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는 예성과 손깍지를 낀 채, 석진과 은후를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리의 시선에는 확실히 석진과 은후에게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 나리의 눈빛에 은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리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쭉 함께였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어?’ 은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나리는 은후의 그런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자의 담담한 태도에 은후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석진이 은후의 말을 막아섰다. 석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나리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눈에는 단단한 결심과 미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리야, 인정할게. 우리가 잘못했어. 그땐 정말 어리석었고,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호연이를 이용하려 했던 거야.”“우린 호연이를 좋아한 적 없어. 그저 너를 질투하게 만들고, 네 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는 호연의 최후와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덧붙여 설명했다. “호연이는 결국 S 시에 와서 네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우리는 호연이를 다시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어. H 시에 있던 집도 정리했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갔어. 호연이는 지금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어.” 석진의 설명을 듣자, 나리는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호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찾아올 수 있었지?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제공한 사람이, 감히 내 도움을 바란다고?’ 나리는 호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해질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정말로 힘든 삶을 살겠지. 하지만... 호연이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동정할 이유가 없어.’ 그러나 나리의 마음을 더욱
은후의 두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예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해? 난 인정 못 해! 나리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칠게! 해외로 가도 좋고, H 시로 돌아가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하지만 예성은 은후의 주먹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저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으로 끝냈다. 은후의 주먹은 예성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지만, 예성의 뺨엔 붉은 흔적이 남았다. “아...!” 예성은 살짝 다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찡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예성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나리는 예성의 상처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안 아파요.” 예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 예성을 보자 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 예성이 끝까지 손을 풀어주지 않자, 나리는 은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지은후! 왜 이 사람한테 손찌검한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충동적이고 화를 못 참는 사람이 됐어?” 그런 나리의 책망은 은후의 멘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구예성만 걱정하는 거냐고!?’ 방금 자기 주먹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은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성이 이렇게까지 과장하며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은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난 제대로 때리지도 않았어! 저 사람, 안 다쳤어! 송나리, 나랑 가자! 저 자식은 믿을 만한 놈이 아니야.” 그는 나리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리는 단호하게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지은후, 이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할 만한 행동이야?” 그 순간, 은후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왜 항상 나만 나쁜놈이 되는 거지?’“여긴 우리 집이야. 내
‘이대로 포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감정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들은 다 뭐가 되는 거야?’ ‘설마 만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그 남자보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거야?’ 석진과 은후의 눈엔 절대 꺼지지 않을 듯한 불꽃 같은 집념이 가득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같이 움직이자. 이후엔 각자 실력으로 해결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은후는 한영수와 주미애에게 도움을 요청해 나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을 뒤져 찾아낸 사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리가 이걸 다 태워버렸구나.’ 남은 건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단독 사진뿐이었다. 비록 아쉬웠지만, 은후는 만족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한편, 석진은 구씨 가문에 사람을 심거나, 구씨 가문의 사람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해.’ ‘결혼식까지는 이제 3일... 준비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 그 시각, 나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석진과 은후가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오자, 나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긴장했는지 무의식적으로 예성의 셔츠 소매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다. “예성 씨...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나리는 이미 석진과 은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우린 친구도 될 수 없어.’ 그녀는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은 이미 끝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걸로 끝나면 되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억지로 붙인다고 해서 거울이 다시 멀쩡해지지 않잖아.’ 예성은 나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축하 영상이 끝난 후, 화면은 나리와 예성의 실제 결혼식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신랑과 신부는 현재 S 시 근교에 있는 고풍스러운 왕족의 저택 옛터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궁궐 같은 건물은 붉은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피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현장을 감도는 축제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화면 속에서 예성은 고풍스러운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있었고, 뒤로는 붉은 보자기로 둘러싸인 전통 가마가 따랐다.그 뒤에는 전통 혼례의 격식에 따라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혼례 행렬은 마을 곳곳을 지나며, 순금으로 제작된 동전과 한지로 포장된 떡, 한과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길가에 모인 사람들은 금화와 전통 과자를 받으며 환호했다.“행복한 가정 꾸리세요!”“나리 씨, 예성 씨, 복 많이 받으세요!”...같은 시각, 혼례가 생중계되고 있던 저택 안에서는 하객들에게도 정교하게 제작된 기념품과 다양한 전통 한식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이건 차원이 다르잖아.’저택 안에 있는 모든 하객은 이 결혼식의 호화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진과 은후 역시 화면 속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예성은 왕족 저택 앞에서 부드럽게 말에서 내렸다.그는 우아하면서도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나리가 타고 있는 가마의 문을 열었다.그 안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곱게 단장한 나리가 있었다.예성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아 올렸고, 단호한 걸음으로 왕족 저택의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언제 이런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했지?’석진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서고,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신랑과 신부는 모든 하객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한옥 안으로 사라졌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완벽하고도 황홀했다.석진은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
석진은 뉴스와 온라인 매체에서 나리의 호화로운 결혼식 소식을 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현장 사진과 예성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건 분명 구예성 짓이야, 그렇지? 은후를 저렇게 만든 것도 분명 그놈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한영수와 주미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오늘이 구예성과 나리의 첫날밤이라면... 그놈도 방심하고 있겠지.’ ...구씨 저택. 신혼 첫날, 예성과 나리는 침실에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근한 이불 속, 둘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지금 서로의 존재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이 고요를 깨뜨렸다. 딩동! 딩동! 딩동! 예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석진의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것이다. 퍽! 예성은 빠르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석진의 팔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예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선 석진의 몰골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눈 밑은 검게 멍들었고, 턱엔 깔끔하게 면도하지 못한 상태로 수염이 약간 자라나 있었다. 한때의 냉철하고 완벽했던 석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구예성, 너는 나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은후를 건드렸어?!” 석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후가 병실에 누워 있어. 다리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이 모든 게 네 짓이지. 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진은 예성에게 달려들었다. 예성은 석진의 거친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한숨을 내쉬듯
전화가 끊긴 순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희미하게 들리는 생일 축하 노랫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이 자리는 유석진과 지은후가 서호연을 위해 준비한 생일 파티였다.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서호연이 블랙펄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리 언니, 같이 내려가서 놀아요!” 그녀는 마치 새끼 사슴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리를 바라보며, 청초한 얼굴 위에는 정성스레 그려진 화장이 돋보였지만, 곳곳에 묻은 크림 자국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척하면서... 참.’ 송나리는 서호연의 가식적인 웃음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못 내려가. 너희끼리 재밌게 놀아.” 나리는 차갑게 말했다. 순간, 호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언니... 혹시 저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피하시는 거죠?” ‘싫어한다고? 내가 뭐라도 했나? 자기 혼자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내 탓을 할 건 또 뭐야.’ 속으로 비웃는 나리의 눈에는 호연의 연기가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런 연기는 너희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한테나 보여줘. 나한테는 소용없어.” 단호한 말투로 내뱉은 나리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언니, 그러지 마세요!” 호연이 갑자기 손을 뻗어 문틀에 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손이 그대로 문틈에 끼였다. 아악- 여자의 하얗던 손등에 금세 퍼지는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바로 그때, 유석진과 지은후가 계단을 올라오며 이 광경을 목격했다. “호연아!” 두 남자가 동시에 달려와 호연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살폈다. 손등 위의 상처를 확인한 은후의 눈가가 붉어졌다. 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는 참지 못하고 나리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호연이를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이런 비열한 짓까지 해야 해? 송나리, 너 언제부터 이렇
나리는 문을 닫고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곳 일도 정리해야겠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는 것이 나리의 마지막 목표였다. 그녀는 거실 한쪽에 있는 큰 창가에 앉아, 남아 있는 업무를 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 나리는 이어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탓에 나리의 몸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다 끝났어.’ 아래층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나리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잠깐 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호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 왜 제 게시물에 ‘좋아요’ 안 눌렀어요?] 나리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좋아요? 갑자기 웬...? 나는 어차피 항상 누르지도 않잖아.’ 그런데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실수로 보냈어요. 화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지?’ 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호연의 메시지를 보고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호연의 SNS를 열어보기로 했다. ‘대체 뭘 올렸길래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한 거지?’ SNS를 열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사진 아홉 장이었다. 모두 석진과 은후가 호연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핑크빛 공주 드레스였다. 정교한 디자인의 드레스는 마치 핑크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석진이 보낸 커스텀 메이드 크리스털 힐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하며 사치스러운
눈앞의 두 남자를 바라보며 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일 뿐이야. 다시 찍으면 되잖아.” “깨끗이 태워버렸으니 이제 앞으로 찍으면 되지. 어차피 우리도 여행 안 간 지도 꽤 오래됐잖아.” 석진은 애써 타협하려는 듯 말했다. 은후도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호연이도 같이 데려가자. 자기는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은후의 말에, 나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서호연을 데려간다고? 참, 이제는 아예 나한테 의견도 안 묻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두 남자는 나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없던 것들이었다. “이건 또 뭐야?” 두 사람은 동시에 물었다. 나리는 박스들을 흘끗 보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나 사직했어. 다른 일 알아볼까 해서.” ‘사직했다고?’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이 일을 좋아했는지를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눈앞의 나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의문이 두 사람의 마음에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오늘 나리는 어딘가 이상해. 말투도, 표정도 평소와는 다르고...’ 묘하게 불안한 감정이 두 남자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은후는 더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찢었다. 석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호연의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진 오빠, 우리 집 갑자기 정전됐어요. 너무 무서워요... 저 어떡하죠?] 은후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했다. 석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먼저 나섰다. “호연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바로 갈게.” 석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늘 냉철하고 침착하던 그의 얼굴에 평소 보기 드문 긴장감
석진은 뉴스와 온라인 매체에서 나리의 호화로운 결혼식 소식을 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현장 사진과 예성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건 분명 구예성 짓이야, 그렇지? 은후를 저렇게 만든 것도 분명 그놈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한영수와 주미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오늘이 구예성과 나리의 첫날밤이라면... 그놈도 방심하고 있겠지.’ ...구씨 저택. 신혼 첫날, 예성과 나리는 침실에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근한 이불 속, 둘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지금 서로의 존재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이 고요를 깨뜨렸다. 딩동! 딩동! 딩동! 예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석진의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것이다. 퍽! 예성은 빠르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석진의 팔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예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선 석진의 몰골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눈 밑은 검게 멍들었고, 턱엔 깔끔하게 면도하지 못한 상태로 수염이 약간 자라나 있었다. 한때의 냉철하고 완벽했던 석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구예성, 너는 나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은후를 건드렸어?!” 석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후가 병실에 누워 있어. 다리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이 모든 게 네 짓이지. 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진은 예성에게 달려들었다. 예성은 석진의 거친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한숨을 내쉬듯
축하 영상이 끝난 후, 화면은 나리와 예성의 실제 결혼식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신랑과 신부는 현재 S 시 근교에 있는 고풍스러운 왕족의 저택 옛터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궁궐 같은 건물은 붉은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피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현장을 감도는 축제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화면 속에서 예성은 고풍스러운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있었고, 뒤로는 붉은 보자기로 둘러싸인 전통 가마가 따랐다.그 뒤에는 전통 혼례의 격식에 따라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혼례 행렬은 마을 곳곳을 지나며, 순금으로 제작된 동전과 한지로 포장된 떡, 한과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길가에 모인 사람들은 금화와 전통 과자를 받으며 환호했다.“행복한 가정 꾸리세요!”“나리 씨, 예성 씨, 복 많이 받으세요!”...같은 시각, 혼례가 생중계되고 있던 저택 안에서는 하객들에게도 정교하게 제작된 기념품과 다양한 전통 한식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이건 차원이 다르잖아.’저택 안에 있는 모든 하객은 이 결혼식의 호화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진과 은후 역시 화면 속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예성은 왕족 저택 앞에서 부드럽게 말에서 내렸다.그는 우아하면서도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나리가 타고 있는 가마의 문을 열었다.그 안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곱게 단장한 나리가 있었다.예성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아 올렸고, 단호한 걸음으로 왕족 저택의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언제 이런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했지?’석진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서고,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신랑과 신부는 모든 하객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한옥 안으로 사라졌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완벽하고도 황홀했다.석진은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
‘이대로 포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감정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들은 다 뭐가 되는 거야?’ ‘설마 만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그 남자보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거야?’ 석진과 은후의 눈엔 절대 꺼지지 않을 듯한 불꽃 같은 집념이 가득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같이 움직이자. 이후엔 각자 실력으로 해결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은후는 한영수와 주미애에게 도움을 요청해 나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을 뒤져 찾아낸 사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리가 이걸 다 태워버렸구나.’ 남은 건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단독 사진뿐이었다. 비록 아쉬웠지만, 은후는 만족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한편, 석진은 구씨 가문에 사람을 심거나, 구씨 가문의 사람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해.’ ‘결혼식까지는 이제 3일... 준비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 그 시각, 나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석진과 은후가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오자, 나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긴장했는지 무의식적으로 예성의 셔츠 소매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다. “예성 씨...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나리는 이미 석진과 은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우린 친구도 될 수 없어.’ 그녀는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은 이미 끝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걸로 끝나면 되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억지로 붙인다고 해서 거울이 다시 멀쩡해지지 않잖아.’ 예성은 나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후의 두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예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해? 난 인정 못 해! 나리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칠게! 해외로 가도 좋고, H 시로 돌아가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하지만 예성은 은후의 주먹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저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으로 끝냈다. 은후의 주먹은 예성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지만, 예성의 뺨엔 붉은 흔적이 남았다. “아...!” 예성은 살짝 다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찡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예성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나리는 예성의 상처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안 아파요.” 예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 예성을 보자 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 예성이 끝까지 손을 풀어주지 않자, 나리는 은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지은후! 왜 이 사람한테 손찌검한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충동적이고 화를 못 참는 사람이 됐어?” 그런 나리의 책망은 은후의 멘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구예성만 걱정하는 거냐고!?’ 방금 자기 주먹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은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성이 이렇게까지 과장하며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은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난 제대로 때리지도 않았어! 저 사람, 안 다쳤어! 송나리, 나랑 가자! 저 자식은 믿을 만한 놈이 아니야.” 그는 나리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리는 단호하게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지은후, 이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할 만한 행동이야?” 그 순간, 은후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왜 항상 나만 나쁜놈이 되는 거지?’“여긴 우리 집이야. 내
나리는 예성과 손깍지를 낀 채, 석진과 은후를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리의 시선에는 확실히 석진과 은후에게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 나리의 눈빛에 은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리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쭉 함께였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어?’ 은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나리는 은후의 그런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자의 담담한 태도에 은후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석진이 은후의 말을 막아섰다. 석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나리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눈에는 단단한 결심과 미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리야, 인정할게. 우리가 잘못했어. 그땐 정말 어리석었고,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호연이를 이용하려 했던 거야.”“우린 호연이를 좋아한 적 없어. 그저 너를 질투하게 만들고, 네 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는 호연의 최후와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덧붙여 설명했다. “호연이는 결국 S 시에 와서 네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우리는 호연이를 다시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어. H 시에 있던 집도 정리했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갔어. 호연이는 지금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어.” 석진의 설명을 듣자, 나리는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호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찾아올 수 있었지?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제공한 사람이, 감히 내 도움을 바란다고?’ 나리는 호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해질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정말로 힘든 삶을 살겠지. 하지만... 호연이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동정할 이유가 없어.’ 그러나 나리의 마음을 더욱
예성은 일부러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석진과 지은후에 대한 감시를 잠시 느슨하게 해. 하지만 경계를 푸는 건 아니고. 오히려 두 사람이 움직일 틈을 주고, 거기에 더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해.” 부하들은 보스의 명령을 받자마자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예성은 이를 지켜보며,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차분히 준비를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예성은 일부러 석진과 은후가 S 시로 온다는 소식을 송진국과 장혜정에게 흘렸다. “뭐라고? 그 둘이 감히 나리 결혼식에 오겠다고?” 장혜정은 이 말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리를 그렇게 괴롭힌 사람들이 결혼식에 온다고? 어림도 없어!’ 그녀는 과거에 석진과 은후를 멋지고 유능한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둘을 마음속에서 사윗감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리의 목숨을 걸고 장난처럼 다룬 둘의 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다. 특히, 장혜정은 호연이 나리를 해치려 했을 때 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항상 딸의 곁을 지켜줬던 소꿉친구들이, 호연 같은 여자에게 흔들려 나리를 외면했다는 사실은 장혜정에게는 더 큰 배신감을 남겼다. ‘그런 짓을 하고도 결혼식에 오겠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장혜정은 속으로 다짐하며, 시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버님께서 우리 나리에게 정말 좋은 결혼 상대를 정해 주셨으니.’ 석진과 은후에 비하면 예성은 너무도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예성은 깔끔하고, 흔들림 없이 나리에게만 집중하며,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장혜정은 S 시에서 자라난 예성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고, 예성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생각에 장혜정의 마음은 더욱 단호해졌다. “절대로 그 둘을 나리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해.” 그녀는 곧 송진국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석진과 은후를 결혼식에 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S 시에
나리는 한창 본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찰나, 핸드폰에서 알림 소리가 몇 번 울렸다. 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치맛자락을 만지며 바쁘게 말했다. “예성 씨, 제 핸드폰 좀 봐줄래요?” 옆에 서 있던 예성은 검은색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는 한 손을 벽에 가볍게 기대며 나리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 입력창이 뜨자, 그녀의 이름 이니셜과 생일을 입력해 잠금을 풀었다. 잠시 후, 그는 송하선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남자의 눈빛이 살짝 깊어지더니, 곧 메시지를 나리에게 읽어주었다. “나리야, 석진이랑 은후가 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허락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예성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약간 낮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나리 씨,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결혼식에 그 사람들이 와도 괜찮겠어요?” 그는 천천히 나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여자의 뒤에 서서 옆에 있던 드레스 도우미를 잠시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예성은 직접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기 위해 몸을 낮췄다. 남자의 커다랗고 듬직한 등과 어깨는 나리의 작은 체구를 완전히 감싸 안는 듯했다. 길고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며 움직일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나리는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예성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예성 씨, 그냥... 그냥 그 사람들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리의 볼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으며 겨우 의견을 말했다. 예성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한 손은 나리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나리 씨, 날 믿어줘요. 남
호연은 전원주택 밖에서 꼬박 하루 밤낮을 무릎 꿇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탈진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석진과 은후의 얼굴이었지만,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그 초라한 월세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 밖에서는 서재철과 진춘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여기 더 있다가는 호연이가 또 뭔 짓을 할지 몰라.” “맞아. 애가 제멋대로 굴어서 아무리 붙잡아 둬도 소용없을 거야. 기왕 가려면 지금 정신없을 때 데리고 가야지!” 진춘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했다. “그래. 오늘 끝내.”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호연은 몸이 무거웠지만,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그녀는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손에 든 핸드폰만은 꽉 쥐고 있었다. ‘안 돼... 여기서 잡히면 정말 끝이야.’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면서도 마음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유석진이랑 지은후도 날 이렇게 냉대하는데, 내가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지?’ 호연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렸다. ‘송나리!!’ ‘그래... 송나리... 송나리라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 송나리는 착하잖아. 절박하게 애원하면 분명 마음이 약해질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호연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곧장 S 시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녀는 나리를 만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호연의 계획은 석진과 은후에게 금방 들켜버렸다. 두 사람은 호연의 움직임을 파악하자마자, S 시에 그녀를 막을 사람들을 배치했다. “서호연 따위가 나리를 먼저 만나게 놔둘 것 같아?” 은후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석진과 은후도 아직 나리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는데, 호연 같은 사람이 먼저 나리에게 다가가게 내
순찰 공무원의 냉정한 목소리는 호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발을 쾅 구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호연은 억울함에 눈물을 꾹 참으며, 바로 이삿짐 차량을 불러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차에 오르자,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몇 번이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어디로 가야 돼요? 빨리 좀 말해봐요.”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던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AB 아파트로 가요.” 그녀는 이전에 살던 월셋집 주인에게 다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집이 아직 임대되지 않았다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AB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호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호연의 가족들은 누더기 같은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호연의 마음속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런 모습으로 여길 오다니... 정말 창피해.’ 호연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고 있었다. “서호연!! 돈 내놔!!!”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아버지 서재철과 어머니 진춘자가 차 문 앞으로 달려왔다. 그 뒤로 할아버지 서강식, 할머니 강경수, 그리고 조카 서태민까지 전부 달려들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뻗으며 호연의 짐을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돈이 안 될 것 같은 호연의 물건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고, 값어치 있어 보이는 가방, 옷들은 급히 들고 온 커다란 비닐 포대에 집어넣었다. “놓으라고! 그거 내 거야! 만지지 마!” 호연은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짐을 붙잡았지만, 여러 사람의 손길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잡다한 물건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그 사이, 주위에는 구경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