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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내 여자 건드리지 마: Chapter 11 - Chapter 20

40 Chapters

제11화

“진정해. 선미랑 친하게 지내서 많이 속상했어? 앞으로 조심할 테니까 계약 해지는 함부로 입에 담지 마.”이미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옛날에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너무 기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냥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송유진의 몸이 움찔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미안, 인아도 있는 줄 몰랐어. 며칠 전에 귀걸이를 하나 두고 갔는데 협찬사에서 얼른 돌려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가지러 왔어.”유선미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의기양양했다.그리고 송유진이 보이지 않은 각도에서 도발적인 표정을 지었다.아까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서인아는 그녀를 보자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등 뒤의 송유진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벌써 환승하려는 작정이야? 우리 집 비번을 알려준 것도 연기 때문이었어? 귀걸이는 왜 여기에 두고 갔는지 설명해줄래?”송유진은 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도와줬을 뿐이야. 며칠 전에 선미가 제작사랑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파파라치에게 도촬 당할까 봐 너희 집에서 하룻밤 묵은 건데 굳이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가 있어?”“내가 몰아붙인다고? 송유진! 여긴 우리 집이야. 적어도 누가 들락거리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또다시 말다툼이 벌어지자 유선미가 서둘러 해명했다.“인아, 오해야. 이게 다 내 잘못이거든? 유진은 원래 얘기하려 했는데 네가 병실에서 넘어져 다치게 된 그 날, 파파라치가 어떻게 알고 촬영했는지 일단 급한 불부터 끄려고 하다 보니까...”“조용히 해!”서인아가 유선미를 돌아보았다.유선미는 깜짝 놀라더니 체념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송유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선미랑 상관없는 일인데 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야? 최소한의 신뢰조차 없으면 함께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건 사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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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는 핸들을 꽉 잡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이내 재빨리 시동을 걸고 말했다.“나중에 생각나면 알려줄게. 일단 출발하자.”“그래.”비록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서인아는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조금 전 생각이 너무 짧았다. 송유진과 관계를 끊기로 한 이상 굳이 화를 돋우려고 한도윤을 자극할 필요가 뭐 있었는가?이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충동은 금물이었다.언뜻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사람인데 대체 어떤 요구를 할지 막막했다....차는 아파트를 떠나서 얼마 안 되어 외곽으로 빠지더니 공항 고속도로를 탔다. 그제야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라는 생각에 한시름 놓았다.“어디 가?”그러다 문득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창밖으로 빠르게 변하는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성에 갑자기 나타난 서지훈이 떠오르는 순간 추측이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때, 옆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곧이어 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 다 봤으면 집에 와야지. 2시 항공편을 예매했으니까 도윤이가 데려다줄 거야.”서인아는 황당한 듯 말했다.“돌아간다고 얘기한 적이 없거든?”“아니면 어디 갈 건데? 개판 같은 연예계에서 삼류 스타나 되려고? 쪽팔리지도 않아?”서인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창피한 건 그녀도 매한가지였다.그래서 더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연예계에서 성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정작 결과는 어떠한가?남자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누명을 썼을뿐더러 흑역사만 남긴 채 도망친 꼴이라니.“오빠, 지금은 진짜 안 돼.”서인아의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핑계는 필요 없어. 이번에는 절대 봐주지 않을 테니까.”“변명 아니야! 게다가 대표님이랑 약속이 있는데 내일 계약 해지하러 갈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서지훈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안 돼. 계약 해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돌아와. 할아버지께 이미 네가 해성에 온다고 말씀드렸어. 그동안 매일 걱정으로 지냈으니 이번만큼은 실망시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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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계획만 볼 때 완벽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보아하니 임서원은 계약 해지할 의향을 눈치채자마자 그녀를 완전히 버릴 생각인 듯싶었다.전하린이 보낸 문자를 읽고 나서 서인아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마치 해성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 하성에서 보냈던 시간이 과거가 되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기내에서 비행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고, 결국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앞으로 굳이 나한테 알려줄 필요 없어. 여태껏 고마웠어. 잘 지내고. 기회가 되면 해성으로 놀러 와. 안녕.]이내 휴대폰 전원을 끄고 안대를 쓴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화천 아파트.송유진은 홀로 소파에 앉아 서인아가 꾸민 아늑한 방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마음이 허전했다.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고, 서인아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대학교 내내 죽기 살기로 따라다니며 졸업하고 나서도 기어코 같은 전공에 지원하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솔직히 말하면 서인아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로 여겼다.설령 그녀가 단호하게 잘라냈을지언정 지금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송유진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찾아가는 이상 무조건 재결합할 수 있을 거로 확신했다.머릿속이 뒤죽박죽이던 순간 탁자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하린의 전화였다.송유진은 전화를 받았다.“왜?”“유진 씨, 인아 씨 하성을 떠났어요.”“그게 무슨 소리지?”전하린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았다.“해성으로 돌아갔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올지도 몰라요.”“뭐라고?”송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해성으로 돌아갔다니?‘맞네, 해성 출신이었지?’고3 때 같은 반 친구들에게 들은 말로는 어머니가 가출하고 나서 아버지도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서로 의지하며 두메산골에서 자랐다고 했다.대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할아버지를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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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이내 길가에 개량 한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꼿꼿하던 몸매는 어느새 구부정했고,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을 보는 순간 코끝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거동이 불편한 탓에 산에만 있던 할아버지가 그녀를 데리러 직접 오다니!한편, 서청환은 이번에도 속은 줄 알고 칠칠하지 못한 손자를 욕하느라 바빴다. 역시나 손녀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자칫 놓칠세라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곧이어 누군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할아버지!”서청환은 노안경을 고쳐 쓰더니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모자를 착용한 여자가 허벅지에 엎드린 채 나지막이 흐느끼고 있었다.희미하던 눈동자에 금세 생기가 감돌았고, 그동안 웃을 일이 없던 얼굴에 마침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손을 들어 서인아의 등을 토닥였고, 감격에 겨운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렸다.“어서 와.”...서씨 고택은 해성 외곽의 산속에 있다. 한쪽은 바다를, 나머지는 번화한 도심을 마주했기에 산꼭대기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풍경이라고 해도 평소에 감히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해성 주민들에게 이곳이 수년 전부터 사유지가 되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세 개의 등산로는 검문소가 따로 있으며, 경호원들이 24시간 교대로 감시했다.이때, 검은색 차량 세 대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가운데 있는 리무진 안에서 서인아는 서청환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다.“넌 양심도 없어? 어떻게 집을 떠나고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냐? 이번에 네 오빠가 찾아갔으니 망정이지,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했던 거야?”서인아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죄송해요. 사실 매년 몰래 돌아왔는데 단지...”서청환은 안쓰러운 얼굴로 서인아의 손등을 토닥였다.“다 알고 있어. 우리 착한 귀염둥이, 할아버지는 네 탓 하는 게 아니라 걱정되었을 뿐이야. 바보, 하필이면 하성 같은 코딱지만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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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미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정두한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오랜만이야.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서인아가 미소를 지었다.“아저씨도 나날이 멋있어지는 것 같아요.”“이런!”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이미자는 빨개진 눈으로 서인아를 끌고 갔다.“네가 좋아하는 요리를 잔뜩 만들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봐봐. 고향 음식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그동안 먹고 싶었지?”“네.”서인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특히 아줌마가 해준 옥수수 전이 너무 그리웠어요.”“그럴 줄 알았어.”이미자는 짐짓 허세를 부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옥수수 전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서인아가 신이 나서 그녀를 끌어안았다.“아줌마 최고!”집에 돌아온 손녀를 바라보며 서청환은 차에서 내릴 때부터 눈가가 촉촉해졌다.“인아가 드디어 왔네요. 회장님도 이제 한시름 놓으세요.”정두한이 옆에 서서 말했다.서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동안 밖에서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성격이 권혁을 빼닮아서 나쁜 소식은 절대 전하지 않잖아.”“워낙 철이 든 아이라, 게다가 뒷받침해주는 지훈도 있으니 안심하셔도 돼요.”그는 묵묵부답했다.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손자와 통화하면서 들었던 말만 떠올리면 송유진이라는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감히 인아를 속상하게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나?“두한아.”서청환이 말했다.“우리 집안은 대대로 남자가 득실거렸고, 동시대 유일한 여자아이가 바로 인아란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처럼 키우고 자칫 이상한 놈이 탐낼까 봐 꼭꼭 숨겨두었지. 나중에 연애에 눈을 떠서 송유진을 따라 집을 떠났을 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사회의 쓴맛을 일찌감치 알려주지 않은 탓에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당하게 했어.”“어른이 되려면 뭐든지 경험해봐야 하는 법이죠. 회장님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서청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대외적으로 서씨 가문의 공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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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서인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그제야 졸음이 싹 사라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화면에 뜬 제작팀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사기꾼이 아님을 확신했다.하지만 이는 유선미가 여자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던 역할이지 않은가?전하린의 말에 따르면 최종 결정권은 송유진의 손에 있고, 둘은 커플 계약을 맺은 상황인데다가 스타엔터도 유선미에게 배역을 주겠다고 발표했다.그런데 왜 자신한테 기회가 주어진 거지?서인아는 당최 이해가 안 갔다.이때,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발신인을 확인해보니 스타엔터 매니저 구연범의 전화였다.구연범은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이자 연예계 고참이며, 업계에서 발언권이 꽤 셌다.동시에 여러 명의 아티스트를 담당했는데 서인아도 그중 한 명이다.보통 실적이 거의 없는 무명 연예인은 어시스턴트가 케어했기에 직접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조금 전에 받은 연락을 떠올리자 서인아는 대충 짐작이 갔다.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휴대폰 너머로 소음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짜증이 묻어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디야?”서인아는 입술을 깨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해성이요.”“뭐라고?”구연범의 목청이 한껏 높아졌다.“최근에 해성 스케줄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너 이제 입사한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거나 심지어 늦게 합류한 신입도 더 잘나가는 이유가 정녕 궁금하지도 않아?”서인아는 묵묵부답했다.구연범이 말을 이어갔다.“아티스트의 근무시간이 아무리 유연하다고 해도 통보도 없이 하성을 떠나면 어떡해? 무슨 수를 쓰던지 오늘 저녁까지 당장 돌아와. 이따가 새 영화 촬영하기 전 첫 회식이 있을 거야. 봉 감독님과 박 제작자님 그리고 다른 투자자들도 참석할 텐데 여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서인아는 구연범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무심하게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오늘 밤은 못 가요.”“뭐라고?”“오빠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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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녀와 함께한 몇 년 동안 열애설이 터지면 연예인 수명에 영향을 미칠까 봐 일부러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한 건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잘 챙겨줬다고 자부했다.설이나 명절 때면 선물도 보냈다.심지어 하성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물가가 비싼 도시에서 서인아를 위해 고급 아파트까지 계약했다.유선미 때문에 선을 긋는 건 이해하지만 새 영화 여주인공의 역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일약 스타덤에 올라 유선미를 능가할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함께한 세월이 무색하게 송유진은 서인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당시 그녀가 취미까지 포기하고 무작정 연예계에 뛰어든 이유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기 위해서였다.이제 헤어진 이상 한낱 여주인공 자리에 목을 맬 필요가 뭐 있겠는가?지난 몇 년 동안 연예계의 갖은 추태를 목격한 서인아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송유진은 그녀가 이 바닥을 얼마나 떠나고 싶어 하는지 꿈에도 몰랐다.그나마 당시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까지 잃을 정도는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대학교 때 송유진을 따라 연기과에 지망했지만 동시에 복수 전공으로 몰래 연출 학과 수업까지 이수했다.심지어 예술대학교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한 사실은 아직도 알려주지 않았다.서인아는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웠다.이내 휴대폰을 내려놓고 가져온 짐을 풀기 시작했다.여러 개의 커다란 캐리어에 옷은 별로 없었고 크고 작은 박스들이 대부분이었다.그동안 가족을 위해 샀지만 차마 전하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둔 선물인데 돌아온 김에 직접 나눠주려고 했다.서인아는 신이 나서 방을 정리했다.한편, 해성.서지훈과 한도윤은 H호텔 꼭대기 층 VIP 라운지에서 와인 두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볼일이 끝나서 오후에는 돌아갈 거야.”서지훈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맞은편 소파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은 한도윤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여유가 넘쳤다.이내 휴대폰에서 눈길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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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집을 떠난 지 6년째, 그동안 준비한 선물만 인당 6개씩 되었다.본가는 할아버지와 정두한, 이미자 부부가 살고 있어 각자 선물을 나눠주었다. 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철이 들었다는 둥, 이제 다 컸다는 둥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서지훈의 몫은 방에 두었고, 어차피 집에 돌아오면 발견하기 마련이다.부모님은 부재중이라 잠시 보관할 예정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큰아버지 댁에 보내야 했다.서태호는 직업 군인으로서 큰어머니는 한평생 큰아버지를 따라다녔다.큰집은 아들만 셋인데 큰어머니는 딸을 갖고 싶어 한 명을 더 낳으려고 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을 출산할 때 과다 출혈로 큰아버지는 식겁한 나머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나중에 그녀가 태어나면서 두 집안의 유일한 여자아이가 되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집을 자주 비우는 탓에 큰어머니의 손에서 친딸처럼 자랐다.그리고 사촌 오빠들의 총애도 한 몸에 받았는지라 어렸을 때부터 해성을 통틀어 아무도 감히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서인아의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 서씨 가문의 도련님들이 가차 없이 응징할 거라는 사실은 모두가 뻔했다.따라서 항상 대립하는 서지훈보다 사촌 오빠들이 더 좋았다.서인아가 선물을 확인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집이야?”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상대방이 말했다.한껏 기대하는 말투에 서인아는 미소를 지었다.“응. 오전에 도착했어.”“넌 양심도 없냐? 어떻게 집에 왔는데 연락도 안 해? 나 삐진다?”휴대폰 너머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서인아는 재빨리 잘못을 인정했다.“미안, 다 내 탓이야. 너한테 주려고 선물도 준비했으니까 이만 화 풀어.”“글쎄, 성의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선물 들고 당장 튀어와!”이내 전화를 끊더니 주소를 공유했다....SOHO는 서인아가 해성을 떠난 후 새롭게 오픈한 초대형 백화점이다.7층짜리 건물은 전 세계 명품과 브랜드가 즐비했고, 의류와 주얼리를 비롯해 식품까지 없는 게 없었다.덕분에 최근 몇 년 동안 해성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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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따라서 서인아가 해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순간 재빨리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선물은?”온서우가 손을 내밀었다.서인아는 굽신거리며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자, 한 번 확인해보시지요.”여러 개의 작은 상자는 동일한 브랜드의 제품들이며, 귀걸이와 목걸이 등 그녀의 취향에 딱 맞았다.온서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나쁘지 않군. 용서해주지.”서인아가 피식 웃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온서우는 참다못해 폭소를 터뜨렸다.그리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서서히 웃음을 그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드디어 돌아왔네? 송유진의 민낯이 이제야 공개된 건가?”가차 없이 정곡을 찌르는 말버릇은 여전했다.서인아도 진지한 얼굴로 페이스를 되찾고 조소를 금치 못했다.“맞아. 다행히 제때 발을 빼서 늦지는 않았어.”“말이나 못 하면.”온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내 시선이 마주치더니 동시에 박장대소했다.자리에서 일어난 온서우는 테이블을 지나 서인아의 옆에 앉더니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고생했어.”그녀가 졸업하고 나서 해성으로 가는 바람에 서인아를 홀로 하성에 남겨둔 것에 대해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서인아는 팔을 뻗어 와락 껴안았다.“고생은 무슨, 예술적 영감은 원래 일상생활에서 비롯되는 거야. 삶의 현장을 체험했다고 생각해.”“하하하.”온서우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폭소를 터뜨렸다.“역시 너답네. 그동안 괜한 걱정을 했군.”이내 서인아를 놓아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옆에 앉아 웃으면서 말했다.“그래서 이번 기회에 뭘 깨달은 거야?”서인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뒤돌아서 가방에 있는 노트북을 꺼내 문서를 클릭해서 보여주었다.“한 번 봐봐.”온서우는 호기심에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최 그녀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어느덧 4시간이 훌쩍 지날 줄은 몰랐다.저녁 7시는 하루를 통틀어 백화점 유동 인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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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서인아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오랜만에 만난 온서우와 시동이 걸리자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헤어진 이후로 그동안 하성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여태껏 비밀로 했던 유선미와 송유진의 관계까지 전부 털어놓자 열을 받은 나머지 대신 화풀이하러 가겠다며 당장이라도 항공권을 끊을 기세였다.서인아는 입이 닳도록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말리는 데 성공했다.마지막으로 시나리오를 언급했는데 온서우는 잘 나가는 출판사와 꼭 거래를 성사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게다가 출간만 하면 홍보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차는 저택 앞에 멈추어 섰고, 서인아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역시나 송유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떠나고도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시계는 밤 11시를 가리켰고 서청환과 정두한, 이미자 부부는 연세가 있는지라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하지만 거실은 아직도 훤했다.안으로 들어서자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퇴원과 공항 픽업마저 한도윤에게 부탁한 서지훈이 긴 다리를 뻗고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언제 온 거야?”서지훈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왔어? 오빠랑 한잔해.”서인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겉모습은 여전했지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분위기가 결코 심상치 않았다.서지훈이 회사를 인수한 이후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왜 그래?”서인아가 다가가자 서지훈은 술을 한 잔 따라 건네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을 뿐.”“그 말을 믿으라고?”어렸을 때부터 그는 실면과 거리가 멀었다.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데, 산후조리 중인 산모보다 더 졸려 하는 사람이 잠을 설쳤다니?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서인아는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일인데? 정 얘기하기 싫으면 영민 씨한테 연락한다?”주영민은 서지훈의 비서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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