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881 - Chapter 890

905 Chapters

제881화

박한빈은 무심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진짜로 승낙한 건지 알 수 없었다.에릭의 차가 멀어지자마자, 박한빈은 곧장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라 씨랑 둘이 몰래 무슨 얘기 했어?”“네?”“화장실에서 에릭 아내랑 마주쳤지? 무슨 얘기 나눴어?”박한빈은 이미 확신을 가진 채로 성유리에게 물었다.“별얘기 안 했어요.”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그냥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왜 그러세요?”박한빈이 더 묻기 전에 성유리는 이미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제가 그냥 다른 사람이랑 몇 마디 나누는 것도 한빈 씨한테 허락받아야 하나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난 그냥... 걱정돼서 그래. 에릭이 지금 아내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괜히 네가 무슨 말이라도 들었다가 나중에 에릭이 그걸 빌미 삼아 너한테 화풀이할까 봐.”그러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니까 한빈 씨도 눈치챘다는 거죠?”“뭘?”“아라 씨가 진심으로 에릭 씨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거.”성유리는 전방을 바라보았다.에릭의 차는 이미 멀리 사라졌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는 어두운 밤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난 아라 씨가 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그리고... 지금 얻은 것들은 예전의 아라 씨가 꿈도 못 꾸던 것들이잖아. 어떻게 보면 좋은 일 아닐까?”“아라 씨가 불쌍하다면 밥조차 먹기 힘들고 몸 누일 곳도 없는 사람들은 뭐가 되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각자 처한 상황은 다 다르니까.아라는 겉으로 보면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전부 에릭이 그녀에게 주겠다고 한 것들이다.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었다.즉, 아라가 결혼을 거부하면 에릭은 언제든 모든 것을 회수할
Read more

제882화

박한빈은 사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자신이 식사 자리에서 에릭과 나눈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성유리는 그를 봤을 때 분명 기뻐 보였다.그런데 식사가 끝난 뒤, 성유리의 태도는 확연히 차가워졌다.집으로 돌아갈 때 굳이 조수석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그렇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박한빈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심지어 잘 때조차 박한빈이 침대에 오르자마자 원래 반듯하게 누워 있던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박한빈에게 등을 돌린 것도 모자라 침대 끝으로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까지 더해져 의미는 명확했다.순간 멍해져 있던 박한빈은 몸을 숙여 성유리에게 물었다.“너 왜 그래?”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박한빈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툭 쳐냈다.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 엉망이 됐고 마치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꽉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대체 무슨 일인데?”박한빈이 끈질기게 물었다.“누가 너 괴롭혔어?”그러나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잠시 기다리다가 결국 폭발해 성유리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돌려 눕혔다.“왜 말을 안 해?”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물었다.“무슨 일 생겼어?”박한빈의 끊임없는 질문에 드디어 성유리가 눈을 떴다.그녀는 그를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손 놔요.”“뭐?”“전 지금 박한빈 씨 보고 싶지 않으니까 손 놓으라고요.”그 말에 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날 보기 싫어하는데?”“당신도 잘 알잖아요.”“뭐?”“에릭 씨 일, 박한빈 씨가 조언해 준 거죠?”성유리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그 말에 박한빈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다.뭔가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에릭 씨는 원래
Read more

제883화

박한빈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앉아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성유리도 질세라 턱을 치켜들고 그와 맞섰다.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가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비록 상처는 아물었고 새살도 돋아났지만 여전히 여린 살결 속에는 아물지 않은 피가 맺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흐릿하게나마 검붉은 혈관이 선명하게 보였다.박한빈은 더 이상 서로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잠시 고민한 끝에 먼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과거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우리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그건 당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전혀 아니었네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성유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난 그저 에릭한테 한마디 조언해 줬을 뿐이야. 설마 걔가 그냥 아라 씨를 강제로 데려가 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둘 사이의 문제잖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 넌 왜 이걸로 날 평가하려 드는 거야? 그건 나한테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저희에겐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죠.”성유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하지만 박한빈 씨의 가벼운 말 한마디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가 침묵한 이유는 성유리의 말에 설득당해서가 아니었다.도대체 왜 성유리가 한낱 ‘남’의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설령 자신이 에릭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고 해도 결국 실행한 건 에릭이었다.게다가 그 둘은 이제 결혼 준비까지 하고 있고 겉으로 보기엔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성유리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도 그에게 더 이상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말없
Read more

제884화

“너 진짜 잘 생각한 거야?”박한빈이 대뜸 물었다.에릭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너와 아라 씨는 집안 배경부터 다르고 성장 배경도 다르잖아. 나는 네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는지 전혀 이해가 안 돼.”박한빈이 말을 마치자 에릭은 웃음을 터뜨렸다.“이해가 안 돼? 나도 처음에 성유리 씨랑 네가 만났을 때도 너랑 같은 생각을 했어.”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정말 그런 거라면 이제 더는 내 앞에서 불평하지 말고 앞으로 네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조언을 구하지 마. 안 해줄 거니까.”“왜? 난 친구라곤 너 하나밖에 없는데?”“맞아, 너는 내 친구지. 그래서 난 널 버리거나 만나지 않을 권리가 있고.”박한빈이 말을 마치자 에릭은 잠시 침묵했다.그런 다음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너랑 성유리 씨 나 때문에 싸운 거지? 넌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고.”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에릭은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말했다,“내가 아라랑 안 맞다고 했는데... 넌 너랑 성유리 씨가 잘 맞는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성유리 씨 요즘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 다 너희 쪽 여자는 순하고 온화하다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특히 성유리 씨는 성격이 너무 드세서 아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어.”“사실 너 정도 조건이면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왜...”에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의 무릎을 세게 차버렸다.깜짝 놀란 에릭이 소리를 지르자 박한빈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내 아내에 대해 네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에릭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내 무릎 알잖아? 의사가 말했어. 너무 힘을 주면 나중에 못 일어난다고!”“아, 알겠네. 결혼식에서 너는 여자 쪽 부모에게 절해야 돼. 차례로 인사를 해
Read more

제885화

“게다가 아라 씨 가족이 너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명목상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있는데 너희가 결혼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박한빈은 자신이 에릭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어쨌든 결혼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박한빈은 뭐든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래는 이런 일들이 그와는 전혀 관계없었다.박한빈은 한 번도 자신이 ‘상담자’가 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와의 관계는 이렇게 계속될 수 없었다.그는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 성유리는 자신이 에릭에게 조언을 해줘 아라의 인생을 바꿨다고 생각했으니 그럼 에릭이 결혼을 하지 않게 설득하면 그만이었다.에릭만 결혼을 포기한다면 성유리와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에릭이 행복하고 잘 살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성유리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러나 에릭은 박한빈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었다. 결국 사무실을 떠날 때도 박한빈에게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그저 에릭이 스스로 돌아가서 냉정히 생각하라고 했다.에릭이 떠난 후, 박한빈은 차를 몰고 실버 포레스트로 돌아갔다.그러나 성유리는 집에 없었다.박한빈은 그녀가 엔젤 월드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도 허탕을 쳤다.“유리 출장 간 거 몰랐어?”김서영은 갑자기 찾아온 박한빈 때문에 놀랐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유리가 전에 개작한 드라마가 성공적이었잖아? 지금은 영화 찍으러 갔어.”멍해 있는 박한빈에게 김서영이 계속 말해줬다.“지금쯤 아마 비행기에서 내렸을 것 같아.”김서영의 말을 듣고 박한빈은 그 일이 생각났다. 사실 그가 변호사를 통해 저작권을 처리할 때 성유리가 박한빈과 상의했었지만 오늘 출장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그녀가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하늘이가 먼저 말했다.“아빠, 또 엄마 화나게 했죠?”아이의 말은 너무 직설적이었기에 박한빈은 저도 모
Read more

제886화

성유리가 극장 리딩을 마친 시간은 밤 11시였다. 그녀가 하늘이 보내온 음성 메시지에 답하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의 부름 소리가 들렸다.“성유리 씨!”그 소리에 성유리는 바로 걸음을 멈췄고 뒤돌아보니 이우빈의 매니저였다.“오랜만입니다. 아까 감독님들이랑 함께 있어서 인사드리지 못했어요.”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잘 지내셨나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잘 지냈어요.”“네. 아직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아서 우빈 씨가 모두 다 함께 야식 먹자고 하는데... 성유리 씨도 같이 가시겠어요?”“저는 안 갈래요.”성유리는 자신의 노트북을 가리키며 대답했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여러분들끼리 가세요.”“그러시군요.”매니저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성유리의 대답에 약간 당황했지만 금방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잠시 후에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진짜 괜찮아요. 배고프면 호텔에서 시킬 수 있으니 전 신경 쓰지 마세요.”“괜찮습니다. 사실 이우빈 씨도 성유리 씨께 감사한 마음이 많아요. 드라마 촬영할 때 팬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유리 씨한테 불편을 끼쳤잖아요.”“이번 영화 준비할 때 이우빈이 주연을 맡을 수 있을지 몰랐는데...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역할은 제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감사는 감독님께 하셔야죠.”“물론입니다! 그래도 결국엔 성유리 씨 덕분이에요. 이 작품에 영혼을 넣은 사람은 성유리 씨니까요.”매니저는 계속해서 공손한 태도로 말하며 성유리를 추켜세웠다.결국 성유리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약간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 먼저 가고 싶은데...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아니, 없습니다. 그럼 성유리 씨, 좋은 밤 되세요.”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성유리는 자신의 의사를 매니저가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우빈이 직접 준비해 온 야식을 그녀의 방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작가님, 아직 식사 안 하셨죠?”아주 사적인 자리였
Read more

제887화

캐리어 안에서 빠르게 알레르기 약을 찾고 나온 성유리는 이우빈이 이미 방안의 소파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이우빈은 급히 변명했다.“복도에 사람이 있어서 혹시라도 오해가 생길까 봐 먼저 들어왔습니다.”“괜찮아요.”성유리는 찾은 알레르기 약과 생수 한 병을 함께 건넸다.“먼저 약부터 드세요.”“감사합니다.”이우빈은 약을 받으며 잠시 성유리를 쳐다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마치 마음이 불편한 듯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약을 삼켰다.“할 말 있어요?”성유리가 물었다.“아니요... 아닙니다.”이우빈은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물을 마시던 중 갑자기 목에 걸려버렸다. 성유리 앞에서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물을 억지로 삼킨 후 심하게 기침했다.그 모습에 당황한 성유리가 물었다.“괜찮아요?”“괜... 괜찮습니다.”이우빈은 손을 내저으며 입술을 종이로 닦았다. 기침이 끊기자 그는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냥... 목에 물이 걸려서버려서...”성유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하늘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하늘이요? 네. 잘 지내요.”이우빈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다가 계속 말했다.“사실 저는 항상 하늘이에게 사과할 기회를 찾고 있었어요.”“왜요?”“그때... 하늘이가 저희 둘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저는 저희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늘이 앞에서 불필요한 말을 했어요. 그 말들이 작가님과 하늘이한테 상처를 입힌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이우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런 일도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늘이가 이우빈을 좋아했는데 이후로 이우빈이 관련된 드라마나 기사를 보면 하늘이는 아예 보지 않으려고 했다.“괜찮아요. 하늘이는 아직 어리니까 그런 건 다 잊었을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자 이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켜쥐고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성유리는 처음에는 이우빈의 매니저가 찾으러
Read more

제888화

이우빈을 발견한 박한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그리고 처음엔 어두웠던 눈빛이 점점 놀람과 억울함으로 변해갔다.성유리는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함에 서둘러 해명했다.“박한빈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랑 이우빈 씨는... 아, 맞다! 한빈 씨도 잘 알죠? 이번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이에요.”성유리는 급하게 해명하느라 말을 얼버무렸다.그때, 이우빈이 빠르게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작가님께 간단한 물건을 전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그럼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이우빈을 바라볼 뿐이었다.원래 미소를 짓고 있던 이우빈의 얼굴이 그 시선과 맞닿는 순간 점점 굳어졌다.단 2초 동안의 눈 맞춤이었지만 그렇게 짧은 순간에 분위기가 압도당한 듯했다.기세가 꺾인 이우빈의 미소는 점점 경직되어 갔다.결국, 그는 당황한 듯 성유리를 은근슬쩍 바라보았다.“먼저 가보세요.”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우빈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본능적으로 다시 박한빈을 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더 이상 이우빈을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후,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한쪽에 던지듯 놓고 소파에 앉았다.진짜 ‘황비’가 다시 자신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듯한 모습으로.물론 그렇게 나올 만도 했다. 어차피 박한빈은 지금 성유리의 남편이니까.이우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성유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떠나는 이우빈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빨랐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쟁터 한복판에 휘말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성유리는 문을 닫고 나서야 천천히 박한빈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박한빈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짱을 꼈다.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등 위로 툭툭 튀어나온 핏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지금 그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
Read more

제889화

“응?”“그 사람이 나보다 잘생겼어?”“그게 아니라...”“혹시 내 젊었을 때랑 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박한빈 씨 지금도 안 늙었어...”“그런데 왜 그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선택한 거지? 남자 주인공은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성유리는 상황이 좀 꼬여버렸다고 느꼈다.어젯밤, 그들은 격렬한 말다툼을 한 데다가 심지어 따로 잠을 잤었다.그녀는 최소 며칠은 냉전 분위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왜 대답 안 해?”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캐스팅은 제가 관여하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쓴 남자 주인공이 꼭 박한빈 씨라고 말한 적도 없고요.”“그럼 네 그림이랑 내 사진을 한번 비교해 보면...”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성유리의 작품은 늘 공개되어 왔고 출판되거나 영상으로 각색될 때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박한빈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게 부끄러웠다.“그래요. 맞다고 합시다.”하지만 박한빈이 계속해서 집요하게 쳐다보자 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그래서 어쩌라고요? 각색은 각색일 뿐이에요. 설마 배우가 돼서 직접 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죠?”“연기는 안 해. 하지만 네가 인정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성유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박한빈도 잠시 조용해졌다.이 대화는 이쯤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그렇지만 이제 그들 사이의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예를 들면 성유리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말도 안 하고 혼자 왔는지 같은 것.성유리는 천천히 손을 내렸고 박한빈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입술을 다물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살짝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엄마, 왜 내 메시지 안 봤어?”수화기 너머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성유
Read more

제890화

이곳에 다시 온 건 사실 성유리에게도 몇 년 동안 처음 있은 일이었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사회의 발전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높이 솟은 빌딩들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들.그 풍경 속에서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기억이 엉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큰 변화가 찾아와도 사람들의 생활 습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이 지역은 밤이 되면 산바람이 불어와 꽤 서늘했기에 매운맛과 강한 양념을 선호하는 문화는 여전했다.박한빈은 원래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지만 성유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주 매운탕을 먹으러 다녔다.물론 그는 여전히 맑은 국물을 선택했지만 가끔은 매운 국물에도 도전하곤 했다.그렇지만 오늘 밤 성유리는 매운탕 집 대신 내비게이션을 따라 근처의 음식 거리로 향했다.사실 전국 어디든 이런 음식 거리에서 파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서 있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성유리는 불편해하는 박한빈의 기색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 않아 하며 말했다.“이 음식 거리를 지나면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그리고 그 버스의 마지막 정류장이 예전에 제가 다녔던 학교고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꽉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가볼래?”그러다 문득 그가 물었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이 늦은 밤에 학교엔 누가 가요? 게다가... 전 못 가요.”“왜? 누가 널 보면 곤란해?”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사람이 아니고....”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인지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래서 그는 몸을 숙이며 다시 물었다.“뭐라고?”성유리는 박한빈의 귀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다들 그러잖아요. 우리 학교는 원래 공동묘지였다고. 원한 맺힌 혼령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던데... 학교를 세운 뒤에도 밤이면 돌아다닌대요.”성유리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Read more
PREV
1
...
868788899091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