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9 챕터

제11화

은후는 뒤늦게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간 나리가 보여준 모든 이상한 행동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랬구나... 나리는 그동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석진 역시 아무 말 없이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아마 한 달 전쯤부터 이미 계획했던 걸지도 몰라.’ 그는 자신도 인정하기 힘든 진실을 직감했다. ‘호연이 때문인가? 정말 그게 이유였던 걸까?’ 그 순간, 마침 호연의 전화가 울렸다. 은후는 잠시 망설이며 전화를 받았다. [은후 오빠, 석진 오빠! 저 지금 레스토랑에 도착했어요. 오늘 모여서 축하하기로 했잖아요. 근데 오빠들은 어디예요?]호연의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지만, 은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쥔 남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은후는 겨우 목소리를 짜내듯 말했다. “호연아, 오늘은 그냥... 모임 취소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리가 없는데... 축하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은 전망도 좋고, 구조도 아주 훌륭합니다...” 공인중개사가 한 남자에게 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공인중개사는 열심히 집의 장점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공인중개사는 석진과 은후를 보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 대표님? 은후 도련님? 여기 계셨네요?” 공인중개사는 의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이 집은 이미 매각이 완료된 걸로 알고 있는데, 두 분은 왜 여기 계신 거죠?” 공인중개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집 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짐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확인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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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호연은 전화기를 손에 쥔 채 수없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후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집은 여전히 조용하고 쓸쓸했다. ‘어디에 있든...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밤, 차가운 공기가 점점 깊어지자, 석진과 은후는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여기 있어 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두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새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깜빡 졸고 있는 호연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에는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지만, 석진과 은후는 전혀 따뜻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은후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누구를 챙길 마음의 여유도 없어.’ 석진은 호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향하면서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시간 됐으면 자. 앞으로 우리 기다리지 말고 그냥 쉬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호연은 소파에 웅크린 채 두 사람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왜 이러는 거지? 석진 오빠도, 은후 오빠도... 예전엔 그렇게 나한테 다정했는데.’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 무릎을 감싸며 생각했다. ‘진짜 송나리가 떠난 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안을 서성였고, 석진과 은후의 방 앞을 오가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래. 송나리가 떠난 건 나 때문은 아니야.’ 호연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마음을 다잡고 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고, 빠른 속도로 그동안 나리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나리를 도발했던 모든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송나리는 스스로 떠난 거야. 절대로 내가 밀어낸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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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은후가 다가오자, 석진은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왔어? 내가 S 시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구했어. 둘이 가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은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해. 더 기다리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은후는 페달을 밟으며 차를 도로 위로 몰아붙였다. ‘속도위반 따위 상관없어.’ 그의 차는 마치 레이싱카처럼 질주했고, 석진은 옆자리에서 조용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무런 짐도 준비하지 않은 채, 단 하나의 목표만을 안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서둘렀다. ‘나리를 찾아야 해. 무조건 찾아야 해.’ 두 사람의 마음은 다급했고,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둘은 나리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한편, S 시에 도착한 나리 역시 편히 잠들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자, 그녀는 일찍 일어나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그래, 중요한 날이지.’ 오늘은 송나리와 구예성이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구예성과 나리가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니, 미처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 내 결혼 상대라니.’ 나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구예성이라는 이름은 어릴 적부터 송씨 가문의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는 늘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로 언급되곤 했다. ‘아버지도, 엄마도 항상 칭찬하던 그 사람.’ 송진국과 장혜정이 전화로 가끔 예성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예성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었다. 나리의 기억 속 예성은 어릴 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가끔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꼬집던 소년이었다. 나리는 당시의 예성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결혼이라니...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 거지?’ 결혼이라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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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은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표정이 일그러지며 몇 번씩 바뀌었다. 결국 그의 억지웃음은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입술이 몇 번이나 떨리며 움직였고, 마침내 은후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야, 이 사람 어디서 데려온 배우야? 연기도 별로다. 이쯤에서 멈추지.” 그는 손가락에 낀 반지와 눈앞의 혼인관계증명서를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나리는 두 사람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미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었다. ‘이제 이 두 사람과 다시 엮일 일은 없어.’ 그녀는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배우라니 무슨 말이야? 너희들 예상과는 다르겠지만, 나 정말 결혼했어. 여기 증거도 있어.” 그녀는 손에 든 혼인관계증명서를 펼쳐 보이며, 석진과 은후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예성은 조용히 나리의 허리를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리 씨 남편 구예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예성의 눈동자는 옅은 호박색으로, 석진과 은후를 가볍게 훑었다. 그 시선에는 자연스러운 자신감이 담겨 있었고, 마치 은후와 석진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석진의 흔들리던 동공이 한순간 커지며 가슴 속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나리야, 그만해. 너 지금 화난 거 맞지? 질투하는 거지? 괜찮아, 나도 이해해. 근데 너 이거 진심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이건 실수야. 그러니까 들어가서 바로 이혼하든지 결혼 취소하자. 아직 늦지 않았어.” 석진은 그렇게 말하며 나리의 손을 잡아 구청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나리에게 닿기도 전에, 은후가 예성과 나리 사이로 들어서며 예성을 막아섰다. 은후는 예성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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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S 시에는 내 부모님과 가족들이 다 있지만 H시는 아니잖아? 그리고 이제는 지겨워졌어.” 석진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차갑게 식어버렸다. “송나리, 너 후회하게 될 거야. 결국엔 우리를 다시 찾게 될 거라고!” 나리는 석진의 말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기회는 주지 않을 겁니다.” 예성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고,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은 곧바로 움직였다. 경호원들은 석진과 은후의 입을 막고 손발을 단단히 제압한 뒤, 두 사람을 헬리콥터로 끌고 갔다. 예성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나리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실망하면 어쩌지?’ 그가 구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결코 합법적인 방법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리 앞에서만큼은 그의 숨기고 싶은 면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나리 씨, 내가 이런 모습 보여서... 무섭지 않아요?” 예성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나리는 예성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뜻밖의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말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다르지도 않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왜요? 전혀요. 오히려 이렇게 처리하는 게 더 깔끔하네요.” 나리의 대답은 놀랍도록 담담했다. ‘두 개의 골칫거리가 한 번에 사라졌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어?’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이렇게까지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내가 떠난 뒤에 둘은 나 없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호연을 선택했어야 마땅한데...’ 그리고 둘은 이미 호연과 함께 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호연이도 그럴 생각이 있다는 건 이미 명백했고.’ 나리는 차분히 속으로 정리했다. ‘석진과 은후도 아직 나에게 집착하는 건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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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석진과 은후는 약속했다. 나리가 둘 중 누구를 선택하든, 나머지 한 사람은 마음속의 미련을 깨끗이 정리하고 평범한 친구로 남겠다고. 하지만 정작 나리는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왜 우리가 이런 결말을 맞게 된 거야?' 석진과 은후는 서로 마주 보며 뜻밖에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왜 그런 바보 같은 제안을 했을까?' ‘조금만 더 일찍이거나,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셋이 예전처럼 친구로 남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지금처럼 얼굴 한 번 마주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헬리콥터가 전원주택 옥상에 착륙했다. 경호원들이 두 사람을 거칠게 끌고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리콥터는 다시 굉음을 내며 떠올랐다. 옥상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란 호연이 서둘러 올라왔다. 묶인 손발로 바닥에 앉아 있는 석진과 은후를 보고 놀란 호연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호연은 다급히 다가가 두 사람의 밧줄을 풀어주며 물었다. 석진은 멍이 든 손목을 문지르며 아무런 말 없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떠나는 석진의 뒷모습에 호연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은후 역시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앉아서, 차오르는 분노를 딱히 어디에도 풀 수 없어서 분한 표정이었다. 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뜻한 물 두 잔을 가져와 두 사람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혹시 S 시에 다녀오신 건가요? 나리 언니는 찾았어요? 언니는... 괜찮은 거죠?” 그녀는 옷소매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속으로는 긴장감에 손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돌아온 걸 보니 S 시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나 봐.’ ‘송나리는 모든 걸 가졌잖아. 완벽한 가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다 가진 사람이니까 제발 석진 오빠와 은후 오빠까지는 뺏어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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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호연의 얼굴에 눈물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석진과 은후를 바라보았다. ‘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왜 이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린 걸까?’ ‘예전엔 내가 조금만 울어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안절부절못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의 무심한 태도에 호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자신이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바닥날 때까지 울어도, 두 사람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호연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가 나리에게 했던 도발과, 나리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온갖 의도적인 행동들을 입 밖에 낸다는 건 곧 자신이 이 상황을 전부 끝장낸다는 뜻이었다. 호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은후를 향해 거의 절망적으로 외쳤다. “은후 오빠... 저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발 절 믿어줘요. 나리 언니가 그동안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떻게 언니한테 못되게 굴겠어요?' “만약 오빠들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나리 언니라면... 제가 이 집에서 나가면 되잖아요... 그럼 되겠죠?” 그녀는 말하면서 눈물을 억지로 더 짜내려고 애썼다. “혹시... 나리 언니는 제가 여기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걸까요? 전부터 저를 좀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어서요.” 호연은 계속해서 두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긁는 말을 던졌다. 그녀의 희망은 오직 은후였다. 평소에 다정한 은후가 예전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이번 일도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한 번만... 아니, 딱 한 번만 더 모른 척 눈감아주기만 하면 돼. 이렇게 한집에서 계속 살다 보면 결국 두 사람 마음속엔 나밖에 없을 거야.' 호연의 속마음은 점점 더 집요해졌다. ‘송나리? 겨우 나보다 20년 먼저 두 사람 곁에 있었을 뿐이잖아? 만약 내게 송나리 같은 배경이 있었다면, 난 절대 나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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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다음 날, 조사 결과가 나왔다. 호연은 나리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 뒤, 처음부터 나리를 눈여겨보았다. 나리는 단정한 옷차림에 세련된 말투까지, 한눈에 봐도 기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호연은 금세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제대로 된 금수저구나.’ 처음에 호연은 단지 나리 앞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척 흘린 눈물 몇 방울로 나리의 동정을 사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사람을 고용해 부모인 척 꾸며 전화를 걸게 했고, 순진한 나리는 그런 호연을 가엽게 여기며 돕기 시작했다. 나리의 곁에 머물게 된 호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진과 은후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녀는 나리의 배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석진 같은 사람은 호연이 평소 재테크 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고, 은후는 H 시 전체를 들썩이게 한 유명한 레이싱 선수였다. 은후의 포스터는 한때 H 시 곳곳에 도배될 정도였다. 그때부터 호연의 마음속에 질투가 끓어올랐다. ‘평생을 다 바쳐도 감히 닿지도 못할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나리 주위에서 맴돌다니.’ 그녀는 나리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에 휩싸였기 때문에, 그 뒤부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나리에게 의지하며, 나리의 호의를 빌미로 석진과 은후에게 접근했다. 호연은 석진과 은후가 그렇게 쉽게 자신에게 빠져들 줄 몰랐다.두 사람 모두 호연에게 친절했고, 심지어 나리를 버리고 그녀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연은 석진과 은후의 마음을 더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손을 책상 모서리에 끼워 상처를 내고, 힘들고 외로운 척 과장되게 연기하며 석진과 은후의 동정을 샀다. 심지어 그녀는 나리의 트로피를 일부러 깨트렸고, 고의로 나리의 집에 꽃을 들여놓았다. 호연은 나리가 천식과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리 곁에서 인턴으로 일한 그녀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호연의 이 모든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녀의 속마음은 점점 악의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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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하지만, 그런데도 호연은 마지막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석진의 어머니 주미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어머님... 석진 오빠가... 저를...” 그녀는 일부러 말을 얼버무리며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호연의 약간 쉰 듯한 억울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미애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호연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지금 당장 갈게. 우리 석진이가 설마 널 손대고도 책임도 안 지겠다고? 나는 그런 무례하고 무책임한 아들을 둔 적 없어!]주미애는 전화를 끊자마자 재빨리 집을 나섰다. 그 순간 석진은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화가 났다. 그는 호연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고? 네가 감히 날 모함해?” 석진은 더 이상 품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호연의 턱을 움켜잡고 강하게 쥐었다. 남자의 힘이 들어간 손 때문에 호연의 턱 주변이 순식간에 멍들었다. 하지만 호연은 핸드폰을 품에 꼭 안고, 마치 그것이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결코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은후는 석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저런 건 그냥 우스운 광대일 뿐이야. 어머니가 너를 의심할 이유가 없잖아.” 은후의 말에 석진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때, 주미애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입을 열자마자 호통을 칠 기세였지만, 석진이 조사한 자료를 자기 어머니에게 건네자 주미애는 말없이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모든 내용을 다 읽은 후, 주미애의 얼굴은 검은 먹구름처럼 변했다. 주미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연에게 다가가, 호연의 머리채를 잡아 세차게 흔들기 시작하며 곧이어 호연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호연의 뺨은 순식간에 부어올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려 했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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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한영수는 거침없이 호연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녀의 머리를 분수대 물속으로 강하게 눌러 넣었다.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였지만, 그것이 들이마시는 숨통으로 밀려들어가자 호연은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녀는 연달아 몇 번이고 물을 들이켰고, 기침을 하려 할수록 더 많은 물이 기도로 밀려 들어왔다. 얼마 후, 한영수는 호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 “어때? 나리가 숨을 못 쉬면서 느꼈던 그 절망을 조금이라도 느껴봤어? 살고 싶어서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때의 무기력함이 어떤 건지 알겠어?” 한영수는 호연을 바닥에 휙 내던졌다. 호연은 물에 흠뻑 젖어 헐떡이며 기침을 해댔고, 한영수는 그런 호연을 흘끗 쳐다본 뒤, 손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듯 손을 툭툭 털었다. “은후, 석진, 도대체 누가 사람 꼬시는 걸 다른 여자를 챙기고 질투심 유발하려고 하냐? 그렇게 어리석으니 나리가 S시의 그 구예성을 택하고 너희를 버린 거야.” 이번만큼은 한영수도 자신의 아들을 변호할 마음이 없었다. 주미애는 한영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아하게 앉아있던 주미애는 담담히 말했다. “사실 이번 일은 너희 둘이 잘못한 게 맞아. 나리 쪽은 이미 끝난 얘기야. 결혼까지 했으니, 더 이상 나리를 건드리지 마라.” 석진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어딘가 복잡한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은후는 억눌린 감정을 참아내듯 이를 악물었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둘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둘이 그렇게 유약한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에서의 치열한 경쟁, 레이싱 트랙에서의 극한의 싸움까지 두 사람이 해온 모든 것이 둘의 고집스러운 본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미애와 한영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역시 자기 아이들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참...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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