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양시은은 단숨에 누군지 알아차렸다.고개를 돌리니 나태욱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현과 닮은 부분이 조금 있었지만 훨씬 제멋대로고 거친 인상이었다.양시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현과 비슷한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괜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지천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아, 나태욱 대표님이시군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나태욱이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를 나태욱 대표님이라고 이름을 전부 부르며 나도현과 구분해 왔다.나태욱은 지천우가 의미심장하게 건넨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늦게 왔다고 해도 손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골프장에 내려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그, 그렇긴 하죠...”지천우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난처해했다.‘나태욱 씨 왜 저러지? 지 대표님 체면을 깎아서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아무튼 허락을 받은 나태욱은 직원에게 골프채를 받아 들고 코스 안으로 갔다.그때 나도현도 코스에 남아 있었다. 두 형제가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지만 서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그들의 등장에 현장 분위기는 한층 팽팽해졌다.양시은 역시 마음이 조여들었다. 아래쪽에 있는 나도현과 나태욱을 번갈아 보며 어느 쪽이 이길지 몰라 긴장됐다.물론 속으로는 나도현이 이기길 바랐다.그때 나태욱이 공을 멋지게 쳐 냈다. 관중이 환호하자 그는 의기양양하게 한쪽을 보며 물었다.“형 기록은 몇 개예요?”옆에 있던 누군가가 대신 알려 줬다.“일곱 개요.”나도현은 골프채를 툭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코스를 빠져나가려 했다.마침 걸음을 떼는 순간 나태욱이 그를 불러 세웠다.“왜 그렇게 서둘러요? 설마 지실까 봐 도망가시는 거예요?”나도현은 그 말에 잠시 멈춰 섰다.그 사이 나태욱은 다시 몇 차례 스윙을 날려 공을 넣었다. 마지막 공을 치려 할 즈음 나태욱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번에 제가 형 기록을 깰 것 같네요.”나도현은 그가 잡은 자세를 보고 눈에 비웃음이 스
나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차키를 그녀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쓸모없어.”겉으로는 무심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받았다.차가 한 대 있으면 좋은 일이었다. 굳이 사람을 불러 태워 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고 하민의 등하교에도 훨씬 편하니까.“그리고 우승자에게는 약속대로 보석항 프로젝트를 드리겠습니다.”뜻밖에도 추가 보너스가 따라왔다.양시은은 깜짝 놀랐지만, 나도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는 지천우에게 몇 마디 인사치레 말을 건넨 뒤 곧장 양시은과 함께 돌아갔다.차 안에서 양시은은 참다못해 물었다.“너 혹시 알고 있었어?”“뭘? 아, 지 대표가 연회를 연 이유 말이야? 협력 파트너를 선별하려는 목적 아니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지.”나도현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눈빛이 차분하고 담담했다. 마치 모든 걸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스쳤다.‘확실히 도현 씨는 이런 면에서 능숙해. 회장님이 어떻게든 회사에 붙잡아 두려 하는 이유가 있지.’원래 출장 일정은 사흘이었지만 단 하루 만에 프로젝트를 따내서 당연히 바로 돌아갈 줄 알았다.그런데 이번에는 나도현이 해변을 아예 통째로 빌려 놓았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그들이 묵은 곳은 바다가 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가면 바로 호텔 소유의 전용 해변을 볼 수 있었다.아침 일찍 호텔 지배인의 안내를 받고 아래로 내려온 양시은은 깜짝 놀랐다.“누가 저를 불렀다고요? 이 해변을 정말 다 빌렸어요?”“네, 양시은 님.”호텔 지배인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귀빈 대접을 계속했다.“함께 오신 나도현 님께서 이미 아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양시은 님만 내려가면 된다고 하시네요.”‘도현 씨는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호텔 지배인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양시은은 괜히 어색해서 발끝이 오그라
찬찬히 생각해 보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양시은은 옆에 있는 나도현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살짝 뭉클해졌다. 문득 그가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그들은 진성에서 하루 더 머무른 뒤 다음 날 비행기로 귀국했다.나도현은 겉으로는 티를 안 내도 회사 일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고, 양시은은 문해미와 하민이 신경 쓰였다.집에 도착하자 하민은 무척 신이 나서 달려왔다.“엄마! 돌아오셨어요!”양시은은 폴짝 뛰어오르는 하민을 간신히 받쳐 들고 약간 힘들어하며 말했다.“하민아, 조심해야지. 엄마가 널 못 받으면 어떡해?”하민은 그제야 한 발짝 물러서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엄마...”“괜찮아. 우리 하민이가 건강한 게 엄마는 제일 좋아.”양시은은 아이를 달래듯 말해 주었다.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문해미의 상태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양시은은 바로 문해미를 모시고 검진을 해 봤다.정밀 검진 결과, 의사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환자분 뇌 손상 부위가 스스로 회복하려고 하는 징후가 보여요. 적절한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앞으로 천천히 호전될 겁니다.”정확한 기간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양시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바로 도우미에게 며칠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문해미의 증세가 좋아진 원인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도우미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특별한 건 없었어요. 다만 악몽을 자주 꾸셔서 깨어나실 때마다 평안 팔찌를 꼭 쥐고 사모님 이름을 부르시고는 했죠.”그 이야기를 듣자 양시은은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하지만 곧 좋아지신다면 그걸로 됐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도우미가 방을 나가자 하민이 다가오더니 약간 머뭇거리며 물었다.“엄마, 외할머니는 어디가 편찮으신 거예요?”양시은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하민이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하민아, 너 그거 알고 있었어?”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양시은은 더욱
짧은 몇 마디의 대화로 양시은은 여러 번 놀랐다.“그럼 나태욱 씨는 어떻게 된 거야?”“집안에서 입양한 양자 같은 거지. 근데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몰랐던 사실임이 분명했다.나용민이 그런 결정을 한 이유는 결국 그에게 경쟁 상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결국 그와 나태욱 둘 다 승자가 아니었다.양시은은 약간 불안해졌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오랫동안 경쟁을 벌인 상대가 사실 수련용 도구 같은 거였다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무언가 위로의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나도현은 담담히 말했다.“예전 같으면 벌써 아버지를 추궁하러 달려갔을 거야. 근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아.”“왜?”양시은의 심장이 반 박자 늦게 뛸 정도로 놀라 무심결에 물었다.나도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옮겼다.“이제는 화낼 이유가 없어. 내가 신경 쓰는 게 달라졌으니까.”예전에는 변호사 일을 중시했기에, 최정숙과 나용민이 그의 인생에 칼을 들이밀면 분노가 치밀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양시은뿐이다. 나용민이 뭘 하든 전혀 동요가 없었다. 양시은에게 해를 끼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줄 생각도 없었다.주변이 조용해졌다.마치 둘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만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양시은은 어느새 얼굴이 달아올라서 입을 뗄 듯 말 듯 머뭇거렸다.그런데 나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날 호텔에서 했던 말 기억하지? 꽤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이제 답 좀 해 줘야 하지 않아?”‘답?’양시은에게는 참 낯선 단어였다.아주 오래전에 한 번쯤 들어봤지만, 그때는 최정숙이 내민 6억 원과 차가운 현실 앞에서 모든 게 무너져 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 말을 다시 듣게 되다니 말이다.양시은은 갑자기 말을 잃었다.“잘 모르겠어...”“그건 답이 아니지. 긍정이든 부정이든, 난 네가 확신을 갖고 말해 주길 원해.”나도현이 다시 한번
눈 밑에 다크서클이 선명한 어떤 여직원이 조용히 물었다.“양 비서님은 혹시 혼나 본 적 없어요?”양시은은 무심코 대답했다.“없는데요...”그녀는 말을 내뱉자마자 실수했다 싶었다.역시나 직원들의 눈빛이 반짝였고 다들 우르르 몰려와 그녀에게 이러쿵저러쿵 물어대려 했다.결국 양시은은 노트북을 안은 채 직원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큰일 날 뻔했네. 사무실에 더 있긴 힘들 것 같아.’아직 처리하지 못한 자료가 남아 있어서 양시은은 응접실 하나를 골라 마저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안쪽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나도현이 보였다.그 역시 노트북을 들고 있었고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양시은은 발을 들여놓았다가 곧바로 뺐다.“잘못 들어왔어, 미안.”나도현이 그녀를 불러세우며 매서운 시선으로 물었다.“양시은, 왜 나를 피해 다니지?”양시은은 대답을 망설였다.며칠 전 그가 건넨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피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이다.하지만 이미 꽤 오래 피해 다닌 터라, 나도현도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한발 다가섰다.“거절해도 괜찮아. 근데 도망치는 건 뭐야?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대?”그가 뭔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은 양시은은 해명하려 했지만 목이 턱 막혀 말이 안 나왔다.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결국 나도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시간 준다고 한 게 강요한다는 말은 아니었어. 제발 나를 피하지 말아 줘.”그 한마디에 양시은은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굳이 그를 피해 다니지 않았다. 어떻게든 평상시처럼 대하려 애썼다.가장 변화를 실감한 건 회사 직원들이었다. 전에는 며칠 간격으로 불호령이 떨어져서 다들 전전긍긍했지만, 양시은이 더는 그를 피하지 않자 기분도 한결 나아졌는지 여전히 무표정하긴 해도 전보다는 훨씬 온화해졌다.사람들은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일 지경이었다.양시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일절 말하지
요즘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도현은 업무를 정리한 뒤 곧장 양시은을 찾으러 갔다.그런데 오늘 양시은은 회사에 오지 않았다. 그녀는 하민을 데려오기 위해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린 하민 혼자 병실에 두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바닥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막 나가려던 참에, 마침 나도현이 돌아왔다.그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녀를 보며 다가와 손을 잡았다.“잘 됐다. 준비 다 됐지? 지금 같이 갈 데가 있어.”“오늘 꼭 가야 돼?”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양시은은 하민을 데리러 가는 게 가장 급했다.“나중에 가면 안 될까? 오늘은 하민이부터 데려오고 싶어. 이제 하민이도 널 받아들였고, 아빠라고 부르겠다고 했잖아. 집에 데려와야 더 좋은 환경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어차피 하민은 수술을 마치고 이미 회복했으니, 앞으로는 몸조리만 잘하면 돼서 더는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양시은은 조만간 하민에게 나도현의 정체를 얘기할 생각이었다.그렇다면 지금부터 부자가 함께 지내면서 정을 쌓아야 나중에 진실을 말했을 때 하민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네가 애 걱정하는 거 이해해. 하민이는 내 아들이기도 해. 나도 하민이가 신경 쓰여. 근데 오늘은 우선 나랑 갔다가 다음에 같이 병원에 가서 하민이를 데려오면 되잖아. 둘 다 놓치지 않을 수 있어.”나도현은 조금 고민하다 이렇게 절충안을 내놓았다.사실 그에게는 오늘 양시은을 위해 준비해 둔 깜짝이벤트가 있었다.이걸 실행하지 않고 넘어가면 괜히 허탈하기만 할 것이다.“그래, 그럼 빨리 다녀오자.”양시은은 잠깐 고민하다가 동의했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리고 곧장 그녀를 데리고 맨 위층의 웨딩숍으로 향했다.양시은은 가게 안에 진열된 웨딩드레스를 보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놀란 눈길로 나도현을 쳐다봤다.“갈 데가 여기였어? 여긴 웨딩드레스 파는 곳이잖아. 우리 아
이런 분위기에서 양시은은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직원의 도움으로 그녀는 금세 머메이드라인의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직원이 커튼을 열어 주는 순간 나도현의 눈이 반짝였다.원래도 양시은이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너 진짜 예쁘다.”“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 같아요. 드레스가 맞춤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리시네요.”직원 역시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양시은 자신도 드레스가 괜찮아 보였다.‘정말로 도현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그렇게 생각하다가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손님, 다른 디자인 드레스도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여러 벌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거든요.”직원은 다른 스타일들을 권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벌 입으나 여러 벌 입으나 마찬가지일 테고, 여러 스타일을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다음에는 무거운 장식이 많은 긴 트레인 드레스를 골랐는데, 갈아입기가 까다로워서 직원이 도와줘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그 틈에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주려고 밀크티를 사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예상보다 훨씬 더 길게 줄을 서야 했다.양시은이 어렵게 드레스를 다 입고 나왔을 때, 나도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마침 그때, 임다혜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다. 그리고 정말로 양시은이라는 걸 확인했다.“이 드레스에는 세트 베일이 있어요. 스톤이 많이 박혀 있는데, 전부 손바느질로 하나하나 고정해 둔 거라 아주 튼튼해요. 그것도 한 번 착용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직원은 그들이 실제 구매력이 있다고 봐서 더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나도현이 아까부터 양시은을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도 한몫했다.임다혜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임다혜는 매서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바로 손을 뻗어 양시은의 웨딩드레스를 벗기려 했다.하지만 양시은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임다혜의 손목을 잡아 힘껏 밀쳐 내자, 임다혜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며 자칫 넘어질 뻔했다.“양시은 씨, 지금 나한테 손을 댔어요?”임다혜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평소 나도현의 앞에서 조심스러워 보이던 양시은이, 이제는 나도현이 보호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오만하게 군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양시은은 나도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최정숙의 마음마저 돌려놓아 그녀가 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임다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바로 다시 달려들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시은이 몸을 살짝 비키자 그녀는 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임다혜는 서경 그룹의 금지옥엽 같은 존재다.집안 배경도 양시은보다 훨씬 우위였고, 한때는 최정숙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모든 걸 빼앗긴 느낌이었다. 게다가 양시은에게는 아들까지 있으니 그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꼴이었다.지금처럼 추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까지 들키자, 임다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양시은 씨,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죽여 버릴 거라고요!”대낮부터 이런 소리를 내뱉는 데도 양시은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임다혜와 치고받을 생각까지 했는데, 그 전에 나도현이 밀크티를 들고 나타났다.나도현은 성큼성큼 달려와 양시은의 앞을 막아서며 임다혜의 손목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임다혜는 뿌리치듯 내던져져 버렸다.나도현은 급히 돌아서서 양시은을 확인했다.“괜찮아? 다친 데 없어?”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이 광경을 지켜본 임다혜는 슬픔이 극에 달했다.“도현 씨, 저 기억 안 나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겉으로 나도현은 아버지의 계략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양시은 때문이었다.더구나 그는 원래부터 임다혜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지금은 더더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