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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1화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손에는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익숙한 감촉에 그녀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문해미가 아주 오래전에 그녀에게 남긴 팔찌였으니까...문해미가 실종된 후 팔찌를 볼 때마다 생각날까 봐 그녀는 팔찌를 이곳에 맡겨두고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그녀의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말이다.팔찌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문해미는 혼자 놀고 있었다. 하민이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무료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문해미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과 비슷했기에 혼자서 놀고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지금처럼.“엄마, 저 왔어요. 이거 혹시 아직도 기억해요?”“팔찌... 시은이한테 준 팔찌.”문해미는 그녀의 손에 있던 팔찌를 가져갔다. 여전히 팔찌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시은은 2초간 멍해 있더니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버렸다.“엄마, 기억하고 계셨군요.”문해미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였고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줬던 팔찌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네, 엄마가 저한테 준 팔찌에요. 엄마, 조금만 더 자세히 보세요. 제가 이걸 그동안 금은방에 맡겨두고 있어서 그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양시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문해미는 팔찌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시은의 손을 잡았다.문해미는 팔찌를 그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시은아, 껴.”양시은의 목이 메어왔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입을 벌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적어도 문해미의 앞에서는 목 놓아 울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해미가 걱정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문해미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문해미의 목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온화함이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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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2화

하민이는 낮에 친구들에게 외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묻기도 했었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자신의 외할머니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외할머니는 다른 외할머니와 다르게 아이처럼 행동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멀지 않은 곳에 함께 있는 문해미와 하민이의 모습에 양시은은 그제야 마음 놓고 장을 보았다. 대충 다 고르고 두 사람을 찾으러 계산대로 갔을 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이 할망구가 지금 남의 물건을 훔치고 있어요! 얼른 도둑 잡아요!”“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희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주머니가 물건을 이쪽으로 던지니까 제 외할머니가 주워서 본 거잖아요!”하민이는 논리를 따지며 맞섰다. 하지만 상대는 중년의 여성이었고 딸을 데리고 있었다. 다 큰 어른으로서 아이의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던지라 여자는 모든 잘못을 문해미에게 돌렸다.“난 아이를 봐야 했다고. 물건도 들고 있어서 핸드폰을 잠시 거기에 둔 거야. 아니, 내 핸드폰을 가져간 건 네 할머니인데 왜 적반하장이니?”여자는 차갑게 비꼬아 말했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여자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다들 누가 옳은 건지 판단 좀 해주세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다 큰 어른이 어떻게 핸드폰이 뭔지도 모르고 가져갈 수 있겠어요!”“그렇네요. 물건을 훔쳤으면서 적반하장이네요.”“꼬마야. 이번 일은 네 할머니 잘못이란다.”조급해진 하민이는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는 핸드폰을 돌려주려고 한 거라고요!”그러자 여자는 더 가소롭게 여기며 웃었다.“그래. 그 핸드폰이 내 거라니까.”무슨 말을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었던 하민이는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억울했고 살면서 자신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었던지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옆에 서 있는 문해미를 보며 겨우 눈물을 참았다.‘울면 안 돼. 엄마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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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3화

여자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하, 지금 그런 거로 날 협박하는 거예요?”“이건 협박인지 아닌지는 그쪽의 행동에 달린 거죠. 먼저 멋대로 물건을 던진 건 그쪽이잖아요.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는 건 미끼를 던진 거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죠. 그쪽이 멋대로 던진 물건을 돌려주는 건데 주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죠?”양시은은 잔뜩 비꼬며 말했다. 양시은을 상대로 하는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달라졌다.“지... 지금 잘못을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예요?! 그쪽 같은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네요! 잘못을 했으면서 반성의 기미도 없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니!”“우리 엄마한테 멋대로 말하지 마시죠.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쪽을 욕한 적 한 번도 없는 거로 아는데요. 이미 충분히 참고 있는 건데 자꾸 화를 돋우면 제가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그쪽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어요?”양시은은 헛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는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딸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여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양시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는 말라도 너무 말랐고 머리카락마저 푸석푸석했다.여자에게 밀쳐버린 여자아이는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눈을 비비며 울기 시작했고 여자는 양시은의 탓을 해댔다.“그쪽 때문에 내 딸이 울잖아요! 당장 돈 물어내요!”양시은은 여자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너무도 능숙한 여자의 모습을 보니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일부러 일을 만들고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너무도 능숙한 모녀의 모습에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양시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너무도 불쌍했지만 그녀는 보살도 아니었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기꾼에게 동정을 베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바로 신고했다.“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우리 경찰서로 가서 다시 얘기하죠.”그러자 여자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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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4화

이런 일은 사실 많았고 일일이 다 도와줄 수 없었다. 게다가 남의 집안일이었으니 끼어들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예전에 했던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세상 모든 엄마가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이기적이고 나쁜 엄마는 꼭 존재했다.양시은은 오늘 일로 하민이에게 영향을 줄까 봐 걱정되었다. 아이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격과 생각이었으니까.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되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뒤 살짝 떠보며 달래주려고 했지만 하민이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의젓했다. 오히려 양시은을 더 놀라게 했다.“저도 알아요. 그 누나 엄마는 나쁜 엄마라는 것을요. 하지만 엄마는 아니잖아요. 전 그 아주머니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양시은은 아이의 말에 한참 멍하니 있다가 대견하다는 듯 보며 웃었다.문해미의 상태는 안정되었고 더는 밤에 깨어난 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양시은은 그제야 회사로 출근했다.휴가 시간이 긴 양시은을 부러워하던 비서가 말했다.“양 비서님, 휴가 시간이 엄청 기네요. 저도 긴 휴가를 만끽하고 싶은데 대표님께 말씀 좀 드려주시면 안 될까요?”더는 사무실에 박혀 일하고 싶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다. 양시은은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직접 얘기해 보세요.”비서는 자신이 말을 꺼내면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휴, 됐어요...”“양 비서님, 이 자료 좀 대표님께 전해드려 주실래요?”이때 여직원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럴게요. 어차피 지금 한가하던 참이었거든요. 주세요.”자료를 받은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보석항?”양시은은 자료에 적힌 세 글자를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비서도 힐끔 보더니 이내 그녀가 들고 있던 자료를 가져왔다.“보석항 프로젝트 이렇게나 빨리 시작한다고요? 기획안은 지난해에 금방 만든 거잖아요. 실행하려면 적어도 이번 연말 즈음이 되어야 할 텐데요.”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이으며 미소를 지었다.“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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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5화

양시은은 그저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우연히 지나가다가 나태욱도 이 프로젝트를 맡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 프로젝트는 나도현 대표님이 맡으신 거 아닌가요? 왜 하나의 프로젝트에 두 명의 담당자가 생긴 거죠?”비서는 주위를 힐끔 살피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간 후 작게 말해주었다.“회장님이 지시하신 거예요.”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미간을 확 구겼고 이틀 전에도 지금도 늘 담담했던 나도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정말로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 건가? 아니면 숨기고 있었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건가?'‘회장님이 무슨 속셈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양시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녀의 직감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기에 바로 나도현을 찾아갔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그는 그녀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마침 잘 왔네. 할 말이 있었거든. 내일 진성으로 출장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이틀 동안 하민이 맡겨둘 곳을 알아봐.”“그렇게나 급한 거야?”“보석항 프로젝트의 을이 진성에 있거든.”양시은은 나도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가 왜 자신도 데리고 가려는 지에 대해 딱히 묻지 않았다.만약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반대했을 테니까. 그의 비서로서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에 빠질 수 없지 않은가. 당연히 따라갈 것이다. 하민이도 맡길 곳이 있었기에 걱정되지 않았다.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당연하게 누군가를 떠올렸다.“그럼 사모님께 말씀드려서 하민이를 며칠 동안 봐달라고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고 양시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냥. 엄마가 떠올라서...”하민이를 언급하고 나니 보살핌이 필요한 또 다른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이는 박은희에게 맡길 수 있어도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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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6화

양시은은 코끝이 시큰했지만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문해미는 왜 말할수록 양시은이 점점 더 힘들어하는지 몰라서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거듭 말했다.“울지 마... 시은아, 울지 마.”양시은은 어릴 적 그녀가 늘 이렇게 말하던 걸 떠올리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살짝 웃었다.“저 안 울어요.”그리고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그녀가 울음을 멈추자 문해미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만약 제가 엄마를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면 앞으로 저나 하민을 자주 못 보시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혹시 저를 원망하시진 않을까 해서...”“어디 가는데?”문해미는 더욱 당황했다.그런 그녀를 보자 양시은은 곧바로 마음을 접고 서둘러 달랬다.“아니에요. 그냥 농담이었어요. 엄마, 얼른 가서 하민이랑 계속 놀아주세요.”문해미는 하민과 즐겁게 놀았다. 가끔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양시은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고민은 나중에 돌아와서 다시 해야겠다 싶었다.아침 일찍, 공항.그들은 이른 비행편을 탔고 짐도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들어 줘서 크게 번거롭지는 않았다.곧 비행기가 이륙했다.이륙 전, 양시은은 한참 동안 전화를 했다. 상대는 하민이었다.어제 오늘 아침 일찍 진성으로 이틀간 출장을 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속상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그래도 혹시나 그가 더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 걱정돼 영상통화를 끝낸 뒤 슬퍼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양시은은 안심했다.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던 양시은은 이마를 누르며 불편함을 느꼈다. 곁눈질로 보니 나도현 역시 뭔가를 주무르고 있었는데, 그가 누르는 곳은 위였다.그녀는 문득 떠올랐다.‘맞다, 깜빡했네. 도현 씨는 위병이 있지.’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기저기 뒤적였다. 떠나기 전 위약을 챙겼던 게 기억났다.“혹시 따뜻한 물 한 잔만 줄 수 있어요?”비즈니스석 승무원은 무척 친절하게 곧바로 따뜻한 물을 건네줬다.양시은은 물과 약을 들고 가서 말했다.“도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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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7화

나도현은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양시은은 일부러 그를 흔들어 깨우려다 무심코 살짝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음이 약해져 더 이상 깨울 수가 없었다.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 결국 깨우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도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어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둘은 곧장 예약해 둔 호텔로 들어갔다.양시은의 방은 나도현의 방 바로 옆이었고, 다른 비서는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밤에 샤워를 하던 양시은은 물안개가 가득한 욕실 분위기에 젖어 있었는데 씻는 도중 갑자기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고장 난 건 아니고 그냥 물이 끊긴 것 같았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다.“고급 호텔에 물이 끊기는 날이 다 있네.”양시은은 중얼거리며 몸을 대충 닦고 나와 옷을 갈아입으려 했지만 트렁크가 보이지 않았다.방 안을 두 바퀴 정도 돌다가 문득 떠올랐다. 트렁크는 비서가 관리했는데, 아까 나도현의 것만 건네받고 그녀의 것을 깜빡 잊었다는 걸 말이다.양시은은 난처해졌다. 이 상태로 비서를 찾으러 갈 수는 없었다. 비서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고 투덜댔으니 전화도 안 될 게 뻔했다.‘그렇다면 누구한테 부탁하지?’망설이다가 그녀는 나도현을 떠올리고 전화를 걸었다.“도현 씨, 지금 시간 괜찮아? 나 트렁크를 깜빡하고 비서한테 두고 온 것 같아서...”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도현이 다짜고짜 끼어들었다.“내가 가져왔어. 문 열어. 지금 줄게.”깜짝 놀란 양시은은 수건만 둘러맨 상태로 문을 열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줘.”나도현은 그녀가 몸을 문 뒤에 숨기려는 걸 보고 픽 웃었다.“왜 그렇게 꼭꼭 숨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해? 그리고 그런 자세로는 트렁크 못 들어.”그가 손을 살짝 쳐내자 양시은도 기분이 상했다.“이 상태로 밖에 나가라고?”“내가 들어가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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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8화

양시은은 잠시 멈췄다. 서로 눈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묘하게도 그녀는 나도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순간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가시 탓에 나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비서도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딱 꼬집어 말은 못 했다.“양 비서님, 대표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둘 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던데.”비서는 머뭇거리다 결국 물었다.양시은은 서류를 재빨리 훑어보는 남자를 힐끗 본 뒤 곧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일을 하는 중인데요.”비서는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뾰족한 증거도 없으니 더 묻지 않고 넘어갔다.“골프 칠 줄 알아?”갑자기 나도현이 물었다.양시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조금은 치는 데 공이 자꾸 엉뚱한 데로 날아가.”나도현은 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공이 엉뚱한 데로 날아간다는 건 사실상 못 친다는 얘기 아닌가 싶었던 모양이었다.이내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서며 말했다.“괜찮아. 내일 하루 시간 내서 골프 가르쳐줄게.”양시은은 그 얘기에 괜히 내일이 기대됐지만 스스로 알아채지는 못했다.골프장.양시은은 공을 몇 번 쳐 봤지만 하나같이 형편없었다.나도현은 끼어들 기색 없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공이 점점 더 터무니없이 날아가자 도저히 참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무릎을 살짝 톡 치며 말했다.“폼이 잘못됐어. 그리고 하체에 힘을 줘야 해. 안 그러면 방금처럼 계속 빗나갈 수밖에 없지.”양시은은 비로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곧 나도현이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손을 잡아 자세를 교정해 주자 공이 잘 들어가기 시작했다.“그럼 선물이야.”“도현 씨?”양시은이 고개를 들자 검은색 레이스 장갑 하나를 든 나도현이 보였다.“공을 잘 쳐 준 기념이자, 내일 밤 여기서 열릴 연회 때도 끼면 좋을 것 같아서.”멍하니 있던 양시은은 이제야 선물을 준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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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9화

이번에는 양시은을 주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번 연회는 참가자들이 직접 골프를 치는 시간이 있다는 점이 남달랐다.잘 치면 선물을 받게 되지만 참석자들은 대부분 재벌이어서 선물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저 흥이 나면 잠시씩 치는 정도였다.마침 누군가 공을 멋지게 넣었는지 연회장은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였다.우아한 인상의 중년 남자 지천우가 그쪽을 힐끗 본 뒤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걸었다.“나 대표님, 함께 오신 분과 함께 내려가서 한 번 쳐 보시겠습니까?”그가 말을 건네는 동안 양시은은 조용히 그를 살폈다. 그리고 바로 그가 프로젝트의 담당자임을 짐작했다.지천우의 질문에 양시은은 서두르지 않고 시선을 거두며 정중하게 답했다.“지 대표님께서는 소문대로 골프를 좋아하시는군요. 하지만 재능이 없어서 괜히 민폐만 끼칠까 봐 오늘은 자제하겠습니다.”지천우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양 비서님께서는 참 솔직하시군요.”듣기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안 좋게 말하면 직설적이라는 뜻이다.지천우는 워낙 온화한 분위기의 사람이라 이 정도 말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그러고 나서 그는 나도현을 바라봤다. 양시은이 잔에 담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려던 찰나 나도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그럼 내려가서 한 번 쳐 보죠.”그 한마디에 양시은은 거의 와인을 뿜을 뻔했다. 나도현이 실제로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지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나도현이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으니 적극적으로 호응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던 모양이다.결국 나도현은 필드로 내려갔다. 직원이 가져다준 골프채를 건네받고 여유롭게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선 것이다.지천우는 잠깐 양시은을 쳐다보다가 멋쩍게 웃었다.“나 대표님이 골프를 잘 치시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제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양시은은 그의 속을 모르는 척 미소 지었다.“원래 나 대표님이 잘하는 게 좀 많긴 하죠.”지천우는 그녀가 나도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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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0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양시은은 단숨에 누군지 알아차렸다.고개를 돌리니 나태욱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현과 닮은 부분이 조금 있었지만 훨씬 제멋대로고 거친 인상이었다.양시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현과 비슷한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지천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아, 나태욱 대표님이시군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나태욱이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를 나태욱 대표님이라고 이름을 전부 부르며 나도현과 구분해 왔다.나태욱은 지천우가 의미심장하게 건넨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늦게 왔다고 해도 손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골프장에 내려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그, 그렇긴 하죠...”지천우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난처해했다.‘나태욱 씨 왜 저러지? 지 대표님 체면을 깎아서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아무튼 허락을 받은 나태욱은 직원에게 골프채를 받아 들고 코스 안으로 갔다.그때 나도현도 코스에 남아 있었다. 두 형제가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지만 서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그들의 등장에 현장 분위기는 한층 팽팽해졌다.양시은 역시 마음이 조여들었다. 아래쪽에 있는 나도현과 나태욱을 번갈아 보며 어느 쪽이 이길지 몰라 긴장됐다.물론 속으로는 나도현이 이기길 바랐다.그때 나태욱이 공을 멋지게 쳐 냈다. 관중이 환호하자 그는 의기양양하게 한쪽을 보며 물었다.“형 기록은 몇 개예요?”옆에 있던 누군가가 대신 알려 줬다.“일곱 개요.”나도현은 골프채를 툭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코스를 빠져나가려 했다.마침 걸음을 떼는 순간 나태욱이 그를 불러 세웠다.“왜 그렇게 서둘러요? 설마 지실까 봐 도망가시는 거예요?”나도현은 그 말에 잠시 멈춰 섰다.그 사이 나태욱은 다시 몇 차례 스윙을 날려 공을 넣었다. 마지막 공을 치려 할 즈음 나태욱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에 제가 형 기록을 깰 것 같네요.”나도현은 그가 잡은 자세를 보고 눈에 비웃음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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