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다 끝났어.’ 그녀는 석진과 은후의 반응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유로움은 처음이네.’ ...한편, H 시 최고급 전원주택 단지에 위치한 한 저택은 무거운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석진과 은후는 호연과 함께 이 집에 도착한 지 이미 세 시간이 지났지만, 나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 사람의 짐은 모두 거실에 정리되어 있었지만, 나리의 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진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대체 뭐지?’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후는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고,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은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왜... 왜 받지 않는 거야?’ 그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호연은 두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설마 송나리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나리 언니가 아직 짐을 다 못 챙겼나 봐요. 우리부터 먼저 준비 시작해요. 어차피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언니가 설마 오늘 약속 잊기야 하겠어요?” 석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그냥 기다리면 괜찮아질까... 아니, 뭔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초조하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은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소파 옆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대충 걸치고, 빠르게 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리...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내가 확인하러 갔다 올게.” 은후의 행동에 석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주위에 있던 직원들에게 간단히 지시를
은후는 뒤늦게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간 나리가 보여준 모든 이상한 행동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랬구나... 나리는 그동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석진 역시 아무 말 없이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마 한 달 전쯤부터 이미 계획했던 걸지도 몰라.’ 그는 자신도 인정하기 힘든 진실을 직감했다. ‘호연이 때문인가? 정말 그게 이유였던 걸까?’ 그 순간, 마침 호연의 전화가 울렸다. 은후는 잠시 망설이며 전화를 받았다. [은후 오빠, 석진 오빠! 저 지금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 오늘 모여서 축하하기로 했잖아요. 근데 오빠들은 어디예요?]호연의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지만, 은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쥔 남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은후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듯 말했다. “호연아, 오늘은 그냥... 모임 취소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리가 없는데... 축하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은 전망도 좋고, 구조도 아주 훌륭합니다...” 공인중개사가 한 남자에게 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공인중개사는 열심히 집의 장점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공인중개사는 석진과 은후를 보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 대표님? 은후 도련님? 여기 계셨네요?” 공인중개사는 의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이 집은 이미 매각이 완료된 걸로 알고 있는데, 두 분은 왜 여기 계신 거죠?” 공인중개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 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짐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확인하려는
호연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후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집은 여전히 조용하고 쓸쓸했다. ‘어디에 있든...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밤, 차가운 공기가 점점 깊어지자, 석진과 은후는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여기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새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깜빡 졸고 있는 호연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에는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지만, 석진과 은후는 전혀 따뜻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은후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누구를 챙길 마음의 여유도 없어.’ 석진은 호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향하면서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시간 됐으면 자. 앞으로 우리 기다리지 말고 그냥 쉬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호연은 소파에 웅크린 채 두 사람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왜 이러는 거지? 석진 오빠도, 은후 오빠도... 예전엔 그렇게 나한테 다정했는데.’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 무릎을 감싸며 생각했다. ‘진짜 송나리가 떠난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서성였고, 석진과 은후의 방 앞을 오가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래. 송나리가 떠난 건 나 때문은 아니야.’ 호연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마음을 다잡고 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빠른 속도로 그동안 나리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나리를 도발했던 모든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송나리는 스스로 떠난 거야. 절대로 내가 밀어낸 게
은후가 다가오자, 석진은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왔어? 내가 S 시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구했어. 둘이 가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은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해. 더 기다리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은후는 페달을 밟으며 차를 도로 위로 몰아붙였다. ‘속도위반 따위 상관없어.’ 그의 차는 마치 레이싱카처럼 질주했고, 석진은 옆자리에서 조용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무런 짐도 준비하지 않은 채, 단 하나의 목표만을 안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서둘렀다. ‘나리를 찾아야 해. 무조건 찾아야 해.’ 두 사람의 마음은 다급했고,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둘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한편, S 시에 도착한 나리 역시 편히 잠들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자, 그녀는 일찍 일어나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그래, 중요한 날이지.’ 오늘은 송나리와 구예성이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구예성과 나리가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니,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 내 결혼 상대라니.’ 나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구예성이라는 이름은 어릴 적부터 송씨 가문의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는 늘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로 언급되곤 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항상 칭찬하던 그 사람.’ 송진국과 장혜정이 전화로 가끔 예성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예성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었다. 나리의 기억 속 예성은 어릴 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가끔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꼬집던 소년이었다. 나리는 당시의 예성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결혼이라니...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 거지?’ 결혼이라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
은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표정이 일그러지며 몇 번씩 바뀌었다. 결국 그의 억지웃음은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입술이 몇 번이나 떨리며 움직였고, 마침내 은후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야, 이 사람 어디서 데려온 배우야? 연기도 별로다. 이쯤에서 멈추지.” 그는 손가락에 낀 반지와 눈앞의 혼인관계증명서를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나리는 두 사람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미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었다. ‘이제 이 두 사람과 다시 엮일 일은 없어.’ 그녀는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배우라니 무슨 말이야? 너희들 예상과는 다르겠지만, 나 정말 결혼했어. 여기 증거도 있어.” 그녀는 손에 든 혼인관계증명서를 펼쳐 보이며, 석진과 은후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예성은 조용히 나리의 허리를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리 씨 남편 구예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예성의 눈동자는 옅은 호박색으로, 석진과 은후를 가볍게 훑었다. 그 시선에는 자연스러운 자신감이 담겨 있었고, 마치 은후와 석진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석진의 흔들리던 동공이 한순간 커지며 가슴 속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나리야, 그만해. 너 지금 화난 거 맞지? 질투하는 거지? 괜찮아, 나도 이해해. 근데 너 이거 진심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이건 실수야. 그러니까 들어가서 바로 이혼하든지 결혼 취소하자. 아직 늦지 않았어.” 석진은 그렇게 말하며 나리의 손을 잡아 구청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나리에게 닿기도 전에, 은후가 예성과 나리 사이로 들어서며 예성을 막아섰다. 은후는 예성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S 시에는 내 부모님과 가족들이 다 있지만 H시는 아니잖아? 그리고 이제는 지겨워졌어.” 석진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차갑게 식어버렸다. “송나리, 너 후회하게 될 거야. 결국엔 우리를 다시 찾게 될 거라고!” 나리는 석진의 말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기회는 주지 않을 겁니다.” 예성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고,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은 곧바로 움직였다. 경호원들은 석진과 은후의 입을 막고 손발을 단단히 제압한 뒤, 두 사람을 헬리콥터로 끌고 갔다. 예성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나리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실망하면 어쩌지?’ 그가 구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결코 합법적인 방법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리 앞에서만큼은 그의 숨기고 싶은 면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나리 씨, 내가 이런 모습 보여서... 무섭지 않아요?” 예성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나리는 예성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뜻밖의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말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다르지도 않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왜요? 전혀요. 오히려 이렇게 처리하는 게 더 깔끔하네요.” 나리의 대답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두 개의 골칫거리가 한 번에 사라졌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어?’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이렇게까지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내가 떠난 뒤에 둘은 나 없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호연을 선택했어야 마땅한데...’ 그리고 둘은 이미 호연과 함께 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호연이도 그럴 생각이 있다는 건 이미 명백했고.’ 나리는 차분히 속으로 정리했다. ‘석진과 은후도 아직 나에게 집착하는 건 단지
석진과 은후는 약속했다. 나리가 둘 중 누구를 선택하든, 나머지 한 사람은 마음속의 미련을 깨끗이 정리하고 평범한 친구로 남겠다고. 하지만 정작 나리는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왜 우리가 이런 결말을 맞게 된 거야?' 석진과 은후는 서로 마주 보며 뜻밖에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왜 그런 바보 같은 제안을 했을까?' ‘조금만 더 일찍이거나,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셋이 예전처럼 친구로 남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지금처럼 얼굴 한 번 마주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헬리콥터가 전원주택 옥상에 착륙했다. 경호원들이 두 사람을 거칠게 끌고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리콥터는 다시 굉음을 내며 떠올랐다. 옥상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란 호연이 서둘러 올라왔다. 묶인 손발로 바닥에 앉아 있는 석진과 은후를 보고 놀란 호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호연은 다급히 다가가 두 사람의 밧줄을 풀어주며 물었다. 석진은 멍이 든 손목을 문지르며 아무런 말 없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떠나는 석진의 뒷모습에 호연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은후 역시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앉아서, 차오르는 분노를 딱히 어디에도 풀 수 없어서 분한 표정이었다. 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뜻한 물 두 잔을 가져와 두 사람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혹시 S 시에 다녀오신 건가요? 나리 언니는 찾았어요? 언니는... 괜찮은 거죠?” 그녀는 옷소매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긴장감에 손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돌아온 걸 보니 S 시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나 봐.’ ‘송나리는 모든 걸 가졌잖아. 완벽한 가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다 가진 사람이니까 제발 석진 오빠와 은후 오빠까지는 뺏어가지 마!
호연의 얼굴에 눈물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석진과 은후를 바라보았다. ‘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왜 이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린 걸까?’ ‘예전엔 내가 조금만 울어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안절부절못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의 무심한 태도에 호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자신이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바닥날 때까지 울어도, 두 사람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호연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가 나리에게 했던 도발과, 나리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온갖 의도적인 행동들을 입 밖에 낸다는 건 곧 자신이 이 상황을 전부 끝장낸다는 뜻이었다. 호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은후를 향해 거의 절망적으로 외쳤다. “은후 오빠... 저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발 절 믿어줘요. 나리 언니가 그동안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떻게 언니한테 못되게 굴겠어요?' “만약 오빠들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나리 언니라면... 제가 이 집에서 나가면 되잖아요... 그럼 되겠죠?” 그녀는 말하면서 눈물을 억지로 더 짜내려고 애썼다. “혹시... 나리 언니는 제가 여기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걸까요? 전부터 저를 좀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서요.” 호연은 계속해서 두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긁는 말을 던졌다. 그녀의 희망은 오직 은후였다. 평소에 다정한 은후가 예전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이번 일도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한 번만... 아니, 딱 한 번만 더 모른 척 눈감아주기만 하면 돼. 이렇게 한집에서 계속 살다 보면 결국 두 사람 마음속엔 나밖에 없을 거야.' 호연의 속마음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송나리? 겨우 나보다 20년 먼저 두 사람 곁에 있었을 뿐이잖아? 만약 내게 송나리 같은 배경이 있었다면, 난 절대 나리처럼
석진은 뉴스와 온라인 매체에서 나리의 호화로운 결혼식 소식을 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현장 사진과 예성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건 분명 구예성 짓이야, 그렇지? 은후를 저렇게 만든 것도 분명 그놈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한영수와 주미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오늘이 구예성과 나리의 첫날밤이라면... 그놈도 방심하고 있겠지.’ ...구씨 저택. 신혼 첫날, 예성과 나리는 침실에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근한 이불 속, 둘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지금 서로의 존재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이 고요를 깨뜨렸다. 딩동! 딩동! 딩동! 예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석진의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것이다. 퍽! 예성은 빠르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석진의 팔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예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선 석진의 몰골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눈 밑은 검게 멍들었고, 턱엔 깔끔하게 면도하지 못한 상태로 수염이 약간 자라나 있었다. 한때의 냉철하고 완벽했던 석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구예성, 너는 나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은후를 건드렸어?!” 석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후가 병실에 누워 있어. 다리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이 모든 게 네 짓이지. 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진은 예성에게 달려들었다. 예성은 석진의 거친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한숨을 내쉬듯
축하 영상이 끝난 후, 화면은 나리와 예성의 실제 결혼식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신랑과 신부는 현재 S 시 근교에 있는 고풍스러운 왕족의 저택 옛터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궁궐 같은 건물은 붉은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피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현장을 감도는 축제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화면 속에서 예성은 고풍스러운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있었고, 뒤로는 붉은 보자기로 둘러싸인 전통 가마가 따랐다.그 뒤에는 전통 혼례의 격식에 따라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혼례 행렬은 마을 곳곳을 지나며, 순금으로 제작된 동전과 한지로 포장된 떡, 한과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길가에 모인 사람들은 금화와 전통 과자를 받으며 환호했다.“행복한 가정 꾸리세요!”“나리 씨, 예성 씨, 복 많이 받으세요!”...같은 시각, 혼례가 생중계되고 있던 저택 안에서는 하객들에게도 정교하게 제작된 기념품과 다양한 전통 한식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이건 차원이 다르잖아.’저택 안에 있는 모든 하객은 이 결혼식의 호화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진과 은후 역시 화면 속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예성은 왕족 저택 앞에서 부드럽게 말에서 내렸다.그는 우아하면서도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나리가 타고 있는 가마의 문을 열었다.그 안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곱게 단장한 나리가 있었다.예성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아 올렸고, 단호한 걸음으로 왕족 저택의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언제 이런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했지?’석진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서고,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신랑과 신부는 모든 하객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한옥 안으로 사라졌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완벽하고도 황홀했다.석진은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
‘이대로 포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감정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들은 다 뭐가 되는 거야?’ ‘설마 만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그 남자보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거야?’ 석진과 은후의 눈엔 절대 꺼지지 않을 듯한 불꽃 같은 집념이 가득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같이 움직이자. 이후엔 각자 실력으로 해결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은후는 한영수와 주미애에게 도움을 요청해 나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을 뒤져 찾아낸 사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리가 이걸 다 태워버렸구나.’ 남은 건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단독 사진뿐이었다. 비록 아쉬웠지만, 은후는 만족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한편, 석진은 구씨 가문에 사람을 심거나, 구씨 가문의 사람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해.’ ‘결혼식까지는 이제 3일... 준비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 그 시각, 나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석진과 은후가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오자, 나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긴장했는지 무의식적으로 예성의 셔츠 소매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다. “예성 씨...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나리는 이미 석진과 은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우린 친구도 될 수 없어.’ 그녀는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은 이미 끝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걸로 끝나면 되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억지로 붙인다고 해서 거울이 다시 멀쩡해지지 않잖아.’ 예성은 나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후의 두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예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해? 난 인정 못 해! 나리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칠게! 해외로 가도 좋고, H 시로 돌아가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하지만 예성은 은후의 주먹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저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으로 끝냈다. 은후의 주먹은 예성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지만, 예성의 뺨엔 붉은 흔적이 남았다. “아...!” 예성은 살짝 다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찡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예성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나리는 예성의 상처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안 아파요.” 예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 예성을 보자 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 예성이 끝까지 손을 풀어주지 않자, 나리는 은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지은후! 왜 이 사람한테 손찌검한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충동적이고 화를 못 참는 사람이 됐어?” 그런 나리의 책망은 은후의 멘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구예성만 걱정하는 거냐고!?’ 방금 자기 주먹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은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성이 이렇게까지 과장하며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은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난 제대로 때리지도 않았어! 저 사람, 안 다쳤어! 송나리, 나랑 가자! 저 자식은 믿을 만한 놈이 아니야.” 그는 나리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리는 단호하게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지은후, 이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할 만한 행동이야?” 그 순간, 은후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왜 항상 나만 나쁜놈이 되는 거지?’“여긴 우리 집이야. 내
나리는 예성과 손깍지를 낀 채, 석진과 은후를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리의 시선에는 확실히 석진과 은후에게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 나리의 눈빛에 은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리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쭉 함께였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어?’ 은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나리는 은후의 그런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자의 담담한 태도에 은후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석진이 은후의 말을 막아섰다. 석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나리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눈에는 단단한 결심과 미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리야, 인정할게. 우리가 잘못했어. 그땐 정말 어리석었고,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호연이를 이용하려 했던 거야.”“우린 호연이를 좋아한 적 없어. 그저 너를 질투하게 만들고, 네 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는 호연의 최후와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덧붙여 설명했다. “호연이는 결국 S 시에 와서 네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우리는 호연이를 다시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어. H 시에 있던 집도 정리했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갔어. 호연이는 지금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어.” 석진의 설명을 듣자, 나리는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호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찾아올 수 있었지?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제공한 사람이, 감히 내 도움을 바란다고?’ 나리는 호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해질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정말로 힘든 삶을 살겠지. 하지만... 호연이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동정할 이유가 없어.’ 그러나 나리의 마음을 더욱
예성은 일부러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석진과 지은후에 대한 감시를 잠시 느슨하게 해. 하지만 경계를 푸는 건 아니고. 오히려 두 사람이 움직일 틈을 주고, 거기에 더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해.” 부하들은 보스의 명령을 받자마자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예성은 이를 지켜보며,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차분히 준비를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예성은 일부러 석진과 은후가 S 시로 온다는 소식을 송진국과 장혜정에게 흘렸다. “뭐라고? 그 둘이 감히 나리 결혼식에 오겠다고?” 장혜정은 이 말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리를 그렇게 괴롭힌 사람들이 결혼식에 온다고? 어림도 없어!’ 그녀는 과거에 석진과 은후를 멋지고 유능한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둘을 마음속에서 사윗감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리의 목숨을 걸고 장난처럼 다룬 둘의 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다. 특히, 장혜정은 호연이 나리를 해치려 했을 때 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항상 딸의 곁을 지켜줬던 소꿉친구들이, 호연 같은 여자에게 흔들려 나리를 외면했다는 사실은 장혜정에게는 더 큰 배신감을 남겼다. ‘그런 짓을 하고도 결혼식에 오겠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장혜정은 속으로 다짐하며, 시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버님께서 우리 나리에게 정말 좋은 결혼 상대를 정해 주셨으니.’ 석진과 은후에 비하면 예성은 너무도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예성은 깔끔하고, 흔들림 없이 나리에게만 집중하며,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장혜정은 S 시에서 자라난 예성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고, 예성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생각에 장혜정의 마음은 더욱 단호해졌다. “절대로 그 둘을 나리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해.” 그녀는 곧 송진국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석진과 은후를 결혼식에 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S 시에
나리는 한창 본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찰나, 핸드폰에서 알림 소리가 몇 번 울렸다. 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치맛자락을 만지며 바쁘게 말했다. “예성 씨, 제 핸드폰 좀 봐줄래요?” 옆에 서 있던 예성은 검은색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는 한 손을 벽에 가볍게 기대며 나리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 입력창이 뜨자, 그녀의 이름 이니셜과 생일을 입력해 잠금을 풀었다. 잠시 후, 그는 송하선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남자의 눈빛이 살짝 깊어지더니, 곧 메시지를 나리에게 읽어주었다. “나리야, 석진이랑 은후가 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허락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예성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약간 낮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나리 씨,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결혼식에 그 사람들이 와도 괜찮겠어요?” 그는 천천히 나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여자의 뒤에 서서 옆에 있던 드레스 도우미를 잠시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예성은 직접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기 위해 몸을 낮췄다. 남자의 커다랗고 듬직한 등과 어깨는 나리의 작은 체구를 완전히 감싸 안는 듯했다. 길고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며 움직일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나리는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예성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예성 씨, 그냥... 그냥 그 사람들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리의 볼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으며 겨우 의견을 말했다. 예성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한 손은 나리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나리 씨, 날 믿어줘요. 남
호연은 전원주택 밖에서 꼬박 하루 밤낮을 무릎 꿇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탈진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석진과 은후의 얼굴이었지만,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그 초라한 월세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 밖에서는 서재철과 진춘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여기 더 있다가는 호연이가 또 뭔 짓을 할지 몰라.” “맞아. 애가 제멋대로 굴어서 아무리 붙잡아 둬도 소용없을 거야. 기왕 가려면 지금 정신없을 때 데리고 가야지!” 진춘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했다. “그래. 오늘 끝내.”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호연은 몸이 무거웠지만,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그녀는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손에 든 핸드폰만은 꽉 쥐고 있었다. ‘안 돼... 여기서 잡히면 정말 끝이야.’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면서도 마음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유석진이랑 지은후도 날 이렇게 냉대하는데, 내가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지?’ 호연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렸다. ‘송나리!!’ ‘그래... 송나리... 송나리라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 송나리는 착하잖아. 절박하게 애원하면 분명 마음이 약해질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호연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곧장 S 시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녀는 나리를 만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호연의 계획은 석진과 은후에게 금방 들켜버렸다. 두 사람은 호연의 움직임을 파악하자마자, S 시에 그녀를 막을 사람들을 배치했다. “서호연 따위가 나리를 먼저 만나게 놔둘 것 같아?” 은후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석진과 은후도 아직 나리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는데, 호연 같은 사람이 먼저 나리에게 다가가게 내
순찰 공무원의 냉정한 목소리는 호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발을 쾅 구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호연은 억울함에 눈물을 꾹 참으며, 바로 이삿짐 차량을 불러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차에 오르자,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몇 번이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어디로 가야 돼요? 빨리 좀 말해봐요.”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던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AB 아파트로 가요.” 그녀는 이전에 살던 월셋집 주인에게 다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집이 아직 임대되지 않았다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AB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호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호연의 가족들은 누더기 같은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호연의 마음속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런 모습으로 여길 오다니... 정말 창피해.’ 호연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고 있었다. “서호연!! 돈 내놔!!!”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아버지 서재철과 어머니 진춘자가 차 문 앞으로 달려왔다. 그 뒤로 할아버지 서강식, 할머니 강경수, 그리고 조카 서태민까지 전부 달려들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뻗으며 호연의 짐을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돈이 안 될 것 같은 호연의 물건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고, 값어치 있어 보이는 가방, 옷들은 급히 들고 온 커다란 비닐 포대에 집어넣었다. “놓으라고! 그거 내 거야! 만지지 마!” 호연은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짐을 붙잡았지만, 여러 사람의 손길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잡다한 물건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그 사이, 주위에는 구경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