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281 - Chapter 290

557 Chapters

제281화

쏟아지는 폭우. 주변에는 나무들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질퍽한 진흙탕을 밟으며, 시연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꽤 먼 거리를 걸었지만, 시야가 조금씩 트일 뿐, 여전히 유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길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갈 수 있는 길은 이쪽뿐이었는데...’ 순간, 시연에게 불안이 엄습했다. ‘차에서 괜히 내렸나?’ ‘그 사람이 차에 돌아왔는데, 내가 없으면 더 큰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시연은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시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맹수? 공격적인 짐승 소리 같은데...?’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울음소리. 불길한 기운에 시연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풀숲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놀란 그녀의 발이 미끄러졌다. ‘탕!’ 총소리! “꺄악!”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가 눈에 어려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여자의 눈가가 붉어졌다. “유건 씨!” “나야.” 유건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시연을 부축하고, 다른 손으로 사냥용 총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의 총성이 바로 그 총에서 울린 것이었다. 그는 깊게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자, 일어나. 걸을 수 있겠어?” “네, 괜찮아요.” 남자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어나며, 시연은 민망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유건이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을 했고, 결국 위험한 상황까지 만들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유건은 전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무 늦었어.” ‘어떻게 네 잘못이겠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 유건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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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감사합니다, 할머니. 이제 제가 할게요.” “그래.” 할머니가 준비해 둔 방은 2층에 있었다. 유건은 시연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했고, 의자 위에는 목욕 가운과 갈아입을 옷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에서 몸 좀 풀어. 감기 들면 안 되잖아.” 그렇게 말한 후,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때, 시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유건 씨.” “응?”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요?” 유건도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난 아래층에서 씻으면 돼. 굳이 욕조에 안 들어가도 괜찮아.” “네, 알았어요.” 유건은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시연은 조용히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전신을 감싸면서,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서서히 풀려갔다. 한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온기에 몸을 맡겼다. 시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유건은 이미 씻고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덕분에 늘 단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묘하게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시연은 목욕 가운만 걸친 채였다.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얼굴, 희고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얇은 가운 아래 드러난 가녀린 두 다리. 유건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다. “빨래 가지러 온 거였어.”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좀 누워 있어. 저녁은 내가 가져올게.” “그건 좀...” ‘괜찮을까? 내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신경 쓰지 마.” 유건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말씀드렸어. 너는 아주 피곤할 거라고.”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시연의 젖은 옷을 챙겨 방을 나섰다. 조용해진 방 안. 시연은 침대에 몸을 기댔다. 몸은 무겁고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불을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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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할머니는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보르쉬, 구운 채소, 스테이크, 신선한 과일과 디저트까지. 해외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식사는 보통 명절이나, 귀한 손님을 초대했을 때 차려진다는 것을.그래서 유건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시연은 눈앞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들에도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유건은 바로 눈치챘다. “먹고 싶지 않으면 안 먹어도 돼.” “괜찮아요.” 시연이 그를 막아섰다. “어차피 뭘 먹어도 입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할머니의 정성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국부터 한 입 먹어봐.” 유건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 입이라도 더 먹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네.” 시연은 ‘음식을 약이라 생각하자’ 생각하고, 두 숟갈 정도 떠먹었다. “어때?” “괜찮아요...” “다행이네.” 유건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기 식사를 시작했다. “웩!” 갑자기, 시연이 입을 틀어막더니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시연아!” 유건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화장실에서, 시연은 변기를 부여잡고, 방금 마신 국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유건은 황급히 양치할 수 있도록 물을 떠 왔다.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자꾸 억지로 먹으려고 해?” 시연은 눈가가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죄송하잖아요.” ‘할머니께서 정성 들여 준비해 주셨는데, 한 입도 못 먹으면 실례잖아.’ “뭐가 미안해?” 유건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있잖아. 네가 못 먹는 건 내가 다 먹으면 돼.” 그러면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 알았어?” “네.” 그렇게 해서, 결국 유건 혼자 두 사람 몫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걸 조용히 바라보는 시연. 그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녀가 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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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지역도 아닌데, 무슨 방법을 쓰겠다는 거예요?” “해보기 전엔 모르지.” 유건은 능청스럽게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진짜 간다고?’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건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다.“그 슈퍼는 꽤 멀어. 차로 왕복하면, 날이 밝고 말 거야.”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 체력이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할머니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할머니, 제 아내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지.”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남편을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당신도 젊었을 때 그랬잖아요? 날 위해 뭐든 하겠다고.”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었다. “좋아, 차고에서 차를 꺼내올게.” “얘야,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비옷부터 입으렴. 공방에 있을 거야.” “네, 할머니.”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방으로 가서, 우비를 걸쳤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시연은 현관 앞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여자의 표정은 복잡하고,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나왔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유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작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가지 마요.” “응?” 유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내려와 있었어? 다 들은 거야?” ‘웃을 일이야?’ 그녀는 전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말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진지해하자, 유건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주지한이 못 오면, 넌 8시간 넘게 굶어야 해.” 그러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그걸 알면서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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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현관 앞. 유건이 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 온 뒤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촉촉하게 젖은 풀숲 사이에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차 타고 갔다 온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젖었어요?” 그러면서도, 몸을 살짝 옆으로 빼며 유건을 안으로 들였다. 유건은 커다란 봉투를 안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봉투를 내려놓고, 하나씩 정리하면서 말했다. “쌀을 샀어. 그리고 생선도.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생선찜을 좋아한다고. 식초 찍어서 먹는 거.” 그러다 문득, 말이 끊겼다. ‘언제 다가온 거지?’ 시연은 어느새 손에는 수건을 들고 유건의 앞에 서 있었다. “고개 숙여요.” “아, 응.”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시연은 조용히 유건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샤워할래요?” 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니.”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몸까지 젖은 건 아니야.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습기만 좀 찼을 뿐이야.” 그는 테이블 위의 쌀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먹을래? 밥? 아니면 죽?” “음...” 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밥을 더 먹고 싶어요.” “좋아.” 그는 직접 수건을 들어서 머리를 대충 털어낸 뒤, 조용히 쌀을 씻기 시작했다.시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유건이 피식 웃었다. “또 그 생각 하는 거지?” “어떤...?” “저 도련님이 저런 것도 해?” 시연은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 할 줄 아는 거 많아.” 그는 자연스럽게 찜기 대신, 노부부가 사용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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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쌀을 팔던 그 마트 말이야, 주인 부부가 우리나라 분들이더라.” 유건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 입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자기도 임신했을 때 그랬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이 방법을 알려주셨어.”‘그랬구나.’ 시연은 조용히 들으면서, 비 오는 깊은 밤, 유건이 낯선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리고 묘하게 간질거렸다. 이때, 고요한 공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시연은 반사적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핸드폰을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곳은 조용했고, 거리도 좁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래도 몇 마디는 들렸다. “응, 아직 Y국이야.” ‘여기가 Y국이었어?’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직 이틀 정도 더 있어야 해. 걱정하진 말고.” “너도... 몸조심해.” 유건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그 따뜻한 배려. 장소미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알겠어, 가서 이야기하자.” 전화를 끊고, 유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조금 전까지 온기가 가득했던 식탁.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따뜻한 밥과 생선이 그대로인데, 그걸 먹던 사람은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6시가 되기 전. 주지한이 도착했다. 정민환과 정기환도 함께였다. 그들은 차 두 대를 타고 왔다. 유건은 Y국을 떠날 때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기에, 한 번에 네 장을 구하지 못해서 결국 유건과 지한이 먼저 오게 되었다. 이른 시각, 노부부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건 일행은 떠나야 했다. 유건은 직접 노부부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희를 데리러 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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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민환과 기환은 다 특수부대 출신이라 두 사람의 감각이 틀릴 리 없었다. 유건은 미간을 좁혔다. ‘CA국이라...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나를 몇 번이나 쫓고 위협하고도, 또 뭔가를 하려는 거지?’ “형님...” 그때, 뒷좌석에서 기대어 자고 있던 시연이 살짝 움직였다. “그만.” 유건은 순간적으로 민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마. 지금은 안 돼.’ 민환도 즉시 눈치를 챘다. “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뒷좌석에서, 시연은 단순히 몸을 조금 뒤척였을 뿐이었다. 다행히, 깊이 잠든 듯 보였다. 유건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깼네. 다행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지저분한 일들은 시연이가 알 필요도 없어.’‘하지만... 시연이가 이 사실을 알면 날 걱정해 주려나?’ 사실, 시연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유건과 민환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누군가 고유건을 해치려는 건가?’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유건이 칼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저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다. 시연은 재벌가의 발이 넓을 거라 생각했다.‘하긴, 고유건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살인범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을 거야.’ 그런데, 아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그 배후를 찾지도 못한 거야?’이 사실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문제 없이 ‘웰스'에 도착했다. 주지한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 관련된 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 일행은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을 둘러보았다. ‘웰스’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다양한 첨단 산업에 기여해 왔다. “이 학생 말이에요.” 책임자인 30대의 여성은 최근 사례를 소개했다. “우주군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무려 8개 연구소에서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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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도시로 들어설 무렵, 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형수님을 먼저 내려드릴까요?” ‘당연한 걸 왜 묻지?’유건은 이런 질문 전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연이 먼저 거절했다. “아니에요.” “일단 유건 씨가 머무는 숙소로 가요. 괜히 집까지 돌아갈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는, 병원에 좀 들러야 해요.”지동성은 아직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아버지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웰스'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을 그녀는 직접 전해야 했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유건의 미간이 본능적으로 좁혀졌다. 그는 반대하고 싶었다. “시연아...”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유건의 의도를 미리 읽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건이 ‘웰스’까지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두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유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치 쓴 약을 삼킨 것처럼.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렵게 말했다. “그래, 약속 지킬게.” 그러고는 민환에게 지시했다. “앞 사거리에서 내려줘.” “네, 형님.” 차가 멈추고, 시연이 내렸다. 문을 닫고, 그녀는 유건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시연은 ‘잘 가’라고 했고,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는 하지 않았다.때로는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보다, 더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 ‘잘 가’라는 말이었다.언젠가 다시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 그렇게 덤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픈 법이었다.“그래. 잘 가.” 유건은 아주 작게,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읊조렸다. 차가 움직였다. 그는 거울을 통해, 시연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느낌. ‘아... 나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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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시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는 받지 않았다. 이어서 곧바로 주지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역시, 같은 결과.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연의 이마 한가운데 주름이 깊게 잡혔다. ‘불길해.’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하지? 전화를 계속 거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저 앉아서 속만 태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야.’ ‘망설일 필요가 없겠어.’이렇게 생각하자, 시연은 핸드백을 챙겨 곧장 Mavis호텔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길을 가는 내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불안감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직접 그곳을 마주했을 때,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Mavis 호텔의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짙은 연기가 솟구쳤고, 불길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하늘을 향해 타올랐다. 사람들의 비명,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시연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지금 내가 이성을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손에 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그 기도는 닿지 않는 듯했다. 시연이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이미 통제선이 쳐져 있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며 대피를 돕고 있었다. 시연은 사람들 속에서 호텔 직원을 찾았다. 그리고, 금발의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 그녀는 서둘러 다가가, 그 남자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호텔 직원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행이네요!” “제 친구들이 이 호텔에 묵고 있었어요.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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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간호사는 손에 든 명단을 빠르게 넘겨보며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들은 체크 표시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Cem 씨는... 체크 표시가 없네요.” 즉, 유건은 아직 여기에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시연은 손에 힘을 주며 간절히 물었다. “혹시... 구급차 안을 볼 수 있을까요? 제 친구가 있을지도 몰라서요.” “네, 가능합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응급 구조 중이니 방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네, 물론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에는 혼란과 슬픔이 가득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절망과 비통함이 교차하는 공간. 시연은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구급차 하나하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유건은 없었다. ‘이상해! 간호사 명단에 없다면, 여기 있어야 하는데.’ ‘혹시, 기록이 잘못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병원으로 이송된 걸까?’ 그때 옆을 지나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젊은 여자애가 중년 여성을 부축하고 있었던 것. 엄마와 딸인 것 같고, 딸은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연의 귀에 스친 모녀의 대화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의 곁을 떠났어. 이제 받아들여야 해...” “아냐... 아직 아냐...” “엄마...” “...”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눈을 뜨자, 조금 전 시연과 스친 젊은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네?” 여자애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혹시 가족을 찾고 계세요?” “네.” “만약 병원에도 없고, 구급차에도 없다면...” 그녀는 조용히 남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곳은 다른 곳보다 더욱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말을 끝맺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애가 의미하는 바를.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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