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501 - Chapter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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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1화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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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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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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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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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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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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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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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박한빈은 바로 병실 밖에 서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차림이었다. 한층 더 마른 듯한 모습에 날카로워진 얼굴선, 그리고 길고 큰 체격이 주는 강렬한 압박감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그런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차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박한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언제 내 어머니까지 찾아간 거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말했다. “내 어머니가 올해 연세가 얼마인지 알기나 해?” “알아요.” “그런데도 어머니에게 그런 수술을 하게 했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늘이가 몇 살인지도 아세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살 반, 정확히는 29개월하고 7일이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금이 치료의 최적 시기라고 하더군요. 박 대표님, 제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전 그저 아이가 천천히...” 성유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원래 그녀는 그런 금기를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일이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닥치자 그녀는 그런 미신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신께 기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못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내 어머니를 강제로 수술하게 만든 이유라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성유리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술 동의서는 작성되었고 아무도 박한빈에게 수술을 강요할 수 없듯 그 역시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성유리는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말했다. “만약 내가 동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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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그렇다 해도 지금은 네 말만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이 감정서를 보여주기만 하면 어머니가 서명한 수술 동의서는 바로 무효가 될 거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 또는 슬픔,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나 놀랍다는 감정. 지금 성유리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저 가만히 서서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를 응시했다. “왜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 당신은 정말 당신의 딸이...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이 순간, 어떤 금기 따위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단 하나, 끝없는 혼란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박한빈이 하는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박한빈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왜 하늘이에게까지 이런 잔인한 짓을 하려 하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비록 박한빈이 하늘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과거 성유리가 한 선택을 증오한다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늘이는 분명 그를 아빠라고 불러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가슴 아파?”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오히려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지난 2년 넘게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왔어. 네가 나를 의심하던 그때도. 내가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난 그 아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네가 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은 깊은 저주처럼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쇠붙이로 쓴 낙인처럼 새겨졌다. 결국 성유리는 몰려오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재회 후, 처음으로 박한빈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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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그 순간, 성유리는 문득 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이식을 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던 엄마가 아니라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였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을 때, 과연 후폭풍을 생각했을까? 엄마는 그 결과로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선택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박한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지금의 성유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체면이나 존엄성, 심지어 목숨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가 살아남기만 하면 만족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한 장의 종이를 던져줬던 순간만 떠올랐다. 거기엔 박한빈의 서명이 적힌 수술 동의서가 있었다. 도대체 박한빈이 언제 서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 결국 박한빈이 원했던 건 자신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간절히 비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이걸 원한다고 말해줬더라면 이 오랜 갈등은 불필요했을 것이다.하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박한빈이 동의서에 서명하자마자 병원 측에서는 즉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수술 팀은 박한빈이 직접 섭외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집도하는 주치의는 이 수술이 마치 일반 의사가 감기를 치료하는 정도로 간단한 일이라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 전날 밤, 성유리는 잠에 들지 못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반면, 하늘이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일은 그냥 조금 길게 자는 날이라고 생각해. 깨어나면 천천히 건강해질 거야. 그러면 하늘이는 다른 건강한 친구들처럼 뛰어다니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그 말이 하늘이에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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