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박한빈은 바로 병실 밖에 서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차림이었다. 한층 더 마른 듯한 모습에 날카로워진 얼굴선, 그리고 길고 큰 체격이 주는 강렬한 압박감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그런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차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박한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언제 내 어머니까지 찾아간 거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말했다. “내 어머니가 올해 연세가 얼마인지 알기나 해?” “알아요.” “그런데도 어머니에게 그런 수술을 하게 했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늘이가 몇 살인지도 아세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살 반, 정확히는 29개월하고 7일이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금이 치료의 최적 시기라고 하더군요. 박 대표님, 제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전 그저 아이가 천천히...” 성유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원래 그녀는 그런 금기를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일이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닥치자 그녀는 그런 미신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신께 기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못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내 어머니를 강제로 수술하게 만든 이유라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성유리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술 동의서는 작성되었고 아무도 박한빈에게 수술을 강요할 수 없듯 그 역시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성유리는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말했다. “만약 내가 동의서
“그렇다 해도 지금은 네 말만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이 감정서를 보여주기만 하면 어머니가 서명한 수술 동의서는 바로 무효가 될 거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 또는 슬픔,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나 놀랍다는 감정. 지금 성유리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저 가만히 서서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를 응시했다. “왜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 당신은 정말 당신의 딸이...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이 순간, 어떤 금기 따위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단 하나, 끝없는 혼란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박한빈이 하는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박한빈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왜 하늘이에게까지 이런 잔인한 짓을 하려 하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비록 박한빈이 하늘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과거 성유리가 한 선택을 증오한다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늘이는 분명 그를 아빠라고 불러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가슴 아파?”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오히려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지난 2년 넘게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왔어. 네가 나를 의심하던 그때도. 내가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난 그 아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네가 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은 깊은 저주처럼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쇠붙이로 쓴 낙인처럼 새겨졌다. 결국 성유리는 몰려오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재회 후, 처음으로 박한빈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성유
그 순간, 성유리는 문득 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이식을 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던 엄마가 아니라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였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을 때, 과연 후폭풍을 생각했을까? 엄마는 그 결과로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선택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박한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지금의 성유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체면이나 존엄성, 심지어 목숨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가 살아남기만 하면 만족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한 장의 종이를 던져줬던 순간만 떠올랐다. 거기엔 박한빈의 서명이 적힌 수술 동의서가 있었다. 도대체 박한빈이 언제 서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 결국 박한빈이 원했던 건 자신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간절히 비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이걸 원한다고 말해줬더라면 이 오랜 갈등은 불필요했을 것이다.하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박한빈이 동의서에 서명하자마자 병원 측에서는 즉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수술 팀은 박한빈이 직접 섭외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집도하는 주치의는 이 수술이 마치 일반 의사가 감기를 치료하는 정도로 간단한 일이라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 전날 밤, 성유리는 잠에 들지 못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반면, 하늘이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일은 그냥 조금 길게 자는 날이라고 생각해. 깨어나면 천천히 건강해질 거야. 그러면 하늘이는 다른 건강한 친구들처럼 뛰어다니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그 말이 하늘이에겐 무
“그럼 아줌마도 그런 거야? 그치만 아줌마는 아직 젊잖아!”“맞아... 아줌마 정말 젊지.”그 말을 하는 성유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성하늘은 그런 성유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물었다.“그럼 난 이제 다시는 아줌마 못 보는 거야?”“맞아...”“그럼 엄마는 오늘 어디 가?”“엄마는...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배웅해주러 가는 거야.”“나도 같이 가고 싶어.”성하늘이 말했다.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다.사하나의 부모님이 모녀의 참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사하나 부모의 원망을 성유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성하늘에게 굳이 그런 상황을 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성하늘에게 ‘사하나를 죽였다’라는 오명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사하나는 성하늘의 친한 아줌마였다.그녀는 성하늘의 모든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 왔다.때때로 성하늘은 성유리보다 사하나와 더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그리고 사하나는 그런 성하늘을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다.만약 죽은 후에도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사하나 역시 성하늘이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주길 원하지 않을까?“같이 가자.”생각 정리를 마친 성유리가 성하늘에게 말했다.“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약속해. 할 수 있지?”성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아줌마가 하늘이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알지?”“응, 알아.”“그러니까 아줌마도 하늘이가 항상 행복하길 바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알겠지?”“응.”성하늘이 아주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지만 성유리는 사하나의 가족들이 그들 모녀에게 품은 원한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그들은 성유리와 성하늘이 장례식장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성유리와 성하늘이 함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사하나의 가족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성유리는 도인국에서 사하나를 처음 만났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혼자 도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그리고 사하나는 그곳에서 유학 중이었고 둘은 온라인에서 만나게 되었다. 사하는 기꺼이 성유리의 가이드가 되어주었고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함께 다녀주었다.그 당시 성유리는 끝없는 자기혐오와 우울 속에 빠져있는 상태였다.하지만 사하나는 그런 성유리의 곁에서 충실히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고 굳이 그녀의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부질없는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초반에는 성유리 역시 사하나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유학생인 줄 알았다.그런 사하나가 대기업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분명 온갖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을 테지만 사하나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부잣집 딸 특유의 거만함이라거나 불량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의리 있고 열정적이었으며 착한 사람이었다.성하늘이 태어나던 때,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딸이 어떤 사람처럼 자랐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그때, 성유리는 사하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사하나 같은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그 대답을 들은 사하나는 꽤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그때 성유리의 답변은 진심이었다.성유리는 성하늘이 사하나처럼 사랑받으며 자라 세상을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끔은 거침없이 행동해도 미움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길 원했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표현을 아끼지 않았으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어렸을 적부터 가장 바라왔던 성격의 소유자였다.성유리는 이미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딸 만큼은 사하나처럼 자라나길 바랐다.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아이가... 왜 죽어야 했을까?사하나의 어머니인 류수미가 성유리에게 물었었다. 사하나가 구출되었던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 알긴 하냐고.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그
박한빈은 성유리는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기며 말했다.“사모님,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네요.”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갑고도 매서운 기세는 이내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사민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해.”“내가 뭘 그만해? 왜? 이젠 당신까지 저 사람 눈치를 보는 거야? 박한빈, 다른 사람들은 그쪽한테 벌벌 떨지 몰라도, 난 아니야!”“내 딸이 저렇게 됐는데, 겁날 게 뭐가 있어!”박한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한 류수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사민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성유리를 이끌고 자리를 떴다.성유리의 머릿속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그저 꼭두각시처럼 박한빈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곧이어 그녀는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성하늘을 발견했다.병상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을 성유리는 이미 질리도록 봐 왔었다.성하늘이 방금 수술을 끝냈던 때였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기계에 표기되어 있던 수치들을 하루하루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류수미가 했던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성유리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류수미는 이미 잔뜩 지친 몰골로 사민혁의 어깨에 기댄 채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성유리는 같은 엄마로서 그 누구보다 류수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인지 안정된 성하늘의 심장박동을 보면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축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나 상태... 많이 안 좋은 거겠지?”“아까 어머님이 했던 말도 다 사실인 거겠지?”“그러니까, 우리 하늘이가 이렇게 빨리 구조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 덕분이었던 거야?”“난 그것도 모르고 사고 났을 때 하나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내 새끼만 걱정하고, 하나 원망만 했지. 왜
“이번 눈사태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가 꽤 많아.”박한빈이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 말했다.“지금 스키장에 인터뷰해줄 사람이 남지 않아서, 기자들도 병원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그 말에 성유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사람들이... 죽었단 말이에요?”“응,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고, 스키장 측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지 못했나 봐. 관광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아직도 행방불명인 사람들이 많아.”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웠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했던 성유리였지만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함부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박한빈이 알려준 잔인한 현실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꿨던 꿈 때문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성유리의 몸은 계속해서 떨려왔지만 그녀의 두 다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곧이어 성유리는 응급실 앞으로 도착했다.박한빈은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성유리의 눈에 빨간 불빛이 들어오던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성유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녀를 재빨리 옆으로 끌어당겼다.성유리를 향해 달려온 누군가의 매서운 손길은 그대로 박한빈의 뺨 위로 떨어졌다.“이게 무슨 짓이에요?”다른 누군가가 또 성유리를 향해 달려왔지만 금방 가로막혔다.하지만 성유리를 향해 달려오던 여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이내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왜 가만히 있던 애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이 사달이 나게 만들어! 하나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고작 26살밖에 안 된 앤데, 아직 결혼도 못 한 내 딸을!”류수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한껏 거칠고 날카로워져 있었다.그녀는 이미 모든 기운이 다 빠져버린 듯 몇 마디 더 외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녀의 남편인 사민혁이 곁에서 류수미를 부축해 주었다.성유리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아무도 이런 일이
성유리의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예전에도 박한빈에게 손을 댄 적이 있긴 했지만 온전히 박한빈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힘껏 내리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리는 온 힘을 실어 박한빈의 뺨을 쳤다.성유리의 손길에 박한빈의 뺨은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그런 박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 이미 찾았어.”그 말에 성유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그게 정말이야?”“응.”“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하늘이는 괜찮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앞으로 달려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왜 나 만나러 안 왔대? 설마 내가 찾으러 안 가서 화났대? 너 뭐 숨기는 거 있지?”“그 두 사람 지금 병원에 있대. 눈사태 날 때 산속 동굴로 피신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어서 구조대가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나 봐. 어쨌든 지금 구조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꽉 감싼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도 느린 말투에서 어떻게든 성유리를 진정시켜 보려는 정성이 느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아직도 의식은 없다는 거지?”“그래.”“목숨에 아무 문제 없는 건 맞고?”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대답했다.“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하늘이 보러 가고 싶어.”성유리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잔뜩 쉰 목에서는 여전히 거친 소리가 났다.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한빈이 말했다.“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게 좋겠어.”“난 지금 당장 보러 가고 싶다고!”방금까지만 해도 진정된 것 같았던 성유리는 다시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박한빈이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붙잡았다.“알겠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나 혼자 갈 수 있어.”“어느 병원인지는
성유리는 박한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의사를 마주한 순간,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성유리의 동공이 겁에 질린 듯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박한빈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박한빈 한 사람도 못 당해내던 성유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는 강제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투여할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이거 놔! 박한빈, 이거 놓으라니까! 내가 뭘 하든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놓으라고!”성유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외쳤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를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곧이어 의사가 준비한 진정제의 바늘이 망설임 없이 성유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이 개자식아! 박한빈, 넌 진짜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야! 내가 하늘이 찾고 싶다는데, 하늘이 찾겠다는데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네가 너무 역겨워... 역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성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몸부림치던 힘도 사라져만 갔다.그렇게 성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길도 사라졌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누르고 있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박한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래, 마음껏 역겨워해.”“난 그냥... 네가 살아있어만 주면 돼.”살아있어만 달라고?성유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만에 하나 정말 성하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유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이 모든 게 다 자신의 실수처럼 느껴졌다.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 같았다.지금 성유리는 그저 성하늘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박한빈은 대체 왜
성유리는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마음의 준비라뇨?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저는 한빈 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요.”“아, 맞다. 하나한테 전화 해봐야겠어요. 하나가 지금 하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하나는 하늘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한빈 씨는 모르겠죠, 하늘이가 착해 보여도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하늘이, 금방 걸음마 뗐을 때부터 여기저기 숨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방을 한참이나 뒤졌어요. 결국, 경찰까지 부르고 나서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애를 찾아냈죠.”“그래도 우리 하늘이 정말 착한 아이예요. 제가 그때 너무 놀랐다는 건 아는 건지, 그 후부터는 다시 저 걱정 안 시켰거든요.”“하늘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정말 약했어요. 자주 아팠고, 열이 날 때는 제가 밤새 끌어안아 줘야 했어요.”“저는 그렇게 하늘이를 계속 안아줬죠. 품에 안겼던 하늘이는 아주 작고 소중했어요. 물론 엄청 피곤했는데, 그래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랑 피가 섞인 아이였고, 제가 아이의 세상이었으니까요.”“하지만 하늘이는 몰랐을 거예요. 제 세상도 하늘이였다는 걸. 저는 정말 하늘이 없으면 못 살아요...”성유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성유리는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떨려오는 손에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왜 이러지? 하나 번호가 안 나와요.”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하나도 하늘이한테는 엄마랑 다름없는 존재거든요. 계속 연락했었는데, 왜 없지? 한빈 씨...”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힘을 실어 꽉 끌어안는 박한빈의 손길에 성유리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눈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나 여기 있어. 빨리 나 찾아봐!”즐거운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성유리의 이성을 돌려놨다.맞다... 성유리는 성하늘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성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성유리는 성하늘과 함께 수도 없이 숨바꼭질하며 놀았다.참을성이 부족하던 성하늘은 숨어 있다가도 몰래 나와 힐끔힐끔 성유리를 살펴보곤 했다.성유리 역시 매번 어디에 숨어 있을지 뻔했던 성하늘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의 행방을 묻곤 했다.그럴 때면 성하늘은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성유리가 “어렵게” 성하늘을 찾아내면 아이는 자신을 못 찾았던 엄마를 바보라며 놀리곤 했다.하지만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성하늘이 정말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는 계속해서 성하늘의 이름을 불렀다.분명 성하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엄마, 빨리 나 찾아보라니까!”“하늘아, 어딨니? 장난 그만 치고 나와. 엄마가 정말 널 못 찾겠어서 그래!”성유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성하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하늘아! 들리니? 하늘아!”하지만 그런 성유리의 말에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새하얗기만 한 눈뿐이었다.그 새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병원을 떠올렸다.성하늘이 병에 걸렸을 때, 성유리는 하얀 천장과 벽을 보며 홀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성유리는 그때마다 맹세했다. 성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항상 아이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성하늘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하늘아...”성유리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다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노란 빛이 그녀를 혼란스
여자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여자를 세게 끌어당겼다.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아이고, 내가 또 말실수했네. 너무 걱정 마요, 하늘이 분명 괜찮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도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눈사태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라면 밖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를 리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했다.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사하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감정 없이 차가운 음성 알림이 반복될 때마다 성유리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떻게 정신을 잃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눈사태가 멈추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직원들이 다급히 구조대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랐다.“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제지당했다.“언제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모님께선...”“제 친구랑 딸이 저쪽에 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거칠어져 있었고 거친 목소리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최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안 그랬으면 눈사태가 일어난 순간, 사람들이 말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을 것이다.이곳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였다.성유리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면 사하나와 성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성유리를 만난 두 사람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는 가벼운 말을 해주기만 바랐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아니었다.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