나지 않고 휴게실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대략 30분이 지나서야 그들은 돌아왔다.“할아버지, 어때요?” 준재가 물었다.확신에 찬 눈빛을 한 신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치료 계획은 내가 봤어. 먼저 한 달 동안 해보자고.”의학상의 일은 준재 등은 모르니, 전문적인 약리 지식으로 설명해 줘도 이해 못 할 것을 뻔히 알고, 신수 노인이 간단하게 얘기한 것이었다.신수 노인이 말하면서, 불가사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준재는 보았다.준재는 그의 눈빛에 깃든 아리송함이 궁금했다.준재의 의문 가득한 눈빛은 다정에게로 투사되었다.‘둘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신수 할아버지는 왜 이런 표정을 짓지?’그러나 신수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상, 그 치료계획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이제 쌍방이 모두 만족하는 이상적 협의를 진행할 차례다.“고다정 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치료에 관한 이야기 좀 합시다.”구남준은 안경테를 짚으며, 성숙하고 진중한 공적인 분위기로 돌입했다.“저는 별다른 요구사항은 없어요. 치료에 잘 협조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치료 비용과 치료 시간도 다 정해지자, 다정은 자기 생각을 밝혔다.구남준은 생각하다가 치료 장소의 문제를 언급했다.“다정 씨는 앞으로 도련님 자택에 와서 치료할 것인가요? 아니면…….”만약 다정이 집까지 치료하러 와준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준재를 곁눈질해 보다가 그의 예리한 매의 눈과 마주했다.“여준재 씨, 저는 집에 돌봐야 할 가족도 있고…… 또 우리 약원도 가꿔야 하니,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제가 가기는 쉽지 않겠어요. 번거롭겠지만 제가 있는 곳에서 치료하면 안 될까요?”구남준과 여준재의 표정이 복잡해졌다.준재처럼 대단한 인물이, 고작 이런 여자한테 끌려다니다니…….하지만 준재의 지병만 고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치료받으러 가는 것뿐인데 안 될 게 뭐가
고다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다정은 고 씨 가문에서 쫓겨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엘리베이터도 없는 이런 낡고 허름한 곳에서 두 아이와 할머니를 모시고, 약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니.이런 삶은 자신의 삶과는 천양지차이다!매일 쥐꼬리만 한 수입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다정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기 위해 왔다. 몸에는 퀴퀴한 약초 냄새가 배어 있고, 누렇게 뜬 얼굴로 산발하고 있을 거라 상상하면서…….그런데 자기가 상상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세월의 지혜와 삶에 대한 애착은 다정을 더욱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들었다.애들을 키우면서 모성의 감성적 색까지 입혀지니 더욱 우아해 보였다.몇 년 전에 고 씨 집안에서 큰 아씨로의 삶을 살고 있을 때보다 더 빛이 났다.고다빈은 겉으로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마음 속에선 쓰디쓴 구역질이 올라와 참을 수가 없었다.예전에도 다정에게 늘 밀렸는데, 지금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니?그녀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다정을 자극했다.“언니, 오늘 나는 아빠 말씀 전하러 왔어. 요 몇 년간 사이가 틀어졌지만, 아빠도 이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그때 일어난 일들, 모두 언니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고……. 그래서 아빠는 이번 결혼식을 계기로 언니를 집에 초대하라고 했어.”고다빈은 청첩장을 꺼내 다정에게 건네주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은은한 골드 배경에 용과 봉황이 춤추고 있는 청첩장에 찍힌 은색의 큰 글씨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고 씨 집안사람들이 하는 짓들은 참으로 어이없다.’ ‘그때는 그렇게 나를 모질게 내치더니…… 5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그들이 하는 이런 행동들이 진짜 가족이라면 과연 할 수 있는 일인지 곱씹어 보았다.다정은 청첩장을 받곤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웃으며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던져버렸다.“나는 고 씨 집안과 진작에 연을 끊었어. 우리 엄마 딸은 나 하나뿐이라고……. 너같은 동생을 둔 적도 없어. 너도 더 이상 나를 언니라
다정이 입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강말숙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강말숙은 머리에 두꺼운 흰색 붕대를 감고, 손에는 링거 꽂고 있었다. 누워만 있는 게 답답한지 일어나 앉고 싶은 모양이었다.다정은 급히 뛰어가서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등 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다.“할머니,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다정이 친절하게 물었다.강말숙은 이마를 짚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도 말했다.“다른 건 괜찮고 머리만 조금 아프네. 의사 선생님이 방금 오셨었는데 큰 문제는 없고, 상처 난 곳에 약만 잘 바르면 된대.”다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할머니 옆의 의자에 앉았다.“다정아, 이 링거 다 맞으면 우리 집에 가자. 겨우 이 정도 갖고 병원에 입원할 필요 없어. 돈 많이 들어.”강말숙은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맡에 거의 다 맞은 링거병을 보며 말했다.“할머니, 오늘 이미 계산 끝냈어요. 지금 퇴원하면 환불도 안 해줘요. 아직 상태가 불안정하니 병원에서 하루 지켜보고 별일 없으면, 내일 퇴원해요.”다정은 손을 내밀어 할머니를 꼬옥 안았다. 다정은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미리 입원 수속을 끝냈다.돈보다 할머니가 중요했다.강말숙은 다정의 마음을 잘 알기에,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베개에 기댔다.강말숙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정의 손을 잡고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다정아, 요 몇 년 동안 아픈 나를 돌본다고 고생이 많다. 이 할미가 너를 힘들게 하는구나.”다정은 얼른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아니에요, 할머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언제 저를 고생시켰다고요. 제가 고 씨 집안에게 쫓겨나 오갈 데가 없을 때, 할머니가 저를 안 받아 주셨으면, 저는 없었을 거예요. 어떻게 저한테 지금 같은 날이 있었겠어요?”고 씨 집안일을 언급하자, 강말숙은 오늘 고다빈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다정아, 고 씨 집안 행사에…… 갈 생각이니?”다정은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곧 다시 별일 없는 듯 활짝 웃었다.“왜
“다정이 그년, 집에서 쫓겨나 할망구랑 같이 살더니, 교양도 없어졌나 봐.”심여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며 화제를 돌렸다.“여보, 우리는 원래 빈이 결혼식을 빌어 다정의 혼사도 정하려고 했잖아요. 지금 걔 하는 거 보니 쉽게 집으로 오지 않을 것 같네요.”고경영은 다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돌아오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라도 데려와야지. 방법을 찾아 볼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분명 때가 되면 임 씨 집안 쪽에서 틀림없이 신부를 내놓으라 할 텐데. 그럼 그땐 어디에 가서 신부를 구해오겠어? 다정이가 그런 스캔들에 휘말린 마당에 임 씨 집안과 결혼하는 것만으로 은혜를 베푸는 영광으로 알아야지! 이걸 거절한다면 그야말로 멍청한 거지…….”임 씨 집안과의 혼인 이야말로 그들이 이번에 다정을 부른 진정한 목적이었다.임 씨 집안은 임진시에서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재산도 많다. 대대로 유명 인사와 인재를 배출했다.하지만 이번 세대에는 안타깝게도 놀고먹는 개차반 2세인 부잣집 도련님이 하나 있는데, 그는 임 씨 가문 최대의 골칫거리였다.이 인간은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얼마 전 운전 중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불구가 되었다. 그런데 다들 동정하기는커녕 인과응보라고 고소해하는 사람이 많았다.결혼할 나이가 다 되었지만, 불구자인데다 성질머리도 더러워서 있는 집 자제와 결혼시키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이런 개차반과 어느 여자가 결혼하기를 원하겠는가?조건이 좋은 여자들은 당연히 이런 놈과 만날 리 없고, 조건이 좋지 않은 여자들은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꼭 그놈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임 씨 집안은 도처에서 집안이 맞는 아가씨를 찾고 있다.조건을 아주 넓게 놓아 재혼이라도 상관없고, 또 두둑이 한몫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마침 고 씨네 그룹은 두 달 전 사업 때문에 적자가 커졌다. 그 적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자금이 급히 필요한 상황이었다.고경영이 한창 자금 때
임은미는 다정의 가장 친한 친구로,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한, 둘도 없는 절친이다.요 몇 년 동안 임은미는 다정을 많이 도왔다. 그녀는 두 아이의 의모이다.강말숙은 은미의 이름을 듣자마자 안심하고 더 이상 딴말하지 않았다.임은미는 다정의 집 열쇠를 갖고 있다. 다정이 급한 사정이 있을 때마다 종종 아이들을 돌봐 주었다.다정은 병원으로 가 밤새 강말숙의 옆을 지켰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강말숙의 컨디션도 점차 회복되었다.오히려 다정은 강말숙이 간밤에 뭔 일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되어 수시로 살피느라 한숨도 못 잤다.이튿날 아침, 회진하던 의사가 와서 강말숙에게 검사 결과를 말해 주었다.다행히 큰 문제없이 여러 가지 지표가 정상이어서 퇴원해도 괜찮다고 의사가 얘기했다.건강 상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정은 간단히 물건을 정리하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주택단지의 입구에 막 이르렀는데 한쪽에서 한 무리의 노인들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수다를 떨며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다정도 얼핏 몇 마디 들었는데, 무슨 고급 외제차니, 좋은 사람 같지 않다느니, 빚 독촉하러 왔다느니 등 얘기가 오갔다. 다정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과 상관없는 일.다정은 외할머니를 부축하여 자신의 아파트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2층까지 올라갔는데 이때 누군가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녀들의 앞을 막아섰다.고개 들어보니 소박한 꽃무늬 상의에 초록색 바지,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뒤로 대충 묶은 4, 50대의 아줌마였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마음씨 따뜻한 이웃집 장 씨 아주머니였다. 장 씨 아주머니는 매우 초조해 보였다.“다정아, 큰일 났어. 너희 집에 일 났어. 십여 분 전에 검정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너희 집에 들이닥쳤는데, 딱 보니 깡패 놈들이 빚 독촉하러 온 거 같더라! 너 사채 빌렸니? 애기들이랑 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여준재,금테 안경테를 쓰고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 구남준이었다.그들은 방을 둘러보았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졌다.작은 방에는 아늑한 느낌이 가득했다.임은미의 말을 듣고, 그제야 시선이 임은미 뒤에 있는 두 아이에게로 향했다.임은미는 그들의 시선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그녀는 두 아이를 껴안고 뒤로 물러났다.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긴장한 나머지 TV에서 보도된 아동 유괴에 관한 사건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어떡하지? 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손 대면 어떻게 대처해야지?’지금의 상황에선 그녀도 취약계층이었다.둘째 하윤은 작은 몸을 완전히 임은미의 뒤에 웅크리고 겁에 질려 감히 그들을 쳐다보지도 못했다.겁이 없는 하준은 오히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동자에는 경계심을 느끼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준재는 턱을 괴고, 이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 왠지 재미있었다.지난번 교통사고 때도 다정 곁에 있던 두 아이를 봤었다. 아마도 그 아이들일 것으로 짐작했다.겨우 4, 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애들은 이목구비가 또렷했다.붉은 입술에 가지런한 이,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너무 귀여웠다. 둘은 비슷한 스타일의 패밀리룩을 입고 있었는데, 거실의 아늑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여자아이는 똘망똘망하니 귀엽게 생겼다. 촉촉하고 맑은 큰 눈망울은 호수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임은미 뒤에 웅크리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다.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남자아이는 미간에 귀여운 느낌 대신 총기와 똘똘함이 더했다.준재가 두 꼬맹이를 훑어보고 있을 때 하준도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잘생긴 아저씨다.’하준은 이 남자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적대심 같은 게 없었다. 반대로 이 아저씨에 대해 이상하게도 친근감이 느껴졌다.준재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들 앞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하준을 쳐다보며 물었다.“고다정 씨는 너
다정의 안색이 변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임은미는 다정의 안색이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방금 전의 일을 설명했다“다정아, 방금 내가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글쎄 이 사람들이 들이닥쳤어…….”그러고는 다정의 귓가에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만약 이 사람들이 막 나온다면 우리 경찰에 신고하자.”하준과 하윤도 다정의 손가락을 잡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녀에게 용기를 주려는 것 같았다.웃기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그녀는, 일단 아이들을 다독였다.“엄마는 괜찮아, 겁내지 마.”“은미야, 괜찮아, 함부로 하지 않을 거야.”다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여준재에게 향했다. 말투에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오려면 사전에 얘기해야죠. 당신들 모습 좀 봐요. 우리 가족들이 놀랐잖아요.”구남준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고다정 씨, 가족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오늘 정말 상황이 급박해서 예고도 없이 방문했습니다.”임은미는 사태의 전개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야?”그녀는 다정의 옆구리를 손으로 쿡쿡 찔렀다.“괜찮아, 나를 찾아온 거야. 악의는 없어. 할머니는 아래층 장 씨 아주머니 집에 계셔. 너, 하준이랑 하윤이 데리고 먼저 거기 가 있어. 내가 좀 있다 가서 설명해 줄게.”다정이 은미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들이 이렇게 급하게 온 것은 아마도 이 남자의 몸에 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때 하준이 다정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엄마, 안 갈래요. 여기 같이 있을래요.”아들이 엄마 걱정하는 것을 알고, 다정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민폐를 끼칠 녀석이 아니니 묵인했다.하윤도 상황을 보고 가지 않으려 했다.“나도 엄마와 함께 있을 거예요.”임은미는 걱정되어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다정은 두 아이를 끌고 준재에게 다가갔다.“이렇게 기별도 없
하준과 하윤은 다정 뒤에 서서 서로 쳐다보았다.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왜 갑자기 이 아저씨를 치료하지?’이해가 안 되지만, 방해할 엄두도 못 내고, 얌전히 바라보기만 했다.“야옹.”앳된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렸다. 젖먹이 고양이 두 마리가 문밖에 갇혔다.하준과 하윤의 눈이 마주쳤다. 분명 그들의 새끼 고양이가 그들을 찾아온 것이었다.두 꼬맹이가 살금살금 뛰어가서 문을 열고 각각 한 마리씩 안고 돌아와 엄마를 바라보았다.다정은 능숙한 동작으로 이미 침 소독을 마쳤다.“시작합시다.”다정은 능숙하게 준재의 등에 침을 놓았다.속도가 빨라 통증을 느낄 틈도 없었는데 이미 끝냈다. 등이 약간 시큰거렸다.하준과 하윤은 준재의 눈을 쳐다보았다.시선은 예리하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꼈다.“멋쟁이 아저씨, 정말 우리 집에 돈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군요.”하윤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이 아저씨가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 같았다.준재는 그제야 제대로 하윤을 관찰할 수 있었다.그녀에게선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운 아우라가 가득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솜사탕처럼 웃는 모습이 작은 천사 같았다.하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신이 치유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준재는 귀여운 하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래, 그럼 빚진 돈은 네 엄마가 치료해준 거로 퉁 치자.”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그렇지…… 아저씨는 나쁜 사람 같지 않았어.”‘방금까지도 내가 무서워서 다른 사람 뒤에 꽁꽁 숨어 있었으면서…….’여준재는 그런 하윤이가 너무 귀여웠다. 하준은 여동생을 덥석 잡아당기며 경계하듯 말했다.“낯선 사람과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우리는 저 아저씨를 아직 잘 모르잖아. 엄마가,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 거 잊었어? 저 아저씨가 잘생겼다고 해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하윤은 귀엽게 눈을 깜빡이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오빠에게 고개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