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깨어난 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보러 갔고 김서영은 그녀를 따라 아이의 병실까지 향했다. 하지만 성유리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경계심을 느꼈던 걸까, 김서영은 쉽게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하늘이를 처음 보는 날인데 서둘러 오느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려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지만 결국 끝까지 들어서지 않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티가 묻어 있었다. 김서영은 그 소리를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틈으로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의 작은 뒷모습과 동글동글한 머리와 하얀 팔이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하늘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 같았다. 하늘이의 실물을 본 김서영의 시선은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맞고 있던 수액 바늘을 뽑으려 했으나 사하나의 강한 만류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는 아직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뒤에야 성유리가 먼저 김서영에게 물었다.“이건 오늘 내가 막 받은 결과야.” 김서영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성유리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성유리는 서류에 적힌 조합 일치라는 몇 글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김서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이건 나와 아이의 조합 결과야.” “언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신 거예요?” 성유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전에 한빈이한테 얘기 들었어. 물론 나도 한빈이의 결정에 극구 반대했지만 걔 몸은 결국 본인의 것이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내린 결정을 어머니인 나조차 강요할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손녀잖아.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이고 유리 네가 그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어. 그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하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이 성유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박한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한빈의 침묵은 성유리의 숨통을 정확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쥐락펴락하는 것이 바로 전부터 박한빈의 특기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유리를 가장 아프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다. 사하나는 그녀 곁에서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미 잠들어있는 하늘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성유리는 아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성유리 씨! 유리 언니.” 사하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그녀는 성유리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성유리는 끝없이 긴 길을 걷고 있었다.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눈앞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앞에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성유리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디에서인가 나약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졌고 그녀는 급히 몸을 돌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여전히 안개는 짙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는 안개를 걷어
성유리의 말을 들은 사하나는 눈에 띄게 멍해졌다. 그녀는 성유리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몇 초가 지나서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수술을 받고 싶지가 않대.” 성유리는 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에 사하나는 즉시 이어폰을 벗으며 외쳤다. “박한빈 씨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병상에 누워 있던 하늘이를 깨웠다. 깨어난 하늘이는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 성유리는 급히 하늘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 깨웠니? 미안해.” 하늘이는 성유리와 사하나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미 사하나의 얼굴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 엄마랑 이모 싸웠어?” 하늘이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야기한 거야. 괜찮으니까 하늘이는 다시 자면 돼.” 성유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늘이의 뺨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다른 이야기를 막 하며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성유리가 오랜 시간 달래고 나서야 하늘이는 다시 잠들었고 그제야 사하나는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된 상태로 말했다. “솔직히 전 전혀 놀랍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애초부터 아버지다운 면모가 없었잖아요. 언니가 아이를 낳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가 아프다고 몇 번이나 보러 왔어요?” “박한빈 씨가 예전에 적합성 검사를 받아준 것도 병원 사람들 입을 막으려고 한 거였겠죠. 검사가 적합하지 않게 나왔더라면 그는 여전히 멋진 아버지 이미지를 유지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오니까 그냥 도망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제 와서 언니가 찾아가니까 대놓고 거부하잖아요. 이런 세상에 미친 놈을 봤나! 자기 아이를 위해 수술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늘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났을까요?” 사하나는 최대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