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짙은 안개 속에 잠겨 널 잊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26 Chapters

제11화

21이 새겨진 촛불은 이미 다 타버렸다. 하얀 크림은 탁자 위를 따라 사방으로 흘렀고 리본 묶인 선물 상자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상자 위에는 은행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원단비가 민씨 가문에 들어온 후 민태건이 그녀에게 줬던 것이다. 카드 아래에는 축하카드가 한 장 깔려 있었고 왼쪽 상단에는 생일 축하 캐릭터가 그려 있었으며 그 위에는 익숙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첫 줄의 여섯 글자를 본 민태건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남은 몇 줄의 글을 다 보고 나서는 노발대발하여 연거푸 좋다고 말했는데 말투는 매우 소름 끼쳤다. “21살 되더니 많이 컸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민태건의 시선이 빨간 선물 상자로 향했을 때 그의 눈은 이미 광기로 가득 찼다. 민태건은 원단비가 정성껏 고르고 꼼꼼하게 포장한 그 신혼 선물을 들어 곧바로 유리에 던져버렸다.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인테리어 벽 전체가 바로 갈라져 버렸다.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모두가 조각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다 죽었어? 당장 가서 찾아내!” 분노에 찬 목소리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민태건은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듯 소파에 쓰러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비서 이윤미가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민 사장님, 단비 아가씨의 핸드폰 위치로 봤을 때 아마 비행기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항공사에 명단을 보내라고 재촉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박진호가 2층에서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 아가씨 방에 있던 물건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민태건은 벌떡 일어나 곧장 2층으로 달려갔다. 민태건은 뛰어들어 옷장을 열어보고 상자들도 들춰보고 금고까지 살펴보았지만 전부 비어 있었다. 텅 빈 방을 한 바퀴 둘러보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공포가 민태건의 마음에 밀려왔다. 하지만 민태건은 아직 사고와 판단력을 유지하며 성큼성큼 다른 안방이었던 원단우의 원래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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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G국?’ 만약 민태건이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원단비의 고모가 G국에 이민을 갔을 것이다. 문득 보름 전 연회장에서의 그 통화가 떠올랐다. 당시 당황함이 스치던 원단비의 표정을 떠올리며 민태건은 이미 어렴풋이 진상을 알아챌 수 있었다.온밤의 걱정과 초조함, 절망과 고통이 이 순간 모두 분노로 변했다. 민태건은 그 은행 카드를 손에 쥐고 기세등등하여 밖으로 나갔다. 서지수가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 사장님, 어디 가십니까?” 민태건은 담담한 얼굴로 두 글자를 내뱉았다. “G국.”서지수는 급히 가장 빠른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12시간에 달하는 비행기 안에서 민태건은 단 한 번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민태건은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각종 장면들이 끊임없이 번쩍였으며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6~7살의 원단비를 데리고 놀이공원에서 놀았을 때 민태건은 즐거웠다. 11살의 원단비를 대신해 그녀 가족의 장례를 주관할 때 민태건은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13살의 원단비를 데리고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그녀가 웃음을 되찾았을 때 민태건은 다행이라 느꼈다. 그러다 17살의 원단비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민태건은 당황스러웠다. 20살의 원단비가 서서히 침묵하는 것을 보고 민태건은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21살의 원단비가 자신을 따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태건의 마음속에는 버림받은 분노와 절망감이 샘솟았다. 민태건도 원단비가 왜 자신을 떠난 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태건은 원단비가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단비가 자신의 곁에서 도망쳐 그렇게 먼 곳까지 갔고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젯밤까지 민태건의 마음속에는 한 가닥의 망상이 남아 있었다. 거짓된 결혼으로 원단비의 비현실적인 생각을 끊어내고 그녀가 다시 고분고분 양녀의 신분으로 자신의 곁에 머무는 망상 말이다. 민태건은 미래는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눈앞의 현재에 대해서는 소홀했고 원단비의 집요하고 통제 불가능한 성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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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서지수가 쓰레기통에서 원단비의 핸드폰을 꺼내자 민태건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민태건보다 원단비의 성격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원단비는 철저히 내려놓는다면 정말 반드시 철저히 놓을 것이다. 그게 민태건이든 원단비의 부모님이든 더 이상 만회할 기회는 없었다. 아직 품고 있던 혹시나 하는 그 마음은 이때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공항에는 사람들이 오갔는데 어떤 사람들은 손을 잡고 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오직 민태건만이 인파 속에 홀로 우뚝 선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는 건? 민태건은 내키지 않을 것이다. 원단비를 만나러 가는 건? 민태건은 그녀의 입에서 포기했다는 말을 직접 듣게 될까 두려웠다. 남거나 말거나, 만나거나 만나지 않는 것 모두 민태건에겐 선택할 수 없는 난제였다. 옆에 있던 서지수는 민태건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이윤미가 알아낸 번호를 받은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원정숙 여사님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BS그룹 본부입니다. 저희가 연락을 드린 건 원단비 아가씨에 관련된 일을 묻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긍정적인 대답을 받은 후 서지수는 핸드폰을 바로 민태건에게 건넸다. “민 사장님, 원단비 아가씨의 고모와 연락이 됐습니다.” 서지수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을 보고도 민태건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의문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와서야 민태건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다. “정숙 누나, 오랜만이에요. 저 태건이에요. 저 지금 오클랜드 공항에 있는데 한 번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이 일을 단비에겐 말하지 말고요.” 주소를 상의하고 난 후, 민태건은 미간을 비비며 마음속 복잡한 그 감정을 모두 뒤로 한 채 몸을 돌려 공항을 떠났다. 카페에 도착한 뒤 민태건은 블랙커피를 한 잔 시켰다. 거의 30시간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던 터라 민태건은 이미 피로가 어마어마하게 쌓인 상태였고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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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룸에서는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민태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누나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모두 제가 단비를 키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단비가 저와 11년 넘게 있어준 겁니다.” “누나도 알겠지만 제 부모님은 사업으로 바쁘셨고 위의 형은 저와 10살 넘게 차이가 났기에 전 어렸을 때부터 혼자 컸습니다.” “비록 물질적인 생활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제 곁은 늘 외로웠죠.” “단비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참 저를 잘 따랐고 또 얼마나 똑똑하고 귀엽던지, 전 단비를 알게 되면서 사람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그 뒤에 참혹한 일이 생긴 후 전 단비가 안쓰러워 그녀를 제 곁에 두기로 한 거고요. 제 마음속에서 단비는 이미 제 가족입니다.” 민태건의 설명을 듣고 난 원정숙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 단비가 비록 너를 삼촌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네가 짊어지고 있는 건 사실 아버지의 책임이나 다름없지. 나도 너희가 가족처럼 가깝다는 거 알기에 오랫동안 방해하지 않은 거야.” “하지만 한 달 전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제야 단비에게 연락해 의견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원치 않았어. 그런데 후에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어.” “나도 단비가 다른 세상을 많이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그린 카드를 신청했고 말이야.” 원정숙의 입에서 일의 자초지종을 똑똑히 듣고 난 민태건은 마음이 약간 저릿했다. “누나는 이 세상에서 단비의 유일한 가족이니 가족이 상봉하는 것도 나무랄 데가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다만 단비가 G국에 오는 건 여행으로도 괜찮고 유학으로도 괜찮은데 왜 하필 이민을 선택한 걸까요?” 원정숙은 원단비가 출국하기 전 이미 민태건과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갑자기 이런 말을 묻는 민태건에 원정숙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스쳤다. “단비가 스스로 이민을 오겠다고 해서 나도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서 신청한 건데 몰랐어?” 민태건은 마치 가슴에 칼이 찔린 것만 같았다. 민태건은 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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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원정숙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곧 새벽이 될 시간이었다. 원단비의 방이 아직 불이 켜져 있어 원정숙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10여 초 후 방문이 열렸고 두 얼굴이 보였다. “엄마.” “고모.” 12시가 다 되었고 늘 밥 먹자마자 졸린다고 하던 윤지나가 아직 자고 있지 않아 원정숙은 희한할 따름이었다. “지나야, 왜 자러 가지 않고 여기서 언니 휴식을 방해하고 있는 거니?” 그러자 윤지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눈을 크게 뜨면서 무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어렸을 때 사진도 보여주고 그림도 보여준다고 했어요. 전 단지 언니가 너무 잘 그린 것 같아서 보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딸의 말을 듣고 난 원정숙도 흥미를 느끼고 이 감상 소모임에 가입했다.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눈에 봐도 원정숙은 조카딸의 천부적인 재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혀를 내둘렀다. “단비야, 그림을 배운 지 몇 년이나 된 거니? 이렇게 잘 그리는데 직업으로 삼는 건 어때?” 원단비는 자신이 한마디만 한다면 원정숙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도와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단비는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냥 취미로 그리며 시간 때우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원정숙은 안타까운 듯이 한숨을 쉬었지만 억지로 원단비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미술 같은 영감에 의한 직업을 오랫동안 견지하는 건 확실히 지루한 일이야. 화가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럼 미래에 계획 같은 건 있어? 꿈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원단비가 매우 진중하게 대답했다. “전 조각을 배우고 싶어요.” “조각? 좋네. 넌 미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조각도 틀림없이 쉽게 배울 수 있을 거야. 먼저 도전해 봐. 네가 하고싶은 게 뭐든 고모는 다 너를 지지해.” 원정숙의 따뜻한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부모님이 세상을 뜬지 오랜만에 원단비는 또다시 혈육의 따스함을 느끼는 듯했다. 원단비는 코끝이 시큰거렸고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윤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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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G국에서의 첫날밤, 원단비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다. 잠에서 깨니 벌써 10시가 되어 있었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자 문어귀에서는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일어났어요? 엄마가 만두를 빚었어요. 내가 쪘는데 얼른 와서 먹어봐요!” 원단비는 대답을 하고서 얼른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식탁에 앉자마자 윤지나가 만두 하나를 집어 원단비에게 먹여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원단비는 일부러 윤지나를 놀리려고 눈살을 찌푸리며 씹었고 꼬마의 얼굴도 따라서 찌푸러졌다. 원단비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고 윤지나는 단번에 품에 끌어안았는데 감탄 가득하 말투로 말했다. “지나가 찐 만두야? 너무 맛있다. 앞으로 언니 만두는 다 지나에게 맡길게!” 이 말에 지나는 순식간에 웃음꽃을 피웠다. “앞으로 언니 만두는 다 나한테 맡겨요! 그럼 나 그림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 이런 사소한 요구에 원단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승낙했다. 결국 아침을 먹자마자 윤지나는 원단비를 끌고 나가서 자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랐다. 마침 한가했고 원단비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고 싶던 터라 바로 승낙했다. 두 자매는 손을 잡고 문구점에 들러 모든 공구를 다 사들였다.그후 윤지나는 원단비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공원으로 갔고 호숫가에서 포즈를 취하고는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원단비도 거절하지 않았고 화대를 세우고 공구를 뜯어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30분쯤 그리자 윤지나는 힘들었는지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단비는 윤지나가 떨어질까 봐 외출할 때 챙겨서 나왔던 장난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려고 했다. 돌 옆 오솔길은 매우 좁았고 원단비가 허리를 굽히는 그 순간 뚱뚱한 사람이 달려와 바로 그녀를 호숫가로 밀어버렸다. 호수는 꽤 깊었고 원단비는 수영할 줄 몰랐기에 물속에서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돌 위의 윤지나는 이 장면을 보고 급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고 몸을 반쯤 내밀어 원단비를 끌어올리려 했다. 그렇게 윤지나까지 호수로 떨어지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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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이 익숙한 목소리에 원단비는 완전히 멍해졌다. 원단비는 눈을 비비고 마침내 눈앞의 사람을 똑똑히 보았고 무의식적으로 불렀다. “삼촌?” 지금 다시 원단비의 입에서 그 호칭을 들으니 민태건은 온몸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넌 이제 원씨 가문으로 돌아갔으니 앞으로는 날 삼촌이라고 부르지 마!” 민태건의 말투를 들은 원단비는 그가 화가 난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원단비는 민태건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부모님이 살아있을 때도 원단비는 민태건을 삼촌이라 불렀는데 말이다. 17, 18살 사춘기 때 원단비가 민태건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뒤 화가 나 몇 번 이름을 부른 것 외에는 줄곧 삼촌이라고 불렀지 않은가? 원단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민태건이 홧김에 한 말일까 봐 감히 다시 묻지 못했다. “삼촌, 저 내려주세요.” 원단비가 또 삼촌이라고 부르자 민태건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삼촌이라고 부르지 마!” 옆에 있던 윤지나는 원단비가 깨어난 것을 보고 순식간에 울음을 멈추고 한마디 끼어들었다.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요?” 원단비와 윤지나는 동시에 민태건을 바라보았고 민태건은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민태건은 안정적으로 원단비를 땅에 내려놓았고 싸늘하게 말했다. “이름 불러.” “민태건이요?” “민태건이요?” 윤지나는 원단비를 따라 한 번 더 말한 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 민태건이 누구예요?” 원단비는 손에 묻은 물을 닦고 윤지나의 작은 손을 잡았다. “언니를 구해준 이 사람이야. 난 삼촌이라고 부르니 너도 촌수에 따라 삼촌이라고 불러.” 이 말을 들은 윤지나는 민태건을 향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삼촌, 우리 언니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이 세대 차이 나는 호칭에 민태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상대는 단지 어린 아이일 뿐이기에 민태건은 윤지나와 따질 수 없었고 이 일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민태건은 원단비를 곁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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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원단비는 핑계를 대고 떠나려 했지만 윤지나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러자 민태건은 윤지나를 안고 다짜고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원단비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레스토랑에 앉자마자 민태건의 전화가 바로 울렸다. 민태건은 한 번 꺼내 보더니 바로 끊어버렸다. 원단비는 곁눈으로 위에 표시된 이름이 진민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단비는 그제야 중요한 일이 생각나 물어보려는 찰나 또 벨소리가 울렸다. 민태건은 바로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2분 뒤, 원단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는데 국제전화로 표시되어 있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는 한바탕 화가 난 듯한 욕설이 들려왔다. [원단비! 이 여우 같은 천한 년! 태건 씨를 어디로 꼬드겼어?]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겁니까?” 원단비와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던 민태건은 진민서가 뱉은 그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었고 안색이 바로 변했다. 민태건은 바로 원단비의 핸드폰을 가져가 진민서의 번호를 차단한 뒤 서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서에게 단비의 번호를 줬어? 누가 네 마음대로 결정하래? 내일 당장 인사발령 부서로 가서 스스로 사직서를 내.” 비록 진민서에게 한바탕 욕을 먹었지만 원단비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오히려 민태건의 이 결정이 너무 당혹스러워 참지 못하고 서지수의 편을 들었다. “서 보좌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사소한 일로 보좌관님께 화를 내는 겁니까?” 민태건은 원단비가 서지수를 위해 사정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고 되려 그녀가 진민서에 대한 반응에 의아했다. ‘이렇게 대놓고 욕을 먹었는데 왜 단비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없는 걸까?’ “서지수는 네 번호를 진민서에게 주었는데 해고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이건 몇 달 동안 진민서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민태건이 유일하게 원단비의 편을 든 것이다. 하지만 원단비는 이미 민태건이 진민서에게 잘해주는 것에 익숙해졌고 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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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하지만 제가 싫어하는 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진민서와 여생을 함께 하 사람은 삼촌이고 전 그 사람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거니까요.”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칼처럼 민태건의 마음에 박혔고 그는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민태건의 눈에는 끝없는 슬픔이 샘솟았고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쾌함을 띄었다. “그럼 나는? 나도 다시 안 만날 거야?” “그럴 리가요?” 앞의 말은 진통제 같았지만 바로 그 뒤의 말은 마치 바로 그 안에 독약을 주입해 넣는 것 같았다. “삼촌은 필경 저를 키워준 은혜가 있잖아요. 명절 때마다 어른들께 안부를 물어야 하니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을게요, 삼촌.” 이 말을 할 때 원단비의 얼굴에는 매우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민태건은 원단비를 아무리 관찰하고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원단비는 이미 철저하게 민태건은 어른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이 결론은 마치 폭풍처럼 민태건 마음속의 미약하게 남아있던 희망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민태건은 마침내 첩첩이 쌓았던 울타리를 타파하고 세속의 눈길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음속 방향을 직시하려는 충동이 분출되었다. 지난날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렀던 끓어오르는 뜨거운 욕망들은 이 순간 마치 광풍과 폭우가 된 것처럼 기승을 부리며 민태건의 머리를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난 너보다 10살 더 많을 뿐이고 우린 혈연관계가 전혀 없어. 이건 모두 네가 했던 말이야. 잊었어?” 원단비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집 하나로 버텨냈던 그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지만, 후회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다만, 어쩐지 조금은 어리석고 순진했던 모습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민태건이 했던 말로 조용히 답을 돌려주었다.“그때 전 고작 17살이었으니 좋아하는 게 뭔지 몰랐고 사랑이 뭔지 혈육의 정이 뭔지 분간하지 못했으니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해도 용서 가능한 일이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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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둘이 오늘 외출할 때 민태건을 만난 건가? 어쩐지 늦게 돌아오더라니.’ 원정숙은 약간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 스쳤고 몇 마디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윤지나는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처음에 물에 빠진 일을 이야기하자 원정숙은 간담이 서늘했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뒤이어 점심에 대해 말할 때 윤지나는 똑똑히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나는 한 두 마디만 골라 말하면서 민태건의 표정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다. “삼촌이 언니에게 다시 보지 않으려 했냐고 물을 때에는 거의 눈물을 흘리려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10살이 더 많고 혈연관계가 없고 그런 말을 할 때와 언니가 마지막으로 신혼 축하한다고 했더니 삼촌은 테이블을 엎어버렸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비록 어린 애가 멋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윤지나의 이 말에 원정숙은 철저히 깨달았다. 원정숙은 이전부터 원단비와 민태건 두 사람 사이가 어딘가 묘하게 이상하다고 느껴왔다.왜 갑자기 원단비가 출국을 승낙했는지, 왜 민태건은 결혼식도 마다하고 쫓아왔는지, 왜 두 사람이 말을 할 때의 표정과 말투가 어색했는지 말이다. 그리고 원정숙은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이상했던 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원단비와 민태건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의지하는 ‘부녀’ 사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다투고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어색함과 날 선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게다가 윤지나가 제공한 정보까지 더해지니 원정숙은 원단비와 민태건의 관계가 이미 정상적인 가족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결론이 나자 원정숙의 마음속에는 한기가 돌았다. 원정숙은 윤지나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일어나 2층으로 향했고 원단비의 방 문을 두드렸다. “단비야, 고모에게 솔직하게 말해봐. 테가 출국하기로 결정한 거 네 삼촌이 결혼하기 때문인 거니?”엄숙한 얼굴의 고모가 정중하게 이 말을 묻자 원단비의 몸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고모, 왜 이런 걸 물어요? 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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