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분위기에서 양시은은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직원의 도움으로 그녀는 금세 머메이드라인의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직원이 커튼을 열어 주는 순간 나도현의 눈이 반짝였다.원래도 양시은이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너 진짜 예쁘다.”“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 같아요. 드레스가 맞춤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리시네요.”직원 역시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양시은 자신도 드레스가 괜찮아 보였다.‘정말로 도현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그렇게 생각하다가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손님, 다른 디자인 드레스도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여러 벌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거든요.”직원은 다른 스타일들을 권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벌 입으나 여러 벌 입으나 마찬가지일 테고, 여러 스타일을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다음에는 무거운 장식이 많은 긴 트레인 드레스를 골랐는데, 갈아입기가 까다로워서 직원이 도와줘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그 틈에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주려고 밀크티를 사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예상보다 훨씬 더 길게 줄을 서야 했다.양시은이 어렵게 드레스를 다 입고 나왔을 때, 나도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마침 그때, 임다혜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다. 그리고 정말로 양시은이라는 걸 확인했다.“이 드레스에는 세트 베일이 있어요. 스톤이 많이 박혀 있는데, 전부 손바느질로 하나하나 고정해 둔 거라 아주 튼튼해요. 그것도 한 번 착용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직원은 그들이 실제 구매력이 있다고 봐서 더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나도현이 아까부터 양시은을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도 한몫했다.임다혜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임다혜는 매서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바로 손을 뻗어 양시은의 웨딩드레스를 벗기려 했다.하지만 양시은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임다혜의 손목을 잡아 힘껏 밀쳐 내자, 임다혜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며 자칫 넘어질 뻔했다.“양시은 씨, 지금 나한테 손을 댔어요?”임다혜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평소 나도현의 앞에서 조심스러워 보이던 양시은이, 이제는 나도현이 보호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오만하게 군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양시은은 나도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최정숙의 마음마저 돌려놓아 그녀가 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임다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바로 다시 달려들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시은이 몸을 살짝 비키자 그녀는 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임다혜는 서경 그룹의 금지옥엽 같은 존재다.집안 배경도 양시은보다 훨씬 우위였고, 한때는 최정숙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모든 걸 빼앗긴 느낌이었다. 게다가 양시은에게는 아들까지 있으니 그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꼴이었다.지금처럼 추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까지 들키자, 임다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양시은 씨,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죽여 버릴 거라고요!”대낮부터 이런 소리를 내뱉는 데도 양시은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임다혜와 치고받을 생각까지 했는데, 그 전에 나도현이 밀크티를 들고 나타났다.나도현은 성큼성큼 달려와 양시은의 앞을 막아서며 임다혜의 손목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임다혜는 뿌리치듯 내던져져 버렸다.나도현은 급히 돌아서서 양시은을 확인했다.“괜찮아? 다친 데 없어?”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이 광경을 지켜본 임다혜는 슬픔이 극에 달했다.“도현 씨, 저 기억 안 나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겉으로 나도현은 아버지의 계략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양시은 때문이었다.더구나 그는 원래부터 임다혜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지금은 더더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었다.임다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양시은의 성격을 몰랐다면 정말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내가 모든 걸 남자한테 걸었다고 하는데, 정작 양시은 씨는 어떤데요?”임다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양시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여러분, 이 여자가 말이에요, 여동생 약혼자랑 몰래 사귀더니, 이젠 제 약혼자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이런 여자는 다들 조심해야 해요!”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이끌려 사방에서 몰려들었다.나도현은 키가 크고 한눈에 띄는 외모라 이내 누군가가 그를 알아봤다.“어? 저 사람 예전에 유명하던 변호사 아니야?”한마디가 떨어지자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번졌다.“지금은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사업한다잖아요.”“분명히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새 갈아탄 모양이네.”“남자 하나를 두고 두 여자가 난리법석이라니,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까지 매달릴 일인가?”“나 변호사님, 둘 다 데리고 살면 어떤 범죄에 해당하나요?”“근데 이제는 변호사도 아니니 그냥 둘 다 데리고 살지 그래요?”...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말을 뱉었다.그러나 나도현으로서 직업이 어떻게 변하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건 오직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시은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임다혜를 포함한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다들 똑똑히 기억하세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고 눈길도 안 가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양시은 하나뿐입니다.”그 말에 양시은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옛 기억이 떠올라 쓰린 기분도 들었다.예전에 나도현이 그녀와 만나려고 할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언했었다. 그때는 감동으로 순순히 넘어갔지만 이후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복잡했다. 나도현이 복수심을 품은 적도 있으나, 결국 잘해 준 적도 많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 역시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그를 잊지 못하지 않았을
이렇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도현을 대단하게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애인을 보호하다니 남자다워.”“진짜 좋은 남자네.”“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 아니야?”“거기 아가씨, 억지로 버텨 봐야 소용없어요. 안 될 사람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요. 계속 우기면 결국 본인만 다쳐요.”...이런 말 하나하나가 임다혜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하, 우습네.’나도현은 양시은을 대변한 뒤 또 한 번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시은이한테 잘못이 있든 없든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가자.”나도현은 짧게 말하며 양시은을 데리고 인파에서 빠져나왔다.그렇다고 이곳에 양시은을 데려온 이유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 주고 직접 사 주고 싶었다.그러나 양시은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무수히 생길 것이다. 나도현이 워낙 주목받는 위치에 있고 사실관계도 복잡하니 말이다.그녀는 얼른 드레스를 벗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부드럽게 밀크티를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마셔. 그리고 다른 드레스도 더 입어 봐. 여러 벌 입어 보는 게 좋잖아.”“하지만...”“시은아, 너도 나랑 함께하는 미래가 기대되면서 망설이는 거잖아. 내가 너라도 그럴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인생은 정말 짧아.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나중에 병원에 누워서 차라리 같이 살 걸 하면서 후회하고 싶어? 하민이를 생각해 봐. 어머니도 이제 우리를 반대하지 않아. 내가 너한테 진 빚을 갚게 해 줘. 그리고... 나중에 아이 하나만 더 낳아 주면 안 돼?”여이현이 온지유와 헤어졌다가 다시 합쳤을 때, 이미 꽤 큰 아이가 있는데도 결국 딸을 하나 더 낳았다.여이현은 완전히 딸바보가 돼서 SNS마다 딸 사진을 잔뜩 올리며 사는 중이다. 그걸 볼 때마다 나도현은 부럽다고 느꼈다.사실 양시은이라고 해서 나도현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오늘은 그와
[최주하: 왜 너라고는 안 하냐? 이 녀석이 맞을 짓을 하네.][지석훈: 나? 농담하지 마, 나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안 보여? 여유가 있어야 여자도 만나고 하지.][배진호: 그만 싸워요. 둘이 동시에 연애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여이현: 나도 그렇게 생각해.]지석훈과 최주하는 말이 없어졌지만 여이현은 휴대폰을 쥐고 미소를 지었다.마침 온지유가 방에 들어오자, 여이현은 아이를 침대에 눕혀 두고 혼자 휴대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온지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재밌어?”여이현은 온지유의 목소리를 듣자 무심코 휴대폰을 접으며 대답했다.“단톡방에서 석훈이랑 주하가 옥신각신하길래, 진호가 그 둘이 동시에 연애할 거라고 했어.”“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도현 씨는 아직도 결혼 발표 안 했어요?”온지유는 무심결에 물었다.그들은 원래 홍혜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홍혜주와 용경호는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건너뛰었다.지금은 누구의 결혼식이라도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결혼 소식은 못 들었어. 근데 요즘 둘 다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오르는 거 보면 결혼 발표도 머지않은 것 같아.”온지유는 아이 돌보기에 전념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사실 그녀도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법로가 아직 항암 치료 중이라 몸이 성치 않아서 아이를 봐 줄 수 없었다.게다가 별이의 어린 시절을 놓친 것도 아쉬운데, 둘째 딸이 너무 어려서 조금 더 챙겨주고 싶었다.“그렇구나.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그래.”여이현은 온지유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물었다.“조만간 어디 놀러 가고 싶진 않아? 내가 데려가 줄게.”“됐어!”딸도 어리고 별이도 어렸다. 여행을 가겠다고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불편했다.온지유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여이현은 그녀의 걱정을 읽고는 웃으며 말했다.“그거 뭐가 무서워. 사람을 좀 더 데려가면 되지
양시은은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나도현이 말한 것처럼, 설령 두 사람의 마음이 멀어졌다고 해도 하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민을 아버지 없이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마음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면...“일단 하민이 의견부터 물어볼래.”양시은은 나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드디어 도망치지 않기로 한 듯했다.“이건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고 하민이랑도 직결된 문제니까. 하민은 네가 누군지 모르잖아. 먼저 알려 주고 생각도 들어볼래.”나도현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살짝 풀었다. 비록 그가 기대했던 최상의 답변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진전이었다. 최소한 양시은이 마음을 열 기색을 보였으니 말이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래, 하민이한테 잘 얘기해 줘. 기다릴게.”지금 당장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나도현 덕분에 양시은도 안도했다.나도현은 조용히 비서를 불러서 웨딩드레스 준비를 지시했다. 전에 양시은이 입어 봤던 드레스를 우선 사 두고 다른 것들도 마련하라고 했다.뜻밖의 업무를 받은 비서는 잠시 멍해졌다.‘우리 대표님 정말 결혼하시는 건가? 누가 우리 대표님 마음을 사로잡은 거지?’비서는 그런 상상을 하며 알 수 없는 경외심을 품었다.물론 양시은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도현이 뒤에서 이런 식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자신의 말이 화근이 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나도현은 양시은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녀가 조용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양시은은 하루 종일 집 침대에만 파묻혀 지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그러다 문득 하민을 유치원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큰일 났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그녀는 급히 차 키를 챙겨 나섰다. 하지만 도로가 꽉 막힌 탓에 차는 거북이 속도로 이동했다.속이 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공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다행히 공 선생님은 그
“엄마는 왜 아직 안 오지...”바로 그때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하민이니?”하민은 낯선 여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이모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이모 낯이 익어요.”양채은은 자신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양시은이랑 그 사람 아이겠지.’“나는 네 엄마... 친구 정도 되는 사람이야.”“그럼 엄마가 왜 안 오는지 아세요?”“아마 오는 길일 거야. 나랑 잠깐 저쪽에 가서 놀면서 기다릴래?”하민은 잠시 망설였다.양시은이 늘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상대는 아예 낯설다고만 하기에는 좀 묘했다.한참 고민하다가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근데 엄마가 오면 바로 갈 거예요.”하민이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를 쓰자 양채은은 은근히 웃음을 지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그녀가 하민을 데려간 곳은 그리 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유치원 근처의 한 카페에 잠시 앉았다.하민은 커피라는 음료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양채은은 단호히 말렸다.“안 돼. 애들은 커피 마시면 뇌에 안 좋아. 대신 달콤한 걸로 먹어.”뇌에 안 좋다는 말에 하민은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곧장 커피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난 바보 안 될 거야.’양채은은 자신에게는 라떼를, 하민에게는 따뜻한 우유와 티라미수를 주문해 줬다.하민은 디저트를 먹으며 퍽 즐거워 보였다.양채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가에 묘한 쓸쓸함이 깃들었다.사실 그녀도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충동적으로 조카를 한 번 보고 싶어져서 들른 것이었다.“이모.”“응, 왜?”하민이 그녀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양채은은 고개를 떨군 채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솔직히 말해 하민은 나도현을 닮았다. 특히 저 맑은 눈동자가 똑같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걸 보자 그녀는 잠시 넋이 나간
하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나도현은 회의를 하다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 그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뜨려 하자 주주들은 잔뜩 긴장해 일제히 그를 만류했다.“대표님,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이 프로젝트 아직 결론도 안 났고 방향성도 잡히지 않았는데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주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 내자 나도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는 날 선 시선으로 그들을 훑으며 말했다.“더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는 돌아와서 얘기하죠.”주주들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나도현은 이미 나가 버렸고 그들은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도현이 충동적으로 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말이다.한편, 적잖은 시간을 들여 양시은은 간신히 유치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공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왔고 양시은도 급히 물었다.“선생님, 하민이 아직 못 찾았나요?”공 선생님은 반가우면서도 초조한 기색이었다.“네,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하민이 어디로 간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이 말을 듣고 양시은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유치원 하교 시간은 원래도 유괴 위험이 큰 때다.‘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을 타 인신매매범이라도 끼어 있다면...’그녀는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았다.“CCTV 볼 수 있죠?”“참, CCTV를 안 봤네요! 지금 바로 가요.”공 선생님도 머리를 탁 치며 서둘러 모니터실로 향하려 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말이다.마침 CCTV를 확인하러 가려던 찰나, 양시은이 갑자기 하민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하민아, 어디 갔었어? 엄마가 놀랐잖아.”양시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만약 하민을 못 찾았다면 어쩔 뻔했는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하민도 깜짝 놀랐다. 그도 이제는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양시은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줬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엄마. 걱정
법로는 여이현의 눈빛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는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온지유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한번 또 한 번 당부했다.그는 살면서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자식들이었다. 분명 비흡연자에 술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하늘은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려 했다. 법로는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벌이라고 생각했다.법로와 여이현은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짜증 내는 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비록 신무열이 모든 걸 잘 해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부했다.“앞으로 성질 좀 죽이며 살아. 내 빚은 네가 갚겠다는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남은 시간은 지유와 함께 보내고 싶어. Y 국엔 아직 네가 필요하니까 이만 가봐도 돼. 내가 지금 유일하게 바라는 건 네가 나 대신 Y 국을 잘 보살피는 거야. Y 국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구나.”“혜연이도 좋은 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싸우는 일이 있게 되어도 네가 먼저 사과해. 물론 싸우는 일이 없으면 더 좋고. 알콩달콩 잘 지내야 해. 유일하게 아쉬운 게 너희들의 아이를 내가 돌봐줄 수 없구나.”“별이의 성장 과정도 더 지켜볼 수도 없고... 게다가 난 하마터면 별이와 지유를 죽일 뻔했잖니. 노석명 쪽은 내가 죽은 후에 깔끔하게 처리하려무나.”법로는 신무열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노석명의 일도 빼놓지 않았고 심지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서도 이미 계획을 세웠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그의 일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잖아요. 우리 이제 앞만 보고 살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 하면 할수록 더 괴로워질 거라고요.”신무열은 법로가 자책하는 것을 더는 바라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말을 하
비서의 말에 인명진은 침묵했다. 잊지 못한 사람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 사람만 존재했다. 온지유, 바로 그의 율이였다.다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온지유를 찾았을 땐 이미 여이현과 결혼한 상태였고 아이도 있었다. 나중에 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온지유는 변함없이 여이현을 사랑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속에 들어 살 수 없었다.온지유만 떠올려도, 그녀가 행복한 모습만 봐도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이 외로움은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다만 인명진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버렸다.“내가 준 업무는 다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일을 너무 적게 줬나 봐요. 나한테 이런 관심을 보일 정도면?”비서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아니요.”인명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가서 할 일이나 하세요. 쓸데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비서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며칠 후.김혜연과 신무열의 태아가 성공적으로 잉태되었다. 그 뒤로 모든 건 절차대로 움직였고 김혜연은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와 신무열에게 드디어 아이가 생겼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법로를 부축해주고 있었다.“아버지, 좋은 소식도 들려왔으니까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저랑 오빠의 아이들을 아버지가 돌봐주셔야죠.”온지유는 말을 하고 나니 또 괜스레 눈물을 나올 것 같았다. 법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면서 아이들을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와 여이현이 편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쉴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돈도 아끼지 않고 썼다.법로는 심지어 집안의 작은 가구도 고민하지 않고 사주었다. 특히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이 있으면 바로 사주었다. 온지유는 자신과 법로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은 하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사실 법로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었다. 다만 그의 생명은 다하
법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지만 시험관 시술을 받아 성공적으로 임신하게 되면 법로에겐 아주 기쁜 소식이 되어줄 것이다.김혜연과 신무열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병원장 인명진이 직접 데리고 온 환자였던지라 의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시험관 시술을 받는 과정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신무열은 그런 김혜연이 너무도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이미 법로의 앞에서 얘기를 꺼낸 이상 법로도 묵인하고 있었다.신무열은 김혜연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혜연아, 미안해. 고생했어. 아버지 상황도 봐서 알잖아. 게다가 이미 시험관 시술받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아버지에게도 우리의 아이를...”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무열은 내뱉었던 말을 취소했을 테지만 법로의 앞에서는 그것이 너무도 어려웠다.“괜찮아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저도 얼른 아이를 낳고 싶은걸요.”김혜연은 그런 신무열을 안아주었다. 애초에 그녀는 신무열의 아이를 너무도 원하고 있었기에 신무열이 자신에게 부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신무열이 그녀가 고생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법로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안겨주고 싶을 뿐이다.이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더구나 그녀에겐 부모님이 없었고 신무열과 결혼한 순간부터 법로가 그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시한부이니 그녀도 당연히 신무열과 똑같이 하려 했을 것이다.신무열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고생했어.”“괜찮아.”곧이어 김혜연과 신무열은 서로 다른 진료실로 들어갔고 법로는 온하윤과 별이, 그리고 온지유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온지유는 따스한 햇볕이 창문으로 들어와 법로만 비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법로 모습은 유난히도 온화해 보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나 김혜연과 신무열의 아이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법로는 자기 자식들이 얼른 가정을 이루어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인명진의 덕분에 그들의 시술을 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왜 죽어요?”온지유는 더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눈물을 터뜨린다면 멈추기 힘들 것 같았다.법로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세상 만물에서 죽지 않는 것은 없지.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단다. 게다가 내가 살아서 너를 찾은 것만으로도, 네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도, 네 용서를 받은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단다.”“됐으니까 얼른 식사하세요. 다른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법로도 계속 말을 이어가면 눈물이 흘러나올까 봐 두려웠다.“그래.”온지유는 감정을 갈무리하곤 아이들에게 법로의 곁에 더 많이 있어 주라고 말했다.신무열과 김혜연은 다음 날 점심에 도착했다. 법로는 그들을 보자마자 온지유가 부른 것임을 바로 눈치채고는 말했다.“Y 국에 처리할 업무가 얼마나 많은데 왜 온 것이냐. 지금 또 나라가 발전할 좋은 기회이지 않으냐. 내가 누누이 말했지. 중요한 일부터 하라고.”신무열은 앞으로 다가갈수록 법로의 안색이 전보다 나빠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지금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지유도 볼 겸 말이에요. 혜연이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경성에 좋은 의사가 있어서 겸사겸사 진찰도 받아보려고 온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도 경성에 계시잖아요. 안 그래요?”신무열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법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내 지금 상태로는 메스를 들기도 어려울 것 같구나. 인명진이 잘하니까 아이를 원하면 인명진한테 가서 상태를 봐달라고 해.”“알겠어요.”어쩌면 핑계로 들릴 수도 있다. 법로에게 더는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서로가 어떤 생각 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법로는 음식도 잘 먹었을 뿐만 아니라 잠도 잘 잤고 아이들도 잘 돌봤다.신무열과 김혜연, 그리고 온지유도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다만 신무열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이상 법로는 그들을 데리고 직접 인명진에게 찾아왔다.인명진은
“양념 생선구이 드실 수 없어요. 지금 상태론 담백한 걸 드셔야 한다고요.”온지유는 법로가 먹고 싶다는 걸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의 몸 상태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자 법로는 웃으며 말했다.“요즘에 너무 담백한 것만 먹었더니 양념이 있는 거로 먹고 싶더구나.”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며 망설이고 있던 때 여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법로의 말에 대꾸했다.“이따가 퇴원 수속 끝내면 지유가 집 돌아가서 해드릴 거예요.”“그래.”법로가 먹고 싶다고 하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운전을 하고 온하윤은 법로의 품에 안겨 잠들어 버렸다. 홍혜주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했다.집에 도착한 온지유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고 여이현이 그녀를 도와주었다.“아버지 상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시겠다는 것도, 양념 생선구이가 드시고 싶다는 것도 말이야.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많아지셨잖아. 안 되겠어. 오빠한테 얼른 연락해서 오라고 해야겠어.”법로의 모습은 꼭 죽음을 앞둔 사람 같았다. 게다가 여이현도 법로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법로의 두 눈이 전보다 더 탁했기 때문이다.온지유의 가슴은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저릿하고 아팠으며 괴로웠다.“난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현 씨,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항암 치료받고 있는데도 상태가 안 좋잖아. 난...”온지유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상태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나아지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니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인간은 죽음을 막을 수 없어. 인간이 죽기 전의 모습을 많이 봐서 네 말이 틀렸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도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어. 지유야, 우리 아버님께 잘해드리자.”법로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법로의 상태가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다.온지유는 거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무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무열은 온지유의 연락을 받았을 때 이미 눈치채
홍혜주는 온지유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온지유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후 온지유는 아이와 홍혜주와 함께 법로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고 여이현은 운전을 맡았다.법로는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거부했다. 병원에 있어야만 언제든 법로의 몸 상태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온지유는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충격도 받고 싶지 않았다.아이를 본 법로는 너무도 기뻐했다.별이는 얼른 법로에게 다가가 몸을 기댔고 온하윤은 법로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자 온하윤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법로님, 제 존재감이 이 정도였나요?”법로의 안중에는 온통 아이들이었던지라 주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법로는 홍혜주를 발견했다.“오랜만이구나. 내가 노화가 시작되었는지 널 미처 보지 못했구나. 미안하구나.”“괜찮아요. 제가 법로님 두 손자에 비하면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죠. 요즘 몸은 어떠세요?”홍혜주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지만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법로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괜찮단다. 큰 문제는 없어. 지유야, 네 오빠랑 언니가 Y 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나도 퇴원할까 한다만.”“퇴원이요? 안 돼요. 지금 상태도 안 좋으시잖아요. 인명진 쪽도 새로 개원해서 엄청 바쁘단 말이에요. 집으로 돌아갈 바엔 차라리 지금처럼 입원해 있는 게 더 나아요.”지금 법로는 VIP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만약 법로가 퇴원하고 집에서 지낸다고 해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만큼 검사를 정확하게 할 수 없을 것이었기에 온지유는 그래도 입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법로는 더는 병원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내가 의사 양반한테 물어봤단다. 지금 내 상태로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나도 이 답답한 병실에서 벗어나면 매일 기분도 좋아질 것 같구나.”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별이와
“그건 부대에 있을 때 얘기고요. 지금 우리 집에 왔으니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죠.”온지유는 홍혜주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막상 보니 백지희도 떠올랐다. 하지만 백지희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많이 바쁠 테니까 말이다.홍혜주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언니가 왜 저를 홀대해요. 법로 님이 아프다면서요. 지금 상태는 어떠세요?”“항암 치료 꾸준히 받고 있어요. 암 말기라 완치된다고 할 수는 없네요.”항암 치료를 받고 몇십 년을 더 산 환자도 있다고 하지만 내일 당장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고 했기에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자 홍혜주가 말했다.“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여하간에 그녀와 인명진은 법로의 손에 키워진 것이었고 나중에 흉터남이 그녀를 통제하긴 했지만 그것은 전부 지나간 일이었다. 이젠 다들 앞만 보며 살고 있었다.“일단 식사부터 해요. 이따가 저랑 같이 가요.”“네, 그럴게요.”온지유는 도우미가 만든 음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었다.아이가 울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은 아이를 달래주고 있었다. 홍혜주는 온하윤을 보자마자 온지유와 똑같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분홍색의 통통한 볼을 보니 너무도 귀여웠다.여이현은 온하윤을 그녀에게 건네자 바로 품에 안아보았다. 그녀는 이렇듯 작은 아이는 처음 안아보는 것이었기에 순간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행여나 떨어뜨리게 될까 봐 긴장하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이 웃음을 터뜨렸다.“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폭탄도 만져본 사람이 이렇게 작은 아이를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렇게 두려워하면 나중에 어떻게 아이 엄마가 되려고요?”홍혜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소대장님, 아이는 아이고 폭탄은 폭탄이잖아요.”두 가지는 애초에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여이현은 계속 그녀를 놀려댔다.“그럼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긴장할 것도 없어요. 놀러 왔으니 며칠 동안 여기서 머물면서 지유 곁에 있어 줘요.
나도현이 그런 양시은에게 물었다.“정말로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어머니는 지금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야. 간병인을 알아봐 주지 않으면 몸 뒤척거리는 것도 힘드시다고.”그러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내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잊었어?”하민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일이든 다 해보았다. 그랬기에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양시은의 말에 나도현은 가슴이 아팠다.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아이의 병을 치료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고생했어. 예전에는 미안했어...”조금 슬픔에 젖어버린 나도현의 목소리에 양시은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괜찮아. 나한테 사과하자고 모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니까 과거의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말을 마치자마자 양시은의 핸드폰이 울렸고 온지유의 연락이었다.“하민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놀러와요. 별이가 며칠 동안 계속 하민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온지유는 정말로 양시은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현도 온지유에게 연락해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었기에 그녀는 행사만 있으면 양시은을 불러 적응하게 할 생각이었다.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있는 박은희를 보며 거절했다.“미안해요. 요즘엔 바빠서 안 될 것 같네요. 바쁜 일 끝내면 찾아갈게요.”“그래요. 그럼 언제 한가해지면 연락해줘요.”“네, 알겠어요.”온지유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책을 읽던 여이현이 고개를 들어 그런 그녀를 보았다.“왜? 안 된대?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볼까?”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백지희는 경성에 없었고 지선율과 장다희는 촬영일로 바빴다. 홍혜주와 용경호는 부대에 있었기에 비교적 한가한 그녀와 달리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던지라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양시은도 바쁘다고 했다.“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아니면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여이현은 온지유를
양채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난 이미 내려놨어. 언니는 이젠 부잣집 며느리잖아. 설마 기자들에게 과거의 일로 고통받고 싶은 건 아니지?”문해미와 그녀는 분명 양시은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었다. 양시은은 양채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들과 가족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문해미를 원망한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원망하지 않았다.“채은아...”양시은이 여전히 그녀를 잡으려던 때 양채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 이런 말은 그만하자. 언니,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거야. 게다가 난 언젠가는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1년이든 2년이든 시간을 미룰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영원히 날 신경 쓰면서 살 수는 없잖아. 난 그냥 자유롭고 싶은 거야. 엄마랑 함께 말이야. 언니, 난 이미 결정했고 바꿀 생각 없으니까 이제 더는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말아줘.”“알았어...”확고한 양채은의 모습에 양시은은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그녀는 직접 양채은과 문해미를 배웅해 주었다.“그럼 어디로 가는지 꼭 알려줘야 해. 나중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어도 연락해야 해. 알았지?”양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양채은은 오늘 이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해도 절대 양시은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고 연락도 하지 않을 것이다.양시은이 고생하면서 산 것에 비해 그녀는 나쁜 짓이 많이 저질렀기에 양시은이 행복하려면 자신이 사라져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감정을 갈무리하고 들어갔다고 해도 나도현은 바로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나직하게 물었다.“양채은이 떠난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양채은은 확고하게 거절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아직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