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열여덟, 스물 다섯 / Chapter 11 - Chapter 20

All Chapters of 열여덟, 스물 다섯: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이제 남은 사람이라곤 우리 둘뿐이다.그날 정민규와 기분이 상한 채 헤어진 후로 처음 만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가 한동안은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은 일부러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듯 빨리 만난 건 물론이고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했다.정민규가 굳은 얼굴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뒷걸음질 치려 했다.그런데 아직 뒤로 가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나의 손목을 잡더니 카운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내 앞을 막아선 채 한 손으로 카운터를 잡고 지탱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나랑 세라를 한 쌍으로 만들었더라? 그럼 네 짝은 누군데? 나상민? 아니면 조운시의 다른 재벌?”정민규는 나를 값어치를 매긴 상품처럼 말했다. 그가 이미 한번 말했고 그의 마음속에 비친 나는 목적이 불순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욕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나는 정민규를 빤히 보며 웃으면서 일부러 화를 돋우었다.“내가 누굴 선택할 것 같아?”“고은성.”정민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닿을 무렵 확 밀어버렸다.“아무튼 누굴 선택하든 절대 넌 아니야.”나는 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게를 나온 그 순간 성지연이 다가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은성아, 괜찮아?”나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더는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다.“그냥 집에 가자.”“그래.”성지연은 곧바로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이내 자리를 비웠다.우리가 떠날 때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보지 않았다.성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성지연의 부모님이 곧 수능인 딸의 옆에 있어 주려고 먼 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걸 알게 되었다.성지연은 기쁜 나머지 부모님의 품에 와락 안겨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 아빠를 불렀다.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2화

적금과 필요 없는 사치품을 정리하던 그때 도우미가 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하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물건을 내려놓고 방에서 나갔다.위층에 꽤 오래 있어서 나상민이 이쯤이면 그만 돌아갔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주방에 들어가 보니 마치 주인처럼 센터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민욱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평소 고민욱은 나와 고은빈에게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었는데...고민욱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은성아, 얼른 와서 도련님이랑 얘기 나눠. 난 이젠 나이 먹어서 내가 얘기하면 젊은이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해.”나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고민욱에게 휴대전화를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숫자를 얘기했다. 곧이어 입금됐다는 문자를 받았다.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천만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문자를 확인한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뒷짐을 진 채 발걸음을 멈췄다.“회장님, 매수비가 좀 적은데요? 아니면...”나는 고의인 듯 아닌 듯 나상민을 힐끗거렸다.머리가 좋은 나상민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나와 고민욱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피식 웃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더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회장님, 은성이 용돈이라도 깎았어요?”고민욱이 다급하게 부정하면서 웃었다.“오해야, 오해. 이번 달에 하도 바빠서 용돈을 이틀 늦게 줬거든. 그래서 삐졌어.”그러고는 이를 꽉 깨물고 나에게 웃었다.“일단 와서 밥 먹어. 이따가 은빈이 엄마더러 2천만 원 입금하라고 할게.”밥 한 끼에 이렇게 많은 돈을 얻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나는 두 눈이 반짝였다.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려 더 많은 돈을 얻어내려 했다.“아빠, 2천만 원으로는 부족해요. 수능이 끝나서 친구들이랑 나가 놀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입학 통지서가 나오면 참석해야 할 진학 연회도 엄청 많을 텐데. 아빠, 이참에 용돈 더 올려주세요.”고민욱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그럼 얼마를 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3화

수능이 끝난 탓인지 긴장이 풀리면서 그날 밤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입학 통지서를 받기 전날이 돼서야 몸이 괜찮아졌다.수능 성적이 나온 그날 밤에 나는 인터넷으로 점수를 확인했다. 400점 만점에 370점을 맞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단성대학교에 붙었다. 나는 이 결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드디어 아름다운 꿈이 악몽을 뒤덮어버렸다.이튿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학교로 갔다.성지연은 수능을 마치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십여 일 만에 학교 문 앞에서 만났다.그녀는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브라운 톤으로 염색까지 했다. 이젠 졸업했으니 그다지 단정하지 않은 스커트를 입었는데 만화 속을 찢고 나온 소녀 같았다.성지연은 나를 보자마자 기뻐하면서 달려와 와락 안았다.“너무 보고 싶었어, 은성아. 마애민에서 너한테 줄 선물 엄청 많이 사 왔어. 이따가 입학 통지서 받으면 같이 우리 집에 가지러 가자.”성지연에게 안긴 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알았어.”“그럼 약속한 거다?”성지연은 나를 풀어주고는 다시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쪘는지 야위었는지 보자.”그러더니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왜 야위었어? 밥 제대로 안 먹었어?”성지연은 부모처럼 나를 챙겼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와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며칠 전에 얘기했잖아.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고.”“맞다.”성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량소년처럼 나의 아래턱을 잡고 말했다.“이런 상황에 해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너 많이 예뻐졌어. 네 미모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겠어.”그녀의 과장에 나는 그녀의 손을 툭 치면서 말했다.“거짓말쟁이, 어제는 아이돌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하더니.”성지연이 헤벌쭉 웃었다.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이젠 고등학생이 아니어서 그런지 짧디짧은 십여 일 동안 친구들이 다 변한 듯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4화

6개월 전에 조운고등학교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남학생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남학생이 학교에 유언비어를 퍼뜨린 바람에 그 여학생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미 잊은 듯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성지연이 진세라를 째려보았다.“무슨 일이든 다 알려고 하고. 참 오지랖이 넓어.”그러자 진세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악의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진세라가 하도 당당해서 그만 헛웃음이 나고 말았다.“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니까 그러지.”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진세라는 나를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성지연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나의 자리와 두 줄 떨어진 곳에 정민규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책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옆 책상에 올려놓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다가가 올려다보면서 비켜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만 그의 두 눈과 마주하고 말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두 눈에 억제와 복잡함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정민규가 다리를 옮기고 나서야 나와 성지연은 제자리로 돌아갔다.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교단에서 말했다.“오늘 몇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조운시의 이과 1등과 2등이 모두 우리 반 학생이야.”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대박. 우리 반이 이렇게나 대단했어?”“누구예요?”“선생님 얼른 말해주세요. 그 대단한 학생이 누군지.”담임선생님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1등은 당연히 정민규 학생이고 2등은...”담임선생님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자 학생들이 또 떠들어댔다.“2등은 고은성 학생이야. 고은성 학생이 370점을 맞았는데 정민규 학생과 불과 1점 차이밖에 안 나.”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5화

마지막 학급 회의가 끝났고 3년 동안 힘들었던 공부도 끝이 났다.조운고등학교의 관례에 따라 오늘 저녁에 사은회를 진행한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친구들끼리 한바탕 제대로 놀아야만 완벽한 결말을 맺을 수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시간은 이미 9시가 넘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 누군가 노래방으로 가자고 제안했다.이젠 다 성인이라 담임선생님도 말리진 않았다. 하지만 젊은이들끼리 즐길 시간을 주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비웠다.나는 정민규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고 진세라의 여우 짓을 계속 경계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대고 떠나려 했지만 텐션이 업된 성지연이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은성아, 우리 이따가 술 한잔하자. 모히토 어때? 나 아직 술 마셔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먹어보고 싶어. 진짜 그렇게 맛있는지.”성지연은 나를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성지연은 지금까지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었다.이젠 성인이 되었고 게다가 초롱초롱한 두 눈에 기대가 가득한 걸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알았어. 근데 나랑 약속해.”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았다.“지금 10시니까 12시에 집에 가자. 술도 많이 마셔선 안 되고 맛만 살짝 보는 거야. 알았지?”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찾질 못했다.성지연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면서 배시시 웃었다.“알았어.”그 시각 진세라가 정민규에게 물었다.“민규야, 너도 갈래?”정민규가 덤덤하게 말했다.“넌 가고 싶어?”그러자 진세라가 대답했다.“가고 싶어. 앞으로 애들이 뿔뿔이 흩어질 텐데 이렇게 놀 기회가 별로 없어.”정민규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가자.”나의 기억 속 정민규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그리 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성격이 통쾌하고 예의가 바른 정민규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친구들과 서로 도우면서 잘 어울려 지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었다.정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6화

성지연이 일어나서 따지려 하자 나는 곧바로 말렸다. 나는 성지연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갔다.“놀자. 어떻게 하는 건데?”내가 너무 빨리 대답한 탓인지 친구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가가서 게임 룰을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맨 먼저 반응한 한정수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더러 옆에 앉으라고 하고는 게임 룰을 설명해 주었다.게임 룰은 간단했다.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돌리다가 맥주병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은 전 라운드에서 걸렸던 사람이고 벌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설명을 마친 한정수가 나에게 물었다.“알아들었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게임이 금방 시작됐을 땐 다들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질문도 반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연애한 적이 있는지, 지금까지 했던 창피한 일 등 이런 질문밖에 없었다.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질문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고 벌칙도 어려워졌다.대부분 걸려서 질문을 받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라운드가 시작되었고 맥주병 입구가 정민규를 가리켰다.그러자 친구들이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게임이라 그런지 용기도 더욱 생기는 것 같았다.전 라운드에 걸렸던 친구가 정민규에게 물었다.“민규야, 왼쪽에 앉은 애를 좋아해? 아니면 오른쪽에 앉은 애를 좋아해?”그 친구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친구들이 분위기를 띄웠다.그때 누군가가 말했다.“진성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당연히 세라지. 안 그러면 그렇게 바쁜 민규가 우리랑 놀 리가 있겠어?”진세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쑥스러워하면서 기쁜 얼굴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분위기를 띄우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내 자리를 힐끗거렸다.한정수가 내어준 그 자리가 바로 정민규의 왼쪽 자리였다. 그러니까 방금 정민규에게 한 질문은 진세라와 나 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7화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향해 있는 맥주병을 내려다보았다.전 라운드에서 걸린 사람이 정민규였기에 이젠 그가 나에게 질문할 차례였다.나는 저속한 마음으로 고상한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나에게 여러 번 시비를 건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난감하게 할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할 때는 난감해도 이게 바로 행복이고 나를 신경 써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그때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그런데 뜻밖에도 정민규는 아주 평범한 질문을 건넸다.“좋아하는 사람의 성이 뭐야?”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주 쉽게 대답했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나의 이성은 정민규를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좋아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어떻게 짧은 몇 달 사이에 깔끔하게 사라지겠는가.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정민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그 질문이 그렇게 어려워? 예전에 민규를 쫓아다닐 땐 그렇게 얼굴이 두껍더니 이제 와서 쑥스러운 척이야?”친구들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진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 질투와 언짢음이 가득했다.나의 시선을 느낀 진세라는 보란 듯이 정민규의 팔을 잡으면서 상황을 수습하는 척했다.“아이고, 다들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여자는 뭐 체면이 없는 줄 알아? 아니면...”진세라가 두 눈을 깜빡였다.“은성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가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되는 사람인가?”진세라는 내가 누구의 여자 친구라는 수식어를 한시라도 빨리 붙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정민규가 그녀를 사랑하고 신경 쓰는데 이깟 일로 겁을 낼 필요가 있을까?“얼마 마시면 돼?”나는 정민규를 보면서 술을 마시는 걸 택했다. 그러자 정민규가 피식 웃었다.“6병.”맥주 6병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주량이 별로였고 위도 좋지 않았다. 여섯 병째를 마시던 그때 위가 아프기 시작했고 이마에 땀방울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8화

그 빗물이 다른 사람에게 닿으면 미움만 살 뿐이었다.한참 동안 토하다가 마신 술을 전부 비우고 나서야 속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빙빙 돌았다.다시 룸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성지연에게 그만 집에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노래방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회전문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과를 건넸다.“미안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죠?”예상했던 책망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나상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물어볼 사람은 나지. 어디 아픈 데 없어? 내 초콜릿 복근이 꽤 탄탄할 텐데.”생뚱맞긴 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나는 나상민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괜찮다면 먼저 가볼게.”그러고는 나가려 했다.“잠깐.”나상민이 쫓아와서 말했다.“내 제안 한 번 더 생각해 봐.”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그의 제안이 무엇이었던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물었다.“제안?”“내 여자 친구가 되어달라는 거 말이야.”나상민이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고 아껴줄게. 네 말이라면 토 달지 않고 무조건 따를게.”나는 그런 나상민이 귀찮기만 했다. 짜증이 밀려와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냈다.“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다른 여자들은 알아?”“하하하하, 걔네들은 내가 말하기를 바랄걸?”나상민은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밖에 비 와. 이것만 입고 나가면 감기 걸려. 고마워할 건 없고.”그러고는 또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내 제안 진짜로 한번 생각해 봐.”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나상민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누군가 나의 손목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다가 삼나무 향이 코를 스쳤다.‘정민규.’누구인지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미 벽과 벽 사이의 복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19화

화가 난 나와 달리 정민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를 헐뜯었다.‘참 변덕스러운 사람이야. 태도가 한순간에 180도 바뀌었어.’나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말을 잘 듣는 개는 길을 막지 않아. 그러니까 비켜.”나는 분노를 터트리며 나가버렸다. 하지만 정민규의 행동을 진세라가 보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림을 찢고 나온 것처럼 미모가 뛰어났고 이목구비의 조화도 아주 좋았다. 그런데 입술에 빨간 상처가 나 있었다.조금 전 어두운 복도에서 한 소년이 나에게 거칠게 키스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정민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좋아하지 않았다. 분명 싫어하면서 왜 또 나를 건드리는 걸까?나는 세면대의 변두리를 꽉 잡았다. 잠시 후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취기가 올라와 진작 잠이 들었을 시간이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다시 일어나 겉옷을 입고 베란다에서 일출을 기다렸다.아침 햇살이 구름층을 뚫으면서 하늘 전체가 몽환적인 색깔로 바뀌었다. 잠시 후 태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실눈을 뜨고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날 오후 나는 단성시로 가는 티켓을 구매했다. 고씨 가문을 떠나게 되면 할 일이 매우 많을 것이다.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집을 구매하는 것이었다....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오전 9시에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단성시의 날씨는 참 좋았고 6월이라 한창 무더울 때였다.나는 옅은 초록색의 원피스로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연하게 한 다음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네 시간 동안 여섯 일곱 채를 구경했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풀이 죽은 채로 있었고 중개인도 답답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책임을 다했다.“고은성 씨, 남교 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제20화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흘겨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상민이 뒤따라오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단성에는 언제 왔어? 집은 왜? 단성에 집을 사려고?”‘시끄러워 죽겠네. 뭔 말이 이렇게 많아.’고개도 돌릴 생각이 없었는데 나상민이 갑자기 물었다.“네가 단성에 집을 산다는 걸 가족들은 알아?”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웃는 모습이 정말 교활한 여우가 따로 없었다.“드디어 멈춰 섰네.”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야?”“아무 뜻도 없어.”나상민은 배시시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현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지 않겠어? 난 단성 사람이니까 우리 관계에 당연히 밥 한 끼라도 대접해야지.”“그럴 필요 없어.”“그럼 집 살 때 할인 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까? 안 그러면...”나상민이 아래턱을 어루만졌다.“너희 가족들한테...”“그 입 다물어.”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로챘다. 승기를 손에 쥔 듯한 나상민의 모습만 보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나상민은 나에게 단성시 구경을 시켜주었다. SNS에서 핫한 버블티 가게에서 버블티를 샀고 또 핫플레이스에서 사진도 찍었으며 맛집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맛이 없는 음식도 먹었다.정말 너무도 재미없었다. 하도 재미없어서 단성 토박이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세 번째 날, 나상민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던 길에 나상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고작 십여 초 사이에 나상민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이토록 어두운 그의 표정은 처음 봤다. 그가 택시를 잡고 올라타자 나도 다른 택시를 잡고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상민이 탄 택시가 한 요양원 앞에 멈춰 섰다. 나도 따라서 택시에서 내렸다.나는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가다가 VIP 병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요양원의 관리가 아주 엄격했다. 병문안을 왔다고 해도 프런트 직원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로비에서 잠깐 방황하다가 이대로 떠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상민은 나와 부모님의 관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12-11
Read more
PREV
123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