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5화

작가: 운명의결
나리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어느새 끊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한 친구가 결혼해. 왜, 너희도 같이 갈 생각 있어?”

요즘 들어 석진과 은후는 나리에게 점점 더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S 시로 돌아가고 나면 이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앞으로 우리 사이는 친구라고 부르기도 어렵겠지.’

그렇다면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결혼하러 간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 없잖아.’

나리의 말을 들은 석진과 은후는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쳤다.

“아니, 난 못 가. 회사 일이 바빠서.”

석진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차가운 표정으로 서류를 챙겨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은후 역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호연이가 너 때문에 다쳤잖아. 피까지 났는데, 네가 직접 가서 사과하는 게 맞아. 안 그러면, 너랑 같이 결혼식 같은 데 갈 생각 없어.”

그는 말끝을 차갑게 맺고, 휙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끝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더는 말싸움을 할 힘도 없다는 듯 나리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리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다.

거실로 나서던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거실 한복판에 화병들이 열 개도 넘게 놓여 있었다.

화병마다 신선한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은은한 꽃향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쾌한 향기였지만, 나리의 얼굴은 그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

‘꽃가루...?’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거실을 휘감으며 나리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리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야... 대체 왜 여기에 꽃이...’

그녀는 천식 환자였고,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점점 더 심해졌고, 나리의 가슴은 들썩거렸다.

“약... 약...”

나리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으며 약을 찾으러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약이 들어 있는 약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제발...”

나리는 손을 떨며 약 보관함을 만졌지만, 손끝에서 점점 힘이 빠지며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약장 옆에 놓인 화병을 쳤고, 화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꽃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꽃병 속의 물과 꽃들은 바닥에 흩어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깨지는 소리를 들은 석진과 은후는 다급히 거실로 달려왔다.

바닥을 본 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과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나리의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바닥의 난장판에만 신경을 썼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석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날아왔다.

나리는 간신히 약을 손에 넣었지만, 지금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둘의 말을 들을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은후는 더 다급하게 반응했다.

그는 나리를 밀쳐내듯 옆으로 제치고는, 급히 바닥에 흩어진 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꽃이 다 망가졌잖아.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나를 밀었어...?’

은후의 거친 손길에 나리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그녀의 무릎은 바로 옆에 있는 가구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고, 그 자리에서 피부가 까지며 붉게 부어올랐다.

‘너무 아파...’

나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릎을 잡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점점 심해지는 호흡곤란이었다.

두 손에 쥔 약병이 계속해서 떨렸고, 그녀의 숨소리는 점점 더 가빠졌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결국, 나리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스프레이를 찾아내었다.

그녀는 구원의 희망처럼 스프레이를 입 가까이 가져가 뿌리기 시작했다.

약이 기도로 들어가자, 불편하고 건조했던 나리의 기도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있게 된 그녀는 겨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다리를 절뚝거리며 방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나리는 힘없이 주저앉아 한 손으로 무릎의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석진과 은후는 나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꽃과 깨진 꽃병을 수습하느라 여전히 분주했다.

‘이제는 나한테 관심조차 없네. 내가 이렇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쳤는데도...’

나리는 속으로 비웃었다.

‘꽃이 그렇게 중요해? 나보다? 이게 진짜 너희들이 생각하는 나와의 관계였던 거야?’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리의 가슴속 깊은 곳이 서늘해졌다.

관련 챕터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6화

    나리는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벽에 기대며 손에는 약을 꼭 쥔 채, 얼굴을 감싸 꽃가루가 더 들어오지 않도록 애썼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녀의 귓가에 석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대체 왜 이렇게 호연이에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이 꽃들, 호연이가 우리 주려고 애써 준비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다 망가뜨리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 바로 이어 은후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리, 요즘 너 정말 이상해졌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그 말들을 들은 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숨을 고를수록 몸이 떨리고,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이 그녀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예민하다고? 변했다고? 정말 내가 변한 거 맞아? 너희가 변한 거 아니고?’ 수없이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리의 입에서 나온 건 단 한 마디였다. “내가 변했다고? 아니, 변한 건 너희야.”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천식이 있다는 거, 그리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너희 정말 모르는 거야?”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석진과 은후의 귀를 때렸다. ‘그런데도 모른척한다고?’ 나리의 말은 마치 커다란 천둥처럼 둘의 귀를 때렸다. 예전의 두 사람은 나리를 가장 아꼈던 사람이었다. 나리가 천식으로 쓰러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잡고 눈물까지 보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둘이었다.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나리 곁을 서성이고, 아무리 선생님이 불러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너희들이 그것마저 잊어버렸다고?’ 나리는 차갑게 떨리는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석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면서 눈에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교차했고, 얼굴빛은 점점 창백해졌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7화

    집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이제야 조금 편해졌네.’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문득 일정표를 확인한 나리는, 집을 정리하고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는 날이 마침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는 날과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좋네. 굳이 석진이나 은후한테 딱히 뭐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겠어.’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고 나자 나리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정말 끝나가는구나.’ 하지만 아직 끝내야 할 마지막 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에 들러 시간을 들여 고심 끝에 마사지기와 고급 보석 팔찌를 골랐다. 그리고 송하선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송하선은 두 팔을 벌려 나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리야, 네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정말 섭섭하고 허전하다. 네가 여기 H 시에 있는 동안, 난 너를 진짜 내 딸처럼 여겼는데... 네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지내겠니?” 송하선은 눈물을 훔치며, 나리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리의 마음도 찡했다.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가야 하는 걸 어떡해.’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송하선을 위로했다. “고모, 나도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비행기도 있고, KTX도 있으니, 명절 때 금방 다시 볼 수 있어요.” 송하선은 나리의 말을 듣고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더니 조카딸을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얘야, 착하게 여기 앉아 있어. 네가 간다고 해서 며칠 휴가를 냈어. 며칠 동안 내 집에서 지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잔뜩 만들어줄게.” 나리가 미처 거절할 틈도 없이 송하선은 주방으로 가서 분주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이 그녀 앞에 놓였다. 바쁜 와중에도 웃음 짓는 송하선을 보며, 나리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역시 고모는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분이에요. 며칠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8화

    나리가 돌아서자, 석진과 은후는 그녀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석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 정리는 네가 안 해도 돼. 너무 많아서 힘들잖아. 나중에 내가 집에 기사 불러서 새집으로 같이 옮기자.” 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혼자 하기엔 힘들 거야. 우리와 같이하면 돼.” 둘의 배려 넘치는 말에, 나리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어릴 적 자신만 바라보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땐 모든 게 참 단순했는데.’ 그 시절, 서로 웃고 떠들던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시절의 약속은, 결국 다 헛된 말뿐이었나.’ 나리는 이내 시선을 돌려 호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괜찮아. 짐은 내가 직접 정리할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두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걸어 나갔다. ...집에 돌아온 나리는 남은 짐을 정리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정리를 끝낸 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호연이었다. 통화를 받자마자, 호연의 달콤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언니, 오늘 밤에 나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 집에 다녀왔어요. 오빠들의 부모님이 저한테 정말 잘해 주시더라고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이 섞여 있었다. [근데 있잖아요, 오빠들 부모님이 오늘 저한테 각각 집안의 가보를 꺼내 주셨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혹시 제가 이제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닐까요?]호연의 말을 듣는 순간, 나리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나리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호연아, 너랑 그 두 사람 사이의 일에는 나는 관심 없어. 굳이 내게 이런 말 전하지 않아도 돼.” 나리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9화

    말이 끝나자, 석진과 은후는 호연을 데리고 나리가 앉은 테이블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호연에게 음식을 챙겨주며, 호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배려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아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설아는 손에 든 포크로 스테이크를 쿡쿡 찔러대더니, 결국 고기를 으깨버렸다. 하지만 나리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지.’ 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연과 함께 레스토랑을 떠났다. 나리는 설아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석진과 은후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든지 말든지, 이제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마지막 짐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니까, 이제야 돌아왔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 모르는 건, 그 새집엔 내가 없다는 거지.’ 밖에서는 짐을 옮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분주하네. 나와 상관없지만.’ 나리는 무심하게 자신의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바로 그때, 장혜정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받자,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비행기 도착시간 몇 시야? 엄마가 마중 나갈게.]나리는 잠시 앱을 열어 항공권 정보를 확인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 저녁 7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그 순간, 방문이 불쑥 열렸다. 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석진과 은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후가 무심하게 물었다. “누구랑 통화하고 있어?” 나리는 바로 전화를 끊고 차갑게 대답했다. “아무도 아니야.”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두 사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10화

    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다 끝났어.’ 그녀는 석진과 은후의 반응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유로움은 처음이네.’ ...한편, H 시 최고급 전원주택 단지에 위치한 한 저택은 무거운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석진과 은후는 호연과 함께 이 집에 도착한 지 이미 세 시간이 지났지만, 나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 사람의 짐은 모두 거실에 정리되어 있었지만, 나리의 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진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대체 뭐지?’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은후는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고,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은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왜... 왜 받지 않는 거야?’ 그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호연은 두 사람이 느끼는 불안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설마 송나리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나리 언니가 아직 짐을 다 못 챙겼나 봐요. 우리부터 먼저 준비 시작해요. 어차피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요. 언니가 설마 오늘 약속 잊기야 하겠어요?” 석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그냥 기다리면 괜찮아질까... 아니, 뭔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로 초조하게 손가락을 매만졌다. 은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소파 옆에 걸쳐져 있던 외투를 대충 걸치고, 빠르게 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리...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내가 확인하러 갔다 올게.” 은후의 행동에 석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주위에 있던 직원들에게 간단히 지시를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11화

    은후는 뒤늦게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간 나리가 보여준 모든 이상한 행동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랬구나... 나리는 그동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석진 역시 아무 말 없이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마 한 달 전쯤부터 이미 계획했던 걸지도 몰라.’ 그는 자신도 인정하기 힘든 진실을 직감했다. ‘호연이 때문인가? 정말 그게 이유였던 걸까?’ 그 순간, 마침 호연의 전화가 울렸다. 은후는 잠시 망설이며 전화를 받았다. [은후 오빠, 석진 오빠! 저 지금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 오늘 모여서 축하하기로 했잖아요. 근데 오빠들은 어디예요?]호연의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지만, 은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쥔 남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은후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듯 말했다. “호연아, 오늘은 그냥... 모임 취소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리가 없는데... 축하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은 전망도 좋고, 구조도 아주 훌륭합니다...” 공인중개사가 한 남자에게 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공인중개사는 열심히 집의 장점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공인중개사는 석진과 은후를 보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 대표님? 은후 도련님? 여기 계셨네요?” 공인중개사는 의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이 집은 이미 매각이 완료된 걸로 알고 있는데, 두 분은 왜 여기 계신 거죠?” 공인중개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 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짐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확인하려는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12화

    호연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후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집은 여전히 조용하고 쓸쓸했다. ‘어디에 있든...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밤, 차가운 공기가 점점 깊어지자, 석진과 은후는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여기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새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깜빡 졸고 있는 호연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에는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지만, 석진과 은후는 전혀 따뜻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은후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누구를 챙길 마음의 여유도 없어.’ 석진은 호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향하면서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시간 됐으면 자. 앞으로 우리 기다리지 말고 그냥 쉬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호연은 소파에 웅크린 채 두 사람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왜 이러는 거지? 석진 오빠도, 은후 오빠도... 예전엔 그렇게 나한테 다정했는데.’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 무릎을 감싸며 생각했다. ‘진짜 송나리가 떠난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서성였고, 석진과 은후의 방 앞을 오가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래. 송나리가 떠난 건 나 때문은 아니야.’ 호연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마음을 다잡고 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빠른 속도로 그동안 나리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나리를 도발했던 모든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송나리는 스스로 떠난 거야. 절대로 내가 밀어낸 게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13화

    은후가 다가오자, 석진은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왔어? 내가 S 시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구했어. 둘이 가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은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해. 더 기다리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은후는 페달을 밟으며 차를 도로 위로 몰아붙였다. ‘속도위반 따위 상관없어.’ 그의 차는 마치 레이싱카처럼 질주했고, 석진은 옆자리에서 조용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무런 짐도 준비하지 않은 채, 단 하나의 목표만을 안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서둘렀다. ‘나리를 찾아야 해. 무조건 찾아야 해.’ 두 사람의 마음은 다급했고,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둘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한편, S 시에 도착한 나리 역시 편히 잠들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자, 그녀는 일찍 일어나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그래, 중요한 날이지.’ 오늘은 송나리와 구예성이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구예성과 나리가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니,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 내 결혼 상대라니.’ 나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구예성이라는 이름은 어릴 적부터 송씨 가문의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는 늘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로 언급되곤 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항상 칭찬하던 그 사람.’ 송진국과 장혜정이 전화로 가끔 예성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예성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었다. 나리의 기억 속 예성은 어릴 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가끔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꼬집던 소년이었다. 나리는 당시의 예성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결혼이라니...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 거지?’ 결혼이라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

최신 챕터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9화

    석진은 뉴스와 온라인 매체에서 나리의 호화로운 결혼식 소식을 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현장 사진과 예성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건 분명 구예성 짓이야, 그렇지? 은후를 저렇게 만든 것도 분명 그놈이야!’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한영수와 주미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오늘이 구예성과 나리의 첫날밤이라면... 그놈도 방심하고 있겠지.’ ...구씨 저택. 신혼 첫날, 예성과 나리는 침실에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포근한 이불 속, 둘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지금 서로의 존재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이 고요를 깨뜨렸다. 딩동! 딩동! 딩동! 예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그는 대충 잠옷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석진의 주먹이 매서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것이다. 퍽! 예성은 빠르게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석진의 팔을 단단히 잡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예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선 석진의 몰골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눈 밑은 검게 멍들었고, 턱엔 깔끔하게 면도하지 못한 상태로 수염이 약간 자라나 있었다. 한때의 냉철하고 완벽했던 석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구예성, 너는 나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은후를 건드렸어?!” 석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후가 병실에 누워 있어. 다리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이 모든 게 네 짓이지. 네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진은 예성에게 달려들었다. 예성은 석진의 거친 공격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한숨을 내쉬듯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8화

    축하 영상이 끝난 후, 화면은 나리와 예성의 실제 결혼식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신랑과 신부는 현재 S 시 근교에 있는 고풍스러운 왕족의 저택 옛터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궁궐 같은 건물은 붉은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피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현장을 감도는 축제의 분위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화면 속에서 예성은 고풍스러운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있었고, 뒤로는 붉은 보자기로 둘러싸인 전통 가마가 따랐다.그 뒤에는 전통 혼례의 격식에 따라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혼례 행렬은 마을 곳곳을 지나며, 순금으로 제작된 동전과 한지로 포장된 떡, 한과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길가에 모인 사람들은 금화와 전통 과자를 받으며 환호했다.“행복한 가정 꾸리세요!”“나리 씨, 예성 씨, 복 많이 받으세요!”...같은 시각, 혼례가 생중계되고 있던 저택 안에서는 하객들에게도 정교하게 제작된 기념품과 다양한 전통 한식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이건 차원이 다르잖아.’저택 안에 있는 모든 하객은 이 결혼식의 호화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석진과 은후 역시 화면 속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예성은 왕족 저택 앞에서 부드럽게 말에서 내렸다.그는 우아하면서도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나리가 타고 있는 가마의 문을 열었다.그 안에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곱게 단장한 나리가 있었다.예성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아 올렸고, 단호한 걸음으로 왕족 저택의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언제 이런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했지?’석진의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서고,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신랑과 신부는 모든 하객과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한옥 안으로 사라졌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완벽하고도 황홀했다.석진은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7화

    ‘이대로 포기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감정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들은 다 뭐가 되는 거야?’ ‘설마 만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그 남자보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거야?’ 석진과 은후의 눈엔 절대 꺼지지 않을 듯한 불꽃 같은 집념이 가득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같이 움직이자. 이후엔 각자 실력으로 해결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은후는 한영수와 주미애에게 도움을 요청해 나리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을 뒤져 찾아낸 사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리가 이걸 다 태워버렸구나.’ 남은 건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단독 사진뿐이었다. 비록 아쉬웠지만, 은후는 만족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한편, 석진은 구씨 가문에 사람을 심거나, 구씨 가문의 사람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시간이 있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해.’ ‘결혼식까지는 이제 3일... 준비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아.’ 그 시각, 나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석진과 은후가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오자, 나리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긴장했는지 무의식적으로 예성의 셔츠 소매가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다. “예성 씨...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더 이상 그 두 사람과 얽히고 싶지 않아요.” 나리는 이미 석진과 은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우린 친구도 될 수 없어.’ 그녀는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은 이미 끝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던 추억은 그걸로 끝나면 되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억지로 붙인다고 해서 거울이 다시 멀쩡해지지 않잖아.’ 예성은 나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6화

    은후의 두 눈이 충혈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예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해? 난 인정 못 해! 나리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칠게! 해외로 가도 좋고, H 시로 돌아가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하지만 예성은 은후의 주먹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저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으로 끝냈다. 은후의 주먹은 예성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지만, 예성의 뺨엔 붉은 흔적이 남았다. “아...!” 예성은 살짝 다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찡그려졌지만, 그럼에도 예성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나리는 예성의 상처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려 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안 아파요.” 예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런 예성을 보자 나리는 더욱 초조해졌다. 예성이 끝까지 손을 풀어주지 않자, 나리는 은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지은후! 왜 이 사람한테 손찌검한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충동적이고 화를 못 참는 사람이 됐어?” 그런 나리의 책망은 은후의 멘탈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내가 한 말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거야? 구예성만 걱정하는 거냐고!?’ 방금 자기 주먹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은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성이 이렇게까지 과장하며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은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난 제대로 때리지도 않았어! 저 사람, 안 다쳤어! 송나리, 나랑 가자! 저 자식은 믿을 만한 놈이 아니야.” 그는 나리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리는 단호하게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지은후, 이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할 만한 행동이야?” 그 순간, 은후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왜 항상 나만 나쁜놈이 되는 거지?’“여긴 우리 집이야. 내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5화

    나리는 예성과 손깍지를 낀 채, 석진과 은후를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리의 시선에는 확실히 석진과 은후에게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런 나리의 눈빛에 은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리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쭉 함께였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어?’ 은후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울함을 삼켰다. 하지만 나리는 은후의 그런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해.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자의 담담한 태도에 은후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석진이 은후의 말을 막아섰다. 석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나리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눈에는 단단한 결심과 미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리야, 인정할게. 우리가 잘못했어. 그땐 정말 어리석었고,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호연이를 이용하려 했던 거야.”“우린 호연이를 좋아한 적 없어. 그저 너를 질투하게 만들고, 네 마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는 호연의 최후와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덧붙여 설명했다. “호연이는 결국 S 시에 와서 네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우리는 호연이를 다시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어. H 시에 있던 집도 정리했고, 지금은 시골로 내려갔어. 호연이는 지금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어.” 석진의 설명을 듣자, 나리는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호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찾아올 수 있었지?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를 제공한 사람이, 감히 내 도움을 바란다고?’ 나리는 호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해질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정말로 힘든 삶을 살겠지. 하지만... 호연이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동정할 이유가 없어.’ 그러나 나리의 마음을 더욱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4화

    예성은 일부러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석진과 지은후에 대한 감시를 잠시 느슨하게 해. 하지만 경계를 푸는 건 아니고. 오히려 두 사람이 움직일 틈을 주고, 거기에 더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해.” 부하들은 보스의 명령을 받자마자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예성은 이를 지켜보며,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이 차분히 준비를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예성은 일부러 석진과 은후가 S 시로 온다는 소식을 송진국과 장혜정에게 흘렸다. “뭐라고? 그 둘이 감히 나리 결혼식에 오겠다고?” 장혜정은 이 말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리를 그렇게 괴롭힌 사람들이 결혼식에 온다고? 어림도 없어!’ 그녀는 과거에 석진과 은후를 멋지고 유능한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둘을 마음속에서 사윗감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리의 목숨을 걸고 장난처럼 다룬 둘의 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다. 특히, 장혜정은 호연이 나리를 해치려 했을 때 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항상 딸의 곁을 지켜줬던 소꿉친구들이, 호연 같은 여자에게 흔들려 나리를 외면했다는 사실은 장혜정에게는 더 큰 배신감을 남겼다. ‘그런 짓을 하고도 결혼식에 오겠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장혜정은 속으로 다짐하며, 시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버님께서 우리 나리에게 정말 좋은 결혼 상대를 정해 주셨으니.’ 석진과 은후에 비하면 예성은 너무도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예성은 깔끔하고, 흔들림 없이 나리에게만 집중하며,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장혜정은 S 시에서 자라난 예성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고, 예성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생각에 장혜정의 마음은 더욱 단호해졌다. “절대로 그 둘을 나리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해.” 그녀는 곧 송진국과 함께 주변 사람들에게 석진과 은후를 결혼식에 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S 시에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3화

    나리는 한창 본식을 위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찰나, 핸드폰에서 알림 소리가 몇 번 울렸다. 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치맛자락을 만지며 바쁘게 말했다. “예성 씨, 제 핸드폰 좀 봐줄래요?” 옆에 서 있던 예성은 검은색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는 한 손을 벽에 가볍게 기대며 나리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 입력창이 뜨자, 그녀의 이름 이니셜과 생일을 입력해 잠금을 풀었다. 잠시 후, 그는 송하선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남자의 눈빛이 살짝 깊어지더니, 곧 메시지를 나리에게 읽어주었다. “나리야, 석진이랑 은후가 네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허락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예성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약간 낮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나리 씨,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결혼식에 그 사람들이 와도 괜찮겠어요?” 그는 천천히 나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여자의 뒤에 서서 옆에 있던 드레스 도우미를 잠시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예성은 직접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기 위해 몸을 낮췄다. 남자의 커다랗고 듬직한 등과 어깨는 나리의 작은 체구를 완전히 감싸 안는 듯했다. 길고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며 움직일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나리는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예성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예성 씨, 그냥... 그냥 그 사람들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리의 볼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으며 겨우 의견을 말했다. 예성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한 손은 나리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나리 씨, 날 믿어줘요. 남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2화

    호연은 전원주택 밖에서 꼬박 하루 밤낮을 무릎 꿇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탈진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석진과 은후의 얼굴이었지만,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그 초라한 월세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 밖에서는 서재철과 진춘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여기 더 있다가는 호연이가 또 뭔 짓을 할지 몰라.” “맞아. 애가 제멋대로 굴어서 아무리 붙잡아 둬도 소용없을 거야. 기왕 가려면 지금 정신없을 때 데리고 가야지!” 진춘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답했다. “그래. 오늘 끝내.” 잠시 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호연은 몸이 무거웠지만,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그녀는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손에 든 핸드폰만은 꽉 쥐고 있었다. ‘안 돼... 여기서 잡히면 정말 끝이야.’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면서도 마음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유석진이랑 지은후도 날 이렇게 냉대하는데, 내가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지?’ 호연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올렸다. ‘송나리!!’ ‘그래... 송나리... 송나리라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 송나리는 착하잖아. 절박하게 애원하면 분명 마음이 약해질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호연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곧장 S 시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녀는 나리를 만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호연의 계획은 석진과 은후에게 금방 들켜버렸다. 두 사람은 호연의 움직임을 파악하자마자, S 시에 그녀를 막을 사람들을 배치했다. “서호연 따위가 나리를 먼저 만나게 놔둘 것 같아?” 은후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석진과 은후도 아직 나리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는데, 호연 같은 사람이 먼저 나리에게 다가가게 내

  • 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제21화

    순찰 공무원의 냉정한 목소리는 호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발을 쾅 구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호연은 억울함에 눈물을 꾹 참으며, 바로 이삿짐 차량을 불러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차에 오르자,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몇 번이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어디로 가야 돼요? 빨리 좀 말해봐요.”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던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AB 아파트로 가요.” 그녀는 이전에 살던 월셋집 주인에게 다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집이 아직 임대되지 않았다는 답을 받을 수 있었다. AB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호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호연의 가족들은 누더기 같은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호연의 마음속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런 모습으로 여길 오다니... 정말 창피해.’ 호연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고 있었다. “서호연!! 돈 내놔!!!”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아버지 서재철과 어머니 진춘자가 차 문 앞으로 달려왔다. 그 뒤로 할아버지 서강식, 할머니 강경수, 그리고 조카 서태민까지 전부 달려들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뻗으며 호연의 짐을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돈이 안 될 것 같은 호연의 물건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쳤고, 값어치 있어 보이는 가방, 옷들은 급히 들고 온 커다란 비닐 포대에 집어넣었다. “놓으라고! 그거 내 거야! 만지지 마!” 호연은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짐을 붙잡았지만, 여러 사람의 손길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잡다한 물건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그 사이, 주위에는 구경꾼들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