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29 챕터

제1화

전화가 끊긴 순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희미하게 들리는 생일 축하 노랫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이 자리는 유석진과 지은후가 서호연을 위해 준비한 생일 파티였다.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서호연이 블랙펄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리 언니, 같이 내려가서 놀아요!” 그녀는 마치 새끼 사슴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리를 바라보며, 청초한 얼굴 위에는 정성스레 그려진 화장이 돋보였지만, 곳곳에 묻은 크림 자국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척하면서... 참.’ 송나리는 서호연의 가식적인 웃음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못 내려가. 너희끼리 재밌게 놀아.” 나리는 차갑게 말했다. 순간, 호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언니... 혹시 저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피하시는 거죠?” ‘싫어한다고? 내가 뭐라도 했나? 자기 혼자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내 탓을 할 건 또 뭐야.’ 속으로 비웃는 나리의 눈에는 호연의 연기가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런 연기는 너희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한테나 보여줘. 나한테는 소용없어.” 단호한 말투로 내뱉은 나리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언니, 그러지 마세요!” 호연이 갑자기 손을 뻗어 문틀에 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손이 그대로 문틈에 끼였다. 아악- 여자의 하얗던 손등에 금세 퍼지는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바로 그때, 유석진과 지은후가 계단을 올라오며 이 광경을 목격했다. “호연아!” 두 남자가 동시에 달려와 호연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살폈다. 손등 위의 상처를 확인한 은후의 눈가가 붉어졌다. 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는 참지 못하고 나리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호연이를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이런 비열한 짓까지 해야 해? 송나리, 너 언제부터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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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리는 문을 닫고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곳 일도 정리해야겠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는 것이 나리의 마지막 목표였다. 그녀는 거실 한쪽에 있는 큰 창가에 앉아, 남아 있는 업무를 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 나리는 이어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탓에 나리의 몸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다 끝났어.’ 아래층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나리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잠깐 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호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 왜 제 게시물에 ‘좋아요’ 안 눌렀어요?] 나리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좋아요? 갑자기 웬...? 나는 어차피 항상 누르지도 않잖아.’ 그런데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실수로 보냈어요. 화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지?’ 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호연의 메시지를 보고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호연의 SNS를 열어보기로 했다. ‘대체 뭘 올렸길래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한 거지?’ SNS를 열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사진 아홉 장이었다. 모두 석진과 은후가 호연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핑크빛 공주 드레스였다. 정교한 디자인의 드레스는 마치 핑크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석진이 보낸 커스텀 메이드 크리스털 힐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하며 사치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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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눈앞의 두 남자를 바라보며 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일 뿐이야. 다시 찍으면 되잖아.” “깨끗이 태워버렸으니 이제 앞으로 찍으면 되지. 어차피 우리도 여행 안 간 지도 꽤 오래됐잖아.” 석진은 애써 타협하려는 듯 말했다. 은후도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호연이도 같이 데려가자. 자기는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은후의 말에, 나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서호연을 데려간다고? 참, 이제는 아예 나한테 의견도 안 묻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두 남자는 나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없던 것들이었다. “이건 또 뭐야?” 두 사람은 동시에 물었다. 나리는 박스들을 흘끗 보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나 사직했어. 다른 일 알아볼까 해서.” ‘사직했다고?’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이 일을 좋아했는지를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눈앞의 나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의문이 두 사람의 마음에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오늘 나리는 어딘가 이상해. 말투도, 표정도 평소와는 다르고...’ 묘하게 불안한 감정이 두 남자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은후는 더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찢었다. 석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호연의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진 오빠, 우리 집 갑자기 정전됐어요. 너무 무서워요... 저 어떡하죠?] 은후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했다. 석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먼저 나섰다. “호연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바로 갈게.” 석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늘 냉철하고 침착하던 그의 얼굴에 평소 보기 드문 긴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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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호연은 트로피를 품에 안은 채, 나리에게 건네줄 기색은커녕 오히려 입술을 꼭 깨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팀장님이 트로피를 언니한테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이 상 정말 권위 있는 상이잖아요. 언니 진짜 대단해요.”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언니, 제가 정말 두꺼운 얼굴로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이런 상을 한 번도 못 받아 봤거든요. 이 트로피를 며칠만 저한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빌려 달라고? 트로피를?’ 나리는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부탁에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녀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참 얼굴도 두껍다. 그런 부탁은 나에게 안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정말 받고 싶으면 네가 직접 대회에 나가서 받아.”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리는 손을 뻗어 호연 품에 있는 트로피를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나리의 단호한 태도에 호연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호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제가 트로피를 뺏으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집에 잠깐 두고 스스로 동기부여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요?” 나리가 손을 뻗자, 호연은 트로피를 더욱 꽉 안았다. 호연의 표정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듯했다. ‘뭐야, 이제는 아예 주지도 않겠다는 거야?’ 나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트로피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트로피는 호연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유리로 만든 트로피는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마침 그때 석진과 은후가 집으로 돌아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순간 멈칫하더니, 곧장 달려와 호연을 품에 안았다. “호연아!” 두 사람의 얼굴에는 걱정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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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리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어느새 끊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한 친구가 결혼해. 왜, 너희도 같이 갈 생각 있어?” 요즘 들어 석진과 은후는 나리에게 점점 더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S 시로 돌아가고 나면 이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앞으로 우리 사이는 친구라고 부르기도 어렵겠지.’ 그렇다면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결혼하러 간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 없잖아.’ 나리의 말을 들은 석진과 은후는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쳤다. “아니, 난 못 가. 회사 일이 바빠서.” 석진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차가운 표정으로 서류를 챙겨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은후 역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호연이가 너 때문에 다쳤잖아. 피까지 났는데, 네가 직접 가서 사과하는 게 맞아. 안 그러면, 너랑 같이 결혼식 같은 데 갈 생각 없어.” 그는 말끝을 차갑게 맺고, 휙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끝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더는 말싸움을 할 힘도 없다는 듯 나리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 아침, 나리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다. 거실로 나서던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거실 한복판에 화병들이 열 개도 넘게 놓여 있었다. 화병마다 신선한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은은한 꽃향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쾌한 향기였지만, 나리의 얼굴은 그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 ‘꽃가루...?’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거실을 휘감으며 나리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리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야... 대체 왜 여기에 꽃이...’ 그녀는 천식 환자였고,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점점 더 심해졌고, 나리의 가슴은 들썩거렸다.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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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리는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벽에 기대며 손에는 약을 꼭 쥔 채, 얼굴을 감싸 꽃가루가 더 들어오지 않도록 애썼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녀의 귓가에 석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대체 왜 이렇게 호연이에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이 꽃들, 호연이가 우리 주려고 애써 준비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다 망가뜨리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 바로 이어 은후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리, 요즘 너 정말 이상해졌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그 말들을 들은 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숨을 고를수록 몸이 떨리고,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이 그녀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예민하다고? 변했다고? 정말 내가 변한 거 맞아? 너희가 변한 거 아니고?’ 수없이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리의 입에서 나온 건 단 한 마디였다. “내가 변했다고? 아니, 변한 건 너희야.”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천식이 있다는 거, 그리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너희 정말 모르는 거야?”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석진과 은후의 귀를 때렸다. ‘그런데도 모른척한다고?’ 나리의 말은 마치 커다란 천둥처럼 둘의 귀를 때렸다. 예전의 두 사람은 나리를 가장 아꼈던 사람이었다. 나리가 천식으로 쓰러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잡고 눈물까지 보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둘이었다.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나리 곁을 서성이고, 아무리 선생님이 불러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너희들이 그것마저 잊어버렸다고?’ 나리는 차갑게 떨리는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석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면서 눈에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교차했고, 얼굴빛은 점점 창백해졌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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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집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이제야 조금 편해졌네.’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문득 일정표를 확인한 나리는, 집을 정리하고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는 날이 마침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는 날과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좋네. 굳이 석진이나 은후한테 딱히 뭐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겠어.’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고 나자 나리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정말 끝나가는구나.’ 하지만 아직 끝내야 할 마지막 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에 들러 시간을 들여 고심 끝에 마사지기와 고급 보석 팔찌를 골랐다. 그리고 송하선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송하선은 두 팔을 벌려 나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리야, 네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정말 섭섭하고 허전하다. 네가 여기 H 시에 있는 동안, 난 너를 진짜 내 딸처럼 여겼는데... 네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지내겠니?” 송하선은 눈물을 훔치며, 나리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리의 마음도 찡했다.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가야 하는 걸 어떡해.’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송하선을 위로했다. “고모, 나도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비행기도 있고, KTX도 있으니, 명절 때 금방 다시 볼 수 있어요.” 송하선은 나리의 말을 듣고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더니 조카딸을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얘야, 착하게 여기 앉아 있어. 네가 간다고 해서 며칠 휴가를 냈어. 며칠 동안 내 집에서 지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잔뜩 만들어줄게.” 나리가 미처 거절할 틈도 없이 송하선은 주방으로 가서 분주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이 그녀 앞에 놓였다. 바쁜 와중에도 웃음 짓는 송하선을 보며, 나리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역시 고모는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분이에요.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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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나리가 돌아서자, 석진과 은후는 그녀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석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 정리는 네가 안 해도 돼. 너무 많아서 힘들잖아. 나중에 내가 집에 기사 불러서 새집으로 같이 옮기자.” 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혼자 하기엔 힘들 거야. 우리와 같이하면 돼.” 둘의 배려 넘치는 말에, 나리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어릴 적 자신만 바라보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땐 모든 게 참 단순했는데.’ 그 시절, 서로 웃고 떠들던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시절의 약속은, 결국 다 헛된 말뿐이었나.’ 나리는 이내 시선을 돌려 호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괜찮아. 짐은 내가 직접 정리할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두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걸어 나갔다. ...집에 돌아온 나리는 남은 짐을 정리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정리를 끝낸 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호연이었다. 통화를 받자마자, 호연의 달콤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언니, 오늘 밤에 나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 집에 다녀왔어요. 오빠들의 부모님이 저한테 정말 잘해 주시더라고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이 섞여 있었다. [근데 있잖아요, 오빠들 부모님이 오늘 저한테 각각 집안의 가보를 꺼내 주셨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혹시 제가 이제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닐까요?]호연의 말을 듣는 순간, 나리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나리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호연아, 너랑 그 두 사람 사이의 일에는 나는 관심 없어. 굳이 내게 이런 말 전하지 않아도 돼.” 나리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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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말이 끝나자, 석진과 은후는 호연을 데리고 나리가 앉은 테이블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호연에게 음식을 챙겨주며, 호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배려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아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설아는 손에 든 포크로 스테이크를 쿡쿡 찔러대더니, 결국 고기를 으깨버렸다. 하지만 나리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지.’ 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연과 함께 레스토랑을 떠났다. 나리는 설아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석진과 은후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든지 말든지, 이제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마지막 짐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니까, 이제야 돌아왔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 모르는 건, 그 새집엔 내가 없다는 거지.’ 밖에서는 짐을 옮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분주하네. 나와 상관없지만.’ 나리는 무심하게 자신의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바로 그때, 장혜정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받자,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비행기 도착시간 몇 시야? 엄마가 마중 나갈게.]나리는 잠시 앱을 열어 항공권 정보를 확인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 저녁 7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그 순간, 방문이 불쑥 열렸다. 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석진과 은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후가 무심하게 물었다. “누구랑 통화하고 있어?” 나리는 바로 전화를 끊고 차갑게 대답했다. “아무도 아니야.”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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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다 끝났어.’ 그녀는 석진과 은후의 반응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유로움은 처음이네.’ ...한편, H 시 최고급 전원주택 단지에 위치한 한 저택은 무거운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석진과 은후는 호연과 함께 이 집에 도착한 지 이미 세 시간이 지났지만, 나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 사람의 짐은 모두 거실에 정리되어 있었지만, 나리의 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진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대체 뭐지?’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후는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고,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은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왜... 왜 받지 않는 거야?’ 그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호연은 두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설마 송나리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나리 언니가 아직 짐을 다 못 챙겼나 봐요. 우리부터 먼저 준비 시작해요. 어차피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언니가 설마 오늘 약속 잊기야 하겠어요?” 석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그냥 기다리면 괜찮아질까... 아니, 뭔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초조하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은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소파 옆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대충 걸치고, 빠르게 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리...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내가 확인하러 갔다 올게.” 은후의 행동에 석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주위에 있던 직원들에게 간단히 지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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